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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김병호]"고구려를 위하여"를 다시 읽으며 생각해 본다...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10. 21. 06:03

"고구려를 위하여"를 다시 읽으며 생각해 본다...

   

 

  고구려를 위하여 1.2.3

  지은이 : 김병호 지음

  출판사 : 하서출판사 펴냄

  발간일 : 1997. 07. 10

 

 

 

 

김병호 장편소설 "고구려를 위하여"를 읽다보면 이정기의 나라 "제[濟]"가 나온다. 이 소설은 우리나라가 천년전에 당에의 국가가 와해와 함께 당나라에 포로로 끌려간 고구려 유민들의 한많은 세월 속에 그들의 자손으로 태어나서 고구려를 다시 세우려는 고구려 유민들의 민족혼을 그리는 소설이다.

이소설은 '97년 이맘때에 단숨에 읽어버린 소설이지만 헌금에 다시 읽어보니 감해가 세롭다. 소설의 주인공 을지마사는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가진 잃어버린 왕국 "고구려"를 다시 찿으려는 민족혼을 고선지장군과 이정기장군을 통해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민족혼이다.

"고구려를 위하여도" 역사소설의 한 부분인 만큼 저자의 주관적인 생각이 아니라 많은 역사서[삼국사기, 삼국유사, 신.구당서, 후한서, 일본서기, 자치통감, 입당구법순례행기]를 참고로 하여 왜곡에 대한 불신을 없에 버렸고 작가 본인이 현지를 여러번 방문하였다고 하니 작가의 심정과 어려움을 짐작할 수가 있다.

여기서 우리 민족혼에 담긴 이정기의 나라 아니 우리 고구려를 알아 보고 싶어 몇자를 적는다. 그리고 TV에서 방영되었던 해신[海神]의 이사도와 장보고를 다시 생각해 봄으로서 이정기의 나라를 알아본다.



이정기는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포로로 잡혀간 고구려인의 후손이다. 당시 당으로 끌려간 고구려인 20만명은 영주에서 생활했다. 고구려인에게 당에서 유일한 신분상승의 길은 군인이 되는 것이었고 이정기 일가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당의 평로군(平盧軍)에는 고구려 출신의 군인이 많았다. 765년 7월 이정기는 고모의 아들 후희일의 뒤를 이어 평로절도사에 임명된다. 이때부터 그는 15주를 다스리는 치청의 막강한 절도사로 완전히 하나의 독립세력을 형성한다. 당은 이정기의 강력한 세력을 이용할 속셈으로 그에게 요양군왕(饒陽郡王)이라는 작위를 준다.

755년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자 그 틈을 노려 고구려 유민 이정기는 옛 고구려 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지금의 산동반도 일대 당시 당나라의 심장부에 고구려 유민왕국 치청국을 세운 것이다.

그는 자신의 상관이자, 고모의 아들인 唐人후희일을 죽이고 치청국을 세움으로써 고구려의 영광을 알렸다. 치청국은 765년에 건국하여 819년까지 약 55년간 당나라 심장부에 위치하여 당을 벌벌 떨게 만든 군사강국이었다.

이정기 왕국 즉 치청국이 자리한 산동반도는 당시 당나라 경제의 물산이었을 뿐만 아니라 소금의 산지였다. 또한 당의 젖줄 강남과 연결된 통제거가 지나는 당나라의 요충지이자 심장부였다. 이처럼 이정기 왕국의 지리적 요건은 대단히 유리하였다

濟나라의 건국은 을지마사와 많은 고구려유민에 의해 이정기의 아들 이납이 옹립되어 건국된다.

이정기가 자신이 관할하는 영역 안에서 기반이 확고한 국가로 도약할 수 있었던 것은 신라, 발해의 사신 왕래 및 교역을 통괄하는 해운압신라발해양번등사(海運押新羅渤海兩蕃等使)라는 관직 덕분이었다. 이정기가 이 관직을 받음으로써 당이 낙양 동쪽 지역에서의 모든 통치권을 그에게 위임했다 표현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이정기가 신라와 당의 공식교류와 관련된 첫 업무를 관장한 것은 766년 3월 신라가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칠 때였다. 이후 이정기는 신라 사신의 출입을 관장하면서 신라, 발해와 무역으로 큰 이윤을 남김은 물론 경제 외적 이익도 컸을 것이다. 건중 2년 정월 성덕 절도사 이보신이 죽자, 이정기는 이보신의 아들 이유악에게 성덕절도사를 세습시킬 것을 덕종에게 요구했다가 거절당하자 전열, 양숭의 등과 반란을 도모했다.

