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서 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말들을 기록하라 내가 이 말들의 뜻대로 너와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웠음이니라 하시니라(출 34:27)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으로 첫 번째 언약의 돌판이 깨뜨려진 후, 여호와께서는 두 번째로 새로운 증거판(출34:28)을 친히 새기어 주시면서 모세로 하여금 언약(covenant)에 수반되는 부속 명령을 기록하게 하셨다. 이후 수십 년이 경과하여 가나안 정복전쟁이 끝난 후 여호수아는 유언(遺言)을 남기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고 경계하였다(수23:6).
이처럼 모세와 여호수아의 기록은 특정한 역사적 문화적 상황 속에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역사적 사건을 통하여 인간 기록자를 매개(媒介)로 하여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 기록이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신적 부분과 인간적 부분이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된 형태로 나타나므로 두 부분을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자신의 피조물인 사람에게 ‘감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드러내시기’ 위하여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2:10-13)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지혜로는 알 수 없을 만큼 신령(神靈)하다. 그러므로 기록된 말씀의 의미를 충분히 간파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함이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신령한 것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며, 성령만이 하나님의 깊은 것을 통달하시기 때문이다.
교회사 가운데 성경을 해석하는 관점은 크게 두 가지로 전래 계승되었다. 그 하나는 성경의 신적 속성만을 강조하여 문법과 문자의 배후에 있는 영적인 의미만을 해석하려는 부류이다. 이는 초대교회를 비롯하여 중세 1000년 간 주류를 이룬 풍유적(allegorical) 해석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무리한 영해와 본문의 의미를 자의로 해석하는 알레고리적 해석을 지양하고 역사적 상황과 문법과 문자에 근거하여 해석하는 학파이다.
마틴 루터 ․ 존 칼빈 ․ 하인리히 쯔빙글리 ․ 존 낙스가 선도한 종교개혁 이후 알레고리적 해석은 점차 감소하였다. 그러나 이는 표면상의 퇴보(退步)일 뿐이다. 오늘날에도 설교나 세미나나 성경공부에서 많은 이들은 성경의 문자나 역사적 의미를 무시한 채 하나님의 신비한 말씀의 비밀을 캐내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풍유적 해석을 선포하는 자들이 성경을 당대의 하나님 계시 기록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는데 주 원인이 있다. 또한, 그들이 성경의 방대한 계시의 표현 양식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나님의 계시의 표현 양식은 상당한 시간과 물질의 투자연구가 필요할 만큼 다양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성경 묵상(黙想)을 통하여 오늘날 자기에게 주는 도덕적 교훈이나 신비한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으려는 사례가 얼마나 자주 발생하는가? 그렇다면 오늘날 해석자는 어떠한 태도로 성경 본문을 접근해야 하는가? 먼저 “성경이 오늘날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당대의 의미’(What it meant)가 무엇이었는가?”를 알기 위하여 접근하여야 한다.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생략 21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눅4:18-21)
‘당대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처음 계시를 받았던 옛 수신자들이 당해 말씀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살펴야 한다. 성경의 여러 문학 ‘양식’(genre)에 따라 당대의 주요 메시지는 각기 다른 양상(樣相)으로 후세에게 비쳐진다. 그 이유는 율법, 선지서, 시가서, 복음서, 비유, 설화, 예언 등의 양식이 당대에 하나님의 계시를 담은 그릇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본래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 안에서 주어졌다. 그러므로 역사적 맥락 안에서 주어진 그 말씀은 역사적 한계성이 있다. 그러나 그 말씀은 오늘을 사는 후세의 그리스도인에게 거울이 되어 영원히 살아 있는 말씀이 되는 것이다. 즉, 과거 성경 본문의 ‘그 때 그 곳’(then and there)의 문제는 오늘날 ‘지금 여기’(now and here)의 삶의 정황(情況)으로 적용되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 해석자와 그리스도인 간에 간격(間隔)을 해소(解消)하는 길이기도 한 주제이다. 성경해석자의 관심이 성경본문의 기록 당시에 주목한다면, 그리스도인의 관심은 그 본문이 오늘날 나의 삶의 정황에서 어떠한 현재적 의미가 있는가를 주목한다. 균형을 갖춘 경건한 해석자는 과거의 교훈에 대한 현재의 상황 적용에 있어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함을 알고 있다.
만약, 해석자가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의미에만 관심을 갖고 성경을 읽거나 해석하려고 한다면, 해석자는 자신의 유한한 한계와 자기 계시로 인한 통제기능의 결여(缺如)로 저지를 수 있는 온갖 실수와 터무니없는 견해를 마구 쏟아놓게 될 것이다. 사적인 해석의 가장 큰 위험은 주관주의에 빠지게 되어 현존하는 위협에 스스로 빠져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건한 해석자는 해석학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는 ‘상식’(Common sense)을 소유하고 있다. 이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빛의 자녀된 경건한 해석자는 주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시험할 만큼 상식이 있다.
