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타지마 만지(北島万次), 일본공립여대 교수 번역 : 김문자(상명대강사) 들어가기 전쟁은 그것을 일으킨 당사자보다도, 그것과는 관계없는 많은 사람들이 휘말려 드는 것이다. 1910년부터 35년간에 걸친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전역의 식민지 지배는 가장 두드러진 예이다. 현재 한국의 젊은이들은 이 비참한 상황을 체험하지 않았다. 여러분의 조부나 조모로부터 듣거나 또는 여러 가지 책을 통해서 그 상황을 알았다고 생각된다. 지금으로부터 400년전,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아시아의 황제에 군림할 야망을 품고서 일으킨 임진왜란도, 풍신수길의 야망과는 관계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전쟁 속으로 휘말리게 했다. 포로로서 일본에 연행된 사람도 있는가 하면, 더 나아가 유럽에까지 전매된 사람도 있다. 또한 조선인이면서 일본 측에 가담한 사람도 있다. 그들은 순왜(順倭)라고 불렸다. 순왜 중에서는 일본 측의 앞잡이 가 되었던 사람도 있는가 하면, 원래 조선국가에 원한을 품고 일본군의 침략을 계기로 적극적으로 순왜가 된 자 도 있다. 그리고 일본군 가운데서도 조선 측에 투항한 자도 있다. 그들은 항왜(항왜)라고 불리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장진에 의한 병량부족과 염전분위기로 항왜가 된 자가 있는가 하면, 처음부터 풍신수길의 해외파병에 의문을 품고, 적극적으로 조선 측에 투항한 자도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임진왜란연구에 대해 살펴보면, 풍신수길 및 조선에 출진했던 제대명의 움직임, 조선왕조 및 관인층, 조선관군과 저명한 의병, 그리고 조선을 구원한 명군 등에 초점이 놓여져 있었다. 이점은 일본 측의 사료가 풍신수길 및 제대명에 관한 기록이나 문서이었으며, 조선 및 명 측의 사료가 조선왕조실록, 명실록, 명사, 양조평양록 등의 기록?편찬물 이었다고 하는 제약에 의한 것이다. 이로 인해 임진왜란 연구의 주류는 자연히 군사?외교문제가 중심이 됐다. 그런데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임진왜란에 휩싸인 수많은 민중에 대해 눈을 돌린 연구도 나왔다. 그 대표적인 연구가 내등준보의 ‘문록?경장역에 있어서 피로인의 연구’(1976년 3월 동경대학 출판회)이다. 이 연구의 의미는 팽대한 논증을 근거로 해서 임진왜란을 파악한 새로운 시점을 제시 했던 점에 있다. 아시다시피 이순신의 ‘난중일기’는 임진왜란 전후 7년간에 있었던 이순신 주변의 일들을 기록한 것이며, 이순신이 조선 수군을 지휘하기 위한 메모이기도 하다. 그 가운데는 ‘조선왕조실록’에 나오지 않는 일들도 알 수가 있다. 조선 수군의 현장모습과 왜란에 대처하기 위한 생각, 수군 안에서 여러 가지 역할을 분담한 사람들의 모습을 알 수가 있다. 이런 점을 토대로 해서 ‘난중일기’에서 본 임진왜란을 살펴보고자 한다. Ⅰ. 수군을 지탱한 직인집단 A. 이장 이장은, 목手라고도 하며, 선대공을 시작으로 목수 일에 관여한 직인이며, ‘난중일기’를 보면 토목공사도 행하고 있다. 그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사례1] 난중일기 : 癸巳六月二十二乙巳, 晴, ?船始坐塊, 耳匠二百四十名, 軍役??七十二名, 防踏三十五名, 蛇渡二十五名, 鹿島十五名, 鉢浦十二名, 呂島十五名, 順天十名, 興陽??