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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역사이야기

명호경영컨설턴트 2011. 10. 14. 20:06

샬롬

커피역사이야기입니다.

 

한국 커피 문화 100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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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부터 편찬 작업을 시작하여 1990년 2월에 발행된 [동서식품20년사]의 <부록편>에 썼던 [한국 커피 문화 100년]을, 20년 전의 원고라 조금 손보아 이곳에 옮긴다.

나의 기호 목록에서 ‘술’ 다음으로 2~3위를 다투던 ‘담배’와 ‘커피’는 이미 오래 전에 멀어져갔지만, 한때는 골초에다 커피광이었던 지난 시절의 추억에 헌사하는 기분으로 올린다. 깊어가는 가을에 누군가와 커피 한 잔을 들며 인생무상을 조응하는 일도 이제는 낯익은 하나의 풍경이리라. 여전히 비문화적인 이 나라의 살풍경 속에서도 커피 향만큼 사람들의 향도 깊어지는 가을이 되기를 빌어본다.




‘정치적’모습으로 첫선 보인 커피


우리나라에 커피가 처음으로 들어온 시기는 1890년 전후로 추정된다. 이는 에티오피아의 양치기가 커피를 처음 발견한 때에서부터 1300년쯤이 지난 뒤의 일이며, 네덜란드인들에 의해 이웃 일본에 커피가 상륙한 지 170년쯤이 지난 뒤의 일이다.


커피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경로에 관해서는 몇 가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그 가운데서 가장 믿을 만한 얘기로는, 1895년에 을미사변이 일어나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던,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 때(1896년 2월 11일부터 약 1년간) 러시아 공사 웨베르(Weaber K. Ivanovich)가 고종과 담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커피를 권했다는 설이다. 남아 있는 기록을 보면, 우리나라 사람으로 커피를 처음 마신 사람 역시 고종으로 나타나 있으므로 이 이야기는 기록과도 들어맞는다. 특히 웨베르는 한 술 더 떠서 미인계까지 끌어들여 손탁孫凙(Antoinette Sontag)이라는 독일 여인으로 하여금 고종의 커피 시중을 들게 하였다. 이처럼 우리나라에 첫선을 보인 커피는 매우 정치적이었다.


손탁이라는 여인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된 배경은 대강 이렇다. 손탁의 여동생은 1884년(고종 21년)에 당시 중국 텐진天津에 주재하던 러시아 영사 웨베르와 혼인하였는데, 1885년에 웨베르가 주한 러시아 대리공사 겸 총영사로 부임할 때 여동생을 따라 우리나라에 왔다. 웨베르 공사의 처형妻兄인 손탁은 이때 나이가 서른두 살이었으며, 아름다운 용모에다 교양과 예능까지 두루 갖추어 당시 서울 주재 외교관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또 서구 문물에 호기심이 많았던 명성황후에게 서양의 음악이나 그림, 요리, 풍습, 예법 등을 알려주어 신임도 크게 받았던 인물이었다.



@0910-고종황제.jpg고종은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최초의 커피 애호가였다. 러시아 공사관에서 커피 맛을 들인 고종은 환궁 뒤에도 덕수궁에 ‘정관헌靜觀軒’이라는 서양식 집을 짓고 그곳에서 커피를 마시곤 했다. 그 무렵 손탁은 옛 이화여고 본관이 들어서 있던 서울시 중구 정동 29번지의 왕실 소유 땅 184평을 하사받아 이곳에 2층 양옥을 세우고 ‘손탁호텔’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 ‘손탁호텔’에는 다방이 하나 있었으며, 다방의 형태를 갖추고 커피를 판 곳으로는 이곳이 최초로 꼽힌다.


@0910-정관헌.jpg정치적 사건과 함께 이 땅에 등장한 커피는 곧이어 ‘악마의 모습’을 나타내게 되었는데, 1898년에도 한차례 정치적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곧 고종이 만수절萬壽節에 덕수궁에서 태자인 순종과 함께 커피를 마시려는 찰나에 냄새가 이상한 것을 눈치 채고 마시지 않았으나, 이미 마셔버린 태자는 거품을 토하면서 쓰러지고 말았다. 이 사건은, 조선조 말기의 역관譯官이었던 김홍륙이 러시아와의 통상에서 거액을 가로챈 사실이 드러나 흑산도로 귀양을 가게 되자, 아내를 시켜 임금을 독살하려 했던, 이른바 ‘김홍륙 독살 사건’이었다. 순종은 한동안 후유증에 시달리긴 했으나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이 사건으로 미루어보건대 고종은 커피의 향을 그 자리에서 식별할 만큼 대단한 애호가였음을 알 수 있다.



