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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흥미진진 중국의 음식문화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9. 13. 15:19

 

 

왕실 주방장은 총리급, 인간의 젖 먹여 키운 돼지요리 

 

최근 중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중국 관련 책들이 넘쳐나고 있지만 중국 음식에 관한 책은 별로 없다. 중국은 삶의 요소를 ‘의식주’가 아닌 ‘식의주’라 표현할 만큼 음식에 대한 관심이 높고 음식 문화가 발달해 있다.

중국인에게 음식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이고 중국 역사 속에서 음식문화는 어떻게 자리잡았을까.

언젠가 필자는 중국인 친구에게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의 민족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는 대답 대신 엉뚱한 이야기를 했다. ‘중국 사람은 먹느라 돈을 없애고 한국 사람은 옷 사 입고 집 옮기느라 없애고 일본 사람은 저축하느라 없앤다’는 것.

우리가 흔히 삶의 요소를 압축해서 말할 때 의식주(衣食住)라고 하는 데 비해 중국인들은 식의주(食衣住)라고 한다. 그만큼 중국인들은 먹는 데 관심이 많다.

우리의 지난날을 돌아보면 양반 집이든 아니든 밥상 앞에서의 투정은 용납되지 않았다. 우리 역사 속에 커다란 업적을 남긴 훌륭한 위인들도 미식가와는 거리가 멀었고 하나같이 ‘쓴 나물이 고기보다 맛있다’고 노래하곤 했다. 임금이라 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는 다르다. 중국 역사상 명군으로 이름난 청(淸)나라 강희제(康熙帝)만 해도 미식가로 유명하다. 이름난 학자나 예술가, 정치가 중에도 식도락가가 즐비하다. 실제로 황제의 수라상이 얼마나 요란한지는, 청나라 말기 서태후에 대한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돼지 허벅지고기 50근, 돼지 한 마리, 양 한 마리, 닭과 오리 각 두 마리를 재료로 한 각종 요리와 과일은 기본이고 여기에 강소(江蘇)의 조유(糟油), 진강(鎭江)의 준치, 하남(河南)의 유차(油茶, 밀가루 소뼈 생강 땅콩 참깨 따위로 만든 죽), 절강(浙江)의 꿀대추, 옥천산(玉泉山)에서 길어온 물 등이 ‘유난을 부리지 않은’ 서태후의 한끼 밥상이었다.

계절에 따라 황제의 혀를 만족시키기 위한 노력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예를 들면 부춘강(富春江)의 시어를 나르는 특급작전이 그것. 그물에 걸려든 시어를 산 채로 황제에게 올리기 위해서는 3000마리의 말과 수천 명의 사람이 동원된다. 황실과 강까지의 거리가 1300km나 됐기 때문에 1000마리를 나르면 겨우 네댓 마리가 살아남았고 그 중에서도 황제가 직접 먹게 되는 것은 한두 마리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 음식이 바로 청증시어(淸蒸?魚)다.

이렇듯 중국인에게 먹는다는 것은 황제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예로부터 의식동원(醫食同源)이고 음화식덕(飮和食德)이라고 생각했다. 의약과 먹는 것은 뿌리가 같고, 마시고 먹는 일은 덕이라는 뜻. 의식동원은 중국의 한약재 점포에서 인삼, 녹용 등의 각종 한약재와 상어 지느러미, 말린 전복, 해삼, 오징어 등의 건어물들을 함께 취급하고 있는 것만 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중국인에게 마시고 먹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그리고 역사에 음식문화가 어떻게 자리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정치의 중심에 선 음식

‘서경(書經)’을 보면 주(周)나라 무왕(武王)에게 기자(箕子)가 나라를 다스리는 법을 설명하는 말이 나온다.

“나라를 다스리는 여덟 가지 사항의 으뜸은 먹는 것이요, 둘째는 재물이다.”

제나라의 명재상 관중(管仲)은 이것을 한마디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왕은 백성으로 하늘을 삼고 백성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王以民爲天 民以食爲天).”

우리나라 역대 왕조는 잦은 기근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500년 정도는 유지해왔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북방 유목민의 침략이 없어도 굶주린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왕조는 멸망했다. 참을성 많기로 소문난 중국 사람도 굶주림만큼은 못 참았던 것. 지금의 공산당 정권이 들어설 때도 당시의 국민당 정권이 썩었기 때문에 스스로 무너졌다고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가진 자들의 것을 빼앗아 나눠준다는 공산당의 약속이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을 끌어들이는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현재 중국 지도층의 첫째 관심사도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게 하는 데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약진운동과 문화혁명을 거치면서 수천만 명의 백성이 굶주리며 죽는 것을 목격한 진보파들은 사회주의의 한계를 깨달았고, 그 돌파구로 도입한 것이 바로 개혁과 개방이었다.

그뿐 아니다. 동아시아인의 정신세계를 수백 년 이상 지배해온 유교의 교조 공자와 맹자도 그 가르침에서 음식타령을 빠뜨리지 않았다. 맹자는 일찍이 “맛있는 음식과 예쁜 여자를 바라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라고 말했고 공자는 “음식을 먹지 않는 사람은 없으나 참맛을 아는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공자는 여기서 더 나아가 ‘논어’의 향당편(鄕黨篇)에서 음식을 바르게 만들어 먹는 요령에 대해 자상한 가르침을 남기기도 했다.

“쉰밥이나 상한 생선은 먹지 말라. 색깔이나 냄새가 나쁜 것은 먹지 말라. 익지 않거나 제철이 아닌 것은 먹지 말라. 반듯하게 자른 것이 아니면 먹지 말라. 간이 맞지 않은 음식은 먹지 말라. 식욕이 당기는 대로 고기를 먹지 말라. 몸가짐이 흐트러질 정도로 술을 마시지 말라. 제사에 쓴 고기는 사흘을 넘기지말라. 먹을 때 말하지 말라.”

또 중국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음식을 만드는 조리사가 상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특히 왕실의 주방장은 지위가 매우 높았다. 재상(宰相)이라는 글자의 재(宰)는 집안을 뜻하는 갓머리 밑에 요리용 칼을 뜻하는 신(辛)자가 어우러져 만들어졌다. 고대 국가에서 제사는 중요한 국가적 행사였고 이를 주재하는 주방장은 곧 국가의 총리급 인물이었던 것. 하(夏)의 6대 임금인 소강(少康)이 한때 왕실의 주방장이기도 했다. 이처럼 고대 중국은 역사의 출발점에서부터 정치와 음식문화가 깊숙이 관계되어 있었다.

음식 사치로 나라 기울어

전한(前漢) 때의 환관(桓寬)이 지은 ‘염철론(鹽鐵論)’이라는 책에는 은(殷)의 기자(箕子)가 세상을 걱정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당시 주왕(紂王)이 상아로 젓가락을 만든 것을 보고 기자는 “상아로 젓가락을 만들어 사용하려면 그릇은 옥그릇을 써야 할 것이고, 그릇이 옥이면 아무 음식이나 담아 먹을 수가 없어진귀한 요리를 만들어 먹을 것이다. 이렇게 사치스런 생활을 하다 보면 나라를 망치지 않겠는가?”고 말하며 은나라의 어두운 장래를 예언했다. 음식 사치가 지나친 것을 보고 이미 나라가 기울 것임을 알았던 것.