城各十名, 防踏則初送十五名, 軍官色吏論罪(이하 생략)○二十三日丙午, 晴, 早朝点付耳匠等則無一名干云, 新船木板畢造 사례1을 통해 안 사실은, ① 전라좌수영에 240여명이나 되는 다수의 이장(선대공)이 있었다는 점.② 선대공의 일을 도와주기 위해 그 선재를 운반하는 다수의 잡역인부가 좌수영 지배하의 각 진영에서 동원되었다는 점 [사례2] 난중일기 : 甲午正月二十四癸卯, 晴且暖, 朝山役事, 耳匠四十一名, 宋?馹領去 사례2를 통해서 안 것은, 이장이 묘를 만드는 토목공사에도 관여했으며, 그것을 통솔한 것이 이순신의 부장 송덕일이었다는 점 [사례3] 난중일기 : 乙未十一月二十七日乙未, 晴金?謙以二年木斫?事, 耳匠五名率去 사례3을 통해서 안 것은, 이장은 재목의 채벌에도 관여했으며, 이것도 이순신의 군관이 통솔하였다는 점 [사례4] 난중일기 : 丙申二月初六日癸卯, 陰?耳匠十名, 送于巨?, 造船事?之 사례4를 통해서 안 것은, 전라좌수영에 있는 이장이 거제도로 나가서 조선작업을 했는데, 이점은 전라좌수영의 이장은 거제도 이외의 각 진영 선창에도 작업하러 나갔다고 생각되어짐 [사례5] 난중일기 : 丙申八月十九日甲寅, 或陰或晴 (中略) 昏耳匠玉只?材重傷 [사례6] 난중일기 : 丁酉十月三十日丁亥, 晴而東風, 多有雨態 (中略) 早使?得中, 率耳匠往于島北峯底, 造家材木斫? 사례6을 통해서 안 것은, 이순신의 군관인 황득중은 선박과 총통용 철재의 운반 등에도 담당하였으며 (난중일기 丙申 2月 18?19日), 대개 철재?목재를 조달하는 임무에 관여했던 자라고 생각되어 진다. 그 배하에는 이장 등 직인이 편성되어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한다. B. 石手 석수는 석공을 가리킴 [사례1] 난중일기 : 壬辰正月十六日丁丑, 晴 (中略) 城底土兵朴夢世, 以石手往先生院鎖石浮出? 사례1을 통해서 石工은 전라좌수영주변의 토착 병졸에 인솔되어 채석하러 나갔는데, 이것은 그 지역의 토착병졸 지배 하에 석공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 한다. [사례2] 난중일기 : 壬辰二月五日丙午, 大風雨 (中略) 石手等以新築浦坑多致?落決罪, 使之更築 사례2를 통해서 석공은 원래 참호공사(돌 쌓는 것)를 본업으로 행해왔는데 사례1에서 본 것처럼 채석에서 돌 쌓는 일 까지 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C. 궁장 궁장은 궁시인?궁인, 또는 조궁장이라고도 불려졌으며, 활을 만드는 직인이다. [사례1] 난중일기 : 壬辰三月初六日丙寅, 晴, 朝食後出坐, 軍器点?, 弓甲?兜?????環刀則多破?之物, 不成?者甚多, 色吏?弓匠?監考等論罪 [사례2] 난중일기 : 癸巳二月十三日戊戌, 雨雨如注, 戌時雨止 (中略) 弓箭匠大邦?玉只等還? [사례3] 난중일기 : 丙申七月七日壬申, 晴 (中略) 夕, 弓匠智伊及春卜, 夕?? 사례3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이때 이순신은 이미 閑山島로 진영을 옮겼으며, 궁장은 활 만드는 일 때문에 전라좌수영에서 한산도로 나갔고, 일이 끝났기 때문에 전라좌수영으로 돌아 왔다. 이것은 이장이 거제도로 나갔던 것과 같은 문제이다. [사례4] 난중일기 : 丁酉五月八日戊戌, 晴 (中略) 弓匠李智?去 사례4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사례3과 같다. [사례5] 난중일기 : 丁酉八月十六日甲戌, 晴 (中略) 弓人李智及太貴生口?見 사례5에서 이 해 7월 22일,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되었고, 수군재건을 꾀하였으며, 그때 궁장이 인사하러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D. 