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테크/책방이야기

[스크랩] [윤덕한]의 이완용 평전을 읽게 되면...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10. 21. 06:27


우리나라의 뭍사람들은 이완용이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어서 매국노라고 말한다. 이 말의 뜻은 매국노 이완용이 아니었으면 나라가 망하지 않았을 것 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생각을 할 때도 있다. 과연 그럴까? 이완용이 아니더라도 다른 놈이 팔아 먹었을 거라고 하는이도 있다. 그래서 매국에 의한 망국의 모든 책임을 이완용 한 개인에게 돌리고 그를 저주하는것으로 우리들은 말한다.

윤덕한의 이완용 평전[중심(1999)]

이 책을 읽으며 - 이미 여러번 읽는 것이지만 - 이완용이 어떤 인간이며 어떤 생각을 하였던 인간인지를 생각해 보려고 370페이지나 되는 무거운 책을 다 읽고서도 그가 어떤 인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지은이 윤덕한이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민족문제 연구소에 들어가면서 "만고의 역적의 매국적 삶을 천하에 까발려서 오늘날 특권을 누리는 친일파의 후예에게 경종을 울리고..."라고 시작한다.

이 책에 소개된 그의 일대기를 본다면 역적과 애국자라는 이완용의 두 개의 얼굴을 추적하고 있있는데, 조선이 일본에 잡아 먹힌 것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순리였고, 그 대부분은 당시 집권층인 고종과 대원군, 민비와 척족들이 초래한 결과였다고 쓰고 있으며, 망국의 책임을 물으려면 이들에게 물어야지 마지막에 을사조약에 찬성했다고 이완용에게 그 모든 책임을 묻는것은 진실이 아니다라고 한다. 이는 을사조약의 책임을 이완용이 아니라 우리 조선의 왕인 고종에게 떠 넘기고 있는 것이었다.

참고로 네이브의zzaelee님의 글을 빌려보면 아래와 같은데...

1. 들어가며...

이완용, 매국노의 대명사. 천하의 호로자식으로 그를 알고 있는 우리...근데 과연 진실일까? 이 책의 지은이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이렇다. 민족문제 연구소에 들어가면서 "만고의 역적의 매국적 삶을 천하에 까발려서 오늘날 특권을 누리는 친일파의 후예에게 경종을 울리고....어쩌고 저쩌고...."

근데 이게 왠걸? 이완용에 대해 연구하면 할수록 그에 대한 이미지는 왜곡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역사의 이지매....작가는 이완용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나라가 망한 모든 책임을 그에게 떠넘겨놓고 우리는 스스로 자위하고 있는 거란 것이다. 그러나 조선이 일본에 먹힌 것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대세였고, 그 대부분은 당시 집권층인 고종과 대원군, 민비와 척족들이 초래한 결과였다. 망국의 책임을 물으려면 이들에게 물어야지 마지막에 을사조약에 찬성했다고 이완용에게 그 모든 책임을 묻는것은 진실이 아니다. 그리고 사실 나중에 나오겠지만 을사조약의 책임은 이완용이 아니라 고종이 져야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이완용이 어떤 인간인지 감을 잡아보려고 했다. 근데 한 인물에 대해 370페이지나 되는 책을 다 읽고서도 그가 어떤 인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2. 이완용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무색무취하다. 전혀 특징이나 개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김옥균 전기를 읽을 때는 그의 격정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카리스마적인 성격이 바로 느껴졌다. 근데 이완용은 전혀 그런 게 없다. 그는 너무나 특징이 없는 인물같다.

그는 술도 안하고 여자도 안 밝혔다. 당대에 많은 재산을 모았지만 오히려 자신의 생활은 전혀 사치하지도 않았고 검소했다. 신중하고 사려깊고 내성적이다. 평소 취미는 독서와 서예였던 전형적인 선비였다. 그는 끝까지...한일합방 후에 까지도 조선 왕실에 충성을 바쳤던 전형적인 선비였던 것이다. 물론 명예욕, 권력욕, 관직욕은 분명히 매우 많았다. 그가 일제에 저항하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도 권력욕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대놓고 낯 간지럽게 일제에 아부하지도 않았다. 다른 매국노들이 '천황폐화 ..어쩌구"하며 아부할때도 그가 그런 말을 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그는 일제에 저항하지는 않았지만 할 말은 하고 따질 건 따졌던 것이다.

예를 들어 1905년 이토 히로부미가 을사조약을 들이밀며 협박할때 고종과 다른 대신들은 패닉에 빠져서 어쩔줄 몰라했다. 그러나 이완용은 그 와중에서도 내정간섭 부분을 확실히 하자며 이토에게 따졌던 것이다.

