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외우며 극기 3년 ‘수학의 정석’도 너덜너덜
“대학은 하버드 갈거지만 한국에 꼭 돌아올거예요”
- 올해 대일외고를 졸업하고 미국 대학 진학을 앞둔 미국인 학생 에밀리 디베커가 손으로 하트를 만들며 웃고 있다. 정경렬기자 krchung@chosun.com
- 새벽 6시30분, 별을 보고 등교했다. 밤 10시, 또다시 별을 보며 집으로 향했다. 중간·기말 고사 때면 교과서를 달달 외웠다. 밤 12시까지 교육방송을 봤고, ‘수학의 정석’은 너덜너덜해졌다.
여느 명문대 합격생의 뻔한 합격 수기가 아니다. 벨기에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를 둔 에밀리 디베커(Emilie Debacker·19·대일외고 2007년 졸업)양의 얘기다. 외국인인 에밀리는 지난 3년간 특목고인 대일외고를 다니면서 다른 한국 학생과 똑같이 생활했다. 미국 하버드대에 지원한 후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그는 유창한 우리말로 “3년간 매일매일이 극기(克己)의 연속이었다”면서 “누구든 한국에서 고3 생활을 하면 이 세상에서 못 할 게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에밀리가 처음 한국에 온 건 6년 전. 아버지인 쟌 디베커씨가 세계적인 평화운동 민간단체인 ‘천주평화연합(UPF·Universal Peace Federation)’ 한국지부로 발령받으면서다. 한국에서의 첫 학교는 전북 고창의 고창여중이었다.
“‘한국에 왔으면 한국인처럼 살라’고 하셔서 엄마랑 같이 내려갔어요. 한국의 ‘기러기’ 가족이 된 거죠. 엄마도 ‘한국의 전통생활을 체험하고 싶다’며 고창을 고집하셨죠. 덕분에 논밭 구경, 소 구경, 경운기 구경은 실컷 했어요.”
서울에서 한국어 공부를 달랑 1년 한 후 시작한 고창에서의 중학교 생활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아이들의 말투가 서울말과 달라 처음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휘갈겨 쓴 선생님의 칠판 글씨는 암호에 가까웠다. 첫 시험에서 ‘평균 30점’ 성적표를 받아 든 에밀리는 그날 가족들에게 선언했다. “미국으로 보내달라”가 아니라 “성적 올려보겠다”고.
그때부터 에밀리는 매일 밤 10시까지 교과서를 외우기 시작했다. 쪽지시험에서 틀린 문제 수만큼 손바닥을 맞겠다고 자원했고, 수학 학원까지 다녔다. 그런 생활을 한 학기 했을까. 성적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중3 첫 시험에서는 100명 중 30등 안에 들었고, 마침내 17등으로 졸업했다. 자신감이 붙은 에밀리의 다음 목표는 외고였다.
“다들 ‘빈자리가 없다’ ‘외국인은 안 된다’며 거절하는데 대일외고만 ‘외국인 학생이 섞여 공부하면 서로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 불어과 입학을 허락했어요.”
공부 잘하는 학생들만 모인 외고는 그에게 또 한 번 예상치 못한 좌절을 안겼다. 여태 잘 버텨온 에밀리지만, 어느 날 갑자기 “나 미국 가고 싶어. 너무 힘들어”라고 말했다.
“옆 짝이 ‘나 96점밖에 못 받았어, 어떡해~’ 하며 울먹이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중간고사 때까지만 버티자, 기말고사만 보고 그만둘지 생각하자’며 차일피일하다 3년이 흘렀죠.”
국제(유학)반으로 옮긴 후 고3 분위기는 더욱 삭막했다. ‘우리 반에 들어오지 마시오’라고 써 붙이고 부동자세로 공부하는 아이들, ‘새벽 4시까지 공부했다’며 에밀리의 속을 긁어놓는 친구들….
그 속에서 오기로 버틴 3년이지만, 추억도 많다. 친구들과 학교 앞에서 콧물 흘려가며 먹던 ‘즉석 떡볶이’도 좋았고, 입시 스트레스 풀기엔 노래방이 ‘딱’이었다. 학교 최초로 ‘영어토론(debate)’반을 만들어 전국대회에서 1등도 했다.
영어·한국어·포르투갈어·불어 등 모두 4개 국어를 구사하는 그는 ‘국제관계학’을 전공하는 게 목표다. 한미관계, 남북문제에 기여하는 게 꿈이다.
‘입시지옥’ 속에서 산 에밀리가 한국에 다시 돌아오고 싶을까? 에밀리는 “당연하다”고 했다. “그럼요! 고3 생활이 저를 키웠는걸요. 무엇보다 한국에 있으면 행복해요. ‘우리 고창 사람들(동창·이웃주민)’도 보고 싶고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수줍게 웃는 그는 금발의 파란 눈만 가졌을 뿐 천생 한국 여고생이었다.
출처 : 행복한 동네
글쓴이 : 행복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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