진(晋)나라 무제(武帝) 때에도 나라를 망칠 정도의 사치스런 음식 문화가 있었다. 하루는 무제가 사위인 양수(羊琇)의 집에 초대받았다. 통째로 삶은 돼지가 나왔는데 그 맛이 각별해서 비법을 물어보니 인간의 젖을 먹여 키운 것이라고 대답했다. 현재 일본에서는 맥주를 먹이고 마사지를 하며 키우는 소가 있다고 하는데, 중국에서는 이미 1700년 전에 한 수 위의 사육법이 있었던 것이다.

진(晋)나라 혜제(惠帝) 때 기근이 매우 심한 적이 있었다. 굶어 죽는 백성들이 많다고 신하들이 말하자 혜제는 “백성들은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구나. 고기죽을 끓여 먹으면 될 텐데”라고 한탄했다. 백성들의 고달픈 삶에 대한 이해가 이 정도니 나라가 온전히 지탱하란 어려운 일이다.

역사적으로 위진남북조시대라 일컬는 이 시기는 중국 역사상 매우 암울했던 시대로, 어진 이(竹林七賢)들이 대나무 숲에서 술을 마시며 세상을 걱정했던 때다.

또 종종 밥상에서 받는 차별이 나라를 망치기도 했다. 중산국(中山國) 왕은 연회를 베풀면서 양으로 국을 끓였는데 양이 모자라 사마자기(司馬子期)에게 국을 주지 않았다. 무시를 당했다고 생각한 그는 위나라의 힘을 빌려 중산국을 쳤다. 중산국 왕은 그제야 “양고기국 한 사발 때문에 나라를 망쳤구나” 하고 탄식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또 전국시대에 송(宋)의 장군 화원(華元)은 전쟁에 나가기 전날 밤 양을 잡아 군사들을 배불리 먹였는데 자기가 타는 전차를 모는 부하를 깜박 잊고 부르질 않았다. 이에 앙심을 품은 부하는 다음날 전투가 시작되자 화원을 태우고 곧바로 적진으로 돌진했고 화원은 포로가 되고 말았다. 화원 장군의 옛일을 기억하고 있는 중국인들은 지금도 기사들의 식사를 챙겨주는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목숨 구한 풍성한 식사대접

위진남북조 시대 주방을 그린 풍속화

춘추전국시대는 7개의 강국이 대립하며 패권을 다퉜다. 각국의 지도자들은 천하의 인재를 불러모아 손님으로 모시고 그들의 재주를 활용했는데, 그 중에서도 제(齊)나라의 맹상군(孟嘗君)은 식객이 3000명이 넘었다. 그 중에는 별의별 재주를 가진 인물들이 많았다고 한다. 어느 날 풍훤(馮?)이라는 가난뱅이가 맹상군을 찾아왔다.

“무슨 특기라도 있는가?”

“없습니다.”

그러나 맹상군은 웃으면서 그를 받아 들였다. 다른 식객들은 그를 업신여겼고 그에게 나오는 음식도 좋지 않았다. 그러던 중 하루는 풍훤이 기둥에 기대어 칼을 두들기며 노래를 불렀다.

“나의 긴칼이여, 돌아가자. 나의 밥상엔 고기 한 점 없구나.”

이를 전해들은 맹상군의 지시로 그의 상에는 고기가 오르게 됐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칼을 두들기며 다시 노래를 불렀다.

“나의 긴칼이여, 돌아가자. 여기선 가족을 먹여살릴 수가 없구나.”

그에게 늙은 어머니가 있다는 것을 안 맹상군은 모자가 먹고 살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 후 맹상군은 식객들을 모아놓고 자기의 영지인 설(薛) 땅에 가서 빚을 받아올 사람을 찾았다.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는데 풍훤이 자기가 해결해보겠다고 말했다. 그는 그곳에 가서 채권문서를 거두어들인 다음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풍훤이 돌아오자 맹상군이 물었다.

“빚을 받아왔는가?”

“빚을 받아서 의(義)를 사왔습니다.”

맹상군은 기가 막혔지만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맹상군의 명성을 시기한 제(齊)의 민왕(泯王)은 그를 재상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맹상군이 갈 곳은 설 땅밖에 없었다. 가는 길에 맹상군이 풍훤에게 “그대 덕분에 내가 돌아갈 곳이 마련됐구나”고 말했다.

풍원은 “꾀 많은 토끼는 도망갈 굴을 세 개쯤 마련해둡니다. 대인께서는 이제 겨우 한 개밖에 마련하지 못했으니 제가 두 개를 더 마련해보겠습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풍훤은 양(梁)나라로 가서 혜왕(惠王)에게 말했다.

“제나라는 훌륭한 재상을 놓쳤습니다. 어느 나라고 맹상군을 맞이하면 강국이 될 겁니다.”

혜왕이 맹상군을 재상으로 영입하려 하자, 제나라 민왕은 맹상군에게 사과를 하고 다시 재상의 자리에 서게 했다. 풍훤은 맹상군에게 제나라의 종묘를 설 땅에 세우도록 권했다.

“선대 임금의 종묘를 모시면 임금이 공격하지 않을 겁니다. 이것으로 대인은 세 개의 굴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훗날 많은 대신들이 임금의 공격을 받았지만 종묘를 모시고 있는 맹상군은 안전할 수 있었다.

중국요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궁보(宮保)라는 단어는 원래 왕자를 가르치는 선생님을 뜻하다가 훗날 국가에 공을 세운 대신들에게 주는 호칭으로 사용됐다. 궁보라는 수식어가 붙은 대표적인 요리가 궁보계정(宮保鷄丁, 궁바오지딩)이다. 궁보계정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仁者 이름 딴 궁보계정·동파육

19세기 중엽 청나라의 정보정(丁寶楨)이라는 인물이 산동에 근무할 때 공을 세워 궁보(宮保)의 명예를 얻었다. 그 후로 사람들은 그를 정궁보(丁宮保)라고 불렀는데, 그가 궁보의 명예를 얻게 된 사연은 다음과 같다.

당시의 실권은 자희태후(慈禧太后)에게 있었다. 그는 중국 역사상 3대 악녀(한 고조의 황후 여후(呂后), 당의 무측천(武則天), 그리고 청의 서태후다) 중 하나다. 나라가 망할 때 언제나 그렇듯이 서태후도 태감(太監, 내시)들에게 너무 의지해 나랏일을 그르쳤다. 안덕해(安德海)라는 태감은 그의 절대적인 총애를 믿고 대신들까지도 부하 다루듯이 했다.

참다 못한 대신과 왕족들이 일제히 탄핵하자 태후도 어쩔 수 없어 그를 비밀리에 지방으로 보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지방 수령들에게 흠차대신(欽差大臣, 임금의 명을 받고 특별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 파견된 고관)으로 행세하며 위세를 떨쳤는데, 그가 산동에 이르렀을 때 이곳을 다스리던 이가 바로 정보정이었다.

정보정은 안덕해가 나타나자마자 체포해 목을 자르고 조정에 보고했다. 내시가 공식 허락 없이 대궐을 떠났기 때문에 처단했다고 분명히 밝힌 것이다. 태후도 어쩔 수가 없었다. 사실 태감이 공식적인 허락 없이 궁궐을 떠나는 것은 큰 죄에 해당했다. 안덕해의 처단으로 정보정의 이름은 전국에 널리 알려졌고 백성들의 칭송을 받게 됐다.

