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성경해석의 역사
유대교의 밑거름 위에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정하신 때에 이르러 그리스도 예수로 인하여 새롭게 피어난 교회는 초대교회(The Early Christian Church)이래 성경을 해석해 왔다. 예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모세와 선지서들의 말씀을 풀어 설명해 주셨다. 빌립도 이사야서를 읽고 있던 에디오피아의 내시를 만났을 때, ‘네가 읽는 것을 깨닫느냐?’(행8:30)는 대화로 시작하여 구약을 해석해 준 사례를 신약이 기록하고 있다. 신약교회의 성장과 기독교의 팽창(膨脹)으로 복음이 널리 퍼져 나가게 되자 성경의 본문을 해석하는 일은 교회가 처한 당면(當面) 문제였다. 이후 초대교회시대 이래 현대에 이르기까지 복음이 전파된 곳이면 어디든지 성경학자와 신학자에 의해서 신약과 구약의 성경이 해석돼 왔다. 성경해석의 역사는 오늘날 어떠한 교훈을 주는가? 이것은 해석자가 반드시 상고(詳考)해 보아야 할 역사적 과제이다.
1. 유대 문자주의(Jewish Literalism)
유대교 성경해석의 예는 바벨론으로부터 2차 귀환(B.C.458)을 주도했던 학사(Sopher mahiyr) 에스라(Ezra)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였고(스7:6), 학사 서기관 겸 제사장(스7:11-12;느8:9)이었다.
1 이스라엘 자손이 그 본성에 거하였더니 7월에 이르러는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지고 오기를 청하매
2 (생략)
3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오정까지 남자 여자 무릇 알아들을 만한 자의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귀울였는데
4 때에 학사 에스라가 특별히 지은 나무 강단에 서매…
5 학사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저희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6 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느니라
7 …레위 사람들이 다 그 처소에 섰는 백성에게 율법을 깨닫게 하는데
8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
9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10 느헤미야가 또 이르기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11 (생략)
12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그 읽어 들린 말을 밝히 앎이니라(느8:1-12)
에스라는 바사의 아닥사스다 왕 때 2차로 귀환한 유대 백성들의 나태한 신앙을 개혁하였다(스10장). 그 후 무려 12년(B.C.456-444)이 경과된 후에 3 차 귀환을 인도한 느헤미야를 돕기 위해 바사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왔다. 느헤미야가 52일 만에 완공한 성벽의 보수로 인해, 외견상 신앙의 당면 문제는 해결된 것 같이 보였다. 하지만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깊은 영적 갈망을 해결해야 했다. 느헤미야의 인도 하에 귀환(B.C.444년)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은 많은 사회적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에 대한 더욱 철저한 순종을 배워야만 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에스라에게서 율법듣기를 청하였다. 백성들은 마치 한 사람이 행동하듯 일제히 모여 주의깊게 율법을 듣고자 하는 행동을 취하였으나(3절)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 에스라와 함께 한 레위인들이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They read from the Book of the Law of God, making it clear and giving the meaning so that the people could understand what was being read, 8절)하여야 했다.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생활로 인하여 히브리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에스라와 그 따르는 레위인들이 히브리어 본문을 먼저 해석한 후에(보고 번역하여 해석하며, translating at sight and giving understanding) 아람어(Aramaic)로 크게 읽으면서 설명을 덧붙였을 것’이라고 본다. 이후 유대교 랍비들은 이 과정을 ‘탈굼’(Targums, 히브리어 본문의 아람어 설명)의 시작으로 본다. 바벨론 포로시대 이후 이러한 이중적 언어의 상황은 본문에 대한 번역과 해석 설명이 계속 되어야 하는 배경으로 작용되었을 것이다.
유대교는 에스라 시대와 그리스도의 성육신 시대 사이에 흥왕했다. 바벨론으로부터 귀환한 후에 이스라엘은 율법에 대한 문자적 순종으로 우상숭배를 타파(打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여전한 무관심, 형식주의, 사회적 계파 형성으로 인한 정치적 부패는 막지 못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율법의 기본취지를 받들어 문자에 입각한 성경 해석자세를 취하였다. 이러한 성경해석 자세는 후일 바리새주의적인 성경해석의 역사적 상황적 기반이 되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율법에 대한 바른 해석을 하였으나 바리새인들은 지나친 문자주의식 해석법을 적용하는 우(愚)를 범하였다.
이후 유대교의 지도자 계급으로 성장한 서기관들은 성경필사와 성경해석을 위한 시도를 계속하였고, 점차로 이중적 해석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즉 그들은 주어진 본문으로부터 탈무드적인 여러 가지 의미를 찾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만연되므로 성경해석을 전담하는 랍비(Rabbi)가 출현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런 수순이었다. A.D.1세기경 랍비의 수장(首長)격인 ‘아키바’(Aqiba)는 반복, 대화(비유, 은유, 직유 등), 병행, 동의어, 단어, 문자 및 문자의 모양에도 기록된 문자적 의미 외에 어떤 숨겨진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기까지 하였다.
2. 초대교회 시대(The Period of Early Christian Church)
초대교회 공동체는 구약성경을 자신들의 해석 근거로 삼았다. 그들은 율법서(Torah), 선지서(Nebihim), 성문서(Ketubim)의 기록이 자신들의 개종사유에 대한 충분한 근거가 됨을 발견하였다. 그리스도의 공생애에 나타난 복음적 사건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에게 하신 것처럼 율법을 새롭게 읽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들은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신앙이 자기네들의 시대에 이루어진 예수의 사건에 초점(焦點)되어짐을 깨닫고 구약에 대한 새로운 안목을 가지게 되었다. 예수의 제자들이 내적 변화의 토양에 다다르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성경을 상고함이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구약 성경을 해석함으로써 예수를 만났다. 그것은 바로 성경해석을 통하여 깨닫는 일련의 연속된 과정이었다.
그리스도의 최초의 증인들에 의해 새롭게 읽혀진 성경은 해묵은 것이 아니라 당면한 삶의 정황에서 자신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었다. 초기 기독교에 있어 제자들의 진정한 자기 확인은 이스라엘 구속사 전체의 조리 있는 재구성으로부터 이루어졌다. 예수 승천 이후 신약성경이라는 이름으로 사도인 제자들에 의해 기록된 문서나 편지들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작은 무리의 신앙공동체들의 삶과 사고 가운데 구약성경의 해석과 연관된 것이었다. 초대교회 이래 A.D.2세기 중반까지는 성경을 적절하게 주석하려는 시도가 없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경이 권위있는 주석을 요구한다고 보지도 않았다. 그들은 사도나 속사도가 남겨준 편지와 낭독된 구약의 내용을 하나님의 뜻과 말씀으로 듣고 믿었다. 성경해석과 관련하여 최초의 구체적 학파는 A.D.180년 의 ‘알렉산드리아 학파’(Alexadrian School)이다. 알렉산드리아의 학식 있고 부유했던 유대인이며 그리스도와 동시대 인물인 ‘필로’(Philo, B.C.20?-A.D.50?)는 토라(Torah)에 대한 일종의 세련된 주석을 논문형식으로 기술하였다.
일종의 신플라톤주의자인 필로는 헬라의 철학적 사고를 가진 기독인으로서 성경의 모든 문자 배후에는 어떠한 신비한 뜻이 들어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주장은 ‘겉으로 드러난 현상의 배후에 있는 것이 실체’라고 하는 이원론적인 플라톤의 관념주의적 영향에 기인(起因)한다. 필로는 A.D.2세기 후반에 나타나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시조격(始祖格)이 되는 인물이다. 그는 성경해석에 있어 문자의 안개 속에 가리어진 하나님의 영광을 찾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해석자의 임무를 안개와 같은 문자적 의미를 제거하고 그 배후에 있는 실체의 뜻을 밝혀내는 것으로 보았다.
3. 알렉산드리아 학파(Alexandria School)
알렉산드리아는 거대한 항구 도시였으며 철학, 역사, 문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했던 지적 활동의 중심지였다. 이곳은 유명한 도서관의 소재지였으며 성경과 다른 도서들의 사본(寫本)을 제작하는 중심지였다. 속사도 교부시대에 이곳에는 훗날 오리겐이 명성을 얻었던 소위 ‘교리 학교’(catechetical School)가 있었다. 속사도 교부시대에 알렉산드리아에는 다수의 유대인이 있었으며 이집트와 헬라의 여러 신들이 신봉되고 있었다. 필로 이후 이 학파의 중심인물로는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A.D.150?-215), 오리겐(Origan, A.D.185?-254)등을 들 수 있다.
▶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er A.D.150?-215)
그의 생애는 자세하게 알려지고 있지 않으나 아테네에서 수학 후 이탈리아, 시리아, 팔레스타인에서 더 수준 높은 교육을 받기 위하여 여행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3년 과정의 교리학교에서 세례를 대비한 초신자들에게 신앙의 기본을 가르치면서 박식한 지식과 철학 훈련으로 그리스도인의 교육에 헌신하였다. 그는 '헬라인들에 대한 권고'(Exhortation of Greeks), ‘몽학선생’(Paedagogos), ‘교사’(Teacher), ‘논총’(Stromata), ‘구원받은 부자는 누구인가?’(Who Is Rich man That Is Saved?)등 자신의 저술에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다수 인용하며 성경의 권위(權威)를 높였다. 이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메시지를 전한다는 그의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음성이 성경본문을 통해서 말씀하신다는 것을 믿었다. 클레멘트는 성경이 영감으로 쓰여졌다는 확실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성경에 기록된 개개의 단어들은 특별한 어구나 용어의 선택으로 신성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르침을 반영하기 때문에 신성하다고 보았다. 클레멘트는 글자를 따라 단순하게 읽고 본문의 의미를 파악하기보다, 로고스인 말씀이 성육신 전후의 여러 시대와 여러 경로를 통해 말씀하신다고 보았다. 클레멘트는 신약성경에서 명백하게 드러난 것이 구약성경에서는 상징적인 언어로 나타날 수도 있다고 보았으므로 ‘율법은 진리의 그림자’라고 말했다.
