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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중요무형문화재 제21호 승전무-1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9. 21. 09:04

승전무
 
 
종    목 중요무형문화재  제21호
명     칭 승전무(勝戰舞)
분     류 무형유산 / 전통연행/ 무용/ 민속무용
수량/면적
지 정 일 1968.12.21
소 재 지 경남 경남전역 
시     대
소 유 자
관 리 자 승전무보존회
설     명 승전무는 경남 통영(충무)에서 전승되어 온 북춤으로, 궁중에서는 ‘무고(북춤)’라 하여 기녀와 춤을 추는 사내아이들에 의해 전승되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이충무공이 장수와 병졸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추게 하였으며, 전쟁에 이긴 후에는 축하의 의미로 추게 하였다. 본래 통영지방의 잔치에서 행하던 무고, 검무(칼춤) 등의 모든 춤이 군대가 있던 곳에서 추던 것이라는 뜻으로 승전무라 하였는데, 이 가운데 1968년에 ‘무고’만이 승전무라는 이름으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1987년에 검무를 추가하였다.

승전무는 활옷을 입고 양손에는 한삼을 낀 4명의 무희들이 중앙에 북을 놓고 동서남북으로 나뉘어 북을 울리며 창(唱)을 하고 춤을 춘다. 흩어졌다 모여드는 형태는 삼진삼퇴를 뜻하며 전체가 화려하고 웅장하면서 경쾌한 것이 특징이다. ‘영산회상’가운데 삼현도드리와 타령을 반주음악으로 쓰며, 춤가락은 순박하면서 예스럽고 독특한 향토적 특색을 갖고 있다. 검무의 의상은 홍치마에 흰저고리, 흑쾌자, 전립, 홍띠, 색동한삼 등을 갖추며 무구로 1쌍의 칼을 든다.

승전무는 의상이나 사용되는 도구, 춤의 내용 등이 궁중무고와 흡사한 춤으로, 우아한 춤사위와 가락 그리고 치밀한 짜임새는 예술적 가치가 높고 전통성을 담고 있는 우수한 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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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설명

승전무는 경남 통영(충무)에서 전승되어 온 북춤으로, 궁중에서는 ‘무고(북춤)’라 하여 기녀와 춤을 추는 사내아이들에 의해 전승되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이충무공이 장수와 병졸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추게 하였으며, 전쟁에 이긴 후에는 축하의 의미로 추게 하였다. 본래 통영지방의 잔치에서 행하던 무고, 검무(칼춤) 등의 모든 춤이 군대가 있던 곳에서 추던 것이라는 뜻으로 승전무라 하였는데, 이 가운데 1968년에 ‘무고’만이 승전무라는 이름으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1987년에 검무를 추가하였다.

승전무는 활옷을 입고 양손에는 한삼을 낀 4명의 무희들이 중앙에 북을 놓고 동서남북으로 나뉘어 북을 울리며 창(唱)을 하고 춤을 춘다. 흩어졌다 모여드는 형태는 삼진삼퇴를 뜻하며 전체가 화려하고 웅장하면서 경쾌한 것이 특징이다. ‘영산회상’가운데 삼현도드리와 타령을 반주음악으로 쓰며, 춤가락은 순박하면서 예스럽고 독특한 향토적 특색을 갖고 있다. 검무의 의상은 홍치마에 흰저고리, 흑쾌자, 전립, 홍띠, 색동한삼 등을 갖추며 무구로 1쌍의 칼을 든다.

승전무는 의상이나 사용되는 도구, 춤의 내용 등이 궁중무고와 흡사한 춤으로, 우아한 춤사위와 가락 그리고 치밀한 짜임새는 예술적 가치가 높고 전통성을 담고 있는 우수한 춤이다.

※ 보충설명

승전무는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이 있었던 경상남도 충무지방에 전승되고 있는 무고(舞鼓)를 말한다.