청증시어, 궁보계정, 마파두부

그런데 당시에는 안덕해가 내시로 위장했을 뿐 사실은 멀쩡한 남자로 태후의 정부이기 때문에 그토록 위세가 당당하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정보정은 그를 처단한 다음 벌거벗긴 시체를 사흘동안 길거리에 방치해 소문이 사실이 아닌 것을 입증하면서 태후의 체면을 세워줬다. 이 사건이 있은 후 그에게 궁보의 명예가 주어졌다.

그렇다면 이토록 대쪽 같은 정궁보가 궁보계정이라는 요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알아보자. 정궁보가 사천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고향인 귀주에 잠시 들렀다. 일가 친척들이 음식을 장만하느라 고생이 많을 것을 걱정한 그는 친척들에게 닭볶음이나 한 접시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요리사들이 그의 지시를 받아 정성 들여 개발한 닭볶음 요리가 바로 궁보계정이다. 계정(鷄丁)은 네모나게 썬 닭고기를 뜻한다. 원래 귀주요리였으나 정보정이 근무하던 사천 사람들도 먹게 됐고 이제는 분류상으로도 사천요리에 속하게 됐다.

그에 앞선 송나라 시기, 정치가이자 위대한 문학가였던 동파(東坡) 소식(蘇軾)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호를 노도(老?), 즉 식탐 늙은이라고 했을 정도로 대단한 미식가였다.

그가 항주(杭州)에서 태수를 지낼 때의 일이다. 당시 관리 소홀로 인해 서호의 일부가 메워지고 잡초만 자라 폐허가 되면서 저수지 구실을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 이를 본 동파는 백성들의 힘을 빌어 서호를 완벽하게 복구했다. 항주 사람들이 이를 고맙게 생각해 그에게 돼지를 바쳤다. 백성을 사랑하는 동파는 돼지를 요리해 백성들과 함께 먹었고, 사람들이 그 돼지요리를 그의 호인 동파(東波)를 따 동파육(東波肉, 둥버러우)이라 부르게 됐다.

음식 때문에 관직 버리기도

그밖에도 음식과 얽힌 중국 역사의 에피소드는 무척 많다. 진(晉)의 장한(張翰)이라는 사람은 음식 때문에 관직을 버리기도 했다. 그는 낙양에서 벼슬을 살았는데 가을철이 되자 고향의 순채국(蓴菜湯)과 농어회(?膾) 생각이 간절했다. 그는 사표를 내던지고 천릿길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순로지사(蓴?之事)라 하면 고향 땅, 고향음식을 그리워함을 뜻하게 됐다. 우리 같으면 관직에 오른 이가 한낱 음식 때문에 관직을 버린 것에 대해 두고두고 비난하겠지만, 중국에서는 미식가의 한 표본으로 존경을 받는다고 한다.

삼국시대 오나라의 왕 손책(孫策)과 대만의 장개석(蔣介石) 전 총통은 음식을 먹으면서 놀란 만한 판단력과 재치를 보이기도 했다.

어느 날 손책은 사탕수수로 만든 시럽을 먹으려다가 그 위에 쥐똥이 떨어져 있음을 알게 됐다. 환관이 보관책임자를 파면시킬 것을 건의하자 손책은 책임자를 불러 물었다.

“너는 저 환관에게 원한을 살 만한 일을 한 적이 없느냐?”

그러자 “환관이 관물을 빌려달라는 것을 거절한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이에 손책은 “쥐똥이 푹 젖지 않은 것으로 보니 이는 창고에서 가지고 오는 동안에 넣은 것”이라며 환관을 처벌했다.

몇십 년 전 우리나라 고위정치인 중 한 사람이 대만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당시 장개석 총통이 그를 위해 특별만찬을 베풀었는데, 식탁에 음식과 함께 손을 씻을 차가 담긴 그릇이 나왔다. 그는 별 생각 없이 이것을 마셔버렸고 이에 식탁 분위기는 갑자기 어색해졌다. 장총통은 얼른 자기 앞의 사발을 들어 자연스럽게 마셨다. 대만의 최고 권력자가 차를 마시니 다른 사람들도 감히 손을 씻을 수가 없었다.

다민족 국가인 중국에서 음식은 민족화합의 수단이기도 했다.

청나라 시절 만주족은 자민족 우대 정책을 시행했다. 연회에서도 이같은 질서는 엄격히 지켜져, 궁중요리도 만주식 연회를 뜻하는 만석(滿席)과 한족식 연회를 뜻하는 한석(漢席)으로 구분했다. 만석은 여섯 개, 한석은 다섯 개의 등급이 있었는데, 여기에 쓰이는 재료와 예산에 대해서 각각 규정이 정해져 있었다.

이렇게 만석과 한석으로 구분되던 궁중음식이 만한전석으로 합쳐진 것은 청나라 강희제 말기 때다. 강희제는 자신의 회갑을 맞아 65세 이상 노인 2800명을 초청해 대연회를 베풀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만석과 한석을 두루 갖춘 잔칫상을 가리켜 친히 만한전석(滿漢全席)이라 말했다. 그는 만족과 한족의 산해진미를 두루 갖춘 연회에 보다 특별한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던 것.

지금까지 중국의 음식문화가 역사 속에 어떻게 자리했는지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음식문화와 인간의 심성이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 알아보겠다.

 

매운 음식이 혁명가 배출

기름지고 부드러운 중국음식을 맛보면서 우리는 중국인의 만만디(慢慢地) 성격과 중국어의 성조(聲調)를 떠올릴 수가 있다. 깊은 맛이 느껴지지 않고 두어 젓가락 먹으면 끝나는 일본음식의 상차림을 보면 우리는 겉과 속이 다른 섬나라 근성과 간지럽게 느껴지는 일본어를 연결지을 수가 있다. 투박한 보리 빵에 뭉툭한 소시지는 게르만족의 성격과 거친 발음의 독일어를 연상시킨다. 온갖 소스와 재료로 맛을 낸 프랑스나 이탈리아 요리를 먹으면 우리는 예술적 감각이 뛰어난 그들의 생활을 머리에 그릴 수가 있다.

그러면 우리의 음식은 어떠한가. 우리의 입맛은 일제 침략 이후 격동의 현대사를 겪으면서 엄청나게 변했다. 우선 맛이 너무 강렬해졌다. 고추와 후추, 마늘 따위를 듬뿍 넣고 조리함으로써, 우리의 혀끝은 마비가 될 지경이다. 마늘과 고춧가루의 사용량으로 맛을 경쟁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 고추와 후추만 해도 우리 고유의 양념이 아니라 임진왜란 당시 전해졌다는 설이 대체로 인정되고 있는데, 왜 이것들이 우리 식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양념으로 굳어졌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맵고 짠 음식을 주로 먹으면서 우리의 심성이 거칠어졌고 일상어에서도 된소리와 육두문자가 많아졌다. 훈민정음을 창제할 당시에만 해도 있었던 부드러운 입술가벼운소리(△, , )가 사라진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중국에서 매운 요리로 유명한 지역 호남(湖南)과 사천(四川)은 혁명가의 본고장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두 지역은 우리나라의 영호남 관계처럼 라이벌 의식이 강하다.

