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당의 시에서 차(茶)를 소재로 또는 주제로 삼은 작품은 70여 수에 이른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우리나라에 차가 전래된 이래 승속을 통틀어 가장 많은 차시(茶詩)를 남겼다는 데에 더 큰 의미가 있다.
그는 단순히 차를 마시고 이에 대한 느낌만을 시화(詩化)시킨 것은 아니다.
직접 몸소 차를 재배하기도 하고 만들면서 그 자신 또한 차의 성품에 맞춰 살아가려고 노력한 점은
그의 삶에 차가 차지하는 비중이 컸음을 시사한다. 여기서 그의 차시를 살피는 것은 차를 음용(飮用)하는 차원에서 벗어나
선적으로 수용했다는 점에서 선시의 독특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불가에서 차를 수행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조주종심(趙州從¿Çㆍ778~897)의 ‘끽다거(喫茶去)’라는 공안이 대두된 것에서 비롯된다.
조주의 ‘차 한 잔’의 공안은 차 한 잔을 통해 서로가 분리되지 않는 연기실상(緣起實相)의 세계가
온전하게 그대로 드러나면서 모든 존재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고자 하는 선가의 수행법인 것이다.
이는 한 잔의 차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진실되게 지켜보는 직접적인 체험이기에 선가에서 자주 애용되는 공안이기도 하다.
조주가 새로 온 두 사람의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들은 전에 여기 와 본 적이 있는가?”
한 스님이 대답했다.
“와 본 적이 없습니다.”
“차 한 잔 드시게.”
또 한 스님에게 물었다.
“여기에 와 본 적이 있는가?”
“와 본 적이 있습니다.”
“차 한 잔 드시게.”
원주가 스님께 물었다.
“스님께서 와보지 않은 스님에게 차를 마시라고 하신 것은 그만두고라도
무엇 때문에 와 본 적이 있는 스님에게도 차를 마시고 가라고 하십니까?”
스님께서 “원주야!”하고 부르니 원주가 대답하자,
“차 한 잔 드시게.”
이 공안은 차 한 잔을 마실 때 ‘있는 그대로의 차맛’을 안다면 그 마음은 밖의 갖가지 대상이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여의기에 흔들리지 않는 빈마음의 평상심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조주스님께서 관음원(觀音院)에 처음 온 스님이나 한 번 와 본 적이 있는 스님에게 똑같이 ‘차 한 잔 드시게’라 한 것은
참선을 하기 위해 온 스님들에게 ‘무엇인가 얻고자 들고 온 마음’을 놓게 하려는 방편으로 설정한 것이다.
그리하여 차를 마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구하고자 하는 그대들의 마음 또한 욕심이니,
그 마음을 놓지 않고서는 선에 이를 수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 마음을 놓고 부처를 떠나 마음을 비우고 차를 마시듯이 선을 참구하라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조주스님은 ‘차 한 잔 드시게’라는 말 한 마디에 갖가지 망상을 제거하고
평상심을 유지하라는 것을 차에 비유하여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이를 지켜보는 원주는 오는 손님마다 똑같이 대접하는 조주스님의 행동에 의문을 품는다.
그 물음에 대해 조주스님의 답은 역시 ‘차 한 잔 드시게’로 끝을 맺는다.
이는 사사건건 분별하고 의미 붙이기를 좋아하는 마음작용에 대한 경책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한 각양각색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때 상(相)을 취하지 않는 조주스님의 평상심을 엿볼 수도 있다.
마치 달빛이 연못 속을 꿰뚫지만 물에 흔적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하겠다.
이처럼 선가에서 차는 선으로 가는 전제조건으로서 방편이며, 언어기호로서 공안인 것이다.
흔히 선과 차는 같은 것이라 하여 ‘선다일여(禪茶一如)’라는 말을 애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엄연히 선과 차는 동일한 대상으로 비교할 수는 없다.
선은 직관하여 깨닫는 것을 본질로 하듯이 차 한 잔을 통해 주관과 객관을 구별하지 않고
맛보는 주체와 맛이라는 대상의 경계가 사라지면서 모든 것이 인드라망의 그물처럼
상호의존의 관계에서 일체가 공함을 깨닫는 것을 말하기에 ‘선다일여’라 한 것이다.
여기서 ‘일여(一如)’를 바닷물로 비유할 수 있다.
