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테크/성서와 신앙을 알고싶어요

[스크랩] 성경해석학 - 제3장 성경해석의 필요성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10. 12. 10:51

제 3 장 성경해석의 필요성


성경을 해석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믿고 그대로 순종하기를 배워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그들은 성경을 제대로 연구하고 읽기만 하면 성경은 결코 모호한 책이 아니라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실상 성경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인들이 부딪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성경에 대한 이해의 부족보다는 순종하여 실천에 옮기는 가의 문제이다.


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리고 능히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22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1:21-22)


그리스도인의 본분은 ‘마음에 섬긴 하나님의 도를 온유함으로 받아’(humbly accept the word planted in you) 순종하여 실천하는 것이다. 듣기만 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deceive yourselves)임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교훈적 말씀의 일반적 의미를 알고 있다.


1. 성경해석의 목적


성경해석의 바람직한 목적은 본문에 나타난 어떤 독특한 의미를 찾는다든지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것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말씀을 접근함에 있어서, 어떠한 독특함을 추구하고 그것을 목표로 삼아 해석하려는 자세는 똑똑한 자로 인정을 받고자 하는 교만이거나, 특별한 통찰력을 발동한 그릇된 영성(spirituality)이라할 수 있다. 이러한 자세는 자신의 신학적 편견(偏見)을 합리화하려는 해석자의 기득권(vested rights) 때문에 생겨난다.


바른 해석이 지향하는 목적은 너무도 간단하다. 그것은 ‘본문의 명확한 의미’를 밝히는 것으로 이는 ‘깨어 있는 상식’(enlightened common sense)을 절대적으로 요구하는 것이다. 바른 해석을 가늠하는 기준은 그 해석이 당해 본문의 의미를 잘 이해한 데서 나왔는지의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당해 본문의 의미를 올바로 깨달아 전하는 성경해석은 듣는 이로 하여금 마음에 찔림과 위로와 평안과 깨닫는 기쁨을 가져다준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우는지라…(느8:8-9)


그렇다면 성경을 깨어있는 상식으로 단지 읽기만 한다고 해서 명확한 의미를 얻을 수 있는가? 성경해석의 필요성은 요구되지 않는 것인가? 성경해석의 필요성은 성경 자체의 ‘계시’(revelation)로서의 특성과 관계된다. 특별계시로서의 성경이 이미 성경해석의 필요성을 함축(含蓄)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감추인 것을 성경계시로 드러내셨다.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전2:7)


하나님의 계시가 없다면 해석자의 신학적 작업도 정지된다. 성경계시는 오늘날 해석자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성경의 계시는 하나님께서 과거에 하신 일, 현재 하고 계신 일, 그리고 미래에 하실 일을 미리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성경으로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신앙하는 해석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밝혀서 그 의미를 찾아낼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성경의 해석은 성경의 유기적 영감과 축자 영감의 교리만큼 중요하다. 만약 해석자가 본문을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로 해석해 놓고서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무익한 일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인가?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로 인한 구원에 대하여 선지자들도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폈으며 자세히 상고하였던 예’를 베드로를 통하여 계시하시고 바른 성경해석의 중요성을 기록케 하셨다.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벧전1:10-11)


성경해석자의 과업은 무엇인가?


첫째, 성경의 저자(저자이신 하나님과 기록자를 포함)가 최초의 시청자와 수신자에게 한 말씀(명령과 질문)의 의미를 파악(把握)하는 것이다.

둘째, 파악된 의미를 현대의 수신자인 독자에게 그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다.


이처럼 성경의 해석은 두 가지 영역을 갖는다. 첫 번째 영역은 하나님이 당시의 상황 하에서 말씀하신 그 말씀의 원의미를 발견하는 것이고, 두 번째 영역은 현대의 수신자들이 오늘날의 상황 하에서 하나님 말씀의 변화된 적용을 고려하는 것이다. 두 번째 영역은 오늘날 더 많은 관심을 보이는 추세이다. 그 이유는 오늘을 사는 말씀의 수신자들에게 ‘기록된 말씀이 어떻게 적용될 것인가?’ 에 대한 관심이 과거의 어느 때보다도 증폭(增幅)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때로부터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났던 중세시대까지는 신약성경의 세계와 이후 세대들의 간격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르네상스 운동과 그에 따른 자연과학의 급속한 발전은 사람들의 사고 체계에 혁신을 가져왔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시대 이후 20세기 초에 이르는 동안 그 간격은 매우 크게 벌어졌다. 성경기록시대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경우, 오늘날 성경의 독자들은 역사적 상황이 담겨진 본문을 대할 때 어떠한 느낌을 갖게 될 것인가?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라(창13:8)