사천에 매운 음식으로 마파두부(麻婆豆腐)가 있다면 호남에는 동안자계(東安子鷄)가 있고, 혁명가로 사천에 등소평(鄧小平) 양상곤(楊尙昆) 등이 있다면 호남에는 모택동(毛澤東), 유소기(劉少奇) 등이 있다. 이들의 경쟁관계에서 나온 말이 ‘파부라 부파라’이다.

호남 사람들이 “우리는 매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不?辣, 부파라)”고 하면, 사천 사람들은 “우리는 맵지 않은 것을 두려워한다(?不辣, 파부라)”고 응수한다.

그런데 두 곳의 매운 맛에도 약간의 차이는 있다. 호남요리는 입에 넣으면 혀끝에서 톡 쏘듯이 맵고 사천요리는 마랄(麻辣) 때문에 속이 얼얼하면서 맵다. 그래서인지 우리 한국사람들에게는 사천요리가 더 입에 맞는 편이다.

호남성 출신의 모택동은 “매운 것을 먹지 않는 사람은 혁명을 말할 수 없다(不吃辣的東西的人 不能講對革命)”고 말한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중국의 건국 원로 중에 사천과 호남 출신들이 별나게 많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특히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영호남 출신들이 현대 정치사에서 굵직굵직한 역할을 했던 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까.

 

수절 여인 사연 깃든 마파두부, 紹興酒와 궁합 맞는 상하이 게

전세계인들이 좋아할 정도로 다양하고 맛있는 중국요리.
광동요리, 사천요리, 상해요리, 북경요리로 나뉘는 중국요리에는 각기 어떤 특징이 있을까. 또 중국요리를 제대로 먹는 방법은 무엇일까. 중국요리 ‘박사’가 들려주는 실전 노하우.

지난호에는 중국요리의 역사에 대해 대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이제 지역별로 나눠 중국요리를 좀더 깊이 알아보자.

중국요리의 체계는 청나라 때 완성되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중국요리는 광동요리를 중심으로 하는 영남파(嶺南派)와 회양요리를 중심으로 하는 양자강 유역의 남방파(南方派), 그리고 북경요리를 중심으로 하는 황하유역의 북방파(北方派)로 나뉜다.

하지만 요즘은 보통 네 지역으로 나눈다. 홍콩·광동지방의 요리인 광동요리(粤菜 또는 廣東菜)와 사천요리(四川菜), 소주·항주·상해지방의 요리인 상해요리(蘇菜, 上海菜), 산동·북경지역의 요리인 북경요리(魯菜, 北京菜)가 그것이다. 네 지역의 대표 요리들을 중심으로 그 특징을 살펴보기로 한다.

[광동요리]

●통돼지구이(烤乳猪, 카오루주)

광동지방에서 새끼 돼지를 통째로 구워서 내놓는 통돼지구이는 연회의 격을 한결 높여주는 필수 메뉴다. 통돼지구이는 광동성의 주강(珠江) 삼각지 일대가 유명하다. 잘 익은 돼지는 겉이 황금빛이라 금돼지(金猪)라 하고 새끼 돼지는 유저(乳猪)라고 한다. 그러나 음식점의 메뉴에는 통돼지구이가 보통 취피유저(脆皮乳猪, 췌이피루주)로 올라 있는데, 이는 바싹 구워 아삭아삭 씹히는 맛에 착안한 이름이다.

옛날 광동지방에서는 첫날밤에 여자가 친정집에서 준비해간 하얀 천을 잠자리 깔개로 사용하는 습속이 있었다. 다음날 아침 이 천을 벗겨 처마 밑에 내걸었는데, 이 천이 (피로) 붉게 물들어 있으면 동네 사람들은 새댁이 처녀라며 축하해줬다고 한다. 한편 시댁에서는 며느리가 친정에 가져갈 예물로 통돼지를 구웠다 한다.

통돼지구이는 중국인들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주은래(周恩來)와도 관계가 있다. ‘In Search of History’라는 책을 쓴 T. H. 화이트는 돼지고기를 먹는 것이 신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생각하는 유태인이었다. 어느 날 주은래 총리가 그를 초청하여 만찬을 베풀었는데 식탁 한가운데에 화려한 황금빛을 자랑하는 통돼지요리가 놓여 있었다. 주은래는 전통적인 중국인의 식사예법에 따라 고기를 집어주면서 권했지만 화이트가 진땀을 흘리며 사양하다 보니 연회의 분위기가 식어버렸다. 이때 주은래가 재치를 발휘했다.

“괜찮습니다. 중국에서는 이것이 돼지고기가 아니고 오리고기입니다.”

참석자들은 모두 크게 웃었고 화이트도 용기를 내어 한 점을 입에 넣었다. 뒷날 그는 그때를 회상하면서 교리에 어긋난 행위를 한 것에 대해 용서를 구했지만, 통돼지구이의 뛰어난 맛에는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실토했다.

통돼지구이는 이미 3000년 전 주나라 때의 기록에도 여덟 가지 진기한 요리(八珍料理) 중의 하나로 나타나 있고 청나라의 공식 궁중요리인 만한전석(滿漢全席)에서도 으뜸이었다. 지금도 비교적 큰 규모의 연회에선 테이블마다 네 다리를 벌리고 납작 엎드려 있는 새끼돼지를 볼 수 있다.

●전복(鮑魚, 바오위)

전복은 빨판을 4∼5개 가진 조개의 일종이다. 살은 패각근(貝殼筋)에 의해 껍데기에 단단히 붙어 있고 발이 크고 넓다. 머리에는 한 쌍의 더듬이와 눈이 있다. 미역, 바닷말 등을 먹고 산다. 흔히 오분자기를 전복으로 혼동해 사고 파는 경우가 많은데, 오분자기는 전복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빨판이 7∼9개로 많고 크기가 전복보다 작다.

전복의 종류에는 와마포(窩麻鮑, 전복의 최상품으로 일본이나 한국에서 산출), 망포(網鮑, 일본과 중국 일부 지방에서 나는 고급 전복), 길품포(吉品鮑, 중국에서 주로 산출) 등이 있는데, 필리핀에서 나는 소락포(蘇洛鮑)를 제일 저급으로 친다.

전복요리에는 주로 말린 전복을 쓴다. 전복뿐 아니라 많은 해물요리를 할 때도 중국인들은 말린 재료를 애용한다. 한번 익혀서 말리면 보관과 수송에 편리한 데다 건조과정에서 아미노산과 이노신산이 생겨 맛과 영양이 더욱 좋아지기 때문.

흔히 중국요리 중 상어지느러미나 제비집만 비싼 줄 알지 전복요리가 비싼 것은 잘 모르고 있다. 하지만 일반적인 해물요리 중에서 제일 비싼 것은 전복요리다.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자.

홍콩 동라만(銅锣灣)에 있는 부림반점(富臨飯店)에 가서 전복찜을 시키면 그 값에 입을 다물 수가 없을 것이다.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좀 크다 싶으면 1개에 50만원 이상이다.

 

●석반어찜(淸蒸石斑, 칭정스반)

중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생선은 무엇일까. 남쪽은 석반어(石斑魚), 북쪽은 황하의 잉어(鯉魚)가 아닐까 싶다. 여기에 중부지역을 포함한다면 초어(草魚)와 농어(鲈魚), 시어(鲥魚)도 꼽을 수 있다.