전장 전장이라는 것은 궁의 화살을 만드는 직인이다. [사례1] 난중일기 : 甲午八月初四日己酉, 朝?雨晩晴 (中略) 箭匠朴玉?捉竹 E. 야장 야장이라는 것은 단야직을 가리킴 [사례1] 난중일기 : 丁酉十月卄三日庚辰, 晴 (中略) 冶匠許莫同往于羅州, 初更未使奴招之, 則腹痛云 사례 1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단야직도 전라좌수영에 있으며, 나주 등의 지역으로 일하러 가는 경우도 있다. F. 전라좌수영의 직인들 지금까지 예를 들었던 이장?석수?궁장?전장?야장 등의 사례는 난중일기에 보이는 직인에 관한 기술에 의한 것이지만, 1631년 (인조9)에 수록된 ‘호좌수영지’에 의하면, 좌수영에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직人이 편성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단지 이 시점에 있어서의 좌수영 상태는 이순신이 수사로 있었던 당시와는 몇 가지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耳匠 : 46명 *火砲匠 : 45명 *沙工(船頭) : 48명 *弓矢人(造弓匠) : 37명 *漆匠 : 8명 *銀匠(金?銀?細工製造) : 2명 *扇子匠 : 26명 *木手(木工) : 30명 *?匠(葬送具?祭器製造) : 3명 *環刀匠 : 4명 *筒箇匠(竹筒細工) : 24명 *刀子匠(小刀製造) : 3명 *鍮器匠(?鍮器具製造) : 1명 *朱錫匠(朱錫은 ?鍮의 일종) : 1명 *竹席匠(竹皮의 敷物細工) : 10명 *笠子匠 : 6명 *官木手 : 3명 *水?匠(銑?匠?) : 37명 *沙?吹?匠 : 10명 *皮?匠(皮細工職人?) : 3명 *磨造匠(칼?거울 가는 사람?) : 3명 *螺鈿匠 : 2명 *蓋匠(지붕 잇는 직인) : 2명 *瓦匠(瓦職人) : 6명 한 번 봐도 알 수 있듯이 이들 직인은 수영에 필요한 군수물자를 중심으로 한 물품들의 제조에 종사하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수사직속의 군관에 편성되어, 수군의 수요에 응할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란 때 조선 수군이 눈부신 활약을 전개했던 점은 잘 알려져 있지만, 그것을 지탱하고 있었던 것은 이들 직인이며. ‘난중일기’의 이곳저곳에서 이들 민중의 존재를 볼 수가 있는 것이다. Ⅱ, 위왜로 변장한 난민 임진왜란이라는 조선왕조 개국 이래 가장 국가적 위기였을 때, 전란의 혼란한 틈을 타서 방화?약탈을 자행했던 난민이 있다. 그 행동의 일례를 ‘난중일기’ 속에서 소개하자. ○八日庚申,晴,因南海往?人趙鵬,聞賊犯光陽,光陽之人, 已?焚蕩官?倉庫云, 不勝怪怪, 順天?光陽, ?欲?送, 路云不可信, 停之(蛇渡軍官金鵬万, 探知次送之) ○九日辛酉, 晴, 南海又??云, 光陽?順天已?焚蕩云, 故光陽?順天及宋希立?金得龍?鄭思立等, ?送李渫, 昨日先送, 聞?痛入骨?, 不能措語 (中略) 三更末, ?探候船入?, 云賊奇, 則非倭賊, 嶺南避?之人, ?著倭形, 突入光陽, 閭閻焚蕩云, 則不勝喜幸, 晋陽之事亦?云, 然晋陽事, 万無是理, ?已鳴矣 ○十日壬戌, 晴, 晩金鵬万自豆恥(光陽郡多鴨面蟾津里)?言, 光陽之事?矣, 而但賊倭百余名, 自陶灘越渡, 已犯光陽云, 然就?所?, 則銃筒一無度放之云, 倭而万無不放?之理矣(以下略) ○十一日癸亥, 晴 (中略) 蛇渡僉使(金浣)還?言?, 豆恥渡賊事??, 而光陽之?著倭服, 自相作?云, 順天?樂安已?焚蕩云, 不勝痛憤憤, 夕??成, 自光陽還?, 告曰, 光陽賊事, 皆晋州及?人, 出此凶計, 官庫寂然, 閭里一空, 終日回?, 無一人云, 順天尤甚, 而樂安次之云(以下略) 이상 열거 한 사항은, 경상도 피난민이 왜적으로 변장해서 광양에 돌입해 방화?