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테크/킴스특허 변리사

[스크랩] 컵라면 이야기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8. 2. 21:19

닛신식품의 안도 모모후쿠(安藤百福) 회장이 발명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 오사카(大阪)부 이케다(池田)시의 역전 공원에는 높이 2㎙정도의 기념비가 하나 서 있다. 기단부에 ‘사물의 시초, 문화의 마을 이케다’라는 비명이 새겨진 기념비 본문에는 이런 귀절이 적혀 있다.

‘생활 문화 창조의 마을 이케다는 먼 옛날 전통 방직 기술의 전승이 시작된 곳이고 에도(江戶)시대에는 명주(銘酒)와 이케다숯으로 유명했다. 식목의 마을로서의 명성은 지금도 여전하다. 메이지(明治) 시대에는 무로마치(室町)에 일본 최초의 분양 주택이 건설됐다. 1958년에는 이케다시에서 인스턴트 라면이 태어나 전세계에 전파돼 음식문화를 변혁했다’

58년 8월 25일 일본 오사카부 이케다시에서는 혁명이 일어났다.‘치킨라면’이란 이름의 인스턴트 라면이 처음으로 발매됐다. 40년이 흐른 지금 인스턴트 라면은 세계적으로 연간 400억개 이상이 팔려 나가 인류의 식생활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 오고 있다. 세계라면협회가 8월 25일을 ‘인스턴트 라면의 날’로 기념하고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당시 집마당에 작은 오두막을 짓고 가족과 함께 라면의 인스턴트화를 연구했던 안도 모모후쿠(安藤百福)씨는 첫 작품인 이 치킨라면의 성공으로‘닛세이’(日淸)라는 작은 식품회사를 세계 최대의 인스턴트 라면 메이커로 키워 냈다. 전적으로 그의 아이디어와 열정에 의해 이뤄진 일이었다.

닛세이의 창업주로 현재 회장을 맡고 있는 그는 1910년 대만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에 들어 가기도 전에 부모를 여의고 대를 이어 직물업을 하던 오사카의 조부모 집에서 성장했다. 20대에 접어 들면서 타이페이(臺北)에 메리야스 가게를 열었고 22세때 오사카에 진출하는 한편 교토(京都)의 리쓰메이칸(立命館)대학 전문부에 적을 두었다.

전후의 살인적인 식량 부족을 몸으로 겪으면서 그는 식품 산업이야말로 장래가 밝은 산업이라고 판단, 제염업 등 식품산업에 손대는 한편 ‘국민영양과학연구소’를 설립했다.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운 참상이 잇따르는 가운데 그가 주목한 것은 라면이었다. 영양이 풍부하고 가격도 밥보다는 싸 충분히 부족한 쌀을 대신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지만 라면집의 라면은 당시 빈곤한 서민들이 즐길 수는 없는 그림의 떡이었다. 나중에 닛세이의 기업 이념이 된 ‘식족세평’(食足世平·먹을 것이 넉넉해야 세상이 평화롭다)에 착안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전적으로 손으로 하는 작업을 기계로 대신할 수 있으면 가격을 크게 내릴 수 있으리라는 판단은 섰다. 라면 특유의 반죽을 연구하고 기계로 면을 대량 생산하는 데까지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젖은 면을 어떻게 말리고 쉽게 풀어지게 할 수 있느냐가 가장 큰 문제였다. 삶아 말리기도 해 보고 그냥 햇볕에 말려 끓여 보기도 했으나 모두 실패였다.

10년의 세월을 라면 생각으로 보내는 동안 사업은 엉망이 됐고 살림살이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48세의 그가 거의 무일푼이 됐을 때 행운은 우연히 찾아 왔다. 아내가 식사 준비를 위해 튀김을 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문득 기름으로 튀겨서 건조하는 방법을 떠올렸다.

젖은 면을 기름으로 튀기면 밀가루 반죽에 포함된 수분이 급격하게 증발해 빠져 나가면서 밀가루에 숱한 구멍을 남긴다. 이 구멍에 뜨거운 물이 다시 들어 가면 면이 원래의 부드러운 상태로 돌아간다. 이 간단한 원리가 인스턴트 라면을 탄생시켰다. 국물은 일본인들의 입맛에 잘 맞는 닭고기맛이 선택됐다. 이렇게 탄생한 ‘치킨 라면’은 ‘마법의 라면’이라고 불리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값싸고 영양가 높은 대용식으로 삽시간에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공장 시설을 늘리기가 바빴다. 58년 당시 수신세대가 100만대를 넘어 선 TV를 통한 광고도 인스턴트라면의 인기를 부추겼다.

닛세이는 첫 작품에 이어 61년에는 치킨라면에 카레를 가미한 ‘치킨카레라면’으로 또 한번 대히트를 기록했다. 63년에는 ‘볶음면’을 발매하는 등 인스턴트 라면의 얼굴은 다양해져 갔다. 71년에는 끓는 물을 부어 잠시후 바로 먹을 수 있는 ‘컵라면’을 개발 또 한 단계 인스턴트 라면의 혁명을 가속시켰다.

인기와 동시에 해외 진출이 잇따르면서 닛세이가 발명한 인스턴트 라면은 세계의 식품으로 자리를 잡아 갔다. 한국 등에 기술을 파는 한편 70년 미국 현지 공장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브라질, 싱가포르, 홍콩, 인도, 네덜란드, 독일, 인도네시아, 태국, 필리핀, 캐나다 등 해외 생산거점을 확충해 나갔다. 현재는 라면의 본고장인 중국에도 5개 지역에 공장을 설립했다.

이같은 공로로 안도회장은 95년 일본 정부로부터 ‘전후 50년 식품 산업 공로상’을 받았다. 인스턴트 라면의 아버지가 당연히 받아야 할 상이었다.

출처 : 킴스특허
글쓴이 : 킴스특허사무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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