석반어는 우럭과에 속하는 물고기로 생김새나 맛이 우럭과 비슷하다. 대대적으로 양식이 이뤄지고 있으며 종류에 따라 값 차이가 크다. 고급으로는 성반(星斑), 홍반(紅斑)이 있고 최고급으로 노서반(老鼠斑), 가장 싼 것으로 니반(泥斑)이 있다.

석반어는 찜으로 해먹는 것이 일반적이다. 석반어를 손질해 소스를 뿌리고 야채를 얹어 찜으로 해내는 이 요리는 담백하고 특히 육질의 씹히는 맛이 좋다. 광동요리 중에서도 대표적인 해물요리로 꼽힌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찜의 양념국물을 좋아해 생선을 다 먹으면 접시에 밥을 넣어 비벼 먹곤 한다. 이렇게 먹는 맛이 우리로선 별미이지만 이를 처음 보는 중국사람들은 깜짝 놀라곤 한다.

[사천요리]

●마파두부(麻婆豆腐, 머퍼더우푸)

한국사람 치고 마파두부(麻婆豆腐, 또는 麻辣豆腐라고도 함)를 싫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 마파두부는 중국인들에게도 인기가 좋아 중국 어느 지방의 어느 음식점을 가도 먹을 수가 있다. 마파두부는 분명 사천요리 중에서도 가장 사천요리다운 음식이다. 마치 비빔밥이 어느 한식집에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마파두부의 역사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19세기말 청나라 동치(同治)임금 때 사천성 성도(成都)의 온(溫)씨 집안에 딸(溫巧巧)이 하나 있었다. 용모가 매우 아름다웠으나 얼굴이 얽은 것이 옥에 티였다. 목재상에서 일하던 진지호(陳志灝)라는 사람과 결혼했는데, 이들 부부는 시댁에서 부모, 형제와 함께 살았다. 그런데 부지런하던 신랑이 결혼한 후에는 밥 먹을 때만 제외하고는 문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금슬이 너무 좋아 도무지 일하러 나갈 생각이 없어진 것. 식구들이 흉을 보자 이를 견디다 못한 부부는 집을 나와 딴살림을 차리게 됐다.

당시 성도의 주요 산업은 목재와 기름이었다. 신랑은 먹고 살길을 찾아 기름집에 취직했고 새색시는 기름집 일꾼들을 상대로 집 앞에서 차를 끓여 팔았다. 겨우 먹고 살 만하게 된 어느 날 남편이 기름을 운반하다가 사고로 목숨을 잃고 만다. 사랑하는 남편을 여읜 온씨 여인은 비통한 심정을 겨우 추스르고 살림을 꾸리기 위해 시누이와 함께 조그만 음식점을 열었다. 마침 옆에 푸줏간과 두부집, 그리고 기름집이 있어 여기서 사들인 재료와 쇠고기, 고추, 산초, 콩짜개, 된장 따위를 넣고 볶은 음식을 내놓았는데,큰 인기를 얻게 됐다.

이들은 진교교고수두부팽조(陳巧巧姑嫂豆腐烹調)라는 긴 이름의 간판을 걸고 영업했다. 진교교의 올케, 시누이가 만드는 두부요리라는 뜻. 여기서 온씨 여인이 진씨로 바뀐 것은 중국의 여인들은 결혼 후 남편의 성씨를 가지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많은 사람들이 재혼을 권했으나 여인은 수절하면서 더욱 열심히 일했다. 여인이 죽자 이 음식점을 즐겨 찾던 이들이 그녀를 기려 이름 없던 두부요리에 마파두부(麻婆豆腐)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마(麻)는 그녀의 얼굴에 있는 마마자국 때문에, 파(婆)는 그녀가 수절한 채 늙은 노파였기에 붙여진 것이다.

●단단면(担担麵, 단단미옌)과 마의상수 (蚂蚁上樹, 마이이상수)

중국의 대중음식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국수 중 하나가 단단면이다. 단단(担担)은 짐을 지고 간다는 뜻으로 단단면이란 지고 다니며 팔던 국수를 의미한다. 국수에 돼지고기, 고추기름, 야채, 생강, 간장, 파 따위를 넣고 끓여낸 것이 정통 사천식 단단면이다.

마의상수는 볶은 국수의 일종으로 잡채와 비슷하다. 약간 매콤한 맛이어서 입맛이 없을 때 먹을 만하다. 마의(蚂蚁)는 개미, 상수(上樹)는 나무를 올라간다는 뜻. 볶은 국수에 고깃가루를 뿌린 것이 마치 개미떼가 나무를 올라가는 것처럼 보여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싶다.

 

●삼겹살볶음(回鍋肉, 후이궈러우)

사천식 삼겹살볶음회과육(回鍋肉)은 그 역사가 무척 오래됐다. 사천에 가서 이것을 못 먹으면 사천에 안 간 것과 같다고 할 정도. 삼겹살에 생강을 넣고 술을 끼얹어 삶은 다음 적당한 크기로 썰어 고추, 마늘, 파 따위를 넣고 기름에 볶은 것이다. 우리 입맛에도 잘 맞는다.

●소내장전골(毛肚火鍋, 마오두훠궈)

화과(火鍋, 훠궈)는 중국식 신선로. 소내장전골은 쇠고기, 양고기, 각종 야채, 버섯 등을 화과에 넣고 끓여 먹는 음식이다. 사천지방에서 시작했으나 지금은 북경을 포함한 중국 화북지방에서도 인기가 높다. 중국 곳곳에 사천화과(四川火鍋), 중경화과(重慶火鍋)란 간판이 즐비할 정도. 오히려 북경의 이름난 음식인 쇄양육(涮羊肉, 쏸양러우)이 화과 때문에 빛을 잃었다.

모두(毛肚)는 소의 내장 중에서도 밥통 즉 양을 뜻한다. 이 요리는 소의 양은 물론 콩팥과 등심, 물고기, 닭피, 해삼, 두부, 버섯 등 각종 재료를 넣어 끊인다. 여기에 술과 사천지방 음식의 감초라 할 수 있는 생강가루, 산초, 고추 따위를 넣어 얼큰하게 만들기 때문에 한국인의 입맛에도 맞는다. 모혈왕(毛血旺, 마오쉐왕)이라고도 한다.

[상해요리]

●유조(油條, 위탸오)

중국의 역사 속에서 한족(漢族)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은 악비(岳飛)다. 남송(南宋)의 무장인 그는 금(金)나라와의 전쟁에서 여러 차례 이겨 기울어가는 나라를 지켜냈지만 금나라와의 굴욕적인 타협을 주장하는 재상 진회(秦檜)의 계략으로 병권을 빼앗기게 된다. 불평등조약으로 실리를 챙긴 금나라는 진회에게 악비를 제거하도록 부탁했다. 갖은 모략을 꾸몄음에도 악비를 반역죄로 몰아갈 수 없다고 판단한 진회는 아예 악비를 살해하고 만다. 당시 악비의 나이 39세였다. 이때부터 남송은 더욱 기울어 멸망의 길을 재촉하게 된다. 악비가 죽은 후 항주의 어떤 백성이 유골을 수습해 서호의 물가에 묻고 악묘(岳墓)라 이름지었다.

진회에 대한 원한이 사무친 백성들은 밀가루 반죽을 소시지 모양으로 길게 만들어 기름에 튀긴 유조(油條, 위탸오)를 먹으면서 진회를 씹어 먹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전해진다.

