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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선시대의 다도정신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9. 15. 00:04


조선조 후기에 중요한 茶人으로서 茶山 丁若鏞선생님을 빼놓을 수 없다고 하겠다.

다산선생님은 <목민심서>를 비롯한 500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서를 남기신

민족의 큰 스승이시다. 강진의 초암에서 18년간의 긴긴 유배생활을 하시면서

한점 흐트러짐이 없이 참으로 선비답게 의연하고 꿋꿋하게 사신 큰 인물이셨다.

그 분의 외롭고 힘든 유배생활에서 귀한 벗이 되어 주었던 것은 茶였고,

또한 茶山선생님은 차나무를 무척 사랑하시어 스스로 호를 다산(茶山)이라 지어셨다.

신유사옥으로 경상도 장기로 귀양 갔던 그는 황사영의 백서사건으로

심한 고문 끝에 사형에 처해질 위급한 상황에서 황일환의 도움으로 죽음에서 구해져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1805년 정순대비의 승하로 다산의 활동에 약간의 변화가 있어

늘 만나고 싶다고 전갈을 보낸 백련사(白蓮社)의 혜장(惠藏)을 만나러 갔다.

한나절을 보낸 그가 자신이 누구인지 알리지 않고 있었다.

다산선생이 돌아간 뒤 이 사실을 알게 된 혜장이 뒤쫓아 와서 그 밤을 지새우며

학문을 논하게 되었고 이후 혜장이 40세로 세상을 뜨기까지 6년동안 교유하였다.

혜장은 다산선생이 그렇게 좋아하는 차를 함께 마시고 정성껏 만든 차를

때에 따라 보내 주었다. 어느 해 겨울 <걸명소(乞茗疏)>를 지어

아암 혜장(惠藏)에게 보내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 을축(1805) 겨울 아암선사에게 보냄 -

나그네는 요즘 차만 탐식하는 사람이 되었으며 겸하여 약으로 마십니다.

글중의 묘함은 육우의 <다경삼편(茶經三篇)>이요, 병든 몸은 누에인양

노동(盧仝)의 칠완(七椀)차를 들이키오. 비록 정력은 쇠퇴했으나

기모경의 말은 잊지 않았고 막힘을 풀고 흉터를 없애기 위해 이찬황의

차 마시는 버릇을 얻었소. 아침 햇살에 찻빛의 일어남은 맑은 하늘에 흰 구름이 일어남 같고,

 

낮잠에서 일어나 달이는 차는 밝은 달이 푸른 시내에 잔잔히 부서지는 듯하오.

차를 갈 때 일어나는 가루는 잔 구슬인지 백설인지 등잔불 아래서는 가리기 아득한데

자줏빛 어린 차순의 향기만 그윽하오. 활황와 신천은 산신께 바치는

백포의 맛과 같소. 꽃자기 홍옥의 차완은 노공에게 양보하고

돌솥의 푸른 연기의 담소함은 한비에게 가까웁네.

물 끓는 모습 게눈. 고기눈에 비기던 옛선비의 취미만을 부질없이 즐기고 용단.

봉단은 이미 바닥이 났소. 이에 채신의 병이 있어 애오라지 걸명(乞茗)의 정을 비는 바이오.

 

듣건데 고해를 건너는 가장 큰 시주는 명산의 고액을 뭉친 차를 몰래 보내 주시는 일이라 하오.

 

목마르게 바라는 뜻을 고려하사 베푸는 것을 잊지 마소서.

위의 걸명소에는 차를 좋아하는 다산선생의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다고 하겠다.

평소 차를 즐겨 마시고 또한 차에 관한 공부를 많이 하셔서

육우의 다경과 노동의 칠완, 그리고 차 끓이는 방법, 차의 빛깔과 향기, 물 끓는 모습,

차를 가는 방법 등 차일에 관해서 소상히 알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좋은 다완, 용단. 봉단 같은 고급 차도 알고 계시는 등

차에 관해서 다방면으로 해박한 지식을 갖고 계셨다.