약탈을 자행하고 광양인들 사이에도 이들 행위에 가담하는 자가 나왔다고 하는 사례이다. 전라도 관찰사 이정암의 장계에 의하면, 요즈음 충청?경상?전라삼도에서는 하층민이 혼란한 틈을 타 약탈 행위를 하고 있다고 적고 있으며, 왜란에 의한 식량부족과 생활불안이 하층민을 그와 같은 경지로 몰고 갔던 것이다. 광양의 난민에 대해서 최초 이순신은 왜적이 침범했다는 보고를 들었으나, 그것이 조선 난민의 소행이라는 소식을 듣고, 한편으로는 안심하였으나 통분한 마음을 풀길 없는 심정에는 차이가 없었다. ‘난중일기’에는 조선인이 동포를 살식했다는 사실도 기록되어 있고(甲午 2月 9日), 왜란의 영향에 의한 조선 사회의 혼란을 낱낱이 볼 수가 있다. Ⅲ. ‘난중일기’에서 보이는 항왜에 대해서 1. 항왜에 관한 기술 *1594(선조27) 甲午年 10月 6日 初六日, 庚戌, 晴 (中略) 倭奴一名, ?到漆川山麓, 欲?投降, 故昆陽郡守招降載船, 問之則永登倭也 *1594(선조27) 甲午年10月 21日 卄一日乙丑, 晴而小陰 (中略) 晩항왜三名, 自元水使?, 捧招 *1594(선조27) 甲午年 11月 3日 初三日, 丁丑, 晴, 朝金天碩, 指備邊司?, 率항왜也汝文(?右衛門)等三名到陣 *1594(선조27) 甲午年 11月 4日 初四日戊寅, 晴, 出大?, 問항왜等事情 *1594(선조27) 甲午年 11月 5日 初五日己卯, 陰而細雨 (中略) 巡邊使(李鎰), 使其軍官押送항왜十三名 *1594(선조27) 甲午年 11月 7日 初七日辛巳, 晩晴, 朝出大?, 항왜十七名, 送于南海 *1594(선조27) 甲午年 11月 13日 十三日丁亥, 晴, 風日?? (中略) 元帥使防禦使軍官, 領항왜十四名而? *1594(선조27) 甲午年 11月 14日 十四戊子, 晴, 朝, 右兵使(金?瑞)항왜七名, 使其軍官領?, 故?送南海? *1594(선조27) 甲午年 11月 27日 二十七日辛丑, 晴, 食後, 出坐大?, 則左右道送항왜???聚, 故使之習放 *1595(선조28) 乙未年 1月 7日 初七日庚辰, 晴 (中略) 南海항왜也汝文等?現 *1595(선조28) 乙未年 1月 9日 初九日壬午, 晴, 食後也汝文等, 還送南海 *1595(선조28) 乙未年 1月 17日 十七日庚寅, 雨勢似斂 (中略) 晩右水使(李億祺)馳報, 見乃梁伏兵?所?항왜沈安?已招問, 則渠是永登屯倭, 而其?沈安頓(島津義弘)代其子(島津忠恒), 近?入?云云 *1595(선조28) 乙未年 4月 24日 二十四日丙寅, 晴 (中略) 午時姜千石走?告, 逃倭望己時老(孫四??)伏於茂草中, 捕得一倭, 投水死云, ?押?, 三道分?항왜, ??招集, ?令斬首, 望己時老, 少無難色就死, 可謂悍矣 *1595(선조28) 乙未年 5月 21日 二十一日癸巳, 陰 (中略) 朝出坐, 則항왜等?告, 其同類倭山素, 多有兇悖之事斬殺云, 故令倭斬之 *1595(선조28) 乙未年 10月 5日 初五日甲辰, 早朝上?看役, 而?上外楹仰土, 使항왜運役 *1595(선조28) 乙未年 10月 13日 十三日壬子, 晴, 早上新?, 大?仰土, 令항왜畢役 *1595(선조28) 乙未年 11月 1日 十一月初一日己巳, ?行望闕? (中略) 항왜等饋酒 *1595(선조28) 乙未年 11月 16日 十六日甲申, 晴, 항왜汝文?己?也時老(?次?)等, ?告倭等欲逃, 故令右虞候捉?, 摘其首謀俊時等二倭斬之 *1595(선조28) 乙未年 11月 25日 二十五日癸巳, 晴 (中略) 晩慶?虞候??, 항왜八名, 自加?出?云, 熊川(李雲龍)及右虞 *1595(선조28) 乙未年 11月 26日 二十六日甲午, 朝陰晩晴 (中略) 午時慶?水使?, 항왜八名及引?金卓等二名??, 故饋酒, 金卓等則各給木棉一疋而送 *1595(선조28) 乙未年 11月 30日 三十日戊戌, 晴, 南海항왜也汝文(?右衛門)?信是老(信次?)等? *1596(선조29) 丙申年 1月 7日 七日甲戌, 晴 (中略) 未時見乃梁伏兵?三千?官馳報, 則항왜五名, 自厓山出?云, 故使安骨浦万?