클레멘트에 의하면 성경은 다른 문학적 작품보다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높은 수준의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당시의 문학적 특징(알레고리, 수수께끼, 상징, 비유, 은유 등)이 성경 속에도 있으며, 하나님도 그러한 숨겨진 언어로 진리를 전해왔다고 이해하였다. 알레고리(풍유적, 우화주의적)에 대한 클레멘트의 신뢰는 동일한 로고스가 우주에 질서를 주고 성경언어에도 의미를 준다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필로의 영향과 알레고리에 대한 클레멘트의 신뢰 바탕은 그로 하여금 우화주의적 해석의 교조(敎祖)가 되게 하는 배경이 되었다. 클레멘트는 ‘성경의 모든 부분은 구원의 진리를 숨기고 있다’고 간주하였다. 그는 성경을 다섯 가지 측면으로 보았다.
첫째, 역사적의미
둘째, 교회적 의미
셋째, 예언적 의미
넷째, 철학적 의미
다섯째, 신비적 의미
그는 성경의 본문을 이러한 다섯까지 측면으로 보고 각각의 접근적 측면을 인간의 구원과 관련시켜 해석하였다.
성경의 중요한 핵심은 구속사이다. 그러나 성경의 모든 부분이 클레멘트의 관점처럼 반드시 구원의 진리를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구속사관을 강조함으로써 성경의 모든 면을 억지로 구원의 교리에 합치되도록 영해하여 이해하려는 시도가 오늘날에도 자주 발생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런 해석을 통하여도 택하신 자를 구원하실 수 있지만 그 영혼의 구원으로 인해서 잘못된 성경해석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영혼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있기 때문이다.
▶ 오리겐(Origen, A.D.185?-254)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은 클레멘트의 후게자로서 초대교회시대 이후 초기기독교시대에 가장 중요한 성경학자이다. 성경 해석사에서 오리겐은 성경비평(聖經批評)의 아버지로 불리어질 만한 가치를 지닌다. 그는 초기의 여러 기독교 사상가들보다 월등히 많은 저술을 하였다. 기독교 교리와 헬라 문학 및 철학 전통의 혼합으로 이루어진 오리겐의 우주론은 그의 성경해석학 이론과 해석방법을 형성하였다.
오리겐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로마 제국에서 가장 지적(intellectual)이고 문화적(cultural)이며 상업적(commercial)인 중심지였다. 알렉산더 대제는 B.C.331년 이도시를 건설하고 헬라어와 철학, 예술, 문학을 도시문화에 가미하여 도시를 헬라화 했으며 교역을 위해 수 개의 항구를 건설하였다. 오리겐은 알렉산드리아의 다른 그리스도인들처럼 헬라의 고전 교과 과정을 이수하고 성경해석을 위한 필요조건으로서 고전학문에 정진했다. 그의 학문 성취도는 다른 이에 비하여 탁월(卓越)하였다. 이후 그는 수학, 음악이론, 천문학, 기하학의 일반교육과 호머(Homer), 헤시오드(Hesiod), 유리피데스(Euripides)의 문학작품과 교육에 심취하면서 헬라적 사고로 형성되어 갔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교는 헬라문학교육을 이수한 후에 문법교사가 된 오리겐의 성경연구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공동체는 구약성경의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하여 70인 역을 발간하였으며, ‘지혜서’(the book of Wisdom)와 위대한 유대 철학자 필로의 작품들을 번역하였다. 오리겐 시대에 이르러 유대 공동체의 영향력은 감소하였으나 알렉산드리아의 기독교 공동체에게는 여전히 상당한 도전이 되었다. 오리겐의 신학적 작업은 영지주의와 같은 기독교 이단에 맞서서 전개되었다. 오리겐이 대항했던 영지주의의 종류에는 바실리데스(Basilides), 발렌티누스(Valentinus), 마르시온(Marcion)이 있었다. 오리겐은 영지주의의 이론을 합리적으로 반박하고 정경 전체와 교회의 신앙법칙을 보호하려고 노력했다.
오리겐의 대표적인 저술로는 방주(旁註, Scholia, 성경 본문에 대한 짧은 주석들)와 성경주석(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인 주석)과 ‘설교집’(Book of sermon)과 헬라플라(Hexapla, 구약성경 본문의 전진적인 편집으로 구성된 6개 단의 구약성경 편집문서; 히브리어 성경본문, 히브리어 성경의 헬라어 음역, 아킬라의 번역-히브리어의 어순과 어구 관용적 변화 기록 문서, 심마쿠스 번역-유대인 심마쿠스가 히브리어를 보다 읽기 쉬운 헬라어로 번역한 문서, 70인 역의 개역, 테오도션-유대 그리스도인의 번역)를 들 수 있다.
그 중 헥사플라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바로 변증(辨證)이었으나 오리겐은 성경비평 그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본문과 그 경계에 관하여 씨름했던 과제들은 성경자체의 해석이었다. 성경의 영감론, 종말론, 인간론 및 신구약성경의 통일성에 대한 오리겐의 이론은 성경 해석이론에 깊은 영향력을 주었다.
오리겐은 인류에게 필요한 모든 진리는 영감된 성경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몬타누스주의자(Montanism)들의 신비적 황홀경이나 헬라 시인들이 적용했던 무아지경의 불합리한 영감 개념을 거부했다. 오리겐에 있어 성경의 모든 책, 장, 절 그리고 문자는 성령의 역사하시는 호흡이었다. 그는 영감의 활동 중심이 성경의 기록자가 아니라 성경 본문 자체임을 확신하였다. 오리겐은 신구약성경이 하나의 완전한 언약 기록의 두 부분을 나누어 갖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에게 있어 구약성경은 “그림자”(skia)였고, 신약성경은 “형상”(eikon)이었다.
그의 관점에서 구약성경은 신성한 로고스가 성육신하심으로써 성취된 것이었다. 이러한 관점 때문에 그는 구약성경을 기독론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보았다. 오리겐의 모든 구약성경 주석과 설교는 율법과 선지서에서 그리스도를 찾으려는 노력이었다. 오리겐은 성경을 하나의 방대한 알레고리요 모든 세부적인 것이 상징으로 나타나는 놀라운 신비체로 보았다. 그는 성경이 영적인 책이므로 문자적인 의미 속에 감추어진 영적인 의미를 영해함으로써 찾아낼 수 있다고 보았다. 같은 이유로 그는 신약도 문자적인 의미로 받아들일 수 없는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영해되어야만 하는 것으로 보았다.
오리겐은 인간 구조의 삼분설인 영, 혼, 육을 근거로 성경의 모든 부분에도 영적인 의미, 혼적인 의미, 육적인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그의 성경 해석 관점은 성경의 어느 부분을 보든지 문자적 의미인 육적인 뜻이 있고, 도덕적 의미인 혼적인 뜻이 있고, 더 깊은 본질의 의미로서 영적인 뜻이 있다고 본 것이다. 그중에서도 오리겐은 자신의 신념대로 가장 고상한 성경해석으로서 영적인 것을 추구하였다. 그는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보는 것은 가장 열등한 해석이므로 깊은 곳에 있는 영적인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 결과 오리겐은 교회사와 성경해석사를 통하여 알레고리적 성경해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교부가 되었다.
4. 안디옥 학파(Antioch School)
A.D.312년에 순교한 루시안(Lucian)은 안디옥 학파의 창설자로 간주된다. 루시안도 오리겐과 마찬가지로 70인 역 본문을 개정하였으며 히브리어에 탁월하였다. 그는 성경본문의 문자적인 의미를 중요시했다. 라오디게아의 아폴리나리우스(Apollinarius of Laodicea, A.D.310?-390?)는 안디옥의 성경해석가로 가장 칭송(稱頌)을 받던 학자로 제롬도 그의 제자 중 한명이었다. 이처럼 최초의 개신교 해석학파는 시리아의 안디옥에서 발생하였다. 이 학파가 네스토리아주의자들(Nestorians,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428-451년경)로서 안디옥 학파의 기독론을 선도한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 안에 인간 예수와 그 안에 내주하시는 거룩한 로고스 사이의 유기적 결합을 부인함)과의 교통 관계로 인해 정통주의자들에 의해 억압(抑壓)받지 않았다면 교회사는 다른 양상(樣相)을 띠었을 것이다.
안디옥의 기독교 공동체는 유대 공동체의 의하여 영향을 받았으나 유대인들의 축자주의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알레고리주의를 피하고 문자적 의미에 충실한 해석학 이론을 전개하였다. 이 학파의 중심인물로는 루시안(Lucian), 도로테우스(Dorotheus), 디오도루스(Diodirus),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르(Theodore of Mopsuestia), 존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그리고 제롬(Jerome)등이 있다. 이 학파의 해석 이론은 제롬에게 영향을 주었고 알렉산드리아의 알레고리주의를 변화시켰다.
▶ 존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A.D.347?-407)
안디옥 교회의 집사로 섬긴 후에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이 된 존 크리소스톰은 그의 뛰어난 설교 능력에 대한 찬사로 “황금의 입”(The mouth of Gold)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정열적인 설교가요 목사인 크리소스톰은 초기 기독교시대에 가장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영향력 있는 주석가였다. 안디옥에서 고전교육을 받고 성장한 크리소스톰은 법률에 관련된 일에 종사하였으나 다소의 신학자 디오도르(Diodore)에게 큰 영향력을 받아 성경을 철저하게 집중하여 연구하는 방법과 안디옥 학파의 주석방법을 체득(體得)하였다.
