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se "그동안 격월로 해왔던 품질 검사를 매달 하면 어떨까요?"
'어라, 이게 웬 떡?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국내 1위 식품 회사 '맛나킹'의 나고수 상무와 재계약 협상을 앞두고 잔뜩 긴장해 있던 '천사식품'의 최순진 사장은 큰 짐을 하나 내려놓은 기분이다. 맛나킹측에서 단가를 깎자고 하면 어떡하나 전전긍긍하던 최 사장. 그런데 상대가 '품질 검사'라는, 의외로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슈로 협상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최순진 사장: "나 상무님, 그건 걱정 마십쇼! 식품 업계에서 품질검사는 기본 아니겠습니까? 헤헤." 나고수 상무: "그리고, 원재료 구입처가 바뀔 때에는 저희 맛나킹과 합의한 후에 진행해 주실 수 있죠?" 최 사장: "그러죠 뭐, 크게 어려운 것도 아니네요. 흐흐." 나 상무: "좋습니다, 최 사장님. 내년에도 저희랑 함께 하셔야죠!" 최 사장: "정말요? 저희야 좋죠! 감사합니다!"
물 흐르듯 진행되는 협상에, 최순진 사장은 '재계약'이라는 고지의 8부 능선을 넘은 것 같은 느낌이다. 이렇게 협상이 잘 풀리다니…. '올해 재수가 좋다는 점쟁이의 말이 틀리지 않았구먼!'
그런데 웬걸! 맛나킹의 나고수 상무가 갑자기 여러 가지 요구 조건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다른 안건들은 다 타결된 것 같네요. 협상 시간도 줄일 겸, 나머지 내용들은 한 번에 제안드리죠. 첫째, 납품 주기를 격주에서 주 1회로 늘려주시기 바랍니다. 둘째, 납품 단가는 현재보다 10% 인하해 주십시오. 셋째, 운송비 부담을 작년까지는 반반으로 했는데 올해부터 저희 부담은 30%로 낮춰 주셨으면 합니다."
순간, 최순진 사장은 머릿속이 하얘진다. 대체 어떤 요구 조건부터 협상을 해야 할지 막막해져 버렸다. "어, 상무님…. 글쎄요….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주시죠."
최순진 사장의 셔츠가 식은땀으로 물든다. 지난해 겨우겨우 따낸 맛나킹과의 거래인데, 재계약도 못하고 1년 만에 납품이 중단된다면? 그건 악몽이었다.
그때, 5분 정도의 정적을 깨고 맛나킹의 나 상무가 먼저 말을 꺼낸다. "좋습니다. 사장님과의 인연을 생각해서…. 저희가 납품 주기와 운송비 조건 요구는 철회하겠습니다. 대신, 납품 단가는 저희 요구를 들어주시죠?"
세 가지 중에 두 개나 양보를 하겠다는 상대의 '통 큰' 제안에 최 사장은 덜컥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세 가지 요구 중에 두 개는 내 뜻대로 되지 않았는가?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협상을 끝내고 사무실로 돌아온 최 사장은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이번 협상, 뭐가 잘못됐나? |
Answer
1. 까다로운 안건부터? 쉬운 안건부터!
협상가들은 중요한 협상을 앞두고 이런 고민을 한다. "까다로운 안건과 쉬운 안건 중에 어떤 것을 먼저 협상 테이블에 올릴까?"
많은 사람들은 까다로운 안건으로 시작해 상대를 강하게 몰아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요하고 까다로운 이슈가 풀리면 나머지는 일사천리라는 논리다. 하지만 이는 좋은 방법이 아니다. 협상의 순서를 정할 때는 쉽게 타결할 수 있는 안건을 앞에 놓는 것이 좋다.
이는 인간의 뇌가 '항상성(恒常性)'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몸이 관성의 법칙에 영향을 받듯이 뇌도 그러한 특징이 있다. 큰 고민 없이 "예스(Yes)"라고 답할 수 있는 질문을 계속 받으면 우리 뇌는 "Yes"라는 단어와 친해진다. 그래서 "Yes"인지 "No"인지 고민되는 질문에서도 "Yes"라는 답을 할 확률이 높다. 이러한 대화법을 'Yes-Set 대화법'이라 한다.