12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 곧 그 사방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아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게 하였으되 13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삿2:12-13)


15 그가 또 너희 곡식과 포도원 소산으로 십일조를 취하여 자기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16 그가 또 너희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취하여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17 너희 양떼의 10분 1을 취하리니 너희가 그 종이 될 것이라(삼상8:15-17)


현대의 사회는 극도의 개인주의 사회이므로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시대 이스라엘 민족의 혈연적 유대성, 과학 만능시대와 비교되는 고대인들의 만신적 우상숭배주의, 평등사회와 비교되는 귀족과 자유인과 노예로 구성된 불평등한 사회적 구조, 그에 따른 긴장(緊張) 관계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의 민족적 편견(롬11:11-14), 우상의 제물(고전8:7-13), 노예제도 하에서 발생한 사건에서의 메시지(몬1:8-21)들을 잘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읽을 때 읽는 것을 대체로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이 이해한 것이 성경을 기술한 기록자의 의도와 동일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해석자는 그들이 자신의 경험과 문화와 단어에 대한 습관과 선입관(先入觀)을 가지고 성경 말씀을 대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4)


바울이 기록한 이 말씀을 피상적으로 읽을 때, 일반 성도들은 바울이 ‘육체적인 욕망’(bodily appetites)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기 쉽다. 그러나 바울은 영적인 병으로서 ‘죄악된 본성적 욕구’(the desires of the sinful nature)를 말하고 있다. 그는 빛의 갑옷인 그리스도 예수의 옷이 그리스도인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가르치고 있다. 바울은 ‘육신’(flesh)에 대하여 ‘몸’(body)이라는 뜻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이처럼 성경번역은 그 자체가 해석의 한 형태이다. 따라서 성경번역은 또 다른 해석을 필요로 한다.


성경 이해의 출발점이 되는 번역 성경은 많은 학구적인 연구의 최종적 산물이다. 성경번역가들은 번역하고자 하는 모 성경의 어떤 단어나 어구에 대하여 어떻게든 의미를 선택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이 때 선택한 의미는 독자들의 성경 이해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리고 때로는 또 다른 번역(飜譯)이나 성경해석의 과정을 필요로 하기도 한다.


성경에는 성경기록 시대와 오늘날 현 시대를 비교해 볼 때 서로 부합되지 않는 것들도 있다. 특정 성구의 의미는 당시에는 ‘명확한 의미’가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그와 똑같이 명확한 의미로 적용할 수 없는 것이다.


34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35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찌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고전14:34-35)


바울의 이 교훈은 성경 전체의 맥락(脈絡)과 연결시켜 종합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바울과 성경 전체의 메시지가 여성의 인권과 인격을 무시하고 남성의 우월적 지배를 정당화(正當化)하는 것으로 비쳐질 소지가 많다. 바울의 이러한 조치는 여성에 대한 천대가 일반적이던 당시 사회 문화적 배경 하에서 선포된 교훈이다. 본문은 새 언약에 의한 복음이 확산되어 여성도 교회의 예배에 동참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약간의 당황스러움과 혼란이 발생함으로써 취해진 것이다.


이것은 바울 당시 초대교회 시대에 교회 내외의 오해 해소와 질서 유지를 위해 취해진 상대적 조치(措置)이지 전 교회시대에 걸쳐 지켜야 할 문자 그대로의 계명은 아닌 것이다. 즉 바울은 공적 예배에 국한하여 공중 예배의 질서 유지를 위해 조치를 취한 것이지 이외의 공간과 시간대에서까지 여성의 활동을 무조건 제재(制裁)한 것은 아니었다. 이처럼 성육신시대와 초대교회시대의 성경기록에 대하여 오늘날의 상황에서 비추어 해석하여야 하는 성경의 예는 많다. 그 예로서


․ 여자들이 기도하고 예언할 때 머리에 무엇을 써야 한다든지(고전11:4-6)

․ 세례시 세례 요한이 예수께 침례를 베푼 것처럼 몸을 물 속에 완전히 잠기어야 한다든지(마3:16)

․ 유아 세례의 성경적 근거를 찾을 수 있다고 믿는 이(그러한 실례는 성경에 기록되지 않다)들이 있는 사례

․ ‘성도의 견인’(eternal security)에 있어 한번 택함을 받은 자는 반드시 영화에 이르기까지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다. 그러나 ‘받은 구원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있다’고 철저하게 믿는 사례 등등이다.