크리소스톰의 주석 전집에는 하나의 특별한 책을 계속하여 다루며 긴 기간에 걸쳐 설교한 연속설교와 단일 구절에 대한 특별한 본문 설교를 포함한다. 설교집들은 주석서로 불린다. 그 중 현존하는 것은 마태복음, 요한복음, 사도행전, 바울의 열네 개의 신약서신(히브리서를 바울의 저술로 간주)들에 대한 설교들이 있고, 일반서신(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 요한일서)에 대한 설교는 단편으로만 남아있다.
크리소스톰의 성경해석은 안디옥 학파 학풍의 대표적 성격을 띤다. 그의 성경해석 특징은 논리적이고, 정확하며, 과장이 없고, 절도가 있으며, 문법적이고 상세하며 역사적이다. 그의 이러한 성경해석 색채는 본문을 풍유적, 상징적, 영적 의미를 강조하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확연히 구별된다. 성경신학을 이루는 크리소스톰의 성경해석학적 원칙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겸손’(condescension)과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배려’(considerateness)와 성경의 영감에 대한 절대 신뢰이다.
성경의 영감에 대한 크리소스톰의 신학적 견해는
• 성경이 기록될 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언어로 인간에게 말씀하시기로 결정하셨다는 것과
• 당시의 수신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 계시 언어의 수준을 맞추기로 결정하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바탕 하에 크리소스톰은 ‘인간의 한계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로 하나님의 계시는 그 계시가 전해지는 도구들에 의해 조절되었고, …그 계시를 받은 자들의 능력에 의하여 조절되었다’는 견해를 주장하였다. 나아가 그는 성경을 읽는 사람이 받는 영감은 성경의 기록자에 의해 전달된다는 견해를 정리하였다. 그는 말씀이 읽혀질 때 성경 기록자가 실제로 참석하고 있다고 보았다. 크리소스톰의 성경해석학적 접근은 하나님의 영감과 협동하는 본문의 기록자를 크게 강조하였다. 그 이유는 그가 모든 성경을 옛 선진들의 “유물”로 보았기 때문이다. 모든 성경에 대한 그의 견해는 옛 선진들의 존재를 전하고 그들의 덕스럽고 경건한 삶의 모범에 접근하게 하는 유물이라는 것이다.
크리소스톰의 이러한 해석학적 견해는 A.D.4세기에 주목을 끌기 시작한 성인 숭배의 개념으로 굳어졌고 가톨릭주의자에 의하여 중세시대로 이어졌다. 하나님의 “배려”로 표현된 크리소스톰의 영감교리는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주도권을 높이 평가한다. 그에게 있어 성경의 모든 세부적인 내용은 하나님의 배려와 주권에 의한 영감으로 “정확성”(akribeia)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성경의 배후에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므로 성경의 모든 설명과 모든 단어와 모든 음절도 하나님의 의도된 의미를 나타낸다고 보았다. 크리소스톰은 본문의 어떤 작은 부분도 무시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설교를 듣는 청중(聽衆)들에게도 본문의 작은 문구나 문장을 대충 지나치지 말라고 충고하였다.
이러한 원리들에 더하여 크리소스톰은 ‘자신의 설교집’(Chrysostom, Hom, in Ac)에서 강력하고 반복되는 은유로서 성경을 향한 자신의 해석학적 접근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 성경은 발굴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밭에 감추어진 보물이다.
• 성경은 바닥이 없는 우물이다.
• 성경은 숙련된 뱃사람이 땅에서 하늘에 이르기까지 항해할 수 있는 바다이다.
• 성경은 그것을 묵상하는 자로 하여금 영혼을 먹이시고 성령의 향기를 뿜을 수 있는 꽃밭이다.
• 바울의 서신들은 전 인류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방주로서 노아의 방주보다 훨씬 더 큰 방주이다.
• 모든 성경 특히, 바울 서신은 영혼의 모든 질병을 위한 필수처방의 약을 담고 있는 약 상자이다. 그러나 신중하고도 선택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대부분의 초대교회 성경해석자들의 해석과 마찬가지로 크리소스톰의 구약성경해석도 그의 기독론적 관심과 모형론적인 접근을 생생하게 나타낸다. 그의 바울 서신들에 대한 설교는 성경해석을 적용한 설교 중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바울 서신들에 대한 설교는 각 서신이 쓰여진 역사적 정황에 대한 세밀한 주의와 바울의 논리적(論理的)이고 수사학적(修辭學的)인 논쟁 전개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겸비(兼備)하고 있다. 그의 성경해석은 뛰어나게 변증적은 아니지만 교리와 교회에 대한 오늘날의 논쟁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미칠 만큼 예리하다. 크리소스톰은 이단적인 해석들(마르시온주의 Marcionite, 아리안 주의 Arian, 마니교 Manichian)에 대하여는 강력한 비난과 지적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성경해석으로 인한 이단들을 경계하며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성경은 …단순하고 확실하기 때문에 판단하기 쉽다. 어떤 사람이 성경에 동의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나 만약 성경과 충돌한다면 그는 신앙의 기준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Chrysostom, Hom, in Ac, 4
성경해석사에 있어서 크리소스톰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소위 문법적․역사적 성경해석의 원리(Grammatical-Historical Interpretation Principle)를 처음으로 제창하였다. 그는 성경이 기록된 당시의 역사적 정황을 살펴서 역사적․문법적으로 본문에 접근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성경해석의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 제롬(Jerome, A.D.340?-420)
제롬의 본명은 유세비우스 소프로니우스 히에로니무스(Eusebius Sophronius Hieronymus)이다. 그는 교회학 박사이며 초기 기독교 시대의 가장 중요한 성경 해석자로서 광범위한 저술 활동과 경건하고 금욕적인 삶을 살았다. 제롬의 출생 시 로마제국 내 기독교회는 급격히 변하고 있었다. 기독교인 황제인 콘스탄틴 대제는 기독교를 장려(獎勵)하는 정책을 추진하였으므로 제국 내 곳곳에 많은 교회를 건축하였다. 황제와 그의 후계자들의 호의적인 태도로 교회는 박해를 받는 대신 많은 특권과 사회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기독교는 인기의 상승과 함께 존중을 받게 되었으며,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게 되었다. 교인 중 어떤 이들은 성경을 더 깊이 알고자 하였고, 교회는 몰려드는 교인을 잘 교육을 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적 변화에 따라 교회는 제롬과 같은 학자가 필요하였고 제롬은 성경을 설명하는 주석을 저술함으로써 당시의 상황에 부응하였다.
제롬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오랜 성경해석 전통을 물려받았다. 유대교의 랍비학자들은 성경본문 연구를 위한 해석의 규칙과 기술에 대한 하나의 체계를 발전시켰다. 이 체계는 ‘학가다’(haggadah: 지식, 정보 또는 일화, 도덕을 가르치는 주해의 형식을 띰)와 ‘할라카’(halakah: 절차, 실제적인 문제로서 율법의 이행과 토라가 유대인의 삶을 변화시키는 조건들에 대한 적용형식을 띰)라는 두 표제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제롬은 다량의 학가다 자료를 자신의 저술에 사용했다. 그는 서방교회의 교부들에게 학가다의 반향을 전하는 원천이 되었으며 할라카의 원리도 자신의 성경 주해에 사용했다. 제롬의 마음을 끌었던 유대학자는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였다. 필로는 학가다와 할라카의 전통을 알고 있었다. 그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데에 따른 불가능성과 불합리성을 스토아 학파의 윤리학과 플라톤 학파의 우주론에 근거한 풍유적 방법으로 해석을 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풍유적 성경해석 원칙은 필로로부터 초기기독교 속으로 급속히 퍼졌었다. 알렉산드리아의 교리문답학교(the cathechical School)의 클레멘트와 오리겐은 이 해석법을 광범위하게 사용하였다. 제롬은 오리겐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제롬이 풍유적 성경해석법을 최고의 방법이라고 수긍(首肯)한 것은 아니다. 안디옥 학파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풍유적 성경해석에 대하여 반발을 나타냈다. 안디옥 학파의 초기 역사는 아리우스(Arius)의 스승 루시안(Lucian)과 관련이 있다. 안디옥 학파는 성경본문의 역사적 근거를 주장했고, 성경은 가능한 한 문자적 해석에 충실해야 한다고 보았다. 히브리어에 능통한 루시안은 히브리어 원문과 대조하여 70인 역을 교정했다. 제롬은 루시안의 70인 역 교정을 적극 동의했으며 자신의 성경 본문 연구에 광범위하게 사용했다.
제롬은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를 아는 학자였다. 제롬의 업적 중 가장 탁월한 것은 벌게이트(Vulgate)로 알려진 라틴어 성경번역이다. 벌게이트 번역이 제롬만의 작업은 아니지만 그가 이 번역의 많은 작업을 담당했다는 데는 이의가 없다.
제롬의 작품은 대부분 주석의 형태이다. 그는 갈라디아서 주석에서 주석의 목적에 대하여 말하기를 “분명치 않은 내용을 논하고, 분명한 내용을 말하며, 의심스러운 내용을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대부분의 주석에서 제롬은 자신이 인용한 과거의 많은 학자들을 인정했다. 제롬은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에 큰 가치를 두었다. 그는 성경의 역사적인 의미에 대하여는 안디옥 학파의 강조점을 따랐다.