나무꾼들이 마신 커피, ‘양탕국’


러시아를 통해 커피가 들어온 것과 아울러 일본을 통해 들어온 경로도 중요한 한 갈래다. 한일합방 이후로 이 땅에 몰려오기 시작한 일본인들은 그들의 찻집 양식인 ‘깃사텐喫茶店’을 서울 명동 언저리인 진고개에다 옮겨놓고 선을 보이면서 커피 장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다방 문화의 대중화는 아직까지 시기상조였을 뿐 아니라 새로운 문화의 접목이 그리 쉽사리 이루어질 일도 아니었다. 일본에서는 1923년에 관동대지진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우유 한 잔에 생과자를 덧붙여 예쁘장한 여자아이가 날라다주곤 하던, 이른바 ‘가나루 미루쿠 호루’라는 밀크 홀이 동경 시내 대학가 주변에는 많았는데, 대지진 이후 이런 밀크 홀이 없어지고 1925년께부터는 바로 ‘깃사텐’이라는 찻집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0910-나무장수2.jpg역시 개화 초기의 일로, 예로부터 서울로 들어오는 북쪽 관문 구실을 한 무악毋岳재도 커피와 인연이 있었다. 이곳에서 땔감나무 가게를 차려놓고 장사하던 ‘부래상富來祥’이라는 프랑스인(이 부분은 일설에 따르면, 지금의 중부소방서 자리에서 나무 시장을 벌였던 프랑스인 ‘브라이상’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본디 이름은 ‘브레상’으로 추정되는데, 구한말에 우리나라에 건너와 비료 장사로 떼돈을 벌어들인 독신자였다고도 한다. 그는 고려말 이래 ‘선잠단’이라 불린, 지금의 서울시 성북동 성북초등학교 부근의 울창한 수풀 터에다 우아한 서양식 별장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그 뒤 1934년에 이 별장 터는 어느 한국인의 손에 넘어가 ‘북단장’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고, 다시 4년 뒤 ‘보화각’이라는 사설 박물관이 세워졌으며, 1971년 5월에 이 보화각은 브레상에게서 선잠단 터를 산 사람의 호를 따 지금의 ‘간송미술관’으로 불리게 되었다)이 우리나라 나무 장수와 상권 경쟁을 벌이면서, 나뭇단을 짊어지고 새벽길을 넘어오는 나무꾼들에게 ‘시커먼 국물(커피)’을 한 사발씩 주어 선심을 썼다고 한다. 떨떨하면서도 구수하여 입안에 확 풍기는 야릇한 향기를 맛본 나무꾼들은 이 ‘시커멓고 요상한 국물’을 서양의 탕국이라 하여 ‘양탕洋湯국’이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이 양탕국은 우리나라 보통 사람들에게 알려진 할아버지뻘 되는 커피인 셈이다.


1903년 10월 28일에 설립된 기독교청년회(YMCA)도 커피와 관계가 깊다. 기독교청년회관은 서양 문물 도입의 창구 노릇을 하던 곳으로 이곳을 통해 농구나 축구, 야구, 배구 등 서양의 운동 경기가 보급되기 시작했으며, 이상재, 윤치호, 이승만, 김규식, 김정식, 신흥우, 구자옥 등 사회적으로 저명한 개화파 인물들이 간부로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이곳에서도 커피의 향기가 거리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윤치호의 집에서 일하던 요리사가 이 건물 안의 식당 옆 조그마한 방에서 케이크와 간단한 경양식을 비롯하여 커피를 파는, 요즘으로 말하면 학교 주변에 즐비하게 늘어선 스낵 코너 같은 가게를 운영하였던 것이다. 손님이라곤 하루에 열 명 남짓이었고 값은 5전쯤 하였다.