무고는 북을 뉘어 놓고 무원(舞員) 넷이 가끔 두드리며 추는 춤이며 속칭 북춤이라 이른다. 무고는 『고려사 高麗史 』「악지(樂志)」에 그 기록이 보이기도 하는데, 고려 때 중요한 궁중 정재(宮中呈才)의 하나였다. 고려 때 북춤은 두 사람이 추었고 정읍사(井邑詞)를 불렀다. 조선 때에는 북춤에 네 사람이 추거나 여덟 사람이 추기도 하였다. 초기에는 역시 정읍사를 부르고 정읍을 연주하였으나 조선 말기의 『진찬의궤(進饌儀軌)』 등에 전하는 무고는 정읍사를 부르지 않고 창사(唱詞)를 부르며 음악도 영산회상(靈山會相)을 연주하였다.

무고는 지방관아의 연향에서도 추었는데 그 모습이 김홍도의 평양감사좌기도(平壤監司坐起圖, 국립중앙박물관소장)에도 남아 있다. 지방관아의 무고는 통영과 진주의 관아에서 추던 것이 전승되고 있는데 통영지방에 전승되는 것은 삼도수군통제영의 연향에서 연행되던 것이다. 본래 통제영의 연향에서 연행하던 무고·검무 등 모든 춤을 군영(軍營)에서 추던 것이라는 뜻으로 승전무(勝戰舞)라고 하였는데, 이 가운데 무고만이 승전무라는 이름으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조선 말기 통제영 교방청(敎坊廳) 무원으로 김해근(金海根), 이국화(李菊花)가 있었는데, 이들에게 배운 사람들에 의해 전승되고 있다. 승전무는 통영 관아의 연향과 충무공(忠武公)의 춘추제향(春秋祭享)과 탄신일에 제승당(制勝堂) 의례에서 연행되었으며, 영문(營門)이 폐지된 일제 때에도 제승당 의례에서 연행되었고 지금도 제승당 의례에서 무고의 연행은 계속되고 있다.

승전무는 원무 4명과 협무(挾舞) 여러 명으로 편성된다. 무원은 활옷을 입고 화관을 쓰고 양손에는 한삼을 끼고 북채를 든다. 원무는 활옷을 입되 사방색(四方色)에 따라 청(靑), 홍(紅), 흑(黑), 백(白)의 한삼(汗衫)을 입는다. 큰 북을 틀에 걸어 가운데에 놓고 원무 4명이 일렬로 서서 느린 6박자 긴 염불에 맞추어 들어와서 한삼을 뿌리며 춤을 추다가 오른손으로 일제히 북을 치고 또 왼손으로 친다. 이렇게 북을 치며 사면(四面)으로 돌다가 일제히 멈추어 선 다음 창사라는 노래를 부른다. 자유리듬으로 느리게 달아 높이 고이 돋을사 하고 창사(唱詞)를 4절까지 부르고 나서 타령장단에 씩씩하게 북을 치고 춤을 추며 '지화 지화 지화자'를 부른다. 끝에는 흥겨운 굿거리 장단에 일렬로 벌려서서 물러나와 춤을 추다가 마친다.

승전무는 춤가락이 순박하면서 예스럽고 아취(雅趣) 있는 모습을 갖고 있으며 동시에 독특한 향토적 특색을 갖고 있다.




관련 자료 

http://blog.daum.net/hyowon2/13125955
 
중요무형문화재 제21호 ‘승전무’ 엄옥자 부산대 교수
 
 
[춤과 그들]엄옥자 “춤 없이는 숨쉴 수 없었죠”
2007년 07월 19일 09:41:24 경향신문
26세에 인간문화재가 됐다. 우리나라 문화재 지정 사상 드문 일. 최연소 문화재 3명중 한 사람이었다. “통영의 춤을 발굴하고 전승해야 한다”는 청마 유치환의 독려로 내디딘 운명. 춤값은 그만큼 절실했고 그만큼 귀했다. 자신의 꿈공장에서 춤을 만들어온 원향(遠香) 엄옥자(65·부산대 교수). 40년 동안 중요무형문화재 제21호 ‘승전무’를 지켜오면서 참 많은 고갯길을 넘었다.

# 9살짜리 안무가, 26살 인간문화재 되다

원향 살풀이춤.
엄옥자는 엄수영(1989년 72세로 작고)과 김춘금(1950년 30대 초반 작고)의 1남2녀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새어머니 이옥련(작고)도 딸 셋을 낳아 모두 1남5녀.

