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테크/성서와 신앙을 알고싶어요

[스크랩] 성경 연구 자료 - 4강 -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10. 12. 11:12
 

4강 -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본 강의에 앞서 우리가 인지해야 할 사실은 이 강의가 신학적 차원에서 하나님에 대해 논하려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증거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해 알고자 하는 것이다. 이 강의를 통해서 우리는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해 보다 깊은 이해를 가질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유한한 인간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육체를 가진 인간이 영이신 하나님을, 어둠인 인간이 빛이신 하나님을 온전히 안다는 것은, 장님이 손으로 더듬어 코끼리를 완전히 보려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이다. 자기의 유한성 속에서 더듬어 본 하나님의 한 부분을 인간들은 하나님 전체로 착각하고 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 영으로 하나님 앞에 서기전까지 절대로 하나님을 온전히 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계시해 주시는 성경을 통하여, 그리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의 조명 아래서 끊임없이 겸손하게 그 분의 높이와 깊이, 넓이를 알아 가려는 노력을 일평생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 수 없음을 잊지 말라.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최후의 인간 지식이다”라는 토마스 성인의 말을 가슴에 새겨야만 한다. 그 겸손한 마음으로만 하나님을 바로 알아갈 수 있다.


1.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도대체 ‘태초’가 언제인가? 과학만능 시대라는 오늘도 이 질문에 대한 과학의 대답은 ‘모른다’는 것이다. 태초가 언제인지를 아는 사람은 적어도 이 땅 위에 아무도 없다. ‘하나님’은 도대체 누구신가? 과연 인간이 하나님을 완전히 알 수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천지’가 얼마나 큰지 측량할 수 있는 자가 있는가? 최신 과학 설비를 동원하여 인간이 관측할 수 있는 가장 먼 별은 200억 광년 거리에 있는 별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천지’의 전체인가? 과연 인간 가운데 그 누가 감히 ‘천지’를 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창조’의 비밀을 온전히 아는 자가 있는가? 나의 것이라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돋아나는 흰머리를 스스로 막아낼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이처럼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신비로운 네 단어로 구성된 창세기 1장 1절의 말씀 앞에서 우리 인간은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다. 성경의 첫 구절인 이 말씀을 믿느냐 안 믿느냐에 따라, 하나님께서 나의 창조주이심을 믿느냐 아니냐에 따라 인생의 과정과 결과는 판이하게 달라진다. 하나님께서 나의 창조주 되심을 믿을 때 성경을 통해 인간의 현실을 바로 볼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이 창조주 되심을 믿는 자, 그는 말씀(성경)안에서 바른 길을 걸어갈 수 있다.


2. 하나님은 ‘부성(父性)과 모성(母性)을 동시에 지니신 분’이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

  사람들은 오랫동안 하나님을 위력적인 형상을 지닌 남성상으로 이해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전체로서의 하나님 형상은 아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의 형상(속성)을 모두 지니고 계신 분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부성(父性)과 모성(母性)을 동시에 지니고 계신다. 하나님의 모성이야말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최대의 선물이요, 은총이 아닐 수 없다.


3. 하나님은 ‘복 주시는 분’이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7-28)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후 제일 먼저 행하신 행동은 인간에게 ‘복 주시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즐겨하는 분이심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주시기 원했던 ‘복’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간단히 말하자면, 복이란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애프터서비스’(After service)라 말할 수 있다. 자동차의 경우 조그마한 나사 하나만 풀려도 그것은 위험한 흉기가 되고 만다. 이처럼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애프터서비스 없이는 결코 사람답게 존재할 수 없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창 5:2)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복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기복주의’만은 철저히 배격해야 한다. 피조물인 인간의 목적은 언제나 창조주 하나님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 그것이 인간의 목적이고, 복이란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는 은총이다. 우리는 복을 사랑할 것이 아니라,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4. 하나님은 ‘훈련시키시는 분’이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창 15:13)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앞으로 태어날 그의 자손들이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 할 것을 예언하고 계시는 장면이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면 이스라엘 민족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시고 지극히 사랑하신 ‘선민’들이라면 당연히 호의호식하며 지내야 할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예비하셨던 것은 혹독한 노예 생활이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시는 자를 반드시 ‘훈련시키는 분’이기 때문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고독한 훈련을 받았던 것도, 다윗이 사울의 칼날을 피해 심지어는 미친 시늉까지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가혹한 훈련을 받았던 것도 모두 이와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들이 그와 같은 하나님의 훈련에 자기를 온전히 내어 맡김으로 위대한 지도자들이 될 수 있었다.


5.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다.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를 온전히 사랑하실 수 있고,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분께 온전히 맡길 수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전능성을 우리에게 가르치셨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우리 인간이 유한한 존재임을 일깨워 주신 것이다. 인간은 한순간도 자신이 유한한 존재임을 망각치 말아야 한다다. 이처럼 무력하고 유한한 인간들에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아버지가 되어주신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우리는 그분의 전능성을 힘입어 인간의 모든 유한함을 뛰어넘을 수 있다.


6. 하나님은 ‘예비하시는 분’이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창 22:13-14)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그리고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칠 것을 명령하셨다. 얼토당토 않는 하나님의 요구에 아브라함은 한마디 이의도 제기치 않고 순종하였다.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그의 자식에게 주신다 하셨기에 그의 아들을 죽이지 않으실 것이라는 것과, 설령 죽는 경우가 발생한다 할지라도 하나님 당신 자신의 약속을 위해, 죽은 자 가운데서 반드시 다시 살리실 것임을 굳게 믿었다. 이와 같은 믿음으로 순종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번제로 바칠 제물인 양을 이미 예비해 주셨다. ‘여호와 이레’란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다는 뜻이다. 어렵게 사는 부모라도 자식이 태어날 때가 가까워지면 자식을 위해 기저귀며 옷가지 등을 미리 준비하는데 하물며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미리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예비해 두시지 않겠는가?


7. 하나님은 ‘언제나 함께 하시는 분’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5)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 영원하신 분이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다. 우리와 함께 하심은 물론이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신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도대체 어떤 모양으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가?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 행하시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희 뒤에 호위하시리니”(사 52:12상)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개개인들의 앞과 뒤에 계실 수가 있는가? 그 분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영이시며, 또한 빛이시기에 가능하다. 다시 말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빛이시다. 그러므로 그 빛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언제 어느 곳에 있든 우리와 늘 함께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이제껏 창세기를 중심으로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함께 살펴보았다. 하나님은 한마디로 너무나 좋으신 분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좋으신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르셨다(막 14:36). ‘아바’란 ‘아빠’란 말이다. 앞에서 아이는 아빠에 대해 모든 권리를 갖는 반면에, 아빠는 아이에 대해 모든 책임을 진다. 하나님께서는 누구신가? 바로 당신의 아빠시다. 당신을 위하여 모든 책임과 의무를 다하시는 사랑의 아빠시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