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산시성 핑야오(平遙)는 명·청 왕조 때의 성곽과 거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 중의 하나이다.
현대 은행의 할아버지뻘인 중국 최초의 표호(票號)가 바로 여기 핑야오에 있다. 1823년 설립된 일승창(日昇昌)이다. 청나라 때 모두 51개의 표호가 설립됐는데 그 중 43개가 진상이 세운 것이었고 그 가운데 22개가 핑야오에 본점을 두었다.
지금은 고요한 옛 성곽도시지만 당시 핑야오는 ''중국판 월스트리트''였다. 표호는 오늘날 은행의 3대 업무인 예금·대출·환업무를 모두 취급했다.
표호는 고객의 돈을 받은 다음 법적으로 보호도 받을 수 없는 환어음만 한 장 써주었다. 그 어음이 다시 돈이 되어 돌아올 수 있을 것인지는 오로지 표호의 신용에 달려 있었다. 표호의 신용이란 곧 진상의 신용이었다.
진상은 표호의 본점은 산시성에 두고 전국 곳곳에 지점을 열어 중국 어디서나 사용할 수 있는 어음을 유통시켰다. 일승창에는 도광제가 하사한 ''회통천하'', 즉 천하에 어음이 통용된다는 뜻의 편액이 걸려 있다.
진상은 어떻게 신용을 쌓았을까? 진상은 함수호라는 자연혜택에 힘입어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함수호는 소금을 제공해주는 호수였다. 진상은 소금 무역을 장악하면서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소금과 더불어 진상을 키운 것은 차(茶)였다. 진상은 남쪽 지방의 차를 러시아에 가져다 파는 중개무역으로 크게 번창했다. 이르쿠츠크, 모스크바에 지점을 낼 정도였다. 진상의 영업망은 중국 대륙 구석구석 안 닿은 곳이 없었다.
진상은 ''큰 부자는 머리가 아니라 덕에서 나온다''는 말처럼 신용을 최우선으로 꼽았다. 그리고 시대에 따라, 제도에 따라 업종과 경영방식을 탄력적으로 바꿔나갔다. 주식제도를 도입해 투자를 받았고 소유와 경영을 분리했다.
종업원들에게 ''신고''라는 이름의 주식을 줌으로써 수익을 분배하는 선구적인 경영모델을 일찌감치 실현했다. 또한 복잡한 장부기재 방법으로 내부 비리를 차단했다.
그런 진상도 근대화의 파고를 넘지 못했다. 아편전쟁 이후 몰려든 외국 상사와 은행은 진상의 영역을 잠식했다. 진상은 표호를 현대 은행으로 개혁하고자 노력했지만 기울어가는 국운에는 대항할 방도가 없었다. 한 시대를 휘황하게 밝혔던 표호였지만 근대화의 과정에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