그러나 그가 성경해석적 접근에 있어 풍유적 또는 영적 방법을 전혀 무시한 것은 아니다. 제롬의 풍유적 해석은 마태복음 주석 등에서 오리겐에게서 많은 것을 직접 취(取)했고 문자 그대로 차용(借用)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제롬은 오리겐주의자와의 논쟁(A.D.393-402) 이후 ‘나의 스승’이라고까지 자랑스럽게 말했던 오리겐의 신학을 이단이라고 공표했다. 제롬은 ‘에레미야 주석’에서 오리겐을 ‘저 우화작가’라고 비난하고 오리겐의 이단적인 견해를 맹렬하게 공격한 후 오리겐의 풍유적 해석과 거리를 두었다.
제롬의 성경해석학적 자세는 절충적(折衷的)이다. 그는 다른 이들의 작품을 부지런히 연구하여 각 자의 가장 좋은 점을 끌어내려고 노력하는 한편 오류를 적극적으로 배제(排除)하고자 했다. 제롬의 이러한 자세는 알렉산드리아 학파, 안디옥 학파, 유대교의 문자주의의 해석을 받아들이는 학자적 배경이 되었다. 제롬이 안디옥 학파에서 배운 것은 성경해석자는 먼저 성경의 문자적 역사적으로 명백한 의미를 연구하고 설명하여야 하며 그 다음에 그 의미를 넘어 보다 깊은 영적을 해석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제롬은 알렉산드리아 학파 중에서도 오리겐의 알레고리적 해석을 많이 차용했다. 제롬이 안디옥 학파의 저술들보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저술(著述)들을 훨씬 더 자주 인용한 이유는 알렉산드리아 학파를 더 많이 의존해서가 아니라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주석을 보다 쉽게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제롬의 저술 활동시기에 안디옥 학파는 아직 초창기 단계에 있었으므로 알렉산드리아 학파보다 발간된 저술이 적은 상태에 있었다. 또한, 유대교의 주석에서 제롬은 구약성경 원문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그는 초대 교부들 중에서 독특하게 자신의 구약성경 주석의 근거로 히브리어 성경을 사용하였으며 성경해석의 최고 권위자로 인정받았다.
5. 어거스틴(Augustin of Hippo, A.D.354-430)
어거스틴은 자신의 명저 ‘참회록’(Confessions)에서 그리스도인 어머니 모니카의 신앙적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복음서를 접했다고 말한다. 그는 열아홉 살에 현재 소실된 키케로(Ciceronian)의 소책자 ‘호르텐시우스’(Hortensius)를 읽고 키케로와 성경 사이에서 갈등(葛藤)을 겪었다. 그는 키케로식 사상 표현의 특성이 성경에는 없다는 이유로 성경을 덮고 9년 동안 마니교(Manichaean)의 한 분파에 빠져 있었다. A.D.383년 바울의 서신을 읽고 마니교의 영향력에 벗어날 즈음, 그는 밀란의 감독 암브로스(Ambrose)의 설교에 매혹되어 기독교에 심취(深趣)하기 시작했다. 심한 문자주의를 신봉한 어거스틴이 마니교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암브로스는 풍유적 해석으로 구약의 많은 부분(특히, 창세기)을 그에게 이해시켰다.
이후 어거스틴은 암브로스와 심플리키우스(Simplicianus)에게서 성경의 교리와 주해교육을 받고 기독교 사상가요 신학자가 되었다. 어거스틴은 저서 ‘기독교 교리에 관하여’(De Doctrina Christiana)에서 ‘기호이론’(theory of signs)을 발전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기호에 대하여 “감각에 비추이는 인상과는 별도로 스스로 인간의 사고 속에 다른 어떤 것을 떠오르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는 연기는 불에 대한 자연적 기호이며 습관적 기호(conventional signs)는 “살아있는 피조물이 서로에게 교감하는 도구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자신의 기호이론에서 해석학적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의 철저한 일관성(一貫性)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후 다른 성경학자들에 의하여 그의 기호 이론은 무시되었다. 어거스틴의 성경해석을 위한 주된 원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 성경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기본 원리는 참되고 경건한 기독교 신앙이 다.
• 성경을 해석하기 위한 기본적 전제로서 문자적 역사적 관점을 중요하게 보아야 한다. 그러나 성경의 많은 부분은 문자적인 동시에 알레고리적이다.
• 알레고리적으로 해석된 본문의 기초는 문자적이고 역사적인 의미 위에 서 있어야 한다.
• 구약은 기독론적 문헌이므로 당연히 기독론적으로 해석적 접근을 하여야 한다.
• 주석가의 임무는 성경에 의미를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성경으로부터 의미를 끌어내는 것이어야 한다.
• 성경해석 시 믿음의 유비(analogy of faith)로서 참된 정통신앙의 신조를 참조해야만 한다.
• 성경은 의미의 망이므로 어떤 구절도 하나의 단위 자체로 연구될 수 없다. 그러므로 동일한 주제에 대한 다른 곳의 기록과 정통신앙의 신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 성령은 성경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지식의 대용물이 아니다. 그러므로 해석자는 성경 이외의 해석적 도구(원어, 지리학, 역사학, 음악, 수리학, 자연과학 및 고대철학 등)를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 본문의 의미가 불분명한 구절은 분명한 구절보다 해석의 위계를 낮게 두어야 한다.
• 성경의 본문은 어떠한 경우에라도 다른 부분의 본문과 모순 되게 해석될 수 없다.
어거스틴은 이러한 해석원리는 나름대로 훌륭한 점이 있지만 그는 자신의 영적 입장으로 인해 성경에 대한 알레고리적 해석에 지배되었다. 그의 알레고리적 해석 측면은 스승인 암브로스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그의 알레고리적 해석의 근거는 고린도후서 3:6의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이다. 어거스틴은 이 구절에서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설교를(말씀을) 듣는(보는) 것>은 죽이는 것이요, 알레고리적(풍유적) 영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살리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어거스틴은 ‘성경해석자의 내적 심령이 신앙으로 충만’하여야 하고, ‘구약의 내용을 기독론적으로 보아야’ 하며, ‘건전한 해석원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성경해석 방법은 알레고리적이었다. 그의 알레고리적 해석의 대표적인 것은 오리겐의 해석을 발전시킨 선한 사마리아의 비유이다. 어거스틴은 이 비유를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 예수살렘에서 여리고를 향해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쓰러진 자는 죄인의 모형이다.
• 그 옆을 지나가는 레위 인이나 제사장은 율법의 모형이다. 그러므로 율법에 의한 어떤 종교적 행위로서는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
• 선한 사마리아인은 예수의 상징이다.
• 포도주를 상처에 붓는 것은 생명의 피를 쏟아 죄인을 살리는 예수의 구속사역이다.
• 강도당한 자를 주막으로 데려가는 것은 죄인을 교회로 인도하는 것이다.
•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 갚겠다는 것은 예수의 재림을 뜻한다.
어거스틴의 이러한 해석은 교회의 역할에 대한 전통적 인식을 나타내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성경의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해야 하는 뜻을 찾아야 한다’는 사랑의 계명을 성경해석의 중요원리로 확신했다. 이러한 성경해석 관점은 신선미와 활기를 주었지만 후대 성경해석학자에 의하여 비판받았다. 그 이유는 성경 전체에 배어 있는 원 기록자의 뜻을 분명하게 밝혀주기 보다는 모호하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당시 기독교 사회에서 최고의 지성이요 사상가요 신학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영향은 이어지는 중세교회시대 약 1000년 동안 풍유적 해석이 성행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6 중세교회시대(The Mid-church Period)
초대교회 시대 이후 속사도 교부 시대에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디옥 학파가 협조 대립하면서 알레고리적(풍유적, 우화주의적) 해석과 문자적(문법적), 역사적 해석이 공존했다. 중세에는 창조적인 학문 활동이 거의 없이 교부들의 저술을 연구하는 데 그치면서 성경해석의 경향은 전통의 영향 하에 있었다. 아리우스(Arius, A.D.250-336년 경; 리비아 출신의 알렉산드리아의 장로로서 인성을 가질 수 없는 기독론을 주장하므로 A.D.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의 영향을 받은 네스토리우스 논쟁으로 안디옥 학파가 점차로 퇴조(退潮)함에 따라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영향을 받은 알레고리적 해석이 성행했다.
중세시대의 주요한 성경해석자로는 (클레르보의 버나드, A.D.1090-1153;토마스 아퀴너스, A.D.1224-1274;리라의 니콜라스,A.D.1270-1349) 등이 있다. 중세시대(A.D.600-1517)에 접어들면서 성경을 풍유적으로 신비하게 해석하는 경향이 증가함에 따라 성경은 성령의 특별한 감동을 받은 사람이나 사제들이나 해석할 수 있다는 특권적 의식이 발생하였다. 사제급들이 자신들의 특권의식을 행사하려고 교회제도와 행정을 운영하였으므로 평신도들은 성경의 오묘하고 신비로운 뜻을 깨달아 알 수 없다는 의식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성직자들이 성경해석을 교권행사의 도구로 사용했음을 의미한다.
중세시대 교회의 이러한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도 예외는 있었다. 파리의 빅토르 수도원 학파(School of the Abbey of St.Vitor)의 앤드류(Andrew, A.D.1110-1175), 위고(Hugo, A.D.1096-1141), 리처드(Richard)는 성경을 문자적, 역사적으로 해석하려는 연구를 계속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성경 해석 원칙을 중시하지 않으면 성경을 건전하게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빅토르 학파 사람들은 ‘신비적이거나 영적인 의미는 성경이 문자적으로 해석될 때까지 결코 참되게 알려질 수 없다’고 보았다. 이외에도 13세기의 대표적인 종교철학자이며 가톨릭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너스(Thomas Aquinas, A.D.1224?-1274)는 스콜라 철학의 영향을 받아 철학적으로 성경을 접근한 설교를 많이 했으나 그는 문자적, 문법적, 역사적 성경 해석원리를 중시하였다.