앞의 상황에서 최순진 사장이 상대의 마지막 제안을 쉽게 거절하지 못한 이유는 뭘까? '품질 검사', '원재료 구매업체 변경 시 사전통보'처럼 쉽게 동의할 수 있는 안건에 대해 이미 '예스'라고 대답했기 때문이다. 나고수 상무가 쓰는 'Yes-Set 대화법'에 말려든 셈이다.
협상을 시작할 때는 항상 상대와 쉽게 타결할 수 있는 안건을 먼저 제안하라. 이를 통해 상대와 나의 생각을 'Yes'로 맞춰라. 이렇게 두번 세번 'Yes'가 이어지면, 상대는 'No'라고 답하기 쉽지 않다. 내 입장에선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 훨씬 유리하게 협상을 끌고 갈 수 있다.
노사 협상 상황을 가정하자. '임금 인상률'이라는 가장 까다로운 안건부터 먼저 꺼내는 CEO는 하수(下手) 협상가다. 협상 초기에는 노사 양측이 서로 'Yes'라는 답변이 쉽게 나올 수 있는 안건부터 다뤄야 한다.
2. 미끼 전술의 덫에 걸리지 마라
'Yes-Set 대화법'으로 분위기를 만든 나고수 상무는 한꺼번에 세 가지 제안을 하며 최순진 사장을 코너로 몰았다. 나 상무가 이렇게 제안을 한 이유는 뭘까? 협상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아니다. 이는 하나의 전술일 뿐이다. 나 상무가 사용한 전술을 협상학에선 '미끼 전술'이라 부른다. 여러 가지 다양한 안건을 제시해 상대를 혼란스럽게 한 다음, 원래부터 바라지도 않았던 요구 조건은 철회하고 중요한 한 가지만을 얻어내는 기법이다.
앞의 사례에서 나 상무는 '단가 인하'를 얻어내기 위해 '납품 주기', '운송비' 등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았던 안건을 함께 제시했다. 이를 통해 정말 중요한 '단가 인하'를 쉽게 얻어낼 수 있었다. '세 가지 조건 중에 두 개를 우리가 양보할 테니, 나머지 하나는 양보해 달라'는 요구를 하면 상대가 받아들일 확률은 커진다.
이 전술은 실전 협상에서도 자주 사용된다. 노르웨이 해운회사가 국내 모 조선회사를 상대로 선박 구매 협상을 벌일 때도 이 전술을 구사했다. 노르웨이 해운사는 "첫째, 선박 인도 기간을 6개월 당기고, 둘째, 기존에 사용하던 한국 기업의 엔진이 아닌 노르웨이제 선박 엔진을 사용하라. 셋째, 선급금 비율을 기존 10%에서 30%로 올리고, 넷째, 통상 계약 금액보다 20% 저렴한 가격에 계약을 하자"는 조건을 한번에 제시했다. 하지만 노르웨이 해운회사가 진짜 원했던 것은 '싼 가격'이었다. 이를 위해 다른 조건들을 한꺼번에 제시했고, 세 가지 조건을 양보하는 척하며 싼 가격을 얻어냈다. 한국 선박회사는 협상 타결 후 많은 양보를 얻어냈다는 생각에 만족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상대의 미끼 전술에 당한 꼴이었다.
그렇다면 상대가 이러한 미끼 전술을 사용할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안건의 중요도에 따라 양보를 해야 한다. 상대가 내게 두 개를 양보했으니 나도 하나는 양보해야 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양보의 양(量)보다는 질(質)이 중요하다는 뜻. 안건 하나하나에 대해 양보할 만한 것인지 따져야만 미끼 전술에 걸려들지 않는다.
앞의 상황에서 최순진 사장이 이렇게 대응했다면 어땠을까? "지금 말씀 하신 조건들을 저희가 수용하는 것은 너무 어렵습니다. 하나씩 협상을 해 나가면서 양측 모두 좋은 방향으로 만들어 나가도록 하죠. 어떤 조건부터 협상을 해 볼까요?"