오늘날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 간에 발생하는 이러한 이견들 외에도 특정한 성경구절을 근거로 하여 교리를 전파하는 이들도 많다. 그리고 성경 이외의 다른 것으로 자신들의 권위를 행사하고자 하는 이단(아리우스주의, 극단적 신비주의,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시한부종말론자, 문선명집단과 그 유사 계파 등)들도 계속 활개치고 있다. 또 어떤 이들은 명백하게 이단이거나 또는 이단적인 사고와 행위의식을 행하는 이단과 유사한 계파일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 근거가 성경 본문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이단 또는 유사 계파들이 성경해석에 있어 명백한 교리 이반(離反)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예들은 신학적으로 정통에 속하여 있다고 주장하는 오순절 계통의 신자들 사이에서 자주 발견된다. 그들에게 있어 열광적으로 환영받고 있는 ‘부와 건강의 복음’(wealth and health Gospel)은 어떠한가?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1:2)


이 본문에 대하여 ‘부와 건강의 복음’ 차원에서 받는 이들은 ‘복된 소식’이 바로 자신들을 향한 풍요한 물질의 번영과 건강의 복의 근거라고 해석한다. 그들은 이러한 해석이 ‘명확한 의미’의 해석이라고 믿음으로써 그렇게 말하고 가르친다. 과연 그러한가? 이 본문의 바른 해석은 앞뒤의 연결문맥을 고려할 때 자연스럽게 도출(導出)된다. 즉 “장로인 나 요한은 너 ‘가이오’를 참으로 사랑하는 바, 그 이유는 너와 함께하는 형제(성도)가 내게 증거하기를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함을 내가 듣고 심히 기뻐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교회 안팎의 여러 가지 다양한 견해들과 학자들 간의 ‘해석원칙들’에 대한 이견은 ‘성경해석의 필요 없이 단지 읽기만 하면 되지 않겠는가?’라는 우스꽝스러운 결론을 초래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선택이다. 그릇된 해석에 대한 명확한 해독제는 해석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상식적인 지침에 근거한 건전한 해석이다.

2. 성경해석자의 자유와 통제


해석자는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상식을 벗어나 자신의 생각을 성경 기록자의 뜻인 양 첨가시켜서는 안 된다. 해석자의 자유는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어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상식적인 사실에 통제(統制)받아야 한다. 해석자는 자신의 해석 습관이나 전통에 의해 세워진 어떤 사상적 패턴에 우월성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성경의 진리가 그와는 다르게 증거한다면 성경의 진리를 상식으로 하여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왜 그러한가? 그것은 성경 본문의 우월권(優越權)이 성경해석자의 자유보다 항상 우위에 있기 때문이다. 성경해석의 의미는 해석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요 성경 본문의 명료성(明瞭性)에 있기 때문이다.


로마가톨릭은 성경의 명료성을 자신들만의 로마교회가 소유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라틴어의 불가타역을 라틴어로 강론(講論)하고 미사 의식을 라틴어로만 집전했으며, 불가타(Vulgate)역 성경을 영어나 독일어 등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것을 철저하게 금지시켰다. 그들의 논리는 그리스도와 성령이 로마가톨릭교회 내에 신비적으로 내재한다는 그릇된 이론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의적 착각(着角)을 교권수호(敎權守護)의 명분 하에 로마교회만이 그리스도와 성령의 마음을 나누어 가진 것으로 판단하여 교권을 휘둘렀다.