禹??孔太元起送 *1596(선조29) 丙申年 1月 8日 八日乙亥, 晴 (中略) 早항왜五名入?, 故問其?由, 則以其?性?, 役且煩重, 逃?投降云, ?其大小刀, ?之?上, ?非釜山倭也, 乃加?沈安(島津殿)屯所率云 *1596(선조29) 丙申年 1月 15日 十五日壬午, 晴且? (中略) 因饋항왜酒食 *1596(선조29) 丙申年 2月 15日 二十五日壬子 (中略) 昏問右道항왜, ?慶倭同約, 欲?逃去之計云, 故??令通之 *1596(선조29) 丙申年 2月 19日 十九日丙辰, 晴 (中略) 時?慶?陣留在항왜, 使此?倭?南汝文等縛??頭 *1596(선조29) 丙申年 4月 16日 十六日壬子, 晴, 朝食後出坐, 招?汝文(南右衛門)等, 問衝火倭三名招致戮滅 *1596(선조29) 丙申年 4月 19日 十九日乙卯, 晴 (中略) 是日, 朝因南汝文, 聞秀吉之死, ?躍不已, 但未可信也, 此言曾播, 而?未的奇之? *1596(선조29) 丙申年 4月 29日 二十九日乙丑, 晴 (中略) 항왜沙古汝音, 令南汝文斬之 *1596(선조29) 丙申年 6月 24日 二十四日, 初伏, 庚申, 晴 (中略) 항왜也汝文等請殺其類信是老云, 故命殺之 *1596(선조29) 丙申年 7月 13日 十三日戊寅, 晴 (中略) 昏항왜等多張優?, ??者不可坐視, 而?附之倭懇欲庭?, 故不禁也 *1596(선조29) 丙申年 7月 18日 十八日癸未, 晴 (中略) 夕聞항왜??己?沙耳汝文等凶謀欲害南汝文 *1596(선조29) 丙申年 7月 19日 十九日甲申, 晴而大風終日, 南汝文斬?己(??己?)?沙耳汝文等 *1597(선조30) 丁酉年 7月 3日 三日壬午, 晴 (中略) 此時左兵使, 使其軍官押항왜二名而?, 乃?正所率云 *1597(선조30) 丙申年 9月 17日 十六日甲辰, 晴 (中略) 항왜俊沙者, 乃安骨浦賊陣投降者也, 在我船上俯視曰, 着?文紅錦衣者, 乃安骨陣賊?馬多時(?島通??)也, 吾使無上金乭孫要?釣上船頭, 則俊沙?躍曰, 是馬多時云, 故?令寸斬 2. ‘난중일기’의 항왜 기술에서 말할 수 있는 것 1) 항왜 발생의 절정시기 이상, ‘난중일기’에서 보인 항왜의 사례를 소개 했는데, 이를 통해 항왜가 결정적으로 많이 발생한 시기는 1595년(선조28)부터 1596년(선조29)이었다. 이시기는 일본과 명이 강화교섭을 했던 시기이며, 일본군은 조선의 남쪽연안에 왜성을 쌓고서 장기적으로 주둔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2) 항왜는 어디서부터 도망 쳐 왔는가? 그러면 ‘난중일기’에서 보이는 항왜는 어디서부터 도망쳐 왔는가. 영등포(甲午 10月 6日, 乙未 3月 17日), 가덕도(乙未 11月 25日, 丙申 1月 8日), 부산(丙申 1月 7日)등에서 도망쳐온 사례도 있으나, 주목할 것은 경상도황석산성 가등청정(加藤?正)의 진영으로부터 항왜가 있었다는 것이다(丁酉 7月 3日). 당시 가등청정은 경상도 황석산성을 공략하려 했던 때이고(朝鮮王朝 선조?? 선조 30年 9月 戊子), 황석성은 경상도 거창에서 전라도 전주로 통하는 요충지였다. 여기서 도망친 항왜가 경상좌병사 성윤문에게 왔으며 그들이 이순신 밑으로 보내진 것이다. 3) 항왜가 되는 계기 왜병이 항왜가 되는 계기는 성을 쌓는 공사 등 힘든 노역을 들 수 있다. 앞에서 본 도진씨 가신의 경우가 그렇다(丙申 1月 8日). 이때 도진씨의 병력은 가덕도에 주둔하고 있었지만, 도진의홍은 도진령국의 태합검지(토지조사) 후의 지행(영지)분할 문제로 귀국했었고, 도진 병력의 총대장은 도진우팔랑충항(후에 家久로 고침)였다. 이곳에서 도진씨는 축국(옛 귀족들의 공차기 놀이)장소나 다실을 제대명들과 교제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또한 풍신수길로부터 호수의 令이 내려지자, 가신들은 범 사냥에 여념이 없었다(高麗入日記, 薩藩?記?? 33,35. 北島万次 ‘朝鮮日?