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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성경 적용의 원리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10. 12. 10:27
성경 적용의 원리



성경은 신비한 문헌이어서 스스로 말씀하신다. 적용이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는 말의 현상적 표현이지, 우리 해석자나 설교자가 억지로 적용시킬 수는 없다. 하나님은 모든 성경으로 항상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떤 성경으로 어떤 때에 말씀하시는데, 그것을 우리는 적용이라고 말한다. 적용( applicatio)이란 “적절한 사용”이라는 뜻으로 이 말에는 부적절한 사용도 있다는 전제가 함축되어 있으며, 적용은 단순히 “연결”시키는 작업을 의미하지만 올바른 연결이 전제된다. 가스관을 수도에 연결시킨다든지 전기선을 안테나에 연결시킨다면 큰 불행을 자초할 수밖에 없듯이, 성경을 올바로 적용시키지 않는다면 그 자체가 “적용”이 아니라 “부적용”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로막고 왜곡시키는 범죄를 결과한다. 만일 어떤 설교자가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자기에게 적용시켜 교회의 머리와 주인 행세를 하려고 든다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로막고 성경을 빙자하여 자기의 말을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에베소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수신자 이름만을 서로 교체하여 서로 다른 교회에게 편지를 전해 준다면, 아무리 둘 다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 오해는 심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말씀 자체와 말씀이 주어진 상황이 서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강부회식의 성경적용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가로막고 자기의 논리를 전개함으로서,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입을 막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성경은 살아있는 말씀이지 결코 죽어있는 고대의 문헌이 아니기 때문에 해석자의 은혜에 의해서 새로운 뜻이 부여되거나 교훈이 발굴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성경의 올바른 적용원리는 무엇인가? 첫째로, 유사한 상황에 적용해야 한다. 엄격히 말해서 정확히 동일한 상황이란 다시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적용 가능한 상황이란 유사한 상황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과거 성경시대와 유사한 상황이 발생할 때, 성령의 조명 illuminatio)과 적용사역을 통하여 다시 말씀하신다. 유사한 삶의 정황(Sitz im Leben) 혹은 상황(con-text)에 유사한 말씀을 하신다는 사실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반복적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은 한번 말씀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어 우상숭배의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거의 유사한 말씀을 반복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시대가 종료된 후에도 유사한 상황이 발생하면 하나님께서 유사한 말씀을 주시리라는 것은 유추가 가능하며, 성경을 살아있는 말씀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에게 당면한 상황과 유사한 상황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성경본문을 찾아 거기에서 다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영혼의 귀를 기울여 들으려 하는 것은 당연하다. 피정복상황에 정복자에게 준 말씀을 적용시킨다든지, 아내들에게 준 말씀을 남편들에게 적용시킨다든지, 혹은 부자들에게 준 말씀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적용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는 어떤 상황이 발생하거나 어떤 질문이 일어날 때, 성경 전체에서 그 상황과 가장 유사한 상황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하며 그 말씀 앞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려야 한다.  둘째로, 구속사적 관점에서 적용해야 한다. 성경은 단순한 역사기록이나 문학작품이 아니라 영원 전에 계획되어 영원까지 이르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Heilsgeschichte)가 반영된 거룩한 문헌이기 때문에, 모든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구속사적 관점에서 볼 때 일관성 있고 심오한 의미가 드러난다. 구속사에는 예언과 성취, 예표와 실체 등 다양한 구도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특히 구약의 적용에는 이러한 구속사적 구도가 해석의 골격을 이루어야 한다. 셋째로, 성령의 새창조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적용해야 한다. 하나님은 동일한 본문을 통하여 교회에 유사한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항상 새롭게 말씀하신다. 성령께서는 그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을 매순간 새롭게 조명하심으로서 하나님께서 단순히 반복하지 않고 항상 새롭게 말씀하도록 하신다. 실로 성경상황의 단순한 재생이나 유사상황에서의 제한된 적용을 훨씬 넘어서 새로운 상황에서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창조적인 말씀을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본적인 상황적 및 구속사적 맥락 위에서 창조적인 적용의 가능성을 열어 둘 필요가 있다.

  



사사기 적용의 기본구도



예를 들어, 구약의 사사기를 현대의 한국교회 상황에 어떻게 적응할 수 있을 것인가? 사사기는 지금으로부터 3천년 전이라는 아득한 고대에 중동지역의 팔레스틴에서 일어난 가나안 정복사의 일부를 기록하고 있는 고대 문헌이다. 과연 이러한 타국의 고대역사가 현대 한국에 무슨 적용성을 가질 수 있는가? 물론 우리는 예로부터 고대문헌을 온고이지신하여 새로운 뜻을 찾으려고 애써 왔으며, 또한 모든 역사를 연구함으로서 타산지석의 교훈을 배우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사기도 우리에게 교훈과 지혜를 줄 수 있는 문헌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사사기를 읽을 때는 근본적으로 다른 관점에서 적용하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사기를 단지 하나의 고대역사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거기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심지어 기독교 설교자 중에도 불신자가 고대역사에서 배우려는 태도를 거의 동일하게 답습하여 사사기에서 무슨 교훈이나 지혜를 얻을 수 있을까 탐구하는 사례를 흔히 볼 수 있는데, 이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전달자이지 창조자가 아니며, 성경해석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을 수 있도록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케 되도록 만드는 정지작업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막히지 않고 힘차게 전파되도록 섬기는 보조적 사역이다.