루터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이러한 견해를 단호히 배척(排斥)하고 성경의 내적 외적 명료성을 주장했다. 내적 명료성은 성도들의 마음에 역사하는 성령의 사역이다. 성령은 성경의 진리를 하나님의 진리로 인정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조명시켜 주신다. 외적 명료성은 성경의 문법적 명료성을 언어의 법칙에 따라 성경의 뜻을 해석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성경의 내적 외적 명료성이 있기에 성경의 기록이 종료된 오늘날에 이르러도 해석자는 성령의 감동에 의한 해석을 통해 성경의 뜻을 바로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성경은 성경해석의 필요성에 대하여 자체적으로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가?


15 나 다니엘이 중심에 근심하며 내 뇌 속에 이상이 나로 번민케 한지라 16 내가 그 곁에 모신 자 중 하나에게 나아가서 이 모든 일의 진상을 물으매 그가 내게 고하여 그 일의 해석을 알게 하여 가로되(단7:15-16)


다니엘은 침상에서 꿈을 꾸며 뇌 속으로 이상(理想)을 받았으나 그 뇌 속 이상이 의미하는 바를 알지 못해 번민하였다. 그가 왜 번민하였는가? 다니엘의 학문과 지혜가 아무리 출중(出衆)하여도 그 이상이 하나님으로부터 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인 다니엘은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의 곁에 모신 자에게 물어 그 해석을 듣지 않고는 그 해석을 전혀 알 수 없는 유한적 지혜의 소유자였다.

3. 예수님의 성경해석


말씀의 실체이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떻게 성경해석을 교수(敎授)하시며 양육하셨는가?


33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저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34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막4:33-34)


‘비유가 아니면’은 예수께서 평생 비유로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천국에 대해서만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의미이다. 왜 비유로 말씀하셨는가? 그 이유는 천국복음을 듣고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복음의 진리를 더욱 쉽고 친근감 있게 해석하여 확실하게 전달하기 위함이다. 또 다른 이유는 복음의 진리를 대적하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말씀의 내용을 해석하지 못하게 하여 이후의 공생애 사역에 있어 방해를 최소화시키기 위함이었다. 제자들도 무리들과 함께 비유의 말씀을 듣기는 하였으나 무리 또는 불순종하는 자들이 물러가고 난 후에야 예수께서는 ‘자세하게 비유의 해석을 하셨다’(he explained everything). 또한, 주님께서는 부활승천 후 천국의 복음을 선포할 제자들에게는 자세한 해석을 곁들임으로써 사도로서의 사역을 확실하게 세워주셨다.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24:26-27)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도 메시야를 생각할 때 당시 유대종교 지도자들처럼 단순히 영광의 관점(觀點)에서만 생각했다. 그들은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야를 생각하지 못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고난을 당하고 죽은 후 부활하셔서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났다는 사실에 대하여 믿지 못하고 혼동된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자신들의 알지 못함에 대하여 그들은 메시야의 수난 후에 부활의 영광에 들어갈 것을 명백히 기록(시22:11-21;118:22;사53:1-12;요12:32-33)한 히브리경전(구약성경)을 알고 있었으므로 자신들의 무지를 핑계할 수는 없다. 제자들이 핑계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예수께서도 자신의 수난과 그 후의 영광을 자주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바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how slow of heart to believe all that…)로서 성경을 이해하지 못했고, 예수께서 가르치신 교훈의 의미에 대하여 포착(捕捉)이 느린 자들이었다.


제자들이 구약성경을 이미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해하지 못한 것인가? 그것은 그들의 지식의 결핍 때문인가? 아니면 상실된 마음으로 인한 이해의 부족 때문인가? 그들에게 있어 성경을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는 성경해석자이신 예수가 필요하였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다. 그들이 어떠한 과정을 통하여 성경을 깨달을 수 있었는가? 엠마오에 도착한 두 사람은 예수께서 성경을 해석해 주신 과정을 되뇌이며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자신들의 마음이 뜨거웠다고 증거했다(We‘re not our hearts burning within us while he talked with us on the road and opened the Scriptures to us?). 즉 예수께서 성경을 해석하시기 이전에는 성경이 닫혀있는 것과 같았으나 예수의 성경해석의 결과로 마음이 뜨거워지며 성경이 열려졌다는 것이다.