바닷물은 어디서나 짠맛을 낸다. 마찬가지로 차수행을 하거나 선수행을 하게 되면,
마치 여러 줄기의 강물이 모두 바다에 이르러 하나의 짠맛이 되는 것처럼
차와 선은 서로 상즉상입(相卽相入)하여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선다일여’라 한 것이다.
여기에 매월당(梅月堂) 선시의 선미(禪味)를 느낄 수 있다.
坐久不能寐 오래도록 앉아 있어도 잠 못 이루어
手剪一寸燭 한 치 남은 촛불 심지 베어 내었네
霜楓??f我耳 서릿바람 소리 내 귀에 들려오더니
微霰落床額 싸락눈 침상머리에 떨어졌네
心地淨如水 마음이 물처럼 깨끗하니
然無¡ü隔 자유자재하여 막히고 걸림이 없네
正是忘物我 이것이 바로 사물과 나를 잊은 것이니
茗椀宜自酌 혼자서 잔에 차를 따라 마신다네.
- 「고풍(古風)」 16首
차 한 잔을 통한 마음의 평상심이 담담하게 표현된 시이다. 시 앞부분에서는 번뇌에 고민하는 시인의 심사가 담겨 있다.
깊은 밤에도 잠들지 못하는 시인은 어둠을 사르기 위해 촛불의 심지마저 베어버린다.
‘한기 머금은 바람이 귀를 어지럽히고 싸락눈이 침상머리에 떨어졌다’고 했으니
시인은 번뇌망상 탓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뒷부분에서 반전이 일어난다. 시인은 순간 ‘마음이 물처럼 깨끗하다’ 하여 망념(妄念)을 여읜 본각(本覺)을 드러내고 있다.
더 이상 걸림이 없는 자유자재한 모습에 물아(物我)가 일체된 경지를 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마지막에 ‘혼자 차를 잔에 따라 마신다’고 한 표현은 시인이
차 한 잔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이 아닌 깨달음을 차 한 잔에 담았다는 평상심을 말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곧 이 시는 차는 깨달음의 직접적인 계기는 아니며 깨달음의 방편으로서 차를 시에 가탁(假託)한 것이다.
불교에서 평상심은 일심(一心)의 다른 표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디에도 흔들리지 않고 본래 구족되어 있는 본성을 유지하고,
모든 차별상과 주객의 분별의식에서 벗어나 깨달음에 이르렀기에 이를 ‘일심’이라 한 것이다.
원효(元曉)는 일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일심이란 무엇인가. 더러움과 깨끗함의 모든 법은 그 성품이 둘이 아니고,
참됨과 거짓됨의 두 문은 다름이 없으므로 ‘일(一)’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이 둘이 아닌 곳에서 모든 법은 가장 진실되어 허공과 같지 않으며,
그 성품은 스스로 신령스레 알아차리므로 ‘마음’이라 이름한다.
이미 둘이 없는데 어떻게 일(一)이 될 수 있는가. 일(一)도 있는 바가 없는데 무엇을 심(心)이라 말하는가.
이러한 도리는 말을 여의고 생각을 끊은 것이니 무엇이라고 지목할지는 모르겠으나
억지로 이름 붙여 ‘일심(一心)’이라고 하는 것이다.”
일심(一心)은 글자 그대로 ‘한마음’을 말한다. 원효에게 일심은 ‘염(染)’과 ‘정(淨)’, ‘진(眞)’과 ‘속(俗)’ 등 대립적이고 분별적인 사유체계에서 여의어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다. 따라서 일심에 직관한다는 것을 견성이라 하여 불법의 궁극적 실체로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선과 차의 관계에서 일여(一如)라 함은 일심의 함의와 같은 것이다. 한 잔의 차를 마시는 과정을 통해 분별하는 마음을 여의고, 서로를 수용하기에 상입(相入)하며, 수용하여 주객의 구별이 여의기에 상즉(相卽)이라 할 수 있다. 곧 차 한 잔을 통해 상즉상입(相卽相入)의 연기실상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선다일여의 차 한 잔을 내는 과정에는 중도(中道)의 특성과 맞닿아 있다. 차를 지시적인 의미로 보면 선가에서 음용하는 기호품이다. 그러나 차라는 언어기호의 경계를 넘어서면 깨달음의 직관(直觀)이라는 선의 뜻을 함유한다. 직관은 연기적 존재임을 자각하는 것이며, 연기적 존재라는 것은 일체제법이 모두 연기에 의해 실현되고 따라서 공(空)하다는 중도의 세계를 말한다.