당신의 '유능하고 간 큰' 부하 직원이 연봉 협상 때 '부서 이동, 연봉 인상, 승진'이라는 세 가지 조건을 동시에 제안한다면? 이는 미끼 전술일 가능성이 크다. 연봉 인상을 좀 더 쉽게 얻어내기 위해 다른 조건들을 동시에 제안하는 것일 수 있다는 뜻이다. 상대가 양보하는 조건의 개수가 아닌 가치를 기준으로 냉정하게 평가하는 것, 그것이 미끼 전술의 덫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다.
3. Bargaining Mix를 활용하라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상대의 많은 제안이 오히려 고마울 수도 있다. 미끼 전술을 사용하는 상대의 제안을 오히려 역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선 '교환가치'라는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교환가치란, 나와 상대가 특정한 내용에 대해 생각하는 중요도가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가치이다. 예컨대 구매자인 나는 대금 지불을 현금으로 하는 것은 크게 문제되지 않지만, 갑작스레 발생한 수요를 맞추기 위해 납기를 당겨야만 한다. 반면 나의 협상 상대인 판매자는 밤샘 작업을 통해서라도 납기를 맞추는 것은 문제되지 않지만, 이달 말까지 현금이 꼭 필요한 상황이다. 이때는 서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협상을 타결할 수 있다.
이 방식은 협상 안건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효과적이다. 양측이 다른 가치를 매기는 안건들이 많을수록 교환할 수 있는 가치들도 많아지고, 결국 양측 모두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어내는 방법도 늘어난다.
이처럼 교환가치를 활용해 협상을 진행하는 기법을 협상학에서는 '바기닝 믹스(Bargaining Mix)'라고 한다. 협상 테이블에서 오고 가는 많은 안건을 섞어서, 서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취하고 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양보해 협상 전체 파이의 크기를 키우는 방법이다.
1998년 진행된 볼보건설기계와 삼성중공업의 협상에서도 이 방식이 사용됐다. 볼보는 IMF 쇼크 이후 삼성중공업의 애물단지가 되어버린 중장비 분야를 인수했다. 그리고 670억원의 부채를 안고 있던 기업을 인수 2년 만에 흑자로 전환시키는 대성공을 거뒀다.
그 비결은 협상에서 바기닝 믹스를 통해 양측이 나눠가질 수 있는 파이를 키웠기 때문이다. 협상 초기에는 양측 모두 매각 비용을 얼마로 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내심 볼보에는 매각 비용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바로 유럽보다 상대적으로 싼 한국 노동자들을 쓰고, 아시아에서 브랜드 파워가 높은 삼성이라는 브랜드를 활용, 아시아 시장에 진출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매각 비용 이외의 다양한 협상 안건을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삼성중공업은 이 조건을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안건을 제시했다. 브랜드 사용에 대한 로열티 요구와 함께, 자동차 시장 진출을 위해 세계적 수준인 볼보의 자동차 기술 제휴를 요청했다. 삼성 입장에서는 볼보의 선진 자동차 기술을 배우는 것이 매각 비용만큼이나 중요했다. 그리고 이 조건은 볼보에는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어서 바기닝 믹스를 만들 수 있었고, 이 협상은 양측 모두 만족하는 결과로 타결됐다.
그렇다면 앞의 사례에서 최순진 사장은 어떤 조건들을 제시해 바기닝 믹스를 만들 수 있을까? 납품 물량을 늘려달라는 요구를 할 수도 있고, 대금 결제 방식을 현금으로 전환해 달라는 조건을 제시할 수도 있다. 이를 통해 납품 단가 인하로 인한 손해를 만회하면 어떨까?
협상 고수들은 짧은 협상에서도 미끼 전술과 같은 기만적 전술을 사용해 상대를 무너뜨리려 한다. 하지만 상대가 온갖 전술을 써가며 협상한다 하더라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협상의 원리를 알고 이에 대응하는 법을 익혀 놓는다면 상대의 기만적 전술은 내겐 단지 '애교'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