본문 누가복음 24:27의 ‘자세히 설명하다’(he explained to them)는 누가복음 24:32의 ‘풀어주실 때’ 즉 ‘열어주실 때’(he opened the Scriptures to us)와 같은 의미의 사용이다. 예수께서 성경을 해석하실 때 그 초점은 바로 ‘자기에 관한 것’이었고,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에서도 ‘자기에 관한 것’이었다. 이것은 예수께서 율법서와 선지서를 시작하여 자신에 관한 모든 기록을 구약 성경 안에서 찾으셨다는 의미이다. 이 말씀은 구약 전체의 중심주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임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해석관점은 구속적이고 역사적이며 기독론적이어야 한다. 초대교회시대에도 이러한 해석관점은 계속되었다.


27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28 돌아가는데 병거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29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30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뇨 31 대답하되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하고 빌립을 청하여 병거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중략)

34 내시가 빌립더러 말하되 청컨대 묻노니 선지자가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뇨 자기를 가리킴이뇨 타인을 가리킴이뇨

35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행8:27-35)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 맡은 권세 있는 내시는 이사야 53장을 읽고 있었으나 그 뜻을 알지 못했다. 내시가 구약 성경을 읽으면서도 그 뜻을 깨달을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내시의 대답에서 나타남 같이 “지도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unless someone explains it to me, 31절). “지도한다”(όδηγέω, explain~to)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이가 다른 이에게 길을 안내하고 인도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본문의 지도하는 사람인 빌립의 역할은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다(Then Philip began with that very passage of Scripture and told him the good news about Jesus). 즉 빌립은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35절).


빌립이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행한 성경해석의 기능은 무엇인가?


첫째, 성령이 성경해석의 역할을 한다.

둘째, 성령에 의해 인도되는 인간이 성경해석자의 역할을 한다.

셋째, 자연인이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해석자의 해석이 필요하다.

넷째, 성경해석의 목적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성경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해석의 기본 전제는 구속적이요 역사적이며 기독론적이어야 한다. 이러한 성경해석 요소는 자주 강조되어야 하고 반복되어야 한다.

4. 난해한 본문


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17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벧후3:15-17)


베드로가 같이 사도된 바울의 편지를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재림(벧후3:8-14)에 관해 가르쳤던 바와 같이 바울도 당시 교회가 열망(熱望)하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가르쳤다(살전1:10;4:13-17;살후1:10;2:8). 베드로가 본서를 기록할 당시 바울의 서신들 중 다수가 이미 기록되어 교회에 회람(回覽)되고 있었다(골4:16). 바울의 서신은 다른 성경 기자에 비해 심오한 진리를 많이 다루었고 그 중에는 종말에 관해 어려운 부분(살전5:2-6;살후2:1-12)도 있었다. 구약 성경과 이미 정경화되어 회람되던 바울의 서신에 대하여, 성령의 감동을 받지 못하고 말씀 위에 굳세게 서지 못한 자들이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의 자리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해석에 유익하도록 성경을 왜곡(歪曲)시킴으로써 성도로서 도덕적 삶의 동기를 이탈하여 스스로 방탕한 삶에 빠져들었다. 본문의 예에서 보듯이 성경본문 자체가 난해한 점을 내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읽는 이의 이해에 한계성이 있으므로 겸손한 태도에 의한 본문 연구를 통하여 성경해석이 필요한 것이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2:15)


바울의 믿음의 아들 디모데가 하나님께 인정함을 받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分辨)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이 되는 것이다. 즉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는 자라야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이 된다는 의미인 것이다.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려면(correctly handles the word of truth)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옳게 분변하며’는 문자적으로 ‘바로 자르다’(cut straight) 또는 ‘올바로 다루다’(handle aright)의 의미이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왜곡시키거나 변질시키지 아니하며 올바로 다루는 차원에서의 바른 적용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성경에 대한 자신의 계시(눅4:17-21;요5:39)와 성경에 대한 자신의 입지 하에서 자신이 친히 성경을 해석하심으로써 성경해석의 필요성을 말씀하셨다. 아버지와 삼위일체로서 아버지의 품속으로부터 독생하신 하나님(요1:18)은 하나님을 바로 설명할 수 있는 분(interpreter)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이므로 그 계시를 가장 잘 해석할 수 있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 증거는 예수께서 구약 해석하거나 적용을 가르치실 때 권위적으로 하신 것에서 나타난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마5:21-22)


예수께서는 십계명 중 제 6계명을 해석하시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잘못된 구약 해석을 교정하셨다. 특히, 산상보훈에서는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You have heard that~ , But I tell you that~)라는 말씀을 반복하며(마5:27-28, 33-34, 38-39, 43-44) 바른 성경해석의 필요성을 강조하셨다.


