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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폭력의 역사 A History of Violence, 2005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9. 4. 10:50

 

 

 


폭력의 딜레마 - 단절이 아닌 수용하기

 

 

 시시콜콜한 폭력의 역사는 없다. 다만, 잠재적 폭력성과 그 끈질긴 관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어느 한 남성의 양면적 모습이 밝혀질 뿐이다. 영화는 단 한 번의 플래쉬백 없이 이 남자의 과거를 현재에 소환 시킨다. 더군다나 영화 중반부까지 조이와 톰의 정체를 두고, 관객은 물론 극중 배우들까지도 거짓과 진실의 얄팍한 경계선을 거닐게 한다. 정체가 발각된 톰은 조이라 명명되고, 톰의 역사(과거에서 현재)는 ‘폭력의 역사’로 은유된다. 톰은 과거에 죽였다고 생각하는 자기 자신(조이)의 폭력성을 발견한 뒤,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기사를 보고 찾아온 갱단과 마찰을 빚어가며, 자신과 연관되었던 폭력의 순환을 끊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딜레마가 생긴다. 바로 그를 둘러싼 모든 인물들, 관객까지도 그를 돕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폭력의 역사>의 구성적 측면에서, 영화 속 톰의 폭력은 관객과 함께 발생하고, 그의 이중성은 가족에게 수용된다. 결국 그는 폭력의 단절에 실패한다.

 오프닝 시퀀스는 미니멀한 구성이다. 뭔가 핵심이 빠져있는 듯한 두 남자의 미묘한 대사와 그들을 잡는 수평 트래킹 샷은 의미 없는 나열을 보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폭풍전야였다. 뒤이어 어떤 임팩트나 충돌 없이 강렬한 쇼트가 이어진다. 피로 얼룩진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다. 이 과격한 미장센을 관객에게 보여주기 위해, 남자는 냉장고의 생수를 꺼내어 달아나지 않고 일부러 정수기로 물을 받는다. 옆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아이가 나온 뒤, 아무런 거리낌 없이 총구가 카메라를 향한다. 적나라한 살인 현장의 과정은 여기서 생략된다. 그러나 관객은 그 어마어마한 ‘피’로 이 자들의 공격적 면모를 유추할 수 있다. 이것은 관객 내부의 폭력성을 일깨움과 동시에, 폭력적 장면의 익숙함을 조장하는 것과 연결된다. 예를 들어 톰의 가게에 두 명의 킬러가 등장했을 때, 톰보다 관객이 먼저 피를 원하게 된다. 관객은 벌써 두 남자의 사악함을 알고 있으며, 그들의 난폭함이 선량해 보이는 주인공 톰에게 영향을 미칠 것을 예감한다. 그리고 두 남자가 서서히 공격적 면모를 보일 때, 톰이 이들을 처치해 주리라 기대하는 것이다. 실제로 톰은 빠른 순발력과 저돌적 행동으로 그들을 처벌한다. 이로써 관객은 톰의 폭력성에 쾌감을 느끼고, 그를 영웅으로 생각한다. 관객 뿐 아니라, 그가 살고 있는 마을 주민들과 미디어 역시 그를 영웅이라 부른다. 이러한 폭력의 과정은 톰의 아들 잭에게서도 동일하게 발생한다. 그를 괴롭혔던 바비를 혼내줄 때, 그는 아버지의 길을 그대로 걷는다. 이처럼 예기치도 못한 인물에게서 숨어있던 폭력성이 드러날 때, 관객은 놀라움과 동시에 만족감을 느끼게 된다. 그들의 폭력은 숨겨진 내면이기도 하지만 디제시스적 관객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객의 욕망은 폭력을 작동시킨다.