한 마디로 그는 대세순응형인 꼼꼼한 실리주의자 왕당파 관리였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3. 생애

(1)1858년 경기도 광주 출생. 10살 때 이호준 양자로 들어가 명문가의 자제가 됨.
(2)1882년 과거급제(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
(3)1886년 육영공원에서 신식교육 받음. 세계화 사상에 동화됨(나중에 매국의 논리로 작용)
(4)1887~1890년. 미국 주재 외교관으로 부임. 주미 공사까지 거친 후 귀국. -> 친미파의 원조가 됨.
1894년 갑오경장
(5)1895년. 미국에서 알게 된 알렌의 후원으로 학부대신. 우리나라 최초로 의무교육 제도 실행. -> 당시 일본을 배격하고 러시아,미국,영국 등 서구세력을 배경으로 한 정동파의 핵심멤버가 됨.
1895년 민비시해 -> 이완용은 주미공사관에 피신함.
(6)아관파천 주도(당시만 해도 이완용이 '반일' 쪽이였던 걸 알 수 있다. 더불어 왕에게 충성을 바친단 것도...). 이후 외부대신이 되어 알렌과 위베르 등에게 무더기로 이권을 넘김.
(7)1896~1898년. 서재필과 독립협회 설립. 회장까지 거치며 주도.(독립문 현판 글씨도 이완용의 작품임) 만민공동회 개최도 주도. 독립협회 활동으로 인해 전북관찰사로 좌천됨.

...이후 1904년까지 부친상 등의 이유로 관직을 떠남.

(8)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 승리 후 학부대신으로 재입각한다.
(9)1905년. 을사보호조약에 찬성함.
(10)1907년 총리대신. 고종 양위 주관. 이토 히로부미와 정미7조약 체결.
(11)1909년. 이재명의 칼 맞음. 1910년 일총독 테라우치와 한일합방 서명.
(12)일본으로부터 백작 작위 받음. 이후 공식적인 직위없이 여기저기 여행다니고 사회활동에 전념.
(13)1926년. 자택에서 지병으로 사망.

4. 을사 보호조약

우리 역사는 마치 이완용이 일본과 작당해서 고종을 협박하고 을사보호조약을 성사시킨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는 엄청난 왜곡이다. 사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후 조선이 일본에 먹히는 것은 세상 누구나 알고 있었다. 조선인들은 국제정세를 모르는 우물안 개구리였던 것이다. 미국도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이미 일본의 조선 점유권을 인정한 상태였다.

진실은 이렇다. 이토가 조약을 들이대자 고종은 딱히 반대하지 않았다. 다만 외교권을 형식적으로만이라도 어떻게 남겨줄 수 없냐고 사정했을 뿐이다.

이토가 대신들을 모아놓고 의견을 묻자 아무도 대답하지 않을때 이완용이 나서서 대세상 어쩔수 없다고 찬성을 표시했다.

고종과 대신들이 모여 어전회의를 한 결과, 고종은 신들이 알아서 잘 협상하여 처리하라고 사실상 책임을 떠넘겨 버렸다. 이토는 이 말을 근거로 왕이 찬성했는데 어찌 신하들이 반대하냐며 조약을 밀어부친다.

이때 찬성한 박제순,이완용,이지용,권중현,이근택 이 바로 을사5적이다.

내막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고종은 반대했는데 을사5적이 멋대로 조약을 체결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고종은 내키진 않았지만 원래 겁이 많고 소심해서 반대도 못하고 책임을 떠넘긴 것이다. 이는 사실상의 찬성과 같다.

5. 이토 히로부미와의 관계

이완용은 이토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스승으로 여겼다. 어떻게 보면 둘은 닮은 점이 많다. 물론 이완용은 재산욕심이 많고 여자를 안 밝히는데, 이토는 반대로 재산욕심은 없고 여자는 밝혔지만....나머지는 매우 흡사하다.

을사조약 이후 이토는 이완용을 절대적으로 신임한다. 이를 배경으로 이완용은 절대권력을 누린다. 이토가 암살된 소식을 듣고, 특히 범인이 한국인이라는 소식에 황실과 정부는 벌벌 떨었다. 일본의 보복이 두려워서다.

6. 이완용의 재산

그는 조선에서 몇 손가락에 꼽히는 갑부였다. 그렇다고 사치한 생활을 한 건 아니다. 그러나 전국 각지의 땅을 사 놓았다. 그의 재산 형성 과정은 추측만 할 수 있다. 왕실의 하사금과 일제의 은사금이 있다. 순종즉위시 10만원, 한일합병 시 15만원 은사금 등이 그것이다.

그외 아관파천 후 열강에 이권을 내주며 뇌물을 받았을 것이다. 물론 당시 만연했던 매관매직도 가능성이 있다.

그 외에도 개간이나 토지조사사업에서 누락된 토지를 헐값에 사들인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그의 땅 규모를 당시 그에게 부과된 세금으로 아주 아주 rough하게 계산해보면 대략 160만평 정도가 아닐까 추측된다.

7. 후손들

그의 직계후손 중 한국에 사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이완용의 종손 이병길은 동족의 손가락질을 견디지 못하고 1962년 일본 국적을 취득한다. 캐나다로 이민 간 이병길의 장남 이윤형이 1992년 땅찾기 소송을 내서 세상을 떠들석하게 한 적이 있다. 이에 친일파 재산몰수 여론이 일기도 했다.

그러나...