차 또한 마찬가지이다. 차에는 사문(四門)이 있는데, 첫째는 찻잎 따는 문이다. 찻잎을 딸 때에는 시기를 가려 이른 아침에 따야 하며, 따는 순간 현묘함을 느껴야만 차의 성품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둘째는 차 만드는 문이다. 갓 따온 찻잎으로 차를 만들 때에는 오로지 정성 일념(精誠一念)으로 해야만 제대로 된 차가 된다. 여기까지는 진다(眞茶), 곧 차의 완성 단계이다.
셋째는 물을 선택하는 문이다. 물은 차의 체(體)라 하여 근본에서 비롯된 것을 사용해야만 진다(眞茶)를 보일 수 있다. 넷째는 불의 세기를 조절하는 문이다. 불은 문무화후(文武火候)를 조절하여 중화(中和)를 이뤄야만 한다. 여기까지는 진수(眞水), 곧 물의 완성 단계이다.
이 사문(四門)은 초의선사(艸衣禪師)가 중국의 ㆍG만보전서(萬寶全書)ㆍH를 참조하여 엮은 ㆍG다신전(茶神傳)ㆍH의 내용을 도표로 작성한 것이다. 초의선사는 이를 제대로 관장하기 위해서는 중정(中正)을 갖춰야 한다고 한다.
중정은 중도와 같은 뜻으로, 곧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평형상태가 깨지기 때문에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알맞은 상태를 유지해야만 차의 성품이 온전히 드러난다고 보았으며, 이는 선수행에서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고 보아 선다일여라 한 것이다.
閑中經數卷 한가하면 경전 두어 권 읽고
渴來茶七椀 목마르면 일곱 사발의 차를 마시네.
위 시에서 그는 칠완차(七椀茶)를 마신다고 했다. ‘칠완(七椀)’이라고 한 것은
중국 당(唐)대의 시인인 노동(盧仝ㆍ775~835)의 ‘주필사맹간의기신차(走筆謝孟諫議寄新茶)’에서 따온 것으로
차를 마실 때 느껴지는 일곱 가지 변화를 말해주고 있다.
첫째 잔은 입술과 목을 적셔주고, 둘째 잔은 고민을 씻어주고, 셋째 잔은 무뎌진 붓끝이 풀리고, 넷째 잔은 가벼운 땀이 솟아 평생의 불만이 사라지고, 다섯째 잔은 살과 뼈를 맑게 하고, 여섯째 잔은 신선의 영과 통하게 하고, 일곱째 잔은 마시지도 않았는데 두 겨드랑이에서 바람이 일어난다고 하여 차 한 잔의 정신적 가치를 일상생활에서 구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竹引寒泉 대 쪼개어 찬 샘물 끌어다 놓고
琅琅終夜鳴 졸졸 밤새도록 울린다네
細聲和夢咽 잔잔한 소리 꿈과 섞여 목 메이고
淸韻入茶烹 맑은 운치 차 끓이는데 들어간다네.
- 「죽견(竹#ㆍt)」
이 시는 전체적으로 생동하는 느낌을 준다. 대나무를 쪼개 그 사이로 흘러가는 샘물소리로 시작하여 차 끓이는 소리로 끝맺고 있어 마치 누군가가 옆에서 차를 내주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
이렇듯 그는 차 한 잔 하는데 거추장스러운 격식을 차리지 않고, 자연과 함께 즐겨 마시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대나무 가운데를 갈라 물을 길어오니 그 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싫증이 나지 않는 표정이다. 물이 가물어서 그런지 이번에는 아주 잔잔하게 흘러가는 소리가 마치 꿈 속에서 잠꼬대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는 그 소리마저 차 끓이는 소리에 동화시키고 있는데, 이는 차를 통해 삼매경에 빠진 자신을 물아일체의 경지에서 선적 수행으로 나타내고 있음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두 귀에 아무런 들림 없이 홀로 앉아 있을 때 兩耳聊聊獨坐時
반쯤 걷은 발에 비낀 해는 꽃가지를 비치네 半簾斜日映花枝
요사이 점점 구속 없음을 깨달으니 年來漸覺無拘束
뱃속에 가득 품은 마음 그것이 시라네. 幽懷卽是詩
- 「독좌봉인다부시(獨坐逢人茶賦詩)」
홀로 앉아 있다가 사람을 만나 차 한 잔 하며 지은 시이다. ‘두 귀에 아무런 들림이 없다’는 것은 세상의 시비에 구속됨이 없다는 뜻이다. 반쯤 걷어 올린 발 너머로 바라보는 해는 뉘엿해졌고, 길게 늘인 그림자가 꽃가지를 비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3구(句)에서 시인의 자유로움은 자신이 스스로를 아는 정념(正念)의 상태를 보이고 있다. 정념은 물아망형(物我忘形)이라 할 수 있는데, 시비를 떠나고 물아의 사이를 없앨 수 있다면 서로 잊는 상망(相忘)의 경지를 말한다.