이정기는 먼저 도읍을 청주에서 운주로 옮겼다. 그리고 당 조정과 싸우기 위해 변주에 성을 쌓았다. 또한 강·회의 조운을 막음으로 필요한 재화가 공급되지 못하도록 했다. 이때 이정기가 조정에 대항한 것은 아들 이납에게 자신의 지위를 세습하기 위한 속셈이었다. 그러나 이정기는 781년 악성 종양으로 49세의 나이로 죽었다.

이납은 당나라에서 이정기처럼 무인 생활을 했다. 어린 시절 봉예랑, 전중승, 시어사 등을 거치며 파격적으로 승진했다. 또한 검교창부낭중과 총부병을 역임하면서 이정기의 상주로 치주자사에 임명되었다. 그 뒤 이납은 절도관찰유후에서 청주자사, 행군사마, 조주자사와 6주의 유후, 어사대부에 임명되었다.

이 같이 이납이 여러 관직에 오를 있었던 것은 이정기 덕분이었다. 그러나 이정기가 당과 대립하는 과정에서 죽었기 때문에 당은 이납을 계승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이납은 진주 이유악, 전승사의 조카 전열 등 절도사 후계 세습 문제를 안고 있던 인물들과 제휴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납은 아버지 이정기의 죽음을 비밀에 붙이고 군사를 통솔하며 당나라 조정과 싸웠다. 이납은 이정기가 폈던 장안, 낙양 봉쇄작전을 밀고 나갔다. 이납과 전열이 와구를 지키고 양숭의가 남북으로 통하는 뱃길을 막자 장안과 낙양은 공황상태가 되었다. 한편 이납은 복양에서 궁지에 몰린 전열을 구하기 위해 파병하면서 조정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이납은 복양에서 관군에게 포위되었다. 관군을 지휘하던 유흡에 의해 복양 외성이 함락되자, 이납은 내성 망루에 올라가 눈물을 흘리며 판관 방설, 자신의 아우 이경, 아들 이성무와 함께 황제를 배알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요청했다. 이때 이납은 항복한 것과 다름없었다. 그런데 환관 송봉조가 이납의 운명이 끝난 것으로 착각한 것이 재기의 발판이 되었다. 송봉조는 이납을 죽이고 그 공로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겠다는 욕심을 부렸던 것이다. 덕종은 송봉조의 말을 쫓아 방설 등을 금영에 가두었다. 이납은 이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켰다.

조정과 공존하기 위한 협상이 벼랑으로 몰리자 이납은 계획을 바꾸었다. 구당서의 이납전에서는 이 상황을 "이납은 곧 운주로 돌아가 다시 이희열, 주도, 왕무준, 전열과 모의해 모두 반란을 일으켰고, 스스로 제왕(齊王)이라 칭하면서 백관을 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도리어 이 위기가 이납으로 하여금 명실상부한 제나라 건국자로 등장하는 계기를 마련한 셈이다. 이정기는 물론 그의 아들 이납도 당나라와 무관하게 관리를 임명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다스리는 영역에서 거둔 세금을 당나라 조정에 납부하지도 않았다.

당과의 관계에서 제나라의 독립성은 통일신라보다 더 큰 것이었다. 신라와 발해는 수시로 조공을 바쳤으나 제나라는 조공을 바친 적이 없다. 건중 3년 11월 이납은 자신이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하늘에 알리는 제천의식까지 거행하고 스스로를 과인이라 칭했다. 이납이 독립한 이듬해부터 다른 절도사들도 각기 독립을 선포하고 장안을 공격했다.

