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멜로드라마>라는 장르는 친구의 오래된 연애담을 들어야 하는 일처럼 진부한 장르가 되어버린지 오래이다. 이러한 "멜로"의 진부함을 벗어나고자, 이제껏 우리 드라마들은 사랑도 자본주의적 계급과 권력에 따라 쟁취하거나, 혹은 자신을 속여야 했고 (발리에서 생긴 일), 자신을 버린 엄마에게 지독한 복수극을 감행하는 와중에도 지독한 사랑을 해야했으며(미안하다 사랑한다), 능력있는 빠띠쉐임에도 노처녀라는 극단의 하자(;)를 설정하여 그럼에도 재벌2세 연하남과의 연애에 성공한다는 스토리로 대한민국 30대 미혼여성들의 가려운 등을 시원하게 긁어주기도 했었다.(내이름은 김삼순)
지금 방영하고 있는 드라마들의 주인공만 해도 그렇다. 능력있고 어린 남자가 자신에게 대쉬해 와도 꿈 속에서는 열정적인 사랑을 감행할 지언정 현실에서는 "사랑"에 자신없는 여주인공(달자)이 시청자들에게 강력한 공감을 받고(달자의 봄), 바쁘게 돌아가는 종합병원내 주인공들은 제대로 된 연애한번 해보지도 못한다.(외과의사 봉달희) 어디 그 뿐인가. 아예 사랑이라는 것은 현실에서는 필요한 행위가 아니라는 듯, 결혼과 바람질까지도 업무처럼 행하는 이도 있다.(하얀거탑)
"사랑"만으로 시청자들에게 어필 할 수 있는 시대는 갔나보다... 생각하고 있을 무렵, 이게 왠걸.
지독한 운명에 얽힌 사랑이라니. 그래서, 그 사랑에 미쳐버리다니. 그렇게 이 드라마는 시작부터 뻔뻔스럽게, 30대 최고의 여배우 이미연과 군제대후에도 확고한 스타의 자리를 가지고 있는 윤계상을 내세우며, 그 진부한 멜로의 시작을 알렸다.
정말 멜로는 진부한가
1998년 노희경 작가의 <거짓말>부터 2002년 <네멋대로해라>, 그리고 2006년 <연애시대>까지.
나는 솔직히 "사랑"이라는 소재만으로도 끝없이 진화해가는 한국 드라마계가 너무도 놀랍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사랑을 느끼고 연애를 하면서, 배신을 하면서, 혹은 죽음이라는 극단적 상황을 만나면서 겪는 그들의 온갖 감정들은 하나하나가 작은 우주가 되고, 카오스 또는 코스모스의 세계로 시청자들에게 혼돈을 주기도, 폭발같은 감동을 주기도 한다. 이는 16회, 혹은 20회를 걸쳐 이야기를 다루는 "드라마"라는 장르이기에 가능한 일이며, 긴 시간동안 시청자들은 드라마의 등장인물과 함께 하며 깊은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드라마"라는 장르를 좋아한다.)
그 흔하디 흔한 사랑, 누구나 다 한다는 연애를 정말로 이 세상 거의 대부분의 이들이 하듯, 그리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사랑의 모양새들이 가지각색이듯, 그렇게 우리의 멜로드라마도 진부함에서 벗어나고자, 다른 시각을 통해 사랑을 말해보고자 노력해 오지 않았는가.
그리고, 지금 우리는 또 하나의 멜로를 만나고 있는 것이다. 그 어떤 정치적, 사회적 코드를 지니고 있지 않은 생짜멜로를.
<사랑에 미치다>를 특별하게 만드는 배우
항공사 엔지니어팀 과장인 서진영(이미연)은 엔지니어 신입인 김채준(윤계상)의 상사이며, 연배도 높은 연상이다. 전과기록으로 퇴출될 뻔한 김채준을 위기에서 구하고, 그를 직업교육시키며, 하다못해 식사도, 운전도, 상처나면 반창고까지 직접 붙여주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김채준은 철저하게 상사 서진영에게 보호를 받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자신 자체를 인정받지 못하고 살아왔던 김채준은 자신도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다는, 자신을 믿는다는 말을 두 눈 똑바로 뜨고 한치의 의심없이 해주는 서진영에게 그 이상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녀의 아픔을 알아본 그는 그녀를 자신만의 방법대로 위로해주고, 서진영 또한 이 어린 남자에게 조금씩 마음의 아픔을 위로받게 된다.
