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샤그푸르는 비스콘티의 작품을 두고 ‘새로운 것의 폭발적 등장과 함께 영원히 사라지는 것에 대한 비가’라고 지적했다. 그러한 점에서, 나치즘이 만행하던 독일을 배경으로 상류층의 한 가족의 몰락을 그려낸 <지옥에 떨어진 용감한 자들>(1969) 역시 비가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비스콘티의 전작과 비교했을 때 상당히 혼란스럽다. 이 혼란은 부정적인 캐릭터들이 내러티브의 중심부에 있으며, 전환점을 이루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볼 수 있다. 이는, 광기의 시대를 바라보는 비스콘티의 시선과 다름없다.
대부분의 영화 속 캐릭터, 특히 주역은 영화를 바라보는 태도를 반향한다. 중심이 되는 캐릭터를 초반에 설정해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것이 일반적인 영화의 선택이라면, 이 영화는 그것을 배반하고 있다. 영화 초반의 가족모임은 내러티브에서 각 캐릭터가 향할 노선과 충돌을 보여준다. 비스콘티의 전작인 <흔들리는 대지>(1947)나 <레오파드>(1963)처럼, 감독과 같은 이념을 지닌 허버트와 그의 부인이 이 영화를 이끌어 갈 것이라는 예상은 착각으로 전락하고, 그들은 역사의 희생양이 된다. 그 대신 비스콘티는 내러티브의 주역을 마틴으로 설정한다. 그 선택의 의미는 비스콘티가 역사를 바라보는 태도와 연결된다.
비스콘티는 마틴을 통해 나치즘의 폭력성을 퇴폐적인 모습과 함께 그려낸다. 이때 중요한 부분은 완성된 캐릭터로 영화를 진행시킨 것이 아니라, 변화의 과정에 초점을 두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은 <레오파드>의 살리나와 비교 할 수 있다. <레오파드>에서 살리나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라지지만, 마틴은 탄생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진행함에 따라 집안의 권력자는 계속해서 처단되고 주변부에 머물던 마틴은 마침내 중심부로 이동된다. 그러나 마틴이 영화 내 위치되는 과정을 살펴본다면, 이는 결코 긍정적 시선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틴은 요아힘의 생일파티에서 천박하게 여장을 하고 노래와 춤을 추며 등장한다. 이전 씬인 겐터의 첼로 곡과 비교되게 상류층 가족의 위엄을 해체시키는 모습이다. 그의 노래는 중단되고 어둠속에 홀로 남겨진다. 가족 내 지위를 표상하는 테이블에서도 그는 주변부에 머물며, 그날 밤 가족들이 각자의 공간에 모여 음모를 계획할 때도 그는 아이들과 함께 동떨어져있다. 더욱이 그는 집안이 아니라 허름한 정부의 집에서 그의 욕망을 표출한다. 그의 소아애호증과 성적 모호함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렇게 소외되는 마틴이 중심부로 이전되는 근저에는 죽음이 있다. 리사의 죽음은 그를 집안으로 이끌고, 콘스탄틴의 죽음은 그를 아센바흐와 가까워 질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애증 관계인 모친과 근친상간에 이어, 부모를 살해 한 그는 마침내 집안의 권력자가 된다.
이렇게 마틴이 중심부로 위치되는 과정은 피와 배반으로 점철되어있다. 영화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시대상과 가족의 몰락을 목격하게 하며, 최종적으로 나치제복을 입은 마틴을 보여주며 끝난다. 영화에서 등장한 지옥 같은 행태를 나치의 폭력성과 일직선에 놓고 염세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시선을 ‘새로운 것의 등장과 함께 영원히 사라지는 것에 대한 비가’로 본다면, 과거의 노스탤지어가 아닌 경멸로 볼 수 있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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