훗날 사람들은 악비를 모함한 진회와 그의 부인이 함께 묶여 꿇어앉아 있는 형상을 만들어 악비의 묘 앞에 두어, 묘를 찾는 관광객이 뱉는 침을 온몸으로 받아내도록 했다. 후세의 벌을 톡톡히 받고 있는 셈.

그런가 하면 원한을 음식으로 연결지었다는 점에서 유조는 우리의 성계육과 같다. 고려가 망한 후 이성계에 원한을 품은 개성사람들은 돼지고기를 삶아 김치에 싸먹으면서 성계육(成桂肉, 즉 이성계의 고기라는 뜻)을 먹는다고 했으니 그 발상이 비슷하다.

한편 유조는 중국 사람들이 아침에 즐겨 먹는 음식으로 콩국과 함께 먹으면 영양도 만점이다.

●상해게(上海大蟹, 상하이다셰)

가을이 되면 국화가 꽃을 피우고 그 향기는 바람 을 타고 널리 퍼진다. 그러면 사람들은 소주(蘇州, 쑤저우)의 양징호(洋澄湖, 양덩후)나 가흥(嘉興, 자싱)의 남호(南湖, 난후)를 찾는다. 바로 이들 호수에 서식하는 민물게를 즐기기 위해서다. 이곳의 게가 중국사람들에게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는 많은 에피소드에서 짐작할 수 있다.

중국의 유명한 여류시인으로 소주에서 살았던 탕국리(湯國梨)는 “양징호의 게가 좋지 않으면 어찌 소주에 살으리오(不是洋澄湖蟹好 此生何必蘇州)”라는 시를 지었고, 이(李)모라는 화가는 매년 가을이 되면 적어도 100마리의 게를 먹어치워 사람들이 게 백마리 이씨(李百蟹)라 부를 정도였다. 그뿐이 아니다. 술꾼들의 영원한 스승 이태백도 “게 알은 황금의 액체(蟹螯金液)”라고 읊어 게 예찬론자의 대열에서 빠지지 않았다.

그런데 중국 사람들은 ‘구월은 암케 시월은 수케’라는 말을 많이 한다(한자로 ‘九月團臍 十月尖’인데, 여기서 단제(團臍)는 배꼽이 둥글다는 뜻으로 암컷을 가리키고 뾰족한 배꼽을 뜻하는 첨(尖)은 수컷을 가리킨다). 게는 음력 9월이면 암컷의 배에 알이 가득해지고 10월이 되면 수컷의 살이 찌면서 맛이 좋아지는 데서 만들어진 말이다.

가을철 양징호의 게라면 사람들은 돈을 아끼지 않고 사먹는다. 수요는 많고 공급은 달리니 부근 아무 강이나 호수에서 잡아온 가짜를 양징호의 게로 속여 파는 사람들도 많다. 판별법은 온몸에 털이 촘촘히 난 게를 고르는 것. 이 게의 정식 이름이 중화융모해(中華絨毛蟹)인데, 간단히 줄여 모해(毛蟹)라 할 정도로 몸에 털이 많다. 그밖에도 강남해(江南蟹), 또는 대갑해(大閘蟹)라고도 불린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이 음식은 상해 대갑해(上海大閘蟹, 상하이다셰)로 불리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게의 본고장인 소주는 일찍부터 게 요리가 발달했다. 대표적인 음식으로는 증청해(蒸靑蟹, 정칭셰), 해분두부(蟹粉豆腐, 셰펀더우푸), 해분초단(蟹粉炒蛋, 셰펀차오단) 등이 있다. 그런데 소주는 미인이 많기로도 유명한 곳이다. 이 미인들이 어려서부터 게를 먹고 자라면서 게 요리법을 익혔는데, 이들이 새로 발달하는 신흥 상업도시인 상해로 시집을 가면서 소주요리인 게가 상해의 본바닥 요리처럼 굳어졌다. 상해게(上海蟹)라는 이름도 이같은 배경에서 생긴 것이지 양징호와 별도로 상해에서 잡히는 게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상해게 요리는 소흥주(紹興酒, 사오싱주)를 함께 먹으면 제격이다. 또 다 먹은 후 껍데기를 재조립하면 다시 원래의 모양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깔끔하게 먹어야 이 음식을 제대로 먹는 것이다. 이 게를 먹을 때 격식을 갖출 경우 젓가락, 방망이, 받침대, 집게, 작은 숟가락, 가위, 대나무칼 등 일곱 개의 도구가 필요하다. 성미 급한 우리나라 사람들이라면 차라리 안 먹고 말겠지만 그들이 누구인가. 바로 만만디의 중국인들이다. 좋은 음식에는 나름의 격식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니, 상해게 요리를 앞에 놓고 마치 꽃게찜 먹듯 우적우적 씹어 먹으면 아무래도 모양이 좋지 않다.

하지만 필자는 이토록 유명한 상해 게보다 우리나라 게가 더 맛이 있으니 입맛의 차이는 어쩔 수 없나 보다. 상해게는 달걀 냄새가 진하게 나 우리나라 게보다 깔끔하고 담백한 맛이 떨어진다. 또 씹히는 맛 역시 우리 게가 더 쫄깃하다.

●부귀계(富貴鷄, 푸구이지)

가장 호강하는 닭요리가 이것이 아닐까 싶다. 연잎에 싸서 진흙을 발라 구워낸 것이 여간 고급스럽지 않다. 하지만 그 내용을 알고 보면 출신은 그다지 자랑스럽지 않다.

청나라 초 한 거지가 배가 고파 어느 마을에서 닭 한 마리를 훔쳐 강가로 도망쳤다. 변변한 조리도구나 양념이 없어 그냥 내장이나 들어내고 구워먹으려는 순간 멀리서 높은 분의 행차가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당황한 거지는 황급히 강가의 진흙을 닭에 발라 불 속에 던져버렸다. 행차가 지나간 후 불기운에 딱딱하게 굳은 진흙 덩어리를 부수고 닭을 꺼내 먹어보니 그 맛이 일품이었다. 근처에 사는 장(張)씨의 하인이 우연히 이 광경을 지켜보다가 냄새가 그럴싸해 거지를 다그쳐서 요리법을 알아냈다. 주인에게 보고하자 흥미를 느낀 장씨는 요리사를 불러 좋은 재료를 넣고 한번 만들어보도록 지시했다. 요리사가 닭에 여러 가지 재료를 더하고 연잎(蓮葉)에 싼 후 진흙을 발라 오랜 시간 동안 구워 주인에게 바쳤는데, 그 맛이 훌륭했다.

처음에는 ‘거지의 닭’을 뜻하는 규화자계(叫化子鷄, 영어로는 Beggar’s Chicken)라고 부르다가 오늘날에는 부귀계(富貴鷄, 푸구이지)로 바꿔 부르고 있으니 신분이 급상승한 셈이다.

[북경요리]

●북경오리구이(北京烤塡鴨, 베이징카오톈야)

오늘날 세계 각국에서 중국요리를 대표하는 음식이 바로 북경오리구이(北京烤塡鴨, 베이징카오톈야, 간단히 줄여 카오야(烤鴨)라고도 한다)다. 이 요리는 6세기경인 남북조시대의 기록에도 보이지만, 지금과 같은 형태로 발전한 것은 명나라가 남경(南京)을 첫 수도로 정했을 때 남경에서 인기 있던 오리요리를 구이로 개발하면서부터다. 명나라가 수도를 북경으로 옮긴 후부터는 북경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 오리구이 전문점이 등장했고, 19세기말 청나라 때에는 이 음식이 전세계로 알려졌다.