중세시대의 일반적인 성경해석 관점은 성경의 각 본문이 네 가지(때로는 일곱 가지) 의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성경 본문의 사중 의미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 문자적 의미(letter): 하나님과 믿음의 조상들이 한 일을 보여줌
․ 풍유적 의미(allegory): 하나님 말씀의 오묘한 비밀을 보여줌
․ 도덕적 의미(moral): 하나님의 말씀 중 신자의 일상생활의 법칙을 보여줌
․ 신비적 의미(anagogy): 하나님의 말씀 중 신자의 투쟁이 종결된 곳을 신비적으로 보여줌
사중적 의미의 한 예로서, 성경 본문의 ‘물’은 문자적으로는 보통의 물, 풍유적으로는 세례의 교리, 도덕적으로는 정결한 생활, 신비적으로는 하늘 도성 예루살렘의 생명수로 해석한다. 또 다른 예로서, ‘예루살렘’(갈4:22이하)은 문자적으로는 역사적 도시 예루살렘, 풍유적으로는 그리스도의 교회, 도덕적으로는 인간의 영혼, 신비적으로는 하늘의 예루살렘을 가리킨다고 해석하였다.
중세에는 하나님의 말씀 중 신비적인 것을 찾기 위하여 노력했으므로 무질서한 성경해석이 성행하였다. 성경해석의 초점은 종교 의식의 전통과 교리에 적응되어지는 것으로 맞추어졌다. 그리고 중세시대의 수도사 단체에 따라 성경해석 방법이 약간 상이한 점도 있었다. 그 예로서, 프란시스칸(Fraciscan) 수도사들은 성경의 사중적 의미를 동등하게 중요시하였으나 도미니칸(Dominican)수도사들은 문자적 의미를 가장 중요한 해석의 기초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만연된 풍유된 해석법에도 불구하고 리라의 니콜라스(Nicolas of Lyra, A.D.1270-1349)는 문자적 해석에 충실하였다. 니콜라스는 중세시대와 종교개혁시대 사이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하였다. 그는 랍비식 연구에 영향을 받아 문자적 의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불가타역이 히브리 원문에 항상 일치되지 않음을 인하여 비판을 가하였다. 니콜라스는 성경 본문의 사중 의미를 인정했지만 나머지 세 가지 의미는 문자적 의미의 기초 위에 세워져야 함을 주장하였다. 그의 이러한 성경해석적 견해는 저술로 남겨져 약 200년 후의 루터(Luther)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루터가 수학(修學)했던 에르푸르트 대학은 니콜라스의 성경해석 체계를 적극 수용하였다. 루터는 니콜라스를 존경하였고 그의 성경해석 체계에 크게 고무되었다.
7. 종교개혁시대(The Religious Reformation Period)
안디옥 학파의 문자적, 문법적, 역사적 해석 접근 방식은 중세시대의 빅토르 학파에 전승되었고, 이는 종교개혁자들의 본질적 해석 원리가 되었다. 종교개혁 이전 서방 문화권에는 교회의 개혁에 앞서 해석학적 개혁(hermeneutical Reformation)이 선행되었다. 이러한 해석학 개혁의 배경은 르네상스(A.D.14세기 말에서 16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전 유럽에 퍼진 예술과 학문상의 문예부흥운동)와 직접적 관련이 있다. 르네상스가 중요한 것은 고전 연구의 재발견이 시작되었다 데 있다.
고전 연구가 성경해석에 미친 영향은 성경을 하나의 책으로 발견하는 일이었다. 고전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성경은 신성한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하나의 책이라는 인식이 점차 확산되었다. 이러한 인식의 확산은 성경의 해석적 접근 방식에 직접적 영향을 주었다. 16세기 초부터 17세기 말까지의 성경해석은 르네상스와 관련된 문헌학의 발달과 종교개혁과 관련된 신학적, 교의학적 발전으로 인하여 중세시대와는 확연히 구별된다.
종교개혁시대(A.D.1515-1648)는 성경의 권위를 최고의 유일한 위치로 회복시키는 시기였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신앙의 표현은 ‘오직 믿음’(Sola Fide)와 ‘오직 성경’(Sola Scriptura)과 ‘오직 은혜’(Sola Gratia)였다. 개신교도(Protestant)들에게 교황이나 로마가톨릭 공의회의 주장은 성경에 의하여 명백한 기록에 기초하지 않는 한 타당성이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강조점으로 인하여 성경해석의 방법과 해석의 관습은 크게 발전되고 개선되었다.
종교개혁이전 교회의 상황은 성직자의 타락이 있었고, 위클리프(John Wyclif, A.D.1324-1384; 성경이 오직 신앙의 표준, 교황의 속죄권 부인, 화체설 배격을 역설)와 후스(Jan Hus, A.D.1367-1415; 교황정치의 부패를 공격, 속죄권 판매를 반대)등의 순교적 투쟁이 있었다. 종교개혁의 리더 그룹으로는 루터, 칼빈, 쯔빙글리외 부처(M. Butzer, A.D.1491-1551), 불링거(H.Bullinger,A.D.1504-1575),멜랑히톤(P.Melanchton A.D.1497-1560). 베자(T. beza, 1519-1605)등이 있지만 그 중 루터와 칼빈이 가장 탁월하였다.
▶ 마틴 루터(Martin Luther, A.D.1483-1546)
종교개혁에 있어 루터의 탁월한 업적은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정직한 마음과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로 접근하면, 누구든지 성경에서 교훈을 받을 수 있다는 평범하고도 심오한 진리를 깨닫고 ‘만인제사장론’을 역설하였다. 루터는 원어에 해박(該博)한 지식적 바탕 하에 성경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였다. 그는 로마서 및 시편에 관한 설교와 강의를 통해 로마가톨릭교회의 전통주의와 풍유적 해석에 불만을 갖게 되었다. 루터의 이신칭의에 대한 경험은 성경 전체의 중심적 강조점이었다. 이로 인하여 그는 중세시대의 사중적 해석원리를 포기하였다. 루터는 인위적인 성경해석의 복합성(utility)을 포기하고,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권리를 제창하였다. 그의 독일어성경 번역작업은 이러한 신앙적 바탕 위에서 이룩된 것이다. 그는 성경을 최고의 권위에 두었던 어거스틴의 격언을 인용하면서, “성경이 성경 자체의 해석자이다”(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라는 신념을 굳게 하였다.
루터의 성경해석 관점은 문자적 또는 문법적 의미와 영적 심층 의미 간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었다. 루터의 관점에서 풍유적 해석법은 심층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해석자의 교묘한 ‘기만행위들’(monkey tricks)로 간주되었다. 루터는 성경의 의미를 간단하고 분명한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성경에 어려운 구절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경전체의 주된 주제는 상식(common sence)을 갖춘 일반적인 사람의 지성으로 이해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적 의미의 참된 심층에 도달하기 위해서, 루터는 성령의 조명에 의한 경험을 강조하는 신중함도 잃지 않았다. 루터는 성경해석을 위한 주된 원리로서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 기본 원칙을 제창했다.
첫째, 문자적 해석
둘째, 문맥의 중요성에 의한 해석
셋째, 역사적 상황에 의한 해석
넷째, 그리스도 중심의 기독론적 해석
다섯째, 개인의 해석적 자유
루터는 이러한 다섯 가지 기본원칙을 자신의 주석과 저술에 적용했지만 풍유적 해석을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었다.
▶ 존 칼빈(John Calvin, A.D. 1509-1564)
칼빈은 위대한 성경해석자이자 신학자이다. ‘오직 성경’이라는 루터의 이론적 원칙은 칼빈에 의하여 더욱 심화 발전되었다. 칼빈은 ‘오직 성경’이라는 형식적 원칙과 ‘오직 믿음’ 그리고 ‘오직 은혜’이라는 실천적 원칙에 있어서 루터에 동의하였다. 그는 당시 유행하던 ‘스콜라 신학자들’의 복잡한 언어유희나 해석학적 궤변을 단호히 배격함과 아울러 거칠게 비판했다. 칼빈은 오직 성경 말씀에 바탕을 둔 신학을 전개하는 측면에서 루터보다 더 일관적이었다.
칼빈은 성경을 문법적 역사적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그는 허탄한 주관성을 배제하기 위하여 성경의 영감에 의한 성령의 사역과 성경의 해석자에 대한 성령의 조명을 하나로 결합하였다. 칼빈은 결코 인간의 지적인 탐구를 하나님의 교훈으로 대체시키지 않았다. 칼빈은 성경 속에 내재되어 있는 사소한 것에 대한 부정확성(마27:9와 슥11:12-13의 예레미야, 마23:35와 대하24:21-22의 바라갸와 여호야다의 문제)과 엄밀성에 대한 결여(창23:9와 행7:16의 아브라함과 야곱)를 인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석에 대한 칼빈의 표준은 명료한 명쾌성과 간결성이었다.
칼빈 사후 칼빈의 신학을 공격했던 알미니우스(Jacobus Arminius, A.D. 1560-1609, 제네바의 베자에게 배운 네덜란드의 신학자, 암스테르담의 목회자, 라이덴 대학교의 신학 교수로서 알미니안 논쟁의 출발점이 된 자)도 칼빈의 주석을 극찬하였다. 그 이유는 성경해석에 있어서 칼빈을 비길 사람을 없다는 알미니우스의 확신 때문이었다. 알미니우스는 칼빈의 주석들(요한2,3서와 요한계시록을 제외한 성경 전체)에 대하여 이제까지 교부들을 통해 전해 내려온 어느 것보다 탁월하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았다.