記?高麗日記-풍신수길의 조선침략과 그 역사적 고발’そしえて 265頁이하). 4) 어떠한 항왜가 있었는지 - 항왜의 류형 그런데, 일괄적으로 항왜라 해도, 여러 종류의 항왜가 있었는데, 조선 수군에 협력자가 된 자, 항왜라 해도 의연하게 도망치거나 반항한자, 이렇게 둘로 대별할 수가 있다. ① 조선 수군 협력자 조선 수군에 협력한 자로서는, 항왜 내부의 움직임을 이순신에게 고하는 등의 행위를 한 점을 들 수 있다. 난중일기 乙未 11月 16日의 기사에 있는 것처럼, 항왜인 여문련과 야시로(미차랑)가 항왜 중에서 도망 칠 계획이 있다는 것을 고해, 이순신은 그 주모자 두 사람을 처형하고 있다. 또한 난중일기 丙申 4月 16日기사에 의하면 항왜 중에는 방화한 자도 있고, 이순신은 이에 대해 항왜 란여문(남우위문)으로부터 그 범인을 알아내서 처형하고 있다. 그런데 항왜의 처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들 수 있다. 난중일기 乙未 5月 21日기사에 의하면, ‘산소’ 라는 항왜가 교활하기 때문에 그를 참살하고 싶다는 다른 항왜들이 이순신에게 청원을 했다. 그래서 이순신은 항왜들에게 ‘산소’를 처형시키라고 했다. 이 경우 그 교활하다고 하는 내용은 분명하지 않다. 이처럼 항왜에게 동료 항왜를 처형시키는 사례는 난중일기의 丙申 2月 19日?4月 29日?6月 24日의 기사에도 보인다. ② 도망, 반항 또는 협력자에게 린치를 기도한자 이처럼 항왜에 의한 항왜의 처형 배경에는 항왜의 도망과 반항이 있다. 난중일기 乙未 4月 24日에 도망간 항왜를 수군의 협력자가 된 항왜 손사랑이 체포했다는 기사가 있다. 난중일기 乙未 11月 16日의 사례에 대해서는 이미 서술했다. 다음으로 난중일기 丙申 2月 15日의 기사에는, 경상우도의 항왜가 경상도의 왜적과 연락해서 도망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는 것이 보인다. 여기서 상기되는 것은, 1593년(선조26) 7月, 항왜라고 속이고서 투항한 왜병이 대구에서 명의 부총병 이녕에게 달려들었으나 오히려 살해되었다고 하는 사건이다(조선왕조실록 선조 26年 7月 丁巳). 여기에서도 분명한 것처럼 항왜가 되어 투항했어도 이런 경우는 무엇인가 특정한 의도를 갖고서 의식적으로 투항한 자도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더욱이 항왜 사이에서 사형이 있었다는 것이 난중일기 丙時 7月 18日과 19日의 기사에서 볼 수 있다. 그것은 ‘련은기’ 및 ‘사이여문’이라는 이름의 항왜가 수군의 협력자가 된 남우문(남우위문)을 살해하려고 계획했는데 이것이 발각되어 이순신은 남우문(남우위문)에게 명하여 이 두 사람을 참하게 하였다. 이처럼 항왜에 있어서 여러 가지 삶을 보는 것이다. 5) 항왜의 이용 난중일기는 항왜의 이용에 대해서도 적혀있다. 항왜에게 포술을 배우게 한 기사가 있으며(난중일기 甲午 11月 27日),이들은 수군의 포수로서 이용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 난중일기 乙未 10月 5日?13日에 보이는 것처럼, 항왜는 벽토를 바르는 노역이 부과되었고, 이런 점에서 항왜에게 토목공사의 노역도 부과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더욱이 난중일기 甲午 11月 7日?14日의 “항왜를 남해로 보냈다”라는 기사가 있다. 이것은 아마 격군(수부)으로서 부리려고 했던 것일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재기가 있어서 공순한 태도를 취하고 국용에 도움이 되는 항왜는 진중에 두고, 그 외의 항왜는 한산도의 수군으로 보내 격군으로서 이용하려고 했던 점도 분명하다(조선왕조실록 선조 27年 9月 己丑). 