22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마22:28-29)


부활 문제로 자신을 난처하게 하려는 사두개인들의 계교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그들의 불신과 잘못된 성경해석을 견책(譴責)하시며 말씀의 주인으로서 바른 성경해석으로 가르치셨다. 예수께서 성경해석의 필요성을 가르치셨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자연스럽게 이해하는데 있어 해석자는 여전히 어려움을 느낀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5. 성경시대와 현시대의 간격


10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거늘

11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막7:10-11)


성경을 기록한 자들의 시대와 성경의 읽는 오늘날 현시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오랜 시간의 격차(隔差)가 있다. 어떤 사건이나 가르침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건이나 가르침과 연관되어 있는 상황과 형편을 알아야만 한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유전(遺傳)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떻게 저버렸는가를 확연히 드러내 보이기 위해 구체적 실례를 들어 시간적 격차를 해소하는 해석을 하셨다. ‘고르반’(Corban)이란 원래 하나님께 바쳐진 헌물로서 사적 용도로는 쓰여질 수 없었다. 그런데 후대(後代)로 가면서 이 말은 불효자식의 이기적 목적으로 이용되거나 왜곡되었다. ‘나의 재산은 다 고르반 되었다’고 맹세한 후 그 일부를 성전에 헌납하고 나머지 전체를 자기 소유로 삼아 부모 모시기를 거부하는 일이 공공연하게 자행되었던 것이다. 심지어 그가 율법(출20:12;21:17)을 깨달아 회개하고 부모를 봉양(奉養)하려고 해도 인간의 유전인 서기관(書記官)의 법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그릇된 유전을 지적하시고 시간적 격차(隔差)를 해소(解消)하시며 율법의 기본취지를 해석하셨다. 또한, 성경은 기록될 당시의 문화와 오늘날의 문화의 차이도 성경해석의 필요성을 제시한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롬12:20)


본문 중 ‘네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쌓아 놓는다’의 구절은 바울이 잠언 25:21의 말씀에 이어 같은 취지를 첨가한 것이다. 잠언이 기록될 당시 이스라엘 각 가정에는 숯불이 귀했다. 따라서 숯불을 이웃에게 빌려주는 것은 매우 친절한 행동에 속했다. 화로 같은 것에 숯불을 담아 머리에 이고 이웃에게 빌려주는 것은 원수에게도 베풀 수 있는 단순한 친절인 것이다. 이와 같이 성경을 해석하는 데는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는 접근이 필요하다.


또 다른 예로서 ‘거룩한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는 것을 들 수 있다(살전5:26). 이 말씀은 모든 문화를 초월하여 형제 상호간 입맞춤으로 문안(問安)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처럼 성경해석자나 번역자는 여러 성경시대의 문화적 양식을 ‘재생’(resuscitation)시켜 독자로 하여금 그 이해의 폭을 넓혀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또한, 언어적 격차도 성경해석을 강력히 요구하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6. 언어적 격차


23 그 때에 내가 또 본즉 유다 사람이 아스돗과 암몬과 모압 여인을 취하여 아내를 삼았는데

24 그 자녀가 아스돗 방언을 절반쯤은 하여도 유다 방언은 못하니 그 하는 말이 각 족속의 방언이므로(느13:23-24)


이에 엘리아김과 셉나와 요아가 랍사게에게 이르되 우리가 아람 방언을 아오니 청컨대 그 방언으로 당신들의 종들에게 말씀하고 성 위에 있는 백성의 듣는 데서 유다 방언으로 말하지 마소서(사36:11)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막15:34)


성경은 히브리어, 아람어 그리고 헬라어 세 가지 언어로 기록되었다. 위의 세 본문 중 마가복음 15:34의 예수님의 부르짖음은 시편22:1의 말씀을 마가가 아람어로 인용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27:46에서처럼 시편을 히브리어로 인용하였을 것이나 마가는 당시 근동사회의 공용어로 사용되던 아람어의 형태를 사용하였다. 히브리어와 아람어는 똑같은 셈족의 언어이다. 스네이스(N.H Snaith)는 자신의 저서 ‘구약의 언어’에서 셈족 언어의 사용권역을 대략 4 가지로 구별하였다.