역사상 가장 이름난 미식가인 건륭제(乾隆帝, 高宗)가 1761년 3월5일부터 17일까지 13일 동안 오리구이를 8번이나 먹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그 맛이 뛰어났음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다. 오리의 이름을 한자로 압(鴨)이라 하는 데서도 오리 요리의 위상을 알 수 있다. 새(鳥) 중의 으뜸(甲)이라는 뜻이니 말이다.

그러면 북경오리구이가 남다른 맛을 내는 데는 어떤 비결이 있을까. 우선 재료부터 살펴보면 북경오리구이는 특별한 방식으로 살을 찌운 북경오리만을 쓰고 있다. 북경오리는 털이 하얗고 눈은 검으며 부리와 발은 오렌지색이다. 부화하고 2개월이 지나면 무게가 2kg이 될 정도로 성장이 빠르다. 1년에 140여 개의 알을 낳는다. 보통 부화 후 50일쯤 되면 운동을 시키지 않고 하루 2∼4회씩 환약처럼 만든 사료를 목구멍에 가득 차도록 먹여 강제로 살을 찌운다. 전압(塡鴨)이라는 이름도 여기서 얻게 된 것. 그래서 살집이 많고 고기가 부드럽다.

또 하나의 비결은 굽는 방법에 있다. 오리를 잡으면 깃털과 내장을 제거하고 물갈퀴를 떼어내어 겉에 엿을 발라서 4일간 그늘에 말린다. 그리고 몸 속에 공기를 불어넣어 보기 좋게 부풀린 다음 대추나무나 배나무로 땐 장작불위에 매달아놓고 맥아당 양념을 발라가며 다갈색으로 익을 때까지 오랜 시간 구워낸다. 하지만 지금은 나무가 귀해지면서 목탄이나 가스불을 이용하고 있다.

이렇게 구워낸 오리는 식기 전에 껍질을 얇게 썰어 상 위에 올리는데, 숙달된 요리사는 6분 만에 한 마리를 썰어낸다고 한다. 이 껍질을 바오핑(薄餠)이라는 밀전병에 첨면장(甛麵醬, 톈미옌쟝, 밀가루와 소금으로 발효시켜 만든 중국식 된장으로 단맛이 강하다)이라는 양념장과 미리 썰어둔 생파, 생오이 등을 넣고 함께 싸 먹는다.

오리의 각 부분을 전부 조리한 요리를 전압석(全鴨席, 취안야시)이라고 하는데, 이때는 혀와 발의 물갈퀴 부분도 나온다. 일반 음식점에서 북경오리구이를 주문하면 껍질만 썰어 내놓지만 전문 오리집에서는 대개 전압석으로 나온다.

또 오리의 알도 하나의 요리가 된다. 피단(皮蛋, 일명 松花蛋)으로 불리는 오리알 절임은 석회와 소금, 재를 반죽한 것으로 오리알을 싼 후 항아리에 넣고 밀봉해 여러 달 발효시킨 음식이다. 발효과정에서 노른자는 검은색으로 변하고 흰자는 젤리처럼 맑은 색으로 굳어진다. 전채음식으로 나오거나 각종 요리에 넣어 맛과 색을 돋우기도 한다. 오리알을 소금에 절인 셴단(鹹蛋)도 있지만 이것은 너무 짜 우리 입맛에는 맞지 않는다.

●쇄양육(涮羊肉, 쏸양러우)

양(羊)고기가 북경을 대표하는 요리가 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우선 북경은 양고기를 즐기는 북방민족의 침입과 지배를 많이 받았다. 또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회교도들이 주로 북경에 머물면서 독특한 양고기 문화가 발달하게 된 것.

얇게 썬 양고기를 끓는 육수에 살짝 익혀 먹는 쇄양육(涮羊肉, 쏸양러우)은 본래 몽골족의 음식인데, 원나라 때 북경이 수도가 되면서 보급되기 시작됐고 명나라 때 대중화되더니 이젠 북경의 명물 요리로 자리를 굳혔다.

양고기를 종이처럼 얇게 썰어 화과에 살짝 데친 것을 간장, 새우소스, 참기름, 소흥주(紹興酒), 고추기름, 식초 등에 찍어 먹는다. 양고기가 잿빛으로 변한다 싶으면 재빨리 꺼내 국물을 화과에 잘 털고 먹는 것이 요령이다. 원래 화과에는 목탄을 썼으나 요즘은 전기나 가스, 알콜을 쓰는 곳이 많다.

18세기 청의 가경제(嘉慶帝, 仁宗)가 1000명의 건강한 노인들을 초청해 잔치를 베풀었는데, 이때의 기록에 의하면 야화과(野火鍋)니 양육화과(羊肉火鍋)니 하는 말이 나온다. 이는 오늘날 쇄양육의 조상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도 넓은 냄비에 육수를 끓이면서 쇠고기나 국수 등을 넣어 데쳐 먹는 음식이 있었다. 이름은 토렴인데, 오늘날 칭기즈 칸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아무튼 쇄양육은 화과에 데쳐 먹는 토렴과 비슷한 음식으로 보면 된다.

●만두(饅頭, 만터우), 교자(餃子, 쟈오쯔), 포자(飽子 또는 包子, 바오쯔)

사실 우리가 만두라 부르는 음식은 중국사람 기준에서 보면 전혀 만두가 아니다. 중국의 만두는 우리가 생각하는 만두와 모양이나 맛이 전혀 다른 별도의 음식이다. 만두와 혼동하기 쉬운 교자와 포자도 함께 살펴보기로 하자.

만두(饅頭, 만터우)는 팥이 안 들어간 찐빵에 가깝다. 겉과 속이 모두 밀가루뿐이고 내용물이 없어서 보통 다른 음식과 함께 먹는다. 주로 북쪽 지방의 주식이다. 실제로 음식점에서는 만두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둘둘 말아서 울퉁불퉁한 모양인 화쥐안(花卷)이라던가 실가닥같이 벗겨지는 모양인 인쓰쥐안(銀絲卷) 등이 바로 만두에 속하는 찐빵이라 하겠다.

교자(餃子, 쟈오쯔)는 밀가루 또는 찹쌀가루를 반죽해 얇게 민 다음 잘게 저민 고기나 야채 따위를 넣고 찐 것으로 우리의 만두와 비슷하다. 교자의 교(餃)자는 껍데기의 가장자리를 맞추어 둘러싼다는 뜻이다. 따라서 밀가루를 반죽한 후 쪄낸 만두와는 만드는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 본래 만주족의 음식이었으나 청나라가 대륙을 정복하면서 북경에 전해졌다고 한다.

교자(餃子)라는 글자가 ‘자식에게 전한다’는 뜻의 교자(交子)와 발음이 서로 통해 이 음식은 자손이 번영하기를 바라는 주술적인 성격을 띤다. 중국의 동북 지방에서는 음력 설날이 되면 온 가족이 둘러앉아 교자를 빚는다. 이때 교자에 동전을 넣어두는데, 나중에 이것을 발견한 사람은 그 해에 운수가 좋다고 믿는다.