그리고 ‘국용에 도움이 되는 항왜’라는 것은 전투할 때의 이용을 들 수가 있다. 丁酉 9月 17日의 명량해전 때 왜장래도통총을 지명한 항왜 준사의 경우가 그렇다. 3. ‘항왜’라 불려진 왜인 처음에도 말한 것처럼 조선을 복속시키고,명을 정복해서 동아시아 세계에 군림할 야망을 품었던 풍신수길, 그가 일으킨 왜란은 많은 사람을 전쟁 속으로 몰고 갔다. ‘항왜’라 불려진 왜인도 그 하나이다. 그들 가운데에는 오랜 전쟁에 의한 병량불족과 염전분위기로 항왜가 된 자가 있는가 하면, 처음부터 풍신수길의 해외파병에 의문을 품고서 적극적으로 조선 측에 투항한 자도 있다. 난중일기에는 그 항왜의 실태를 낱낱이 볼 수가 있다. 예를 들어 수군의 진영에서 도망치려 했던 항왜의 경우, 처음에는 고된 축성 공사 등 왜장의 대우에 불만을 품고 대개 조선 측에 투항했던 것이나, 항왜에 익숙하지 않자 다시 도망쳤던 것이다. 여기서 왜란에 동원된 하급왜병의 동요를 보는 것이다. Ⅳ, ‘난중일기’ 원본의 날짜착오와 명량해전에 대해서 난중일기(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편 조선사료총간 제6, 난중일기초?임진장초)를 상세하게 읽으면, 丁酉 8月 末日과 9月 전체에 날짜가 잘못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8月 末日의 날짜는 ‘三十日 戊子’로 되어 있고, 9月 1日은 ‘九月初 一日 己丑’으로 되어 있다(267頁). 이것은 ‘충무공전서’에 있는 ‘난중일기’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을 ‘난중일기’의 원본과 대조해 보면, 第5冊目(표제 ‘정유일기’)의 8月 末日의 날짜는 ?日戊寅(?戊子?의 잘못)으로 되어있고, 第6冊目(표제 흠, 영인본은 ‘戊戌’로 적혀있다)의 8月 末日의 날짜는 ‘三十日 戊子’로 되어 있다. 第5冊目과 第6冊目 모두 8月 30日까지로 되어 있는데, 당시의 冊?(명력=조선력) 8月은 小月이었으며, ‘난중일기’의 ‘八月 三十日 戊子’는 ‘九月 一日 戊子’로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더불어 ‘조선왕조 선조실록’ 대비해서 보면 선조 30年 丁酉 8月 末日은 ‘丁亥’이며, 9月 1日은 ‘戊子’이다. 따라서 ‘난중일기’의 9月 기사는 하루씩 밀려야 된다. 더욱이 9月은 大月이므로, 원본의 9月 29日은 30日이며, 10月 1日부터의 날짜는 맞는 것이 된다. 이 ‘난중일기’에 있어서 날짜의 오류는 이순신의 착각에 의한 것이다. 이순신은 ‘난중일기’ 丁酉 9月의 기술을 날짜 착오에 의해 적었기 때문에, 저명한 명량해전도 9月 16日로 되어 있다. 그러나 명량해전은 9月 17日이 바른 것이다. 지금까지 모든 학설사는 무비판적으로 명량해전을 9月16日로서 답습해 왔다. Ⅴ. 마치며 지금까지 ‘난중일기’를 근거로 해서, 해전에서 이순신의 눈부신 활약과는 별도로, ‘난중일기’를 통해서 일본과 조선양국의 서민의 움직임을 보려고 노력했다. 이순신의 해전을 밑에서부터 지지했던 사람들, 왜란의 혼란을 틈타 위왜가 되어 도적행위로 치우친 조선의 하층민, 풍신수길의 야망에 동원되어 항왜가 된 왜인들의 삶, 이것들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난중일기’을 통해서 왜란을 파악할 수 있는 새로운 시점이 보이게 되는 것이다. |
출처 : 살맛 나는 세상이야기들...
글쓴이 : 크레믈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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