그 결과 783년 10월 덕종은 봉천으로 피난했다. 조정에 남아있던 병사들은 태위 주차를 황제로 옹립하는 등 어수선해졌다. 봉천으로 도망간 덕종은 그 해 12월 사자를 파견해 이납 등과 비밀협상을 개시했다. 흥원 원년까지 지속되자 조정은 육지의 상소대로 이납 등의 반란을 사면하는 조서를 발표했다. 항복하면 죄를 용서한다는 조서였다.

이 조서를 받은 이납은 조정과 타협했다. 조정은 이납에게 검교공부상서와 평로군절도, 치주·청주 등의 주관찰사로 임명했다. 그 해 4월에는 검교우복야·동중서문하평장사 등의 직책도 주었다. 당이 유화 제스처를 쓴 후 이납에게 준 관직에 해운압신라발해양번등사가 있다. 제나라가 강력한 국가로 성장할 수 있는 해외 네트워크를 장악했음을 당나라가 공식적으로 인정함 셈이다. 이납과 당이 타협한 뒤 반란을 도모한 세력이 있었다. 783년 진주를 포위한 이희열이 대표적이다. 이납은 휘하병사를 파견해 다른 절도사들의 군사와 함께 이희열을 격파했다.

786년 2월 조정의 요청으로 이납 등이 하남해영에 군사를 보내 토벌에 성공하자 이납의 두 아들에게 각각 6품과 8품의 정원관이라는 벼슬을 주었다. 790년 2월 왕무준 휘하의 체주·조호가 이납에게 귀순했다. 이는 주변 절도사들을 제압했다는 구체적 사례이다. 체주는 소금이 생산되던 지역으로, 이후 이납은 체주에서 막대한 염리를 챙길 수 있었다. 제나라가 날로 강성해지자 조정은 체주를 왕무준에게 돌려줄 것을 요구했으나 이납은 거절했다. 792년 2월 이납은 34세로 요절했다. 그런데 당나라에서 이납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3일 동안 정사를 폐지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는 제나라가 얼마나 강력했는가를 설명하기 때문이다.

이납이 죽자, 아들 이사고가 대를 이어 즉위했다. 이사고는 이납 생전에 이미 청주자사가 되었다. 그때 이사고는 불과 15세였다.

구당서의 덕종기에는 792년 이납의 백성들이 이사고를 옹립하자, 당나라 조정에서 이사고에게 운주대도독장사·평로치청등주절도관찰·해운압신라발해양번등사라는 관직을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나이 어린 이사고가 즉위한 뒤 주변 절도사 가운데 왕무준이 소금 생산지인 체주·합타·삼차를 빼앗기 위해 이사고의 영토로 진격할 작전을 수립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왕사청의 군영에 불이 나 싸우지도 못하고 회군했다. 염전을 확보한 이사고 국가의 재정은 누구보다 튼튼했다. 이사고가 경내에서 생산되는 재화와 아울러 신라·발해·일본과의 외교·통상권을 장악했던 것은 제나라가 경제적으로 강력한 국가였음을 반증하는 셈이다. 제나라는 신라·발해·일본과의 통상뿐만이 아니라 창의절도사 오소성과도 교역했다. 이 때 오소성은 쇠가죽과 신을 만드는 생가죽 재료를 제나라에 보냈으며, 제나라는 그 대가로 소금을 오소성에 보냈다.

이사고는 제나라를 강력한 국가로 만들기 위해 망명자들을 불러모아 융숭하게 대접했다. 당에 대항해 죄를 짓고 도망한 사람들에게도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한편 이사고는 신하 독고조가 장안으로 가서 투항하려 하자 왕제를 파견해 죽엿다. 그만큼 이사고는 당나라를 제압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그래서 제나라 밖으로 나가는 사신은 처자를 운주에 인질로 남겨 놓아야 했다. 이사고는 신하가 당에 귀순하려는 낌새만 발각되어도 그 가족을 죽일 정도로 당에 대한 적대감이 대단했다. 이사고의 신하들은 죽음이 두려워 감히 배반할 생각을 품지 못했다.