칼빈의 성경해석 관점은 성경의 기록자가 의도한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밝히는 것이 성경해석자의 임무이며, 성경 자체는 본래적으로 간단명료하게 기록되었다고 보았다. 칼빈은 무엇보다도 해석자의 상식(common sence, plain literal sence)을 가장 중요시하였다. 칼빈은 성경 해석을 위한 주된 원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문자적 문법적 해석의 원칙이다(그는 알레고리 해석을 사단적인 것으로 취급하여 배척하였다).
둘째, 역사적 맥락을 중요시하는 해석원칙이다.
셋째,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원칙이다.
넷째, 성경본문의 의도인 ‘원 기록자의 의도’(author's intent)를 중요시하는 원칙이다.
다섯째, 성경 본문 자체의 명료성을 중요시하는 원칙이다.
그는 중세교회 우화주의자들의 막연한 여러 의미설(사중의미설)을 배척하고 성경 본문이 가지는 명백한 주제를 밝히고자 하였다.
8. 종교개혁 이후시대(After The Religious Reformation Period)
칼빈의 종교개혁 사역이 급물살을 탈 때, 로마가톨릭교회는 트렌트 공의회(The Council of Trent, A.D. 1545-1563)를 개회하여 로마가톨릭의 교리와 표준을 밝히는 신조를 만들고 개신교회(Protestantism)를 극력 비난하였다. 이에 대하여 개신교회는 자체의 신앙 신조를 제정하여 로마가톨릭에 대응하였다. 종교개혁의 여파로 유럽사회에서는 신학적 저술들이 많이 발간되었다. 이후 17-18세기에는 인간의 이성이 강조되면서 많은 철학자들에 의하여 합리론(合理論)과 경험론(經驗論) 그리고 이성론(理性論)이 크게 대두되었다. 이성적 추상적 신학 저술이 발간되면서, 신학자들은 자신들의 신학을 주장하기 위한 성경 연구에 몰두하였고 신학적 ‘독단주의’(Dogmatism)로 빠져들었다.
▶ 경건주의학파(Pietism)
경건주의학파는 교리를 내세워 서로 논쟁을 일삼는 16세기말 - 17세기 초 신학계의 반향으로 나타났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히 문자적, 문법적, 역사적으로 분해하여 연구하는 것은 신령한 사상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아는 것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그들의 성경해석을 위한 접근 방식은 자신의 죄를 책망하며 죄 지은 것을 애통해 하며 기도하는 태도로 진리의 말씀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스페너(Philipp, Jakob Spener, A.D. 1635-1705)는 이 학파의 지도자로서 자신의 저작 ‘경건한 열망’(Pia Desidera, A.D. 1675 출간)에서 불필요한 논쟁을 그치고 기독교의 상호관심과 선행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학파의 두 번째 지도자는 프랑케(A.H. Francke)로서 언어학자이자 주석가였다. 그는 안톤(Anton)과 샤테(Schade)와 함께 ‘성경연구를 사랑하는 모임’(Collegium Philobiblicum)을 조직하고 성경의 실천적 의미를 강조하였다. 프랑케는 할레 대학에서 경건학파의 지도자 역할을 하였다. 그는 성경을 자주 읽을 것과 주석이 성경 연구 자체에 대체하지 않도록 신중히 사용할 것과 오직 중생한 자만이 성경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경건학파는 성경 연구에 큰 공헌을 하였으며, 모라비아 교도(Morabian)들과 진젠도르프(Zinzendorf)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 학파의 전통은 훗날 청교도(Puritan), 웨슬레(Wesley),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매튜 헨리(Mathew Henry) 그리고 퀘이커 교도들에게 이어졌다. 그러나 이 학파의 성경해석에는 몇 가지 약점이 있었다.
첫째, 성경본문의 영적 진리나 적용을 위한 노력에 치중하므로 문자적 역사적인 일차적인 의미가 훼손되었다.
둘째, 성경본문에서 영적 축복이나 경건한 관점을 내세우기 위하여 알레고리적이 되거나 과도한 모형론(특히, 구약의 경우)에 의한 왜곡이 발생하였다.
셋째, 성경본문에서 ‘내적 조명’(inward light)을 강조하므로 문법적, 역사적 해석을 버리고 주관적 해석으로 치우쳤다.
▶ 합리주의 학파(Rationalism)
합리주의 학파는 인간 이성의 판단 능력을 중요시하였다. 홉스(Hobbes, A.D. 1588-1679), 스피노자(Spinoza, A.D. 1632-1677)등 이 학파의 대표자들은 인간의 이성의 판단능력을 중시한 나머지 전통적으로 지지되어 온 계시에 대한 불신을 널리 전파하였다. 이 학파는 성경에 기록된 초자연적 이적을 거짓과 속임수의 표본이라고 단정하여 이성적 비판을 가하였다. 결국 하나님의 특별 계시인 말씀이 인간에 의한 이성적 판단을 받게 된 것이다. 그들의 합리주의에 의한 이성적 전제는 성경에 대한 극단적 비평을 이끌어 내며 자유주의학파에 영향(影向)을 주었다.
9. 자유주의 학파(Liberalism)
성경에 대한 극단적 취급 방식은 19세기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었다. 자유주의 이전시대에는 성경의 신적기원이 강조되었지만 프리드라히 실라이어마허(Friedrich Daniel Ernest Schleiermacher, A.D. 1768-1834)로 대표되는 이 학파는 성경도 인간의 저술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나아가 다윈(Darwin)의 진화론적인 영향과 헤겔(Hegel)의 변증법적 역사 이해의 영향으로, 그들은 성경을 이스라엘 종교의식의 진화론적 발전을 기록해 놓은 것으로 취급하였다. 이 학파의 성경해석 방법에 나타난 몇 가지 약점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첫째, 성경 역시 인간의 기록에 의한 문헌으로 간주되므로 자연의 규칙과 법칙을 초월하는 성경의 기적을 수용할 수 없다고 보았다. 같은 논리로 죄, 인간의 부패성, 동정녀에 의한 탄생, 그리스도의 대속을 위한 죽음, 지옥에 관한 교리는 인간의 도덕적 감각에 대치되므로 배척되었다.
둘째, 전통적으로 지지되어온 성경의 영감성(축자적, 유기적, 역동적 완전 영감)과 초자연적 교리는 배척되었다.
셋째, 인간의 이성에 의하여 배척되는 성경 기록상의 기적, 신탁 등 초자연적인 것은 신화, 민간전승(forklore) 또는 시적 기교로 다루어졌다.
넷째, 원시적이고 미숙한 이스라엘 종교가 진화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의 절정으로 나아간다는 기독교의 진화개념이 도입되었다.
다섯째, 성경의 많은 신학적 진술이 고대 용어의 잠정적이고 일시적인 형태를 지닌 것으로 주장함으로써 주요 교리가 약화되거나 파괴되었다. 이들은 신약교리의 본질을 현대 용어로 재형성하기 위하여 구약과 신약의 문화의 개념과 이미지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보았다.
여섯째, 성경의 유일성을 단절시키고자 역사적 해석은 축소되었다. 이들에게 있어 역사는 신학적 신념을 창조 해낸 사회적 환경을 이해하는 정도로 간주되었다.
일곱째,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A.D. 1724-1804)에 의한 인식론과 헤겔에 의한 이념(idea) 정화의 과정이 성경해석에 영향력을 끼쳤다.
이들의 논리 중 특히, 헤겔의 이념정화 과정으로서 정(thesis), 반(antithesis), 합(systhesis)의 원칙은 종교를 포함한 사회문화 전체에 적용되었다. 율리우스 벨 하우젠(Julius Welihausen, A.D.1844-1918)은 이 원칙을 구약 해석에 적용하였고, 스트라우스(David Friedrich Straus, A.D.1808-1874)와 튜빙겐 학파는 신약에 적용하였다.
10. 신정통주의 학파(Neo-Orthodoxy)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로마서 주석을 출간한 칼 바르트(Karl Barth, A.D.1886-1968)는 성경해석의 신기원을 이룩한 신학자로 각광받았다. 20세기의 1, 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19세기 전반에 걸쳐 득세한 자유주의 학파의 낙관론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자유주의 신학의 약점이 드러난 상황에서 당시 개신교 신학계는 정통주의 성경관과 중간 입장을 취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롭게 등장한 신정통주의는 성경이 인간의 종교적 의식의 산물이라는 자유주의 견해나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정통주의 견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인간의 증거이다’라는 견해를 주장하였다. 이 학파는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말로써 계시하지 않고 자신의 임재로만 계시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사람이 성경 말씀을 읽고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임재에 반응을 보일 때 계시가 발생한다고 보았다. 이들의 관점에서 계시는 역사의 한 시점에서 발생하여 사람에게 성경 본문으로 전수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실존적 반응을 수반해야만 하는 현재적 경험이었다.
이 학파는 성경의 무오설을 수용하지 않았다. 이 학파의 관점에 의하면 성경기사에는 잘못이 있을 수 있으며, 약간의 잘못이 있다고 하더라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계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계시에 대한 인간의 실존적 관심과 반응이 더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객관적인 계시에 특별한 강조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러한 성경관은 성경 66권에 대한 계시의 객관성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성경해석의 기초가 흔들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이 학파의 지도자인 칼 바르트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의 유일한 자료임을 인정하였다. 하지만 그는 성경 본문의 내용이 자기에게 말할 때에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말함으로써 성경이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지 못하였다. 이 학파의 성경해석 접근 방식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첫째, 계시의 원리에 있어서 성경의 ‘무류성’(infallibility)과 ‘무오성’(inerrancy)을 인정치 아니하므로 계시에 관한 전통적 개념과 역사적 전통적 영감론이 배척되었다. 그 결과로서, 인간의 능력으로 확인할 수 없는 진리의 전달로서의 계시가 배척됨으로써 성경 계시는 인간에 의해 복제된 ‘명제적 계시’(propositional revelation)로 취급받았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타난 명제적 계시는 신정통주의의 전형적인 공격의 논제 대상이 되었다. 또한, 전통적 역사적 영감론이 배척되므로 축자영감을 믿는 사람은 기계적 또는 구술적 영감이론을 범하는 것이 되어 ‘성서광신’(bibliolatry)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들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나님을 위해 말씀하실 수 있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한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적 임재로 보았다. 이들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의식 속에 임재하신 하나님 자신이며, 말씀의 객관적 형태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자비, 은혜 그리고 화해 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이셨다. 그러므로 이들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에게 말씀하시고, 내가 믿음으로 반응할 때 계시는 생겨난다.’고 보았다.