  영화 속 폭력의 덩어리들이 서로 대치되고 사라지는 구성은 아래와 같다.
킬러                 킬러-톰(조이)        갱단-톰(조이)-잭     리치-톰 = 톰(조이), 잭
             킬러-바비           갱단                     리치  
     바비-잭                        바비-잭                          
이러한 폭력의 구성은 영화의 전반부에 걸쳐 깔려 있으며, 결국 남은 사람은 톰과 잭이 된다는 점에서, 폭력의 단절은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의 공동체가 폭력의 승리자이며, 더 나아가 그들의 승리는 한 가족의 안정을 위한 영웅적 기호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구성으로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크로넨버그는 이와 같은 관객의 작용과 폭력이 영웅과 일치되는 미국사회의 아이러니를 고발한다. 그는 폭력의 본질을 거시적 시선이 아닌 미시적 시선으로 바라보게 한다. 공공 집단으로 의해 자행되는 것이 폭력의 역사가 아니라, 폭력이 폭력에 의해 진압되고 재발하는 방식의 분열을 진정한 ‘폭력의 역사’로 본 것이다. 영화에서 ‘아버지 - 갱단, 평화 - 폭력, 가족 - 집단’ 길항관계로 놓은 것은 선-악의 구분을 위함이지만, 사실상 선이 악을 이기는 폭력을 은폐된 미국 의 역사로 까발려 놓으려 한다. 톰과 조이가 하나의 몸이었듯이, 미국의 폭력 역시 양면적으로 성립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성립에서 중요한 것은 내부자의 수용이다. 리치의 대사처럼 안정을 위한 폭력의 묵인은 ‘아메리칸 드림’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미국의 전형적 가족을 보여주는 톰과 그의 가족은, 두 차례의 병원 신과 섹스 신으로 잠재된 폭력과 그 폭력의 발견 그리고 용인되는 과정을 대비시켜 보여준다. 킬러를 죽이는 과정에서 톰은 부상을 당한다. 첫 번째 병원 신에서 그는 신체적 훼손과 그 틈으로 벌어져 나오는 폭력의 발아를 보여준다. 여기서 그는 사회적 안정과 가정의 자랑으로서 영웅이자 가장이다. 그리고 다른 신, 톰과 에디가 은밀하게 사랑을 나누었던 첫 번째 섹스 신 역시 다정한 부부의 모습을 말해준다. 그러나 두 번째 병원 신에서 톰이 조이라고 인정하자, 과거를 숨겼던 사회의 적(갱단)이자 가정불화의 원인이 된다. 톰이 자상한 가장에서 괴물로 묘사되는 폭력의 발견은 두 번째 섹스 신에서 아슬아슬하게 봉합된다. 개방된 공간인 계단에서 거의 강간처럼 벌어지는 격렬한 섹스 신에서, 그 괴물을 부여잡고 자신의 몸으로 이끄는 것은 다름 아닌 에디이기 때문이다. 에디는 두렵지만 내칠 수 없는 톰을 애증의 관계에서 수용시킨 것이나 다름없다. 이는 마지막 시퀀스에서 한 자리가 빈 저녁식사 테이블에서 압축되어 보여 진다. ‘조이의 본색을 드러낸 톰을 가족은 받아들일 것이냐, 말 것이냐.’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톰의 가족이 창문 넘어 바라봤던 톰의 폭력성은, 사실 잭의 도움으로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영화는 가족 구성원이 톰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끝이 나지만, 그 싸늘한 기운이 감도는 침묵은 폭력을 씨앗 형태로 남겨둘 뿐이지 제거 하지 못한다.

 분명, <폭력의 역사>는 영화를 현재의 미국과 과거 개척 당시 미국의 야만성을 떠오르게 한다. 그리고 미국 성립 과정의 폭력을 향한 두 가지 시선을 보여준다. 정의와 안정성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의 폭력, 약탈과 침략의 폭력적 대물림(순환). 중요한 것은, 마지막 시퀀스처럼 암묵적 수용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결국 폭력의 매커니즘이 단절되지 않고, 폭력에 대한 거부/수용 자체가 폭력적 성향의 잠재력으로 되돌아간다. 마치 ‘폭력의 역사’의 임시적 휴지기인 것 마냥, 근본적 문제는 해결되지 못한 채.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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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유디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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