하지만 이사고는 당나라를 공격하려던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못한 채 32세 무렵에 죽었다. 당나라는 이사고의 죽음에 대한 기록을 남기면서 왕이 죽을 때 쓰는 훙(薨)을 사용했다.

이사고의 유언대로 그의 이복동생 밀주자사 이사도가 제나라의 계승자로 즉위했다. 그러나 당은 이사고에게 주었던 관직들을 이사도한테는 주지 않았다. 이사도는 양세 납부와 조정에서 파견한 관리를 등용하겠다며 당나라에 화해를 제의했다.

한편 당은 토번의 발호 등으로 이사도를 견제할 군사적 조치를 취할 형편이 못 되었다. 당은 이사고가 죽은 다음 달 이사도에게 치주·청주 절도유후로 임명한 데 이어 관내지탁영전관찰처치와 해운압신라발해양번등사라는 관직을 주었다. 이사도 재위시 제나라는 이사고 시대 못지않게 발전했다. 당시 중국의 기록은 이사도의 정치에 대해 "법령이 하나처럼 같은데다 세금마저 균일하게 가벼워 절도사 중에서 제일 강대했다"고 적고 있다. 이사도의 제나라는 다른 절도사들의 후계 구도가 잘못되었을 때 직접 개입할 정도로 강성했다.

이사도는 한때 이사고 시대에 오소성에게 보내는 교역품을 탈취한 선무절도사 한홍에게 자신의 행동에 따르라고 명령할 정도였다. 이사도는 당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게릴라전을 구사했다. 원화 10년 하음창을 불사르고 건릉교를 끊었던 것이 바로 그 것이다. 이는 이사도가 당나라 조정을 교란시키기 위한 전술이었다. 이사도는 낙양 부근의 이궐과 육혼에 많은 전답을 소유하고 있었다.

또 이사도는 낙양의 사저에 수백명의 병사를 주둔시키며 반란을 획책했다. 당나라의 재상 무원형은 이사도 군사에 의해 피살되기도 했다. 헌종은 이사도를 공격하기 위해 모든 절도사들을 동원했다. 이사도는 일시 궁지에 몰리자 3개주를 당나라에 헌납하면서 화해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사도의 애첩들이 "제나라가 12주를 소유한데다 영토 안에 수십만명의 병사가 있는데 그런 조치는 옳지 않다"고 하자 이사도는 자신의 계획을 수정했다. 당나라는 절도사를 동원해 이사도를 사방에서 공격했다. 이 때 이사도의 도지병마사 유오는 반란을 꾸미려 한것을 입수되어 그를 소환했고 유오는 이사도에게 보여줄 것이 있다면서 이사도 앞으로 가 칼로 이사도와 그의 아들을 죽였다. 이 때가 819년 2월의 일이었다.

제나라의 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당 조정은 기뻐서 3일 간잔치를 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당에 항복하여, 55년간 산동반도를 통치하며 천하를 호령한 제나라는 멸망하고 말았다. 당은 제나라의 고구려계 장군 1200명을 대량학살했다. 당이 제나라의 고구려계 장군을 학살했다는 것에서 제나라가 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국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로 말미암아 이정기에서 이사도까지 4대 60년 간 12주를 다스렸던 제나라의 시대가 끝났다.

중국의 정통 역사서인 신,구당서,자치통감,책부원구,태평어람 등을 보면 제나라가 존재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제나라를 세운 이정기가 "고구려인"이라고 뚜렷이 기록 되어 있다. 당시 제나라가 위치한 산동지방은 모든 경제의 물산이자 물자 수송통로 였고, 거기다가 소금의 산지였다. 이들 요소는 제나라의 경제를 살찌웠고 제나라는 이러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당나라를 압박하는 군사강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선조이신 많은 님들에게 다시 한번 더 명복을 빌 뿐이다. 천여년이 지난 헌금에서 고향을 떠나 이역의 산과 강에서 떠돌고 있는 님들의 넋들을 편안하게 잠들기를 기원하고, 이정기의 나라 평로국이 헌금까지 존재한다면 헌금의 동아시아 정세를 생각해보는 아쉬움을 갖는다.

출처 : 살맛 나는 세상이야기들...
글쓴이 : 크레믈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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