천병식의 『韓國茶詩作家論』에서는 다산 자신도 차를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주민들에게도 제다 방법을 가르쳤다고 논의하고 있다.

다산선생이 강진을 떠날 때 그에게 글을 배운 많은 제자들이 중심이 된

「茶信契」를 만들도록 하여 그의 제자 24인이 다산이 떠난 뒤에도 차를 만들어 마시며

신의를 지키도록 다음과 같은 절목을 만들었다.

즉, 계원 명단, 자산 내용과 관리인, 봄가을의 시사와 경비, 동암의 이엉잇기,

차 따는 부역, 차를 만들어 유산에게 보내는 일 등이다.


다산선생은 다산초당(茶山草堂)을 짓고 정원에 큰 돌을 옮겨다 놓고

물을 끌어 들어 폭포를 만들고 그 바위에다 '정석(丁石)'이라 글씨를 쓰고 이를 새겨 두었다.

 

처소를 귤동으로 옮긴 다산선생은 마을사람으로부터

차 한 봉지를 얻고서 그 기쁨을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아곡의 햇차가 처음으로 피어날 제

마을 사람으로부터 차 한포를 얻었네

체천의 물이 얼마나 맑은지

한가로이 은병에 넣어 그 맛을 시험해 보리

낯선 강진에서 18년간의 유배생활 중에서도 많은 제자를 길렀으며

많은 저서를 남기기도 한 다산을 떠 받쳐 준 힘은 차에서 나왔다고 하겠다.

선생은 가난하고 불쌍한 백성을 사랑하였으니 그의 많은 시편들에는

愛民의 정신이 잘 표현되어 있다.

김명배는 조선의 다정신을 自得의 정신, 비우사상, 茶禪三昧 등으로 보고 있다.

아래의 茶山선생의 茶詩는 이런 自得의 정신을 담고 있다고 하겠다.

산골물 차가운 소리 천 떨기 대나무에 이르고

봄의 정취는 뜨락의 한 그루 매화에 있네

지극한 즐거움 이 속에 있어도 달랠곳 없어

맑게 갠 밤에 여러번 일어나 어정거리네

위 시에는 언제 귀양에서 풀려날는지 기약도 없는 극한상황을

逍遙와 自得의 드높은 정신력으로 극복한 다산선생의 정신이 나타나 있다.

여기서 정신적인 소요란 현실을 觀照하고 긍정하는 達觀의 경지이고,

自得이란 주어진 여건을 선택된 것으로 여기고 긍정하고 수용하는 능력을 말한다.

정영선은 『다도철학』에서 이러한 자득의 정신을 안분지족(安分知足)하는

정신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는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자기 분수를 지키며

만족할 줄 아는 정신을 말하는 것이다.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차를 끓여 마시며 근심을 덜고 빈천을 분수로 여기는 마음가짐이다.

특히 조선시대의 선비 다인들은 차와 더불어 검박하게 살므로써 자연과 쉽게 동화되어

인간이 자연임을 체득하는 정신적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즐겁기만 한데 무엇을 근심하리오

가난과 천함이 분수에 맞도다.

위 시는 중인 계급의 학자이며 시인인 장혼이 그의 이웃의 작은 오두막집에서의

「옥경산방다회」에 참석하여 읊은 것이다. 이처럼 선비들은 스스로 가난함과 천함을 자신의 분수로 알고

 

만족하며 살았던 것이다.

장혼은 <청렴한 선비의 갖춰야 할 물건 80개>를 들었는데, 그중에는 중요한 책이름,

기를 나무 등을 포함하여 「이름난 차」「차솥」「바구니 다함」등이 있었다.

또 <선비가할 일 34가지>에는 글쓰기와 거울보기, 정원을 가꾸는 여러 일들과 더불어,

「차 달이기」「샘물 긷기」를 들어 선비의 검소한 생활에도 다사가

큰 비중을 차지했는가를 알 수 있다. 김시습의 다음 시는 차가 어떠한 부나 명리보다

높은 가치를 지녔음을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솥 속의 감미로운 차가 황금을 천하게 하고

소나무 아래 띠집이 벼슬아치 붉은 관복의 술띠를 가치없게 하네

옛날 서울의 신설동과 보문동 사이에 있었던 숭신방의 동대문외계에는 우산각리가 있었다.