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10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5:8-10)
경건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본분을 알며 그 본분을 행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근거하는가? 그것은 어느 누구도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지는 못하지만 성도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인 것이다(고전 2:16). 그렇다면 성령본문의 현재적 의미는 어떻게 밝혀야 할 것인가? 경건한 해석자는 성경 본문의 현재적 의미가 우선 과거에 그 본문이 의미했던 바와 동일한 것임에 유의한다. 즉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과거의 수신자에게 주신 말씀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석자는 본문의 원래 의미를 밝히는 ‘석의’(exegesis)와 그 동일한 의미를 오늘날 삶의 정황 속에 있는 다양한 ‘상황’(contexts)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 듣는 법을 배워야 한다. 따라서 ‘성경 해석’(hermeneutics)의 과정이 성도에게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것이다.
현대신학에서 성경에 대한 큰 쟁점은 대부분 성경해석과 관계된 것이다. 해석학의 어원이 되는 그리이스어 ‘Hermes’는 그리이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의 이름이었다. ‘Hermes’는 상위 신의 명령을 다른 신이나 인간들에게 전하는 ‘사자’(messenger)로서 학문, 예술 , 저술, 웅변, 연설, 창안의 신이었다. 그는 금으로 만든 자(尺)를 가지고 자신에게 메시지를 부탁한 신의 뜻을 바르고 정확하게 전달했는가를 측정(measurement)하였다. 즉 그의 임무는 명령을 부여한 상위 신들의 뜻을 해석하는 것이었던 것이다. 그 자(尺)는 오늘날 성경해석학의 중요 과제를 잘 나타내는 상징(象徵)으로 볼 수 있다.
오늘날의 성경 해석 패턴은 이러한 어원적 의미와는 달리 성경 본문의 사적 재해석을 통하여 “성경의 현대화”를 포함하는 해석 방법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해석방법의 결과는 성경본문의 원래 의미를 모호하고도 부정확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로서 성경의 본래 메시지는 현대적인 취향(趣向)의 견해에 순응(順應)된 변화를 초래한다.
종교 개혁자들이 로마 가톨릭교회와 결별하면서 ‘성경이 교회의 최고 권위가 되어야 한다’(sola Scriptura)고 주장했을 때, 그들은 성경 해석의 기본 원칙을 세우는 일에 온 관심을 기울였다. 그들은 성경 해석의 기본원칙을 ‘신앙의 유비’라고 불렀다. 신앙의 유비란 ‘성경이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Sacra Scriptura sui interpres, 성경이 성경 자신의 해석자이다)는 원칙이다. 이것은 성경의 어느 부분도 성경의 다른 부분의 교훈과 모순을 일으키는 결과로 해석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사34:16)
본문은 문자적으로는 각 짐승과 새들의 명단이 여호와의 책에 다 기록되었다는 의미로서 과장법과 상징법을 사용한 형식이다. 그렇지만 본문의 앞뒤 문맥을 고려하면,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모든 예언이 남긴 없이 성취될 것이라는 이사야의 설명이다. 어떻게 그러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예언은 성령께서 배후에 역사하시므로 빠진 것과 짝이 없는 것이 있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예언의 말씀을 여호와의 입이 명하셨고 하나님의 신 성령께서 모으신 결과로 오늘날의 성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성령으로 해석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이 원칙은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말씀이라는 것을 믿는 믿음의 전제하에서만 가능하다. 이 믿음은 오직 성경의 일관성과 통일성의 확신에 근거한다.
하나님은 결코 스스로 모순(矛盾)을 일으킬 수 없으신 분이다. 그러나 무한한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보기에 그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를 다 헤아릴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35 생략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11:33-36)
오늘날 경건한 해석자가 성경 속에 묻혀 있는 진리를 아무리 파헤쳐 낼지라도 그 끝은 다함이 없고 발견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해석자는 성경해석학을 연구함에 있어 진리의 보고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겸손한 태도와 균형 있는 시각으로 성경 본문을 접근해야 한다.
▣ 제 1 장 연구과제
1. 성경의 계시기록의 특성을 기술하라.
2. ‘당대의 의미’의 뜻과 중요성 그리고 연결점을 기술하라.
3. 해석자의 자기계시와 상식의 상관관계를 기술하라.
4. ‘해석학’(Hermenuetics)의 기원이 되는 ‘Hermes’에 대해 기술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