결과적으로, 이 학파에게 있어 성경은 하나님의 직접적 계시가 아니라 계시에 대한 기록이요 증거이지 하나님의 직접적 말씀은 아닌 것이다. 이들은 ‘사람이 성경을 신뢰할 수는 있지만 오류가 가능한 계시에 대한 증거이므로 사람이 계시를 온전히 체험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결코 순전한 전달을 소유하지는 못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들은 ‘성경해석자는 기록된 말씀 이면에 있는 말씀의 의도를 추구해야 하므로, 인간의 오류 가능한 성경의 말씀을 파고 들어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원래의 증거를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둘째, 성경의 가르침은 그 전체성(全體性)에 대한 고려에 의해 결정되므로 부분적인 본문에 대한 세련되지 못한 문자적 해석은 성경의 참된 의미를 드러내지 못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셋째,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이므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만이 구속력(拘束力)이 있는 것이며, 교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것으로만 간주되었다. 이들의 견해에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와 조화되지 않는 모든 것은 정당한 증거가 아니었다. 특히, 루이스(Louis)는 구약에서 하나님에 관한 것 가운데 그리스도인에게 구속력을 가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했으며, 부루너(Brunner)는 기독론적 출발을 가지지 않는 교리(창조와 죄 등)는 기독교적 교리가 아니라고 까지 주장하였다.
넷째, 성경은 ‘특별한 역사’(Heilsgeschichte) 곧 구속의 역사로서 일부는 형태상 신화적이며 또 일부는 실제적 역사로 간주되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성경에 대하여 실존적 접근(열심, 기대, 순종의 정신, 열정적 마음 등)을 할 때 계시가 생겨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신정통주의자들의 관점에서, 성경은 역사를 포함하고 있지만 일차적으로 역사는 아니었으며, 신학을 내포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신학책이 아니었다. 그들의 실존적 해석 접근 방식으로서 성경은 가장 종합적으로 표현된 인간의 삶이었으며 하나님에 관한 책으로 간주되었다.
다섯째, 신화(神話)는 신학적 전달의 한 형태로 보아 우주의 창조, 인간의 창조, 인간의 무죄성, 인간의 타락, 그리스도의 재림 등은 역사적 옷을 입힌 신화로 간주되었다. 이들은 정통주의의 문자적 해석이나 자유주의의 진지하지 못한 해석을 배제하고 그 중도(via media)로서 신화적 해석이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들은 성경의 신화가 인간의 상상력(想像力)과 공들여 만든 전승의 부산물(副産物)인 이방의 신화나 고전에 나타나는 신화와는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이들의 관점에서, 성경의 신화는 인간의 종교적 실존에 관한 초월적인 것과 역사적 형태를 통해 제시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진지하고 의미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여섯째, 하나님에 대한 진리는 변증적 혹은 역설적으로 인간에게 나타나야 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들의 관점에서 어떠한 교리는 ‘주장’(assertion)과 ‘반대주장’(counter-assertion)을 통해 변증적으로 정의되어야만 하므로 주장과 반대 주장은 인간에게 역설적으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이러한 논리는 헤겔과 키에르케고르로부터 왔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하나님의 내재성과 논리적 합리성의 사고 체계를 구성했다. 그는 범신론자로서 자신의 논리에 대한 충만함의 확신으로 ‘범논리주의’(pan-logism)에 심취하였다. 키에르케고르는 ‘하나님의 초월성’(divine transcendence)과 ‘논리적 역설’(logical paradox)을 제기하였다.
11. 구속사 학파(The Heilsgeschichtiche School)
신정통주의가 성경해석의 신기원을 이룬 것처럼 각광을 받은 후, 현대의 신해석학파 사이에 구속사학파가 성경해석의 한 흐름을 주도하였다. 구속사학파는 고전적 정통주의와 19세기의 자유주의 사이에서 성경신학의 새로운 종합을 찾고자 하였다. 이 학파의 기수로 인정받는 독일 에를랑겐(Erlangen)출신의 폰 호프만(Von Hoffmann)은 성경에 대한 체험적 신학을 추구하며 비판적 연구를 전개했던 슐라이어마허(Scheilermacher)의 통찰력과 루터의 신학을 결합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는 종교적 권위를 중생의 체험, 교회와 역사의 실재, 성경의 토대 위에 세우고자 하였다.
성경해석학에 대한 그의 공헌은 성경을 거룩한 역사로서 ‘구속사’의 개념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호프판의 구속사에 대한 통찰력은 역사를 영원한 절대자의 자기표현으로 보는 쉐링(Schelling)의 영향을 받아 세워졌다. 쉐링은 계시에 대하여 과거를 돌이켜 미래로 나아가는 역사의 고등형태로 보는 한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로서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역사의 최고내용으로 보았다. 이러한 쉐링의 영향 하에 호프만은 역사적 사건을 과거의 뿌리, 현재의 의미, 미래에 대한 전조(前兆)의 개념 하에서 바라보았다. 호프만의 성경에 대한 역사적 관점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첫째, 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이다.
둘째, 성경의 각 예언은 직접적인 역사적 문맥 속에 있다.
셋째, 성경은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의도된 성취의 기록이다.
이것은 성경의 각 책을 거룩한 역사 즉, 구속사 안에 하나로 결속시키는 해석학의 업적(業績)이었다. 성경에 대한 유기적 견해가 조직적인 방식으로 주해에까지 적용된 것이다. 이 학파의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의 중심이며, 하나님은 능동적 행위자이며, 하나님의 능동적 행위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중심이었다. 호프만은 현시대가 또 다른 시대인 천년왕국을 예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그는 19세기 루터파의 천년왕국주의자의 입장을 따랐다.
그러나 호프만은 성령이 성경을 영감할 뿐 아니라 교회를 인도하는 관점에서 보았으므로 해석자가 성경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양식화(樣式化), 교리화(敎理化), 정경화(正經化)해서는 안된다고 보았다. 그는 성경해석이 정적인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한 역동적(力動的)인 것이어야 하므로 성령의 가르침에 민감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 같은 그의 성경해석 관점은 ‘성경은 역사적 사건에 영감된 해석이 더해진 것’이라는 개념에 기인된 것이었다. 그는 성경의 모든 구절이나 문장은 역사적 배경 속에서 주어진 것이며,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어떤 교리를 입증하려 할 때 그 구절에 대하여 참된 의미와 중요성을 제공해 준다고 주장했다.
이 학파에서 탁월했던 미국의 오토 파이퍼(Otto Piver)는 폰 호르만의 구속사적 원리에 도움을 받았다. 그는 자신을 신정통주의자나 자유주의자나 근본주의자는 아니라고 밝히면서 성경의 권위는 축자영감에 대한 주장에 있지 않다고 하였다. 축자영감설을 후기 종교개혁자들의 교조주의자(敎條主義者)들에 대한 주장으로 인식한 파이퍼는 “성경을 어떤 고등한 형태의 지식 전달로 보는 것은 영지주의자들의 오류이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였다.
파이퍼는 자신의 저서 ‘나의 성경 연구 방법’(How I study my Bible)에서 다음과 같이 성경의 해석에 대한 비판적 취급을 수용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성경의 일반적 진술은 내가 그것을 받아들일 때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우리가 다른 역사적 문헌에 적응하는 비평주의로부터 성경을 제외시키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고생물학의 발견에 대한 신학적 저항이 그랬던 것처럼 쓸 데 없는 것이다.”
12. 불트만(Bultmann)과 신해석학(New Hermeneutics)
당대의 주도적인 신구약 비평주의자들 밑에서 수학했던 독일의 신정통주의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Rudolph Bultmann, A.D. 1884-1976)은 신약 문헌들에 대한 비평적 연구를 열정적으로 실행하였다. 그는 신약의 역사적 연구를 ‘비신화화’(非神話化)를 통하여 신학적 작업에 연결시키고자 하였다. 불트만의 눈에 비친 성경적 우주론과 현대 인류 간 실제적 비 양립성은 ‘영적 세계’와 ‘물질적 세계’는 서로 간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전제에 기인하였다. 이러한 그의 전제는 현대과학의 성공에 의해 생긴 것이 아니라 인간 자율성의 고수로부터 나온 칸트의 변증법의 필요에 의하여 생긴 것이다. 불트만의 이러한 성경해석 관점은 제자인 ‘후크스’(Ernest Fuchs)와 ‘에벨링’(Gerhard Ebeling)에 의하여 구체적으로 발전되어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신해석학파’로 불리워졌다.
▶ 불트만(Bultmann)
불트만의 주된 관심은 성경해석학이었다. 불트만의 성경해석 관점은 정통주의 신학자 마틴 켈러(Martin Kahler)의 주장과 직간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다. 켈러는 자신의 저서 “소위 역사적인 예수와 성경적 그리스도”(The so-called Historical Jesus and the Historic, Biblical Christ)에서, 옛날처럼 오늘날에도 살아 계시고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실제 인격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슐라이어마허의 역사 비평적 방법이 전혀 부적절하다고 하였다. 켈러는 슐라이어마허에 의하여 현대의 역사 비평적 방법에 의해 제조된 ‘예수’는 실제 역사적(historic)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하였다.