부친은 경남 통영시내 금싸라기 땅인 황남동 2번지에서 한의원을 했고 작은아버지 엄지영도 서울대 약대 졸업 후 통영에서 약국을 경영했다. 엄옥자의 남동생 엄주태도 약대 졸업 후 약국을 차렸다. 부친은 통영시 무형문화재 보존회 이사장을 역임했고, 전국체전에 궁도 선수로 출전해 상도 받았다. 북·장구를 치고 피리를 불고 소리와 춤도 수준급인 풍류객이었다. 모친도 퇴기 이국희에게 춤을 배웠다. 핏줄이 무섭다. 네다섯살의 옥자는 기방에서 예쁜 한복입고 나풀나풀 춤추는 기생들에 반해 자신도 꼭 저렇게 되겠다고 다짐한다. 어린애가 웬 기방? 부자 아버지는 기방에서 손님 접대를 했고, 모친은 옥자에게 동호동 기방에 가서 아버지 모셔오라는 심부름을 시키곤 했다.

“때때옷 입은 기생들이 나비같더군요. 여섯살 때 설빔으로 유똥치마와 호박장식 저고리를 입었는데 내친 김에 장구도 사달라고 어머님께 졸랐죠. 결국 아버지 몰래 장구를 사주셨는데, 어린 마음에도 들킬까봐 이불을 뒤집어쓰고 장구를 두들겼습니다.”

정식 춤은 통영 문화유치원생인 일곱살 때부터. 모친이 퇴기 이국희에게 통영굿거리춤과 칼춤을 배우게 했다. “해치(‘소풍’의 사투리) 가서 주눅들어 앉아있는 제가 안쓰러웠나봐요. 놀이판에서 몸이라도 흔들라면서 소개한 이가 이국희 할머니죠.” 국희할머니는 150㎝ 남짓의 키였지만 성냥개비를 그슬려 눈썹을 검게 그리는 멋쟁이였다. 그는 엄옥자네 대청마루와 큰방 등에서 모녀를 가르쳤다.

여덟살. 임춘앵 김진진국극단이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공연홍보차 거리에서 불던 호적소리는 엄옥자의 작은 가슴을, 어린 운명을 콩닥콩닥 설레게 만들었다.

충렬초등학교 2학년부터는 동네아이들을 모아놓고 부친 몰래 한약방 2층에서 춤을 가르쳤다. “동네 평상들을 모아 키를 맞춘 후 무대를 만들고, 아이들이 가져온 엄마 옷들을 걸친 채 ‘아리랑’ ‘도라지춤’ ‘마리아’ 등을 추었습니다. 어린 애가 무얼 안다고, 하하하….”

중학교 때는 주평의 지도로 기본 굿거리인 ‘세 색시’춤을 배워 발표했다. 본격적인 춤 공부의 시작이었다. 고교 때는 교가에 맞춘 ‘우물가에서’를 학교 행사에서 추었다. 소풍날과 마을 행사 때면 ‘소녀의 기도’ ‘노들강변’ ‘우정’ ‘무당춤’ 등 수많은 작품을 구상해 공연했다.

집에선 ‘기생될 거냐. 시집 못간다’고 춤을 말렸다. 통영 오광대 따라 춤추면 ‘무당새끼처럼 펄쩍거린다’고 매도 맞았다. 그런데 춤 없이는 숨쉴 수 없었다. 훗날 엄옥자 부친의 고백. “딸에게 미안하다. 약대 진학을 종용하고 춤을 전공하지 말라고 막았다. 미안하다. 당시 예술로 돈벌기는커녕 빌어먹는다는 분위기였지 않은가!”

# 숙대 약대 합격증을 찢어버리다

집안에선 가업을 잇기 위해 약대 진학을 원했다. 당시 한 반에서 10등 이내면 학교 추천으로 명문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엄옥자는 숙대 약대에 합격했다. 운명의 순간. 부모가 약대 합격증을 전달받았다면 엄옥자는 약사가 됐을 터. 그러나 엄옥자는 합격증을 직접 받자마자 찢어버렸다. 소원하던 경희대 체육과 합격증도 그가 받았다. “아버지께 경희대 합격증만 드렸더니 체대 입학을 허락하시더군요. … 너무 허약하게 무너지셨습니다.”