다방으로는 개항 전후 인천에 세워진 ‘대불大佛호텔’과 ‘슈트우드호텔’에도 부속 다방이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그 내용은 확실하지 않다. 서울에서는 1926년쯤에 문을 연 ‘나카무라中村’ 다방이 근대식 다방의 시발로 추정되는데, 일본인 나카무라가 자신의 이름을 빌어 지금의 충무로 사보이호텔 동편 쪽에서 운영했다고 한다. [&] (계속)



‘커피’의 어원語源@0910-0606.jpg

에티오피아에서 발견된 야생목의 작은 열매(커피)는 아라비아, 이집트, 페르시아, 도루코라 등으로 각각 전해졌다. ‘커피’라는 명칭의 직접적인 어원이 ‘도루코’에서 나왔다는 말이 있는가 하면, 원산지인 에티오피아 서남쪽의 ‘카파(Kaffa)’라는 지명에서 생겼다는 말도 있다. 이는 에티오피아의 ‘카파(Kaffa)’가 아라비아어 ‘카화(Qahwa)’로, 터키어 ‘카붸(Kahve)’로 그리고 세계적인 용어인 ‘커피(Coffee)’나 ‘카페(Cafe)’로 진화한 흔적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아비시니아를 여행하던 아라비아인이 커피를 발견하고 그 나무에 감사의 뜻으로 아라비아어로 ‘힘力’을 뜻하는 ‘카파’라는 이름을 지어준 데서 ‘커피’가 나왔다는 얘기도 있다. ‘Coffee'란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영국의 브론드 경卿으로 알려져 있다.

커피 연표 ①
Chronology of Coffee

600년경
에티오피아에 있는 세호뎃(Shehodet) 수도원 근처에서 양떼를 돌보고 있던 양치기들은 저녁마다 양들이 소리를 지르며 날뛰는 모습에 놀라 수도원 사제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사제들은 흥분하는 양들을 관찰한 뒤에 아마도 먹이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다음날 양떼를 따라다니며 먹는 것을 관찰했다. 그들은 양들이 전에 보지 못한 나무 열매를 먹는 것을 발견하고는 호기심으로 그 나뭇가지를 꺾어왔다. 그 열매를 말려서 물로 끓인 후 조심스레 맛을 본 사제들은 역시 자신들도 흥분 상태를 느끼고는, 그 뒤부터 ‘졸음을 쫒고 영혼을 맑게 하며 신비로운 영감을 느끼게 하는 성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커피를 맨 처음 마시게 된 때의 이 이야기는 로마에서 아랍어를 가르친 파우스투스 나이로니(Faustus Naironi : 1635~1707) 교수에 의해 유럽에 알려졌다.

875년
페르시아에서는 커피 열매를 볶아 물에 넣고 끓여 마셨다.

900년경
아라비아의 의사 라제스(Rhazes : 850~922)가 아비시니아 지방에서 나는 ‘Bun’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Bun’은 사투리로 커피나무를 뜻하며, 그 음료는 ‘Bunchun’이라고 했다. 한편, 아라비아의 의사이자 철학가인 아비센나(980~1037)도 커피를 기호 음료라고 하여 ‘조심스레 뺀 즙汁은 맑고 마시면 상쾌하지만, 잘못 뺀 즙은 탁하고 좋지 못하다’라고 했다.

1200년경
커피콩은 약재와 식료, 음료로 쓰이면서 아비시니아에서 홍해를 넘어 아덴, 메카, 카이로에 전파되었고, 1300년경에는 이란, 1500년경에는 터키까지 전해졌다.

1258년
이슬람교 사제며 의사인 오마(Ali Ben Omar)는 죽음에 이른 모카 공주를 살려준 끝에 그만 사랑에 빠져 공주를 자기의 아내로 삼자, 모카 왕은 그의 공적이 큼에도 불구하고 크게 화를 내어 오자브 지방으로 귀양을 보냈다. 척박한 곳으로 추방되어 굶주림에 떨던 오마가 알라신에게 도움을 청하자, 갑자기 신비한 음률과 함께 화려한 깃털을 가진 새가 나타나 이상한 나무 열매를 먹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오마는 그 열매를 이용하여 향기로운 음료를 얻게 되었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먹게 하였더니 병에 시달리던 사람들도 거뜬히 낫게 되었다. 이 소문이 모카에까지 크게 나돌자 오마는 귀양을 끝내고 돌아오게 되었다. 그 즈음 ‘커피’의 어원으로 여겨지는 ‘가후아’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