주인공 서진영, 그녀는 이제껏 멜로가 추구해온 여타 여주인공과 다름이 없다. 운명이 던진 큰 상처 앞에서도 씩씩하게 견디며 당당하게 살아가는, 그러나 혼자 있을때면 (혹은 김채준 앞에서만) 여지없이 눈물을 쏟는 여자. 그러나, 멜로드라마 여주인공의 공식화된 삶을 살아가는 서진영을 특별한 여주인공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바로 남자 주인공 김채준의 설정이다.
혼자 먹는 밥맛을 알고,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은데 배가 고픈 심정, 고통 속에 울다가 화장실 가고싶을때의 심정을 아는 이 외로운 남자는 서진영의 따뜻한 말 한마디, 따뜻한 손길 한자락에 그녀를 마음에 두고 만다. 너무 외로운 사람에게는 작은 친절도 헛된 희망이 될 수 있다고 했던가. 본인 스스로도 그것이 욕심인줄 알면서, 그래서 너무 사람좋지 말라고 속으로 되뇌이는 그를 보며 나는 단전에서부터 골수까지 찌릿한 전율을 느껴버리는 것이다.
그렇다. <사랑에 미치다>가 특별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김채준역의 윤계상 때문이다.
굵고 투박한 눈썹, 두툼한 눈두덩이, 단정한 콧날과 입매를 감싸고 있는 굴곡진 그의 윤곽이 성실하고 착하지만 쉬운 삶을 살지 못했던 김채준의 모습을 그대로 그려낸다. 하지만, 그가 김채준으로 짠한 감동을 선사하는 이유는 그의 외모때문이 아니다. 김채준이란 인물이 어릴때부터 가질 수 밖에 없었던 태생적인 외로움이 사회의 성장통을 겪으면서 체화된 고독과 얽혀 깊은 슬픔을 내재하고 있는 인물임을 매순간 표출하는 감정연기 때문이다.
동료직원의 결혼날짜를 보고 홀로 아픔을 삭이는 진영을 위로해주지 못해서 그저 빗속에서 "고맙다"며 여러번 외치던, 남편의 기일에 눈물을 쏟는 진영을 보며 마침내 함께 눈물을 떨구고야 마는, 자신을 믿지 말라는데 믿겠다고 장담하는 진영을 감동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너는 사람을 죽인 살인자라는 청호의 잔인한 말에 홀로 방에서 눈을 감은채로 눈물을 떨구던... 모든 채준의 모습들.
그러한 채준의 모습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연인의 죽음으로 마음의 문을 굳게 닫을 수 밖에 없었던 서진영의 마음이 왜 열릴 수 밖에 없는지 깊은 공감을 유발시키는 것이다.
동정심과는 또 다른, 내재된 슬픔의 동병상련.
그렇게, <사랑에 미치다>는 이들의 말도 안되는 사랑을 너무나 공감되게 그려내고 있다.
앞으로 이들은 서로가 사랑해서는 안될 사람임을 알고 너무도 괴로워 하겠지만, 또한 그 고통 속에서도 또 서로를 갈구하는 자신을 발견하며 느낄 감정이 기대가 되는 건 어쩔수 없다.
...나는 이미 이들의 사랑에 미쳐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들의 사랑에 미칠 사람은 누구
결혼의 조건에 '사랑'은 옵션이 되어버린 지금, 이제는 사랑도 미칠 정도가 되어야 이룰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이런 세상에 멜로의 진부한 공식을 비껴가지 않는 <사랑에 미치다>에 과연 얼마나 시청자들은 함께 미칠 수 있을까. 이 드라마가 그려내고 싶어하는 섬세한 사랑의 변주를, 캐릭터의 감정에 따라 변하는 조명의 컬러나 아름다운 촬영각도의 변주를, 그리고 배우들의 연기변주를 발견해가려 애쓰며 말이다.
하지만, 너무 일찍 와버린 화창한 봄햇살에 오히려 내 얼굴이 너무 도드라져 보일까봐 우울한 기분을 느꼈던 오늘을 보낸 분들이라면, 나와 함께 이들의 사랑에 미쳐보자고 은근히 권하고 싶다.
조민희의 대사, "오빠는 아무것도 가진게 없고 사랑만 있는데, 그 사람은 사랑은 없어도 모든 걸 다 가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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