경희대 체육학과 무용 전공생. 도쿄대 체대 출신 교수는 ‘해님이 반짝’ ‘바람 솔솔’ 등 기초적인 동작을 가르쳤다. 이미 기생에게 진한 춤을 배운 엄옥자로선 싱겁기만 했다. 해결책. ‘김백봉’이었다. 데모(?) 끝에 김백봉을 ‘모셔왔다’. 그때의 인연으로 엄옥자는 김백봉 춤보존회를 조직했고 회장으로 활동했다. “김백봉선생님의 춤처럼 격조 있고 품위 있는 춤을 추고 싶었습니다. 우리 삶의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담긴 김백봉 선생의 춤은 도도하면서도 멋지거든요!”

대학생 때 8개월 동안 광안리해수욕장에서 움막 지어놓고 춤 가르치는 이동안에게도 배웠다. “발탈, 줄타기, 진쇠품, 신칼대신무 등 좋은 춤을 깊이 있게 못배워 후회 막급입니다. 그저 재미있을 뿐, 온 몸을 적셔가며 배워야겠다는 절실함을 몰랐어요. 어느날 이선생을 찾아가니, 움막집이 없어졌더군요. 문일지 선생이 서울로 모셔간 걸 나중에 알았어요.”

20대 후반 부산 한성여자 초급대학(현 경성대) 강사 시절에는 부산 범일동 지하실에서 이매방의 승무 살풀이를 배웠다. 한영숙, 김숙자, 강선영도 사사했다.

# 통영춤을 발굴해야 하는 운명

1967년 라파엘무용학원에서 정순남(오른쪽)에게 ‘승전무’ 중 칼춤을 배우는 24살의 엄옥자.
23살. 교생실습했던 경남여고 교사로 남고 싶었다. 그러나 이번엔 청마 유치환이 엄옥자의 운명을 흔들었다. 당시 경남여고 교장이던 유치환은 엄옥자에게 ‘고향 통영의 까마귀’가 왔다고 반가워하며 통영행을 권했다. 할 일이 있다고 했다. 1965년 통영여고 교사로 활동하며 라파엘 무용학원도 개원했다.

“통영 문화동 경남은행 거물을 임대해 무용학원을 열었습니다. 제가 화가 라파엘을 좋아해서 학원 이름으로 정했고요. 우리, 예술가 집안이에요! 언니는 미술을 좋아하고 저는 춤추고, 남동생은 글을 잘 쓰죠. 여동생은 피아노 치고, 그 밑에 여동생은 도예가, 막내 여동생은 숙대에서 플루트 전공했고요. 우리 아버지, 등골이 얼마나 빠졌겠어요. 아무리 부자여도!”

열정에 가득찬 통영여고 교사 시절은 엄옥자 삶의 황금기였다. 특활시간에 승전무를 가르치며 ‘지화자’를 열창해 각 학교에서 ‘지화자’ 선생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 무용실이 따로 없어 책상을 뒤로 미루고 교실 창틀을 연습바(Bar)로 삼아 춤추곤 했다. 그때 영남지역 문단을 이끈 이민기 교감은 엄옥자의 ‘승전무’를 가능케 한 키워드로 작용한다. 이교감은 “이순신 장군 기념행사의 군대 행렬 때 검무의상에 머리에 전립을 쓴 8선녀 행색의 기녀가 따라가는데, 그 기녀들이 추었던 춤을 찾아 연구하라”고 했다.

엄옥자는 ‘기생춤을 발굴하라니 시집도 못 가게 하려나!’싶어 그냥 흘려들었다. 그러나 이교감은 당시의 예기를 수소문했고, 결국 유명한 한량이며 예기 정순남의 연인 김태현을 찾아낸다. 통영 서호동 마돈나 다방에서의 만남. 그 시간은 엄옥자에게 정순남을 통한 승전무 발굴의 업적을 이루게 한 운명의 시간이었다. 며칠 뒤 김씨는 연인 정순남을 데려왔지만 기생이었던 자신의 신분을 밝히기 싫어 춤추지 않았다. 결국 ‘흉잡힐 일이 아니고, 역사적인 춤을 발굴해야 한다’는 설득 끝에 정순남의 마음이 흔들렸다. 통영의 마지막 예기조합장이던 장구재비 춘당 이갑조를 비롯해 피리의 박경규, 젓대의 주봉진, 해금의 박의성, 북의 노상옥 등 통영에 흩어진 3현6각 악사들을 소집했다.