교자는 익히는 방식에 따라 물만두와 흡사한 쉐이쟈오(水餃, 북경 지방의 것이 유명하다), 쪄내는 정쟈오(蒸餃), 구워 내는 궈톄(鍋貼) 등이 있다. 음식점마다 독특한 이름을 붙인 교자들이 있는데,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베이징쉐이쟈오(北京水餃)는 돼지고기, 배추, 새우가루 따위로 속을 채우고 밀가루 피로 싼 교자를 말한다. 샤쟈오(蝦餃)는 새우로 속을 채운 교자, 관옌쟈오(官燕餃)는 속에 제비집을 넣은 교자이고 위츠관탕쟈오(魚翅灌湯餃)는 상어지느러미 수프에 담아 내는 교자를 뜻한다

중국어는 단어마다 성조(聲調)가 있는데, 교자를 주문할 때 잘못하면 큰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 ‘물만두 한 접시에 얼마냐(一碗水餃多少錢)’ 하는 것을 ‘이완쉐이쟈오둬사오쳰’이라 하는데, 이는 ‘하룻밤 자는 데 얼마냐(一晩睡覺多少錢)’ 하는 것과 성조만 다를 뿐 발음이 똑같다. 음식점 아가씨를 불러놓고 물만두 시키다가 자칫 잘못하면 잠자리 값을 흥정하는 호색한(好色漢)으로 몰릴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포자(飽子 또는 包子)의 겉모양은 만두와 비슷하나 껍데기 속에 팥 따위가 소로 들어가 있다. 포자도 교자처럼 밀가루나 찹쌀가루로 껍데기를 만들고 속을 넣는데, 어떤 것은 교자와 구별하기 어렵다. 다만 일반적으로 교자는 길쭉한 모양이고 포자는 둥그런 모양이다. 포자의 예를 몇 개 들어보겠다. 차사오바오(叉燒飽)는 돼지고기구이를 소로 넣고 찐 것으로 몇 개만 먹어도 배가 부르다. 샤오롱바오(小籠飽)는 상하이 명물요리 중 하나로 껍데기 안에돼지고기와 뜨거운 국물이 들어 있어 먹을 때 조심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는 만두가 어떤 경로를 타고 전래되었을까. 뚜렷한 기록은 없다. 다만 14세기 중엽 고려시대에 수랏간에 들어가 만두를 훔쳐먹은 자를 처벌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만두가 그때쯤 중국으로부터 전래됐지만 아직 대중화되지 못한 귀한 음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가요인 쌍화점(雙化店)에 나오는 쌍화가 소를 넣고 찐 음식이라는 점에서 교자일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고려 사람들은 이를 만두라 불렀다. 또 조선시대에 밀가루 반죽으로 피를 만들고 소를 넣어 삶은 것은 확실히 교자에 해당하지만 이것 역시 만두로 불리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중국의 식사예절]

지금까지 중국의 4대 요리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았다. 이젠 중국사람들과 음식을 먹을 때 어떤 예절을 지켜야 하는지 알아보자.

음식점으로 중국인들을 초대한다면 우선 음식점에 식사인원과 예산을 통보한 다음 2∼3가지의 코스요리를 추천받아 그 중 하나를 고른다. 이때 식사인원보다 다소 넉넉하게 차리는 것이 예의다. 간혹 나이 많은 한국의 기업인들이 중국인을 초청한 자리가 끝나면 메뉴를 정한 실무자들에게 불필요하게 많이 주문해 낭비가 많았다고 나무라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중국인들의 생활 습관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오해다. 오히려 중국인들은 남김 없이 먹을 정도로 ‘적당히’ 차려진 초대상에 대해서 불쾌한 생각을 가진다.

초대한 입장이라면 약속시간보다 30분쯤 미리 음식점에 도착해 기다리는 것이 예의다. 손님이 왔을 때 정문까지 나갈 필요는 없고 예약해둔 방에서 기다리면 된다.

식탁은 주로 원탁형인데 언제나 안쪽의 중앙 자리는 초대한 사람이 앉는다. 초대자의 오른편에 주빈이, 그리고 왼편에 다음으로 중요한 사람이 차례로 앉으면 된다.

자리에 앉은 후 차 주문을 한다.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차는 녹차(綠茶)와 화차(花茶, 또는 香片, 일명 재스민 티), 그리고 철관음(鐵觀音)과 오룡차(烏龍茶), 보이차(普洱茶) 등이 있다. 이 중에서 녹차와 화차는 비발효차에 속하며 양자강 이북 사람들이 즐기고 나머지는 발효차에 속하며 양자강 이남 사람들이 즐긴다는 것을 참고한다.

음식을 미리 주문해뒀더라도 술은 주빈의 뜻을 물어 주문한다. 남쪽 사람들은 술을 별로 즐기지 않지만 북쪽 사람들은 오량액(五糧液)이나 모태주(茅台酒) 등 독주를 즐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적포도주를 선호한다. 특정지역을 갔을 경우에는 그 지방의 명주를 고르는 것이 좋다.

음식이 나오면 초대한 사람 앞에 놓여진 별도의 젓가락을 이용해 좌우의 주빈들에게 음식을 덜어주는 것도 좋다. 술을 마실 때는 손님들의 잔을 살펴 항상 술이 차 있도록 첨잔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에게는 첨잔이 실례지만 그들에게는 무관심이 실례다. 가장 피해야 할 것은 내가 마시던 잔으로 술을 권하는 일. 이는 아랫사람에게 하사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위생상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음식을 먹을 때는 적당히 떠들면서 게걸스럽게 먹는다. 중국 사람들이 자연스러움을 좋아하는 만큼, 맛있는 음식을 놓고 지나치게 얌전을 피우거나 내숭을 떨 필요는 없다. 뼈나 가시와 같은 찌꺼기도 적당한 곳에 놓아두면 된다. 분위기가 고조되면 이태백이나 두목(杜牧) 등 중국의 대표적인 문인들의 시구를 읊는 것도 좋다.

다만 조심해야 할 것은 술주정이다. 중국사람들은 웬만하면 술자리에서 실수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남이 한 실수도잘 잊지 않는다. 술자리에서 한번 실수를 하면 두고두고 흠집으로 남는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술을 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지나칠 정도로 술을 권하는 경우가 많은데, 자신의 주량을 감안해서 잘 조절해야 한다. 술이 과하다 싶으면 술잔을 비우지 말고 음식을 먹거나 음료를 마시면서 여유를 찾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처음 만나거나 특별한 모임인 경우 식사가 끝날 때쯤 간단한 선물을 증정하는 것도 좋다. 물론 초대한 사람 전원에게 주는 것이 좋지만 금전적 여유가 없다면 적어도 주빈에게만큼은 잊지 않도록 한다.

식사가 끝나면 주빈을 문 앞까지 배웅하거나 방에서 주빈이 먼저 나가도록 한 다음 계산을 끝내고 약간의 여유를 뒀다가 나가면 된다.

지금까지 중국요리의 지역별 특성을 살펴보면서 중국인들의 식사예절도 함께 알아보았다. 이 글을통해 독자들께서 중국요리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오묘한 맛의 세계를 음미할 수 있기를 바란다.

 

 

 

 

 

 

<출처;eroom.korea.com/bs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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