․ 동부권: 아카드어(앗수르와 바벨론 언어의 현대 명칭)

․ 서부권: 히브리어와 고대 팔레스타인 및 트랜스 요르단(요단 동편 고지대 지역-모압, 암몬, 에돔, 바산)의 언어

․ 북부권: 후기 수리아어를 포함한 다양한 아람 방언

․ 남부권: 아라비아어와 에디오피아어


구약성경은 몇 군데(창31:47-49의 아람어 두단어; 렘10:11의 아람어 한 절, 단2:4-7:28의 아람어, 스4:8-6:18;7:12-26의 아람어 두 부분)을 제외하고는 히브리어로 기록되었다. 신약성경은 일부(골고다-아람어 ‘굴갈타’의 헬라어 음역, 달리다굼-‘텔리타 쿠미’의 헬라어 음역, 에바다- 아람어 ‘열리다’의의미인 ‘페타’의 명령형을 헬라어로 음역,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제외하고는 코이네(Koine) 헬라어 시대(B.C.332년 아리스토텔레스 사망 후 로마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아네테에 소재한 플라톤의 아카데미를 폐교하고 희랍철학의 교수를 금지시켰던 A.D.529년까지의 시대)로 기록되었다.


신구약 성경의 언어들은 그 특징과 문장과 구조와 관용구에 있어서 오늘날의 현대 언어와 다르다. 따라서 이러한 언어적 격차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성경해석은 필수적이다.

7. 이해력의 한계


인간은 그 이해력에 있어서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해력 정도의 차이는 때로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했거나 성령의 조명을 밝게 받지 못할 때 인간의 무지로 나타난다. 즉, 인간의 무지가 성경의 해석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4-5)


니고데모는 ‘예수께서 성령의 감동에 의한 회심을 말씀하시는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그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도 원죄를 처리 받지 못한 유대인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살리는 영의 말씀(요6:63)에 대하여 무지했다. 즉,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은 하나님과는 영적으로 분리된 채 태어나는 인간에게 반드시 해석되어져야만 했던 말씀이었다. 인간의 영적 무지와 이해력의 한계는 종교개혁시대에 어떻게 나타났는가? 예수님의 살과 피는 죽은 자를 살리는 참된 양식이요 참된 음료였다(요6:53-57). 이를 잘못 해석하여 로마가톨릭교회의 교권수호자들은 ‘예수의 살과 피가 자신들의 성찬의식 사용하는 떡으로 화하는 화학적 변화를 일으킨다’는 화체설(transubstantiation)을 주장하였다. 그들은 영적임재설이나 기념설을 주창하는 개신교도들을 무자비하게 박해(迫害)하거나 살육(殺戮)을 자행하였다. 이것은 인간의 이해부족을 단적으로 증거하는 사건이다.


아담의 범죄 이후 거듭나지 못한 죄인은 죄의 영향으로 신령한 것을 분별하지 못한다(고전2:10-16). 또한, 거듭났다 하더라도 성령으로 조명 받지 못하거나 그 빛의 밝음을 외면한 채 어두움에 자신을 방치(放置)하는 자는 진리를 거부한 채 무리한 주장을 하게 된다. 교회사의 역사적 교훈이 이를 증거하고 있다. 따라서 중생한 자라할지라도 그 이해 능력에는 한계(롬8:5-8)가 있으므로 모든 것을 완전히 터득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진리의 영에 의하여 기록된 말씀을 믿는 믿음 안에서 바른 성경의 해석은 필수적인 것이다.



▣ 제 3 장 연구과제


1. 성경해석의 목적과 목표에 대하여 기술하라.

2. 해석자의 과업에 대하여 기술하라.

3. 해석자의 자유와 상식적 통제에 대하여 기술하라.

4. 예수님의 성경해석 관점에 대하여 기술하라.

5. 빌립 집사의 성경해석에 나타난 기능을 기술하라.

6. 난해한 본문에 대한 해석자의 자세에 대하여 기술하라.

7. 성경시대와 현시대의 역사적 간격에 대한 해석자의 자세를 기술하라.

8. 인간의 영적 무지와 한계에 대하여 기술하라.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