결국 1966년 통영 서호동 엄옥자의 숙부집 거실에서 ‘싱전무’(‘승전무’의 통영 사투리)는 재현됐고, 그 맥은 고 김해근-고 이국희-고 정순남-엄옥자의 계보로 이어지고 있다.

68년 통영북춤이 승전무로 정착되어 중요무형문화재 제 21호로 지정될 때 정순남, 이갑조, 주봉진, 엄옥자 등 4명이 기능보유자로 지정됐지만 71년 연소자를 중요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에서 제외하는 제도가 생겨 엄옥자는 자격이 해제됐다. 기가 막힐 노릇!. 그러나 87년 북춤과 칼춤이 합설되며 준보유자로 인정되고, 96년 한정자와 함께 예능보유자로 재인정됐다.

# 뱃속의 딸이 선물한 인간문화재

인간문화재가 되기 전에 결혼도 했었다. 26살. 통영 황남동 2번지에 살 때 약국집 작은어머니 소개로 이웃에 사는 남편을 소개받았다. 선박업을 하던 남편은 미남이었다. 소개한 작은 어머니조차 ‘잘 생긴 인물값 하느라 바람 피울 것’이라며 결혼을 반대했었다. 그때 말을 들었어야 했다. 결혼생활은 오래 가지 않았고 고모부 소개로 지금의 남편이자 당시 부산 개성여중학교 교감인 변학수(79)를 만났다. 부부는 지금 원향의 무혼을 이어받은 딸 변지연씨(39)를 비롯, 3남매를 두었다. 남편은 은은한 향을 멀리까지 전하라고 ‘원향’이라는 아내의 호도 지어주었다.

그가 정순남과 함께 인간문화재가 되던 해(1968년), 딸이 태어났다. 임신한 채 ‘승전무’를 재현하다보니 애가 거꾸로 들어섰다. 산모의 생명이 위험했다. 친정엄마의 통보. “너는 제왕절개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국내 산부인과 시설로는 불가능하고 외국으로 가야 한다.(그때는 외국여행이 자유롭지 않았다) 결국 가족회의 결과 아이를 포기하고 너를 살리기로 했다.” 그런데 아이는 어렵사리 태어났다. 그 딸이 결국 춤을 춘다.

# 칼의 노래를 넘어서

엄옥자는 승전무 외에 전통춤과 창작춤을 병행해 공연한다. ‘원향 살풀이춤’은 이매방류 살풀이춤, 한영숙류 살풀이춤, 김숙자류 도살풀이춤의 사위 중 자신이 좋아하는 춤사위만으로 재창작한 춤이다.

2003년에는 ‘승전무’를 무용극으로 창작한 ‘칼의 노래를 넘어서’를 공연했다. 채희완(부산대 무용학과 교수) 연출, 김정자(부산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대본, 엄옥자 안무. ‘난중일기’에 어머니 얘기가 많은 반면 아내 얘기는 없는데, 공연을 통해 이순신의 아내 방씨가 최초로 조명됐다. 공연의 수확이었다.

원향은 계속 마음이 바쁘다. 2002년 결성된 원향춤연구회를 정년 퇴임과 동시에 사단법인 원향춤보존회로 재구성한다. 또 1989년 창단된 엄옥자 한국민속무용단은 90년부터 방학 때마다 프랑스를 기점으로 20개국을 차례로 순회공연하는데 오는 7월31일부터 8월9일까지는 터키 공연을 떠난다.

기녀들의 증언 자료를 토대로 통영의 춤 ‘배따라기’도 발굴한다. 경남 문화재위원으로서의 숙제다. 뱃놀이하며 궁녀들이 추던 ‘배따라기’는 느리고 ‘질어서(길어서)’ 재미없지만 닝만적이고 화려한 원형복원에 주력할 예정. 원향은 이미 그 가락을 토대로 ‘원향지무’를 안무했다.

내년 8월 정년 퇴임하면 통영에 원향의 삶을 마무리할 터전을 일군다. 통영의 정신 따라 뜨겁게 끓었던 피와 춤과 사랑… 힘들게 걸어온 춤길이 엄옥자의 꿈공장에서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으로 물레질된다.