정념이 되고 있는 상태에서는 상대를 주관적 시각으로 고정시키거나 자신을 내세우는 등의 번뇌는 일체 용납이 되지 않고 깨어있는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4구에서 시인은 정념의 상태에서 선적으로 충만한 정신을 시로써 표현하여, 차 한 잔으로 시인과 상즉상입(相卽相入)하는 선다일여의 경지를 보이고 있다고 하겠다.
年年茶樹長新枝 해마다 차나무에 새 가지 자라는데
蔭養編籬謹護持 그늘에 키우느라 울을 엮어 보호한다
陸羽經中論色味 육우의 다경에는 빛깔과 맛 논했는데
官家£F處取槍旗 관가에서는 어린 찻잎만을 바치라고 하네
春風未展芽先抽 봄바람 불기 전에 싹이 먼저 피고
穀雨初回葉半披 곡우절 돌아오면 잎이 반쯤 피어나네
好向小園閑暖地 조용하고 따뜻한 작은 동산을 좋아하니
不妨因雨着瓊«ã 비에 옥 같은 꽃 드리워도 무방하리라.
「양다(養茶)」
매월당은 차를 마시기도 하면서 직접 재배까지 하였다. 그는 차의 성품을 진정으로 이해했던 차인이었다.
그는 경주 금오산(金鰲山)이 차를 재배하기에는 알맞지 않음을 알고 추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차밭 둘레에 울을 엮어 세운다. 차나무는 반음반양성(半陰半陽性) 식물이라 그늘에서 잘 자라는 특성을 가진다. 반음반양(半陰半陽)은 곧 매월당의 처지와 닮은꼴이다.
이 시의 제목이 「양다(養茶)」임을 고려해 볼 때, 기른다는 의미는 자신을 두고 한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뿌리가 땅 속으로 곧게 내리듯 그의 심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는 차가 자연의 일부로서 항상성을 지향한다면, 차를 재배하고 만들고 마시는 자신은 유연성을 지향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의 시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질서와 조화를 적극 추구하려고 했던 것이다. 차 만드는 수고로움을 모르고 오로지 세금만 걷으려고만 하는 관리 때문에 백성들의 고충만 늘어가는 현실에서도 그는 침묵으로 저항한다.
때는 차의 새순이 처음으로 올라오는 곡우 무렵이다. 매월당은 햇차를 만들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다. ‘비에 옥 같은 꽃’은 아침이슬을 비유한 것으로, 아침 이슬을 맞은 찻잎이 가장 좋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매월당은 중국 당대 육우(陸羽ㆍ727?~803?)의 ㆍG다경(茶經)ㆍH처럼 차에 대한 문헌을 남기지 않았다. 그는 본래 성현의 도를, 유학적 이상을 현실에서 실천하기 위해 차를 시화한 것이다.
비록 그가 젊은 시절 꿈꾸었던 이상은 현실과의 불화로 인한 방외인적(方外人的) 삶의 처지에 놓여 좌절되고 말았지만, 차가 지니는 성품을 시 속에 투영시킴으로써 그의 문학은 한층 성숙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하겠다.
곧 그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적당히 타협하기보다는 이보다 더 나은 최선의 상태를 이뤄내려고 하는 적극적인 움직임을 차를 통해 드러내려고 했던 것이다. 이는 그의 선시에서 선다일여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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