 

 이 우산각의 주인공은 태조대왕부터 세종대왕까지 4대 임금을 정승으로 섬긴

유관(柳寬)인데, 우산각이란 장마철에 지붕에서 빗물이 새어 방안에서

우산을 받고 살았다는 일화가 있는 집을 말하는 것이다.

우산각에서 그의 외종손인 판서 이희검(李希儉)이 청빈의 전통을 이어 받고 살았다.

그의 청빈한 생활신조란

「옷은 몸을 가리기만 하면 족하고 밥은 창자를 채우기만 하면 족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청빈의 집인 우산각이 임진왜란 때 불이 타서 주춧돌만 남게 되었는데

이희검의 아들로서 실학의 선구자인 판서 이수광(李?光)이 조촐하게 재건하였는데

근근히 비를 가린다는 뜻으로 비우당(?雨堂)이라는 집이름을 붙였다.

이수광은 비우당에서 「차마시기」(飮茶)의 육언시(六言詩)를 읊기도 하고

채다론(採茶論)을 논술하고, 사헌부의 찻때를 적어 남기기도 하였다.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은 불의 상태에

거문고도 피리도 아닌 솔바람소리

노동이 잃은 주발의 마시기를 마치니

표연한 신상은 매우 편안하여라.

효종대왕의 장인인 부원군(府院君) 장유(張維)가 적은 이수광의 묘지명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향을 사르지 않고, 초를 밝히지 않으며, 성악(聲樂)을 듣지 않고, 무색옷을 입지 않으며,

 

가재에 칠이나 조각을 하지 않고, 베옷으로 소식(素食)하는 생활」이라는 철학이 적혀 있다.

결국 조선왕조의 청빈한 관리에 대한 정신적 메카가 된 것이 비우당이라 하겠다.

이러한 비우사상에 의하여 많은 선비 다인들이 검소한 생활을 하였고,

특히 淸白吏들이 차를 몹시 즐긴 경우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청백리는 일반적으로 청렴한 관리를 말하나, 옛날에는 의정부 등의 2품이상

당상관과 사헌부와 사간원의 높은 관리들이 추천하여 선정하기도 하였다.

높은 직책을 맡은 그들은 부를 탐하지 않고 의연한 모습으로 차를 끓여 마시는

생활속에서 허욕을 버리고 즐거운 마음을 지녔다.

시와 글씨는 부질없이 집에

가비와 바람은 이미 지붕을 뚫었고

득하네

-- (중 략) --

조용히 가는 글씨를 쓰고

한가롭게 게눈차를 끓인다네


위 시는 우리나라 다인들 중에서 다사의 달인이었던 서거정(徐居正)의 다시이다.

여기에는 지붕이 뚫린 초가집에서 살며 한가로이 글씨를 쓰며 차를 끓여 마신

청빈한 서거정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서거정은 궁핍함을 불편하게 여기지 않고

조용하게 책을 읽고 차를 달이는 유유자적한 달관된 태도를 취한다.

이러한 정신이 과거 선비들의 맑은 청백리 정신이라 하겠다.

다음으로 다선삼매의 다도정신에 대해 살펴 보면 다성이라 일컬어지는

초의선사의 다시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초의선사가 읊은 것 중에서 「산천도인이 차를 사례함을 받들어 화답하여 짓다.」라 하는

다게(茶偈)에서 선사의 다경을 찾아볼 수 있겠다.

옛부터 성현들은 모두 차를 즐겼나니

차는 군자처럼 성미에 사악함이 없기 때문이라네...

알가의 참된 근본은 묘한 근원을 다하고

묘한 근원에 집착함이 없으면 바라밀이라네



 

 

 

 

<출처;yahoo akwaltz03 (akwaltz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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