켈러는 자기주장의 근거를 ‘히스토리에’(Historie : 비평적이고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역사)와 ‘게쉬테’(Geschichte : 진정하고 사실적이며 초월적인 역사)를 구분하는데 두었다. 불트만은 역사 비평적 모험(冒險)을 완전히 배격하는 정통주의적인 켈러를 따르지는 않았지만 켈러의 역사적 관점에 대한 구분을 받아들였다. 불트만의 성경해석 원리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첫째, 과학적 원리(the scientific priciple)이다.
사실에 대한 모든 문제들은 과학적 방법에 의해 확정되며 모든 역사적 진술도 역사가들의 연구 과정을 통해 입증될 때에만 용납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이에게 과학이나 역사에 반대되는 것(오병이어, 물위를 걸으심 등)을 믿으라고 요구하는 것은 그에게 자신의 지성을 희생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둘째, 비평적 원리(the critical)이다.
신약에서 사용된 용어, 개념 그리고 표현들은 전반적인 역사적, 문학적, 사회학적 그리고 종교적 배경에 대한 연구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예 ; 주, Kurios 등). 이러한 대표적 양식은 선포 기사, 이적기사, 신화, 전설과 ‘짧은 기사들’(Novellen), ‘공관복음전승사’(The History of the Synoptic Tradition)이다. 문화는 한 민족의 전통을 표현하는 모델, 양식, 문학 장르를 형성한다. 신약의 기록자들도 자신들의 문화권에 속하는 양식을 사용했으므로 본문에 대한 ‘양식비평’(Formgechichte)을 거쳐야 한다(예 : 신약은 하나님의 최종 계시가 아니라 문화적으로 조건지어진 문헌이다). 그리고 ‘문헌의 내용’(Sache)은 문헌이 전달하고자 시도하는 내용의 표현이므로 성경해석에 대한 예비 작업으로 ‘내용비평’(Sachkritik)을 거쳐야 한다(예: 신약이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가르친다는 사실을 믿을 수는 있으나 나는 그 사실을 믿고자 하지 않으며 그 내용은 현대인에 의해 받아들여질 필요는 없다).
셋째, 신화적 원리(the mythological principle)이다.
신화는 어떤 개념에 대해 사람의 내면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건이나 사물의 세계로의 투영이다(예: 오병이어). 신약 전체에 걸쳐 나타나는 신화는 일반적으로 유대 묵시적(黙示的) 신화와 헬라의 신비종교의 신화로부터 이끌어낸 것이다.
넷째, ‘변증적 원리’(the dialectical principle)이다.
무엇이든 객관적이거나 역사적인 것은 실존적인 것이 아니며, 또한 실존적인 것은 객관적이거나 역사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객관적이거나 역사적인 증거를 통하여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결단은 통해서 존재한다. 역사적으로 비추어진 십자가와 믿음으로 바라본 십자가의 관계는 변증적이다.
불트만에 있어서 십자가 사건은 비평주의로 굴복시킬 수 없었던 유일한 역사적 항목이었으며, 십자가는 로마 역사에 있어 역사적 사건이요 하나님의 구원이 행위였다. 불트만은 오직 믿음으로만 알려지는 구원에 있어 십자가에 대한 역사적 연구로는 그 의미를 이끌어 낼 수 없다고 보았다.
다섯째, 비신화적 실존적 원리(the demythological-existential principle)이다.
해석자의 첫 번째 임무는 성경구절의 신화적 요소를 인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신화는 현대인들이 믿을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화는 무엇인가를 이야기 한다. 초대교회는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기 위해 신화를 사용했으므로 신약학자는 신화가 말하고자 하는 본래의 의도를 발견해야 한다.
불트만은 자신의 저서 ‘신약과 신화’(New Testament and Mythology)에서 신화가 이야기하는 것을 결정하기 위해 ‘하이데거’(Heidegger)의 실존철학을 사용했다. 그는 신약의 기사들이 실존적 만남을 통해 생겨났으나 불행히도 신화적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불트만의 관점에서 현대의 신학자들은 신화를 들어내고 신화의 본래적, 실존적 의미를 회복(비신화화, Entmytholgisierung:'ent'는 제거하다, 떼어내다의 전치사로 영어 ‘가면을 벗다’의 의미인 ‘un'에 해당한다)해야만 했다. 불트만은 성경해석을 위한 주해와 신학에 있어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의 개념을 최상의 연구모델로 수용하였다.
여섯째, 계시적 원리(the revelational principle)이다.
계시는 사건, 만남, 하나님 자신의 현존을 나타내는 수단이므로 성경의 본질이 아니라 실존적 만남의 체험이다. 따라서 성경은 계시가 발생했다는 기록이나 증거이지 그 자체로 계시이거나 직접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계시는 하나님과 사람 모두를 포함하며 계시 속에서 하나님과 사람의 본질적 만남이 이루어진다.
불트만의 이 견해는 ‘계시는 사람이 믿든지 아니 믿든지 성경 안에 존재 한다’는 정통적 견해에 배치되는 주장이다. 즉 이러한 주장은 불트만에 있어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거나 믿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초자연적인 말씀은 계시가 아니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불트만은 해석자의 임무에 대하여, 성경 안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찾는 신학적 형태의 진술이 아니라 ‘말씀속의 말씀’으로서 ‘성경의 실존층’(existential Straum)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보았다.
일곱째, 율법의 원리(the law principle)이다.
구약은 그리스도인의 책이 아니라 사실상 율법의 책으로서 인간이 실존적 임무에서 어떻게 실패했는가를 보여주는 부정적 교훈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긍정적 메시지는 신약 안에 있다.
▶ 신해석학(New Hermeneutics)
불트만으로부터 배운 후크스(Fuchs)와 에벨링(Ebeling)은 불트만의 회의주의를 극복하기 위하여 보다 긍정적인 해결책을 모색하였다. 불트만의 회의주의적 신학에 대하여 긍정적 해결책의 모델을 세우고자 노력한 학파를 일명 ‘신해석학파’(New Hermeneutics School)라 칭한다.
‘신해석학파’는 계몽주의(Enlightenment)의 영향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계몽주의(啓蒙主義)는 인간의 이성을 존중하므로 인간의 자율의 원칙이 신학의 핵심으로 작용한다.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신학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권위는 흔들리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인 성경은 유오한 인간이 저술한 책으로 전락하였다. 계몽주의에 영향을 받은 신학은 하나님의 권한을 인간에게 부여하였고, 인간이 자신과 역사에 대한 최종적 판단을 인간이 행할 수 있다는 논리의 기초를 세웠다.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하나님은 스스로 해석하시는 자이다’가 아니라 ‘인간은 스스로 해석하는 자이다’라는 해석자의 위치 변위가 발생한 것이다.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신학적 입장은 ‘성경이 어떻게 말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경의 말씀 중 나에게 어떤 것이 의미있는가?’로 변화하게 되었다.
신해석학파의 해석자들은 ‘세상의 모든 현상은 시간의 영향에서 제외될 수 없다’고 보았다. 이들은 ‘성경의 내용도 시간의 경과로부터 오는 영향을 받은 것이므로 시간의 경과로부터 오는 부패적인 영향에서 초월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이들은 성경내의 역사적 사실도 상대적인 것으로 주장함으로써 ‘성경 본문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므로 성경이 모든 시대의 신앙과 행위를 규제할 수 없다’고 하였다. 불트만의 제자로서 신해석학파에 속한 학자들은 인간의 자율성의 원칙을 고수하면서 시간적 상대성을 더욱 과격하게 적용시켰다. 이 학파는 ‘성경본문이 시간적 상대성의 영향을 받는 것처럼 해석자 자신도 같은 영향에서 제외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이 학파의 관점에서 볼 때, 성경 본문은 역사의 흐름에 영향을 받으므로 해석자의 해석은 자신을 제외하고는 다른 이에게 아무런 의의가 없는 것이었다. 이들의 성경 해석은 본문과 해석자 간의 대화적(dialogical) 상호작용을 통해 이해되는 것이었다. 이 학파의 성경 해석의 결과는 상대적인 본문과 상대적인 해석자 사이에서 발생한 상대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결국 이들의 성경해석은 객관적 확실성이 전혀 없으며 해석자에게 실존의 가능성 만을 제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이 학파는 성경의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며, 성경본문의 의미도 고정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이 학파의 성경해석의 원칙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첫째, 비평적 원리이다.
현대인들이 신약에서 반박하는 것은 신화나 역사적인 사건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모든 종류의 오류이다. 이러한 오류는 믿음이라는 것으로 미화시켜지므로 신약의 해석자는 이러한 모든 미화를 반드시 찾아내어 비평으로서 실체 이외의 것을 제거해야 한다. (이들은 불트만이 케리그마에 필요한 유일한 역사적 사건으로 인정한 십자가도 역사적 기초가 너무 작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보다 폭 넓은 역사적 기초를 찾기 위한 비평적 연구로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새로운 탐구’를 시도하였다.)
둘째, 해석학적 원리이다.
말(speech)은 자신이 경험한 세계에 대한 자신의 해석학이므로 전통적 의미의 해석학도 이러한 새로운 개념의 해석학 중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이들의 이러한 주장은 전통적 해석학의 권위를 약화시켰다.)
셋째, 언어의 원리이다.
성경의 기록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반응과 인간의 결단이나 믿음의 행동에 따른 하나님의 반응에 대한 계시로서 ‘만남’(Begegnung)이 아니라 인간의 언어로 기록한 ‘말사건’(sprachgeshehen or Sprachereignis)이다. (이들은 언어에 대한 그들의 실존적 이론을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에 적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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