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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쾌도홍길동]기회를 잃은 청춘들의 살풀이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9. 27. 17:06

상처 받거나, 칼을 갈거나, 혹은 아예 모르거나

 

드라마 <쾌도홍길동>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태어나면서 정해지는 "신분"이라는 사회적 제도에 상처받은 이들이다.

그 대표적 주자라 할 수 있는, 일명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은 뛰어난 재능과 실력을 갖춘 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능력을 펼칠 수 있는 서까래 한자리 차지할 수 없는 서자 출신이다. 그의 아비라 하는 자는, 노예의 신분이면 노예답게 죽은듯이 살라며 그의 재능을 일찌감치 뿌리 뽑아주고, 그 덕분에 홍길동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설움과 태생적 신분제도로 입신양명의 희망을 꿈조차 꾸지못하는 현실에 좌절하는 젊은이이다.

 

홍길동이 서자이기에 서글픈 청춘이라면, 창휘는 "진짜 왕"임에도 왕의 자리는 커녕 적자 신분이기에 어린 나이에 죽임을 당했어야 하는 처지이다. 왕과 무수리에게서 태어난 형 광휘가 세자로 오른 이후에 원비에게서 태어난 창휘는, 적통대군이 아닌 형 광휘에게 존재 자체가 위협이었다. 결국 광휘는 왕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대비전을 불태우고 대비와 창휘를 죽이게 된다. 궁정내 공식적으로는, 이미 죽은 왕자인 창휘는 마땅히 자신의 자리임에도 나이가 어려 힘이 없다는 이유로 형에게 버려진 참혹한 경험을 생명을 담보로 겪었으니 이는 홍길동의 설움보다 더 억울한, "정치적 농간"에 희생당한 청춘이다.

 

그리고 또 한명, 자신의 신분이 무엇이며,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굳이 알려고 하지도 않는 청춘이 있다. 선머슴같은 그녀, 허이녹은 당장 주린 배 허기만 떼우면 그뿐이고, 어디든 하룻밤 무사히 자고 일어나면 만사형통이다. 자칭 "권력의 핵심"이라는 서윤섭 대감의 외동딸 서은혜가 아릿따운 아녀자의 모습으로 "여자"이기에 스스로 그 무엇도 이룰 수 없다는 현실을 자괴하고 있을 때, 허이녹은 외모와 행동을 통해 보더라도 자신의 성정체성을 "여성"으로 뚜렷이 규정짓지 않는다라는 것에서도 의미심장하다. 허이녹이 자신의 출생에 관해, 신분에 관해, 성정체성에 관해 다른 청춘들처럼 상처받고 고뇌할 시간 대신 주어진 그녀만의 독특한 심플라이프는 상처 받고 사랑받지 못한 홍길동에게 위로를, 세상에 차갑게 날을 세우고 있는 창휘에겐 따뜻한 인간미를 제공하는 청정지구의 역할을 한다.

 

  

<출처 - KBS 쾌도홍길동 포토갤러리>

 

문제는, 이러한 조선시대의 "신분"과 "차별"에 대한 청춘들의 속사정이 비단 조선시대에만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이땅의 대한민국, 어느 순간부터 88만원 세대라 불리는 불쌍한 20대 청춘들은 신분과 차별에서 그보다 더 자유로울 수 있는가.

 

자본주의가 팽배한 물질만능주의와 무한이기주의 안에서 대학에 진학한 것만으로도 무언가 이루었다고 생각했던 중산층의 청춘들은, 이미 해외유학을 통해 영어를 제나라 말만큼이나 구현해내는 상류층 동기들을 보았을 때, 앞으로 자신들이 감내해야 할 도서관 자리지키기부터, 취업을 위해 졸업을 하고도 나머지 공부에 열을 올려야 하는 자신을 상상할 때 드는 자괴감은 조선시대 서자와 무엇이 다를까.

제 능력껏 마땅히 거머쥘 수 있는 자리를 확보해 놓고도, 부모 잘만나서 낙하산으로 공중낙하한 동료에게 자신의 자리를 빼앗기는 지금의 청춘들과 무엇이 다르냐는 말이다. 그렇다고, 우리 모두가 허이녹처럼 세상 늘어지게 내 주린 배만 채우고, 밤하늘을 천장삼아 풀밭을 베개 삼아 잠을 청해도 행복해질 수 있는 시대가 아닌데 말이다.

돈 있는 자가 움켜쥔 세상에서 돈 없는 자는 시대의 서자이며, 권력을 쥔 자가 움직이는 세상에서 권력이 없는 자는 차별당하는 자라는 것은,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그리 다를바가 없다는 것에서, <쾌도홍길동>의 주인공들은 묘한 공감대를 불러 일으킨다.

 

세상에 칼을 꽂지 못한다면, 춤을 추어라

 

하지만, <쾌도홍길동>은 이러한 인물들의 아픔을 드라마 전면에 부각시키지 않는다. 주성치의 <서유기>처럼 과장된 슬랩스틱 코메디와 패러디로 무장한,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의 <쾌도홍길동>은 신분제도와 차별에 의해 기회를 잃어버린 청춘들을 신명난 시장터 속에서, 형형색색으로 단장한 객주 안에서 얽매인 기분을 마음껏 풀어버리라고 장을 마련해 준다. 그들은 그곳에서 웃고 떠드는 동안, 서로를 만나며 인연을 맺고, 사건을 이끈다.

<쾌도홍길동>의 첫회, 홍길동과 허이녹, 그리고 활빈당 패거리들은 양반의 잔칫날을 기쁘게 해줄 춤사위로 그들의 눈을 현혹 시킨 후, 그들을 습격했다. 이것은 어쩌면 <쾌도 홍길동>의 주제를 가장 함축적으로 드러낸 씬이 아니었을까. 기회를 잃었다 생각하는 이 순간에도 웃어라. 그리고 춤을 추어라. 이렇게 스스로 기쁘고 즐겁게 내 삶의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가다보면, 언젠간 꼭 기회가 올지니.

 

<쾌도홍길동>이 사극에다가 적극적으로 끌어온 코믹이라는 장르는 사실, 새로운 시도이기 때문에 주목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쾌도홍길동>이 추구하는 '코믹'이 풍자와 해학을 동반할 때에, 등장인물들의 여유작작한 미소와 허풍스러운 대화, 게으른 몸짓은 내용이 꽉찬 구성으로 시청자들의 눈을 현혹시킬 수 있을 것이다. '코믹'을 위한 '코믹 자체'는 이 드라마에서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허긴, 지금의 이런 이야기들도 이미 뒤늦은 말들일 수도 있겠다.

홍길동과 그 일당들의 살풀이는, 이미 시작되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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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공(空)'s FREEview
글쓴이 : 공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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