을사조약을 찬성한 법무대신 이하영의 장손자 이종찬은 대한민국에서 육참총장과 국방장관을 지내며 존경받고 있다. 합방 당시 황실의 합방작업을 마무리한 궁내부대신 민병석의 아들 민복기는 대한민국의 대법원장을 두 차례나 지냈다.

별 차이 없는 매국노들인데 한쪽은 묘가 파헤쳐지고 후손들이 뿔뿔이 해외로 흩어져 살고, 다른 쪽은 명문가로 떵떵거리며 독립된 대한민국의 요직을 두루 거치고 있다.

8. 결론

이완용에게 매국노의 오명이 씌우는 건 당연하다. 그는 합방을 주도했고 일제의 총독정치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그러나 그 때문에 나라가 망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만이 매국노 짓을 한 것도 아니다. 미신에 엄청난 혈세를 퍼부으면서 월급도 못 받는 병사들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인 민비라는 인간, 그리고 그에 빌붙어 각종 비리로 민생을 피폐하게 만든 민씨 척족들...

며느리와의 권력 다툼으로 나라를 망친 쇄국주의자 대원군.

한 나라의 왕으로 소심하게 책임을 회피하고 자기 안위를 위해 외세에 의지한 겁쟁이 고종.

우리 역사의 문제는 바로 이거다. 일본은 나쁘다. 따라서 일본에 반대했던 자들은 애국자다....정말 어이없는 단세포적 논리가 아닐 수 없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천하의 망국의 주역 민비를 명성황후랍시고 추앙하는 붐이 일었던 게 이나라의 역사인식 아닌가? 단순히 일본인들한테 살해당했단 이유로....(사실 민비시해를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대원군인데도 말이다)

일제의 침략 야욕만을 강조하고 그 침략을 자초한 우리의 잘못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반성하지 않는 우리의 역사인식.....이렇게 자기 반성 없이 남 탓만 하는 역사관을 가지고는 미래에 또 똑같은 일을 당할 수밖에 없다.

독립협회 활동에서 보듯, 이완용은 선진문물을 체험한 온건개화파였고 민족의 장래를 두고 고뇌했던 흔적이 있다. 그는 나름대로 자기 입장에서 당시로써는 가장 현실적인 선택을 했었으리라.....그 결과과 매국노라는 오명이긴 했지만.

사망 1년전, 어느 일본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완용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세상에서 제일 처신하기 힘든 일이 세가지 있다. 쇠약한 나라의 재상과 파산한 회사의 청산인, 그리고 빈궁한 가정의 주부가 그것이다."
- 인용 끝 -


아! 각설하고...

 

저자 윤덕한은 우리가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이완용을 나라를 팔아 먹은 매국노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밝혀냄으로써 무엇을 알리고자 했던 것일까..., 또,저자 윤덕한은 이완용을 을사조약과 한일합방등에 의한 을사5적의 한 인물이라고 주장한다.

 

우리의 근대사에 이완용 못지않은 매국노로 장바구니 속의 콩나물 머리 많큼이나 매국노가 덕실거리는 천지였다고 애기를 하는 것은 - 시대에 따라 누구나가 아니면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매국노가 될 수 있다는... - 좀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 윤덕한은 뭍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받아들일 만한 사실 하나를 지적했다는데. 독립문 상단 앞뒤에 한자와 한글로 '독립문'이라고 새겨진 글씨가 이완용이 쓴 것이 백 퍼센트 확실하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들에게 가깝고도 먼 엤날의 망국의 치욕감을 어느 정도 덜어주는 위안이 될 수 있을 지는 모른다고 하겠지만, 이것은 진실은 아닌 것 같다. 진실이 아닌 것은 역사의 교훈이 될 수 없다"라고 그가 『이완용 평전』을 쓰게 된 이유를 밝히고 있다.

 

"이완용 평전"이라는 이 책은 - 여기서 이런 애기를 하여서는 우리에게 나라를 팔아먹은 나쁜 인물로 잘 알려진 이완용이란 인물에 대해서 그의 삶을 돌아보고 다시 생각해 볼 기회를 만드는 이런 책이 존재한다는 것에 큰 의문이 생기면서 호기심이 생기겠지만 - 조금이나마 상식과는 다른 시각에서 이완용을 생각하며 서술 방식의 평전이라기 보다는 위인전 수준의 책으로 밖에 느껴지는 책으로 평가 하고 싶다.



을사조약과 이완용 바로 알기

 

 



을사조약의 성격과 의의는 무엇일까?

1. 자료 1


천만 뜻밖에도 5조약은 어디에서부터 나왔는가? 이 조약은 비단 우리 한국뿐 아니라 실상 동양 삼국이 분열할 조짐을 빚어낼 것이니, 이토 후작이 본래부터 주장하던 뜻은 어디에 있었던가.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대황제 폐하께서 강경하신 성의로 거절하였으니, 이 조약이 성립되지 못한다는 것은 상상컨대 이토 후작 스스로 알고 스스로 간파하였을 것이어늘. [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

2. 자료 2

●비운의 해 1905년

1904년 1월 일본 해군의 뤼순(旅順) 항에 대한 기습 공격