〈부산에서 유인화 선임기자
rhew@kyunghyang.com
 
 
[춤과 그들]“우리 충무장군” 북춤·검무 묶어 ‘승전무’로
2007년 07월 19일 09:41:30 경향신문
“사당에서 연회가 열릴 때 검무에 이어 북춤이 추어졌습니다. 좁은 공간에선 북춤을 출 수 없어 검무만 추었겠죠. 검무는 궁중에 예속된 관기에 의해 발전된 후 궁중무로 연희됐고요. 그후 궁중 기녀들이 낙향한 교방청 관기들에게 8명이 추는 궁중 검무를 가르치며 검무의 맥을 이었죠. 저는 연희 때 추어지던 북춤과 검무 등 두 개의 춤을 발굴 후 묶어서 ‘승전무’로 명명했습니다.” 특히 통영은 1604년 삼도수군통제영이 옮겨가면서 역사의 정면에 등장하게 된다. 통제영이 통영으로 변했지만 당시 통제영에선 이순신 장군의 승리를 기리는 승전무가 추어졌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충무공의 ‘난중일기’에 검무와 북춤을 실제 추었다는 문구는 없지만 교방청 기녀들이 선상 위에서 가무악을 행했다는 대목이 나오기 때문이다.

엄옥자 교수는 곧 출간될 저서 ‘승전무’를 통해 승전무의 모든 것을 밝힌다. 너무 젊어 소명의 소중함을 깨닫기도 전에 승전무 발굴을 이룬 경험 때문일까. 항상 투지와 의지로 불타 있다. 또한 승전무 연구는 굴레가 됐고 아픔이 되기도 했다.

문화유산의 원형 보존과 전승이 가장 중요한 작업임을 강조하는 엄옥자 교수는 “항상 승전무의 원형 보존과 전승 양상을 점검하기 위해 책을 낸다”고 했다. 또 제자들에게 역사가 흘러도 춤 동작의 정확성을 알리기 위해선 모범 텍스트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엄교수는 책에서 승전무로 묶어진 칼춤과 북춤, 승전무의 성립, 승전무의 미학 세계, 승전무의 구성 요소(복식과 소도구, 춤사위, 승전무 음악), 승전무의 기원, 발굴 당시의 상황을 풀어놓았고, 변천 과정사, 승전무 무보를 사진과 설명 및 북한식 자모법으로 구성했다. 세계 무용계의 공통무보법인 라바노테이션으로도 승전무 무보를 기록했다. 승전무는 “어기야 어기 어기여차, 우리 우리 충무장군덕택이요” 등 소리와 소맷자락에서 손수건을 꺼내 발림하며 ‘지화자’를 부르는 등 특이한 춤이다. 이충무공의 춘추향사, 생·기신제, 한산대첩 기념제전 등에 헌무되고 있다.

▶엄옥자 약력

1942년 엄수영과 김춘금(1950년 30대 초반 작고 엄옥자 9살때)의 1남2녀중 둘째딸로 통영에서 출생.

1961년 통영여고졸업

1965년 경희대 체대 체육학과 졸업

1974년 경희대 체육대학원 무용전공 석사

196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 21호 승전무 예능보유자 인정

1977~80년 부산대 전임강사

1990~현재 부산대 교수

1991~97년 엄옥자 한국민속무용단 예술감독

<현재>
엄옥자한국민속무용단장, 경남 문화재위원, 한국무용연구회 이사, 연무회(중고등학교 무용교사 연구회) 지도교수, 사단법인 부산민속예술보존협회 이사

<저서>
어느 무용가의 미관(1992) 등

<수상>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문공부장관상(1968·84), 미국 시카고 렌싱대 총장 감사장(1981), 미국 LA시장 감사장(1989), 폴란드 축제최고상·체코축제 최우수상·헝가리 플라워특별상(이상 1998), 제 1회 중국 호하호특 국제민속무용페스티벌 최우수연출상·개인연기상·특별상(2001), 제 8회 아태장이앤경기대회 개폐호식 총괄안무 대통령표창장(2003) 제 48회 부산광역시 문화상(2005)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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