현대 한국상황에 사사기를 올바로 적용하기 위해서는 거시적인 구속사적 시각이 필요하다. 그러면, 사사기 적용의 기본구도는 무엇인가? 첫째로, 성경 전체의 구속사적 관점에서 볼 때 사사기는 구약 초기의 문헌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될 구원사역의 예표적 성격을 갖는다. 모세의 영도아래 출애급한 이스라엘은 40년 광야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영도력 아래 출애급의 목표였던 가나안 진입과 정복을 통하여 긴 피난과 여정을 마치고 안식을 얻게 된다. 여호수아서가 안식을 주제로 한 가나안 정착과정을 서술하고 있다면, 사사기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이 다시 도전을 받는 과정을 기술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신약시대의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를 예표하며, 가나안은 교회에 대항하는 세상세력을 예시한다. 사사의 수가 12명이라는 것도 신약교회의 사도 수가 12명이라는 것과 대응한다. 그러므로 사사기의 신약적 적용이 취해야 할 기본구도는 세상에 대한 교회의 복음화 과정으로서, 이는 구약의 출애급과 가나안 정복사의 구속사적 성취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사사기는 수많은 복음화 전략을 가르쳐 주고 있다.

둘째로, 사사기는 구약에서 성령의 사역이 가장 두드러진 문헌으로 알려져 있다. 사사의 출현과 사역은 “여호와의 신”이 감동함으로서 이루어진다(3.10, 6.34, 9.23, 11.29, 13.25, 14.6,19, 15.14,19). 출애급을 영도한 모세가 집중적으로 성부와 관계하고, 가나안 입성을 실현한 여호수아가 예수의 히브리명일뿐 아니라 기능적인 성자와의 유사성을 가진다면, 사사시대는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1.1) 계속된 가나안 정복과정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후에 성령께서 강림하여 교회를 영도하는 시대, 즉 성령강림부터 그리스도의 재림 사이의 성령시대에 상응하는 예표성을 가진다. 이러한 삼위론적 구도는 사사기가 특히 교회의 시대에 적용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세째로, 가나안의 완전한 정복은 다윗시대에서야 이루어지지만, 가나안 정복을 서술하는 대표적인 문헌은 여호수아서와 사사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호수아서가 전반적으로 가나안의 성공적인 정복(conquest)과 정착의 안식을 묘사한 성공적 정복사라면, 사사기는 가나안 정복에 대한 현지인들의 끊임없는 도전과 역정복(counter-conquest)의 과정을 서술한 부정적 정복사라고 할 수 있다. 사사기 문제의 본질은 왜 이러한 실패가 발생하였으며 반복되었는가 하는데 있다. 한편, 역정복의 실패에 직면했을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그때마다 사사를 일으켜 역정복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다시 안식과 평화를 회복시켜 주었다. 그러므로, 현대에 적용될 수 있는 상황은 동일한 문제를 교회가 직면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정복이 복음화에 상응한다면, 역정복은 세속화라고 볼 수 있다. 세속화에 직면한 교회는 사사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넷째로, 사사기는 사사시대의 기록이지만, 그를 해석하고 기술한 기자는 후대인이다. 본서는, 비록 바벨론포로 이후에 기록된 듯한 구절이 한곳(18.30)에서 발견되지만, 전반적으로 보아 사울왕의 통치기간에 기록된 듯하다. 왜냐하면 “여부스사람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그들이 “오늘날까지 예루살렘에 거”한다(1.21)는 기록은 다윗시대(삼하 5.6-7) 이전임을 반증하고, 여러 곳에서 “그때에 이스라엘이 왕이 없었”다(17.6, 18.1, 19.1, 21.25)는 기록은 기록당시에는 왕이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으므로, 사울왕의 시대, 특히 악정을 펼치던 후기에 기록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전반적으로 사사기는 왕제도에 대해서 비판적인 반면에 사사제도는 하나님의 뜻임을 분명히 함으로서, 왕과 사사를 비교하고 기록 당시에 왕제도의 폐해가 심각했음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구절은 8장과 9장에 있다. 8장에서는 미디안의 두 왕을 처형하고 13만 5천명의 미디안군을 살육한 사사 기드온에게 이스라엘 국민들이 대대로 통치자가 되어 달라고 간청하였을 때, 그에 대한 기드온의 응답에서 나타난다. 기드온은 이러한 요청을 단호히 거절하면서 말한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8.23) 이 말은 기자의 의도를 강력히 드러내는 듯 하며, 뒤에 이스라엘인들이 왕을 요구했을 때 사무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대답을 반영한다고 보여진다: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삼상 8.7) 9장에서는 형제를 살육하고 스스로 왕이 된 아비멜렉에 대한 요담의 비유적 비판과 하나님의 징벌에서 왕제도에 대한 강력한 거부가 표명된다. 비록 기자의 시대에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왕의 통치가 시작되었으나, 회고적으로 그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예수님의 도래와 하나님의 나라 선포는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모든 인간의 나라와 통치를 비판하며 심판한다. 사사는 성령의 세우심에 따라 부여된 임무를 완수하고 죽으며, 결코 세습화되거나 인간 위에 군림하지 않는다. 요담이 표현한대로,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9.9) 하며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9.13) 하는 사사가 충성된 섬김의 종들이라면, 왕은 인간 “위에 요동”하며 군림하는 “가시나무”에 비유된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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