“승질 나서 정말.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잘 난 줄 안다니까? 어? 당신 일찍 들어왔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오랜만에 일찍 퇴근하고 편하게 쉬려는 나협상 부장의 소박한 소망은 오늘도 어김없이 날아가버렸나 싶다. 한 가득 장바구니를 들고 들어오던 아내는 나 부장을 보자 갑자기 앙탈을 부리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아니, 아파트 상가 안에 있는 세탁소 있잖아? 거기에 당신 양복을 맡긴 지 5일이나 지났거든? 근데 배달이 안 오는 거야. 하도 답답해서 내가 찾으러 가서 다 됐냐고 물어보니까, 내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 옷걸이를 막 뒤져 보더니 ‘아직 안 됐네? 이따 9시쯤 갖다 드릴께요’ 그러는 거야. 나 참 어이가 없어서…”
“뭐? 무슨 그런 데가 다 있냐? 감히 누구한테! 내가 가서 확 엎어버릴까?”
“됐네 이 사람아. 맨날 말만… ”
한참을 씩씩거리던 아내는 나 부장의 오버액션에 살짝 미소를 보인다. 이제 됐다, 싶어 아내의 어깨를 주무르며 말을 이었다.
“근데 그 가게, 저번에도 그러지 않았어? 다른 세탁소에 맡기면 안돼?”
“다른 세탁소까지 가려면 20분도 더 걸어야 된단 말이야. 저 뒷동네로 한참 걸어 올라가야 되는데 어떻게 가.”
“그래서 그 사람들이 그렇게 뻣뻣하게 구는구나?”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당신 말 대로라면 우리 아파트 사람들은 다른 세탁소를 갈 수가 없잖아. 다른 대안이 없으니까 매번 그 쪽에서 하자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는 거구.”
“대안? 하긴, 난 거기 아니면 다른 대안이 없구나…”
“그런걸 협상에선 배트나(BATNA)라고 해. 지금 우리가 협상을 해야 하는 상대 이외의 최선의 대안. 그렇게 치면 우리의 배트나는 뒷동네 세탁소인데, 그건 너무 멀어서 안 좋잖아? 우리 배트나가 너무 안 좋으니까 어쩔 수 없이 지금의 협상 상대, 그니까 상가 안에 있는 세탁소를 계속 상대할 수밖에 없는 거지.”
“그렇게 치면, 상가 안에 있는 ‘맛있는 떡집’이 완전 불친절한데 계속 장사를 할 수 있는 것도 그런 건가? 우리가 다른 대안이 없어서?”
“그렇게 볼 수 있지. 근데 봐봐, 반대로 우리 아파트 근처에는 과일 가게가 네 군데나 있잖아? 그 중에 당신은 제일 신선하고 싼 곳을 골라서 과일을 사. 그건 그만큼 우리의 대안이 많기 때문에 선택할 대안이 많은 거구, 그 중에 제일 좋은 ‘최선의 대안’을 고를 수 있다는 뜻이야.”
“그렇구나… 뭐야 그럼 난 계속 그 세탁소한테 당할 수밖에 없는 거야? 에이 뭐 이래? 우리 이사 갈까?”
“세탁소가 마음에 안 든다고 이사를 가?”
시계를 쳐다보며 9시가 되기만을 기다리던 나 부장의 아내는 20분이 더 지나서야 배달을 온 세탁소 주인에게 괜한 화풀이를 쏟아냈다. 그러고는 통쾌하다는 듯 돌아서서 나 부장에게 양복을 자랑스레 보여주며 방으로 들어갔다. 언제 또 이와 똑같은 답답한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그럼, 나 부장의 아내는 언제까지나 이렇게 세탁소의 횡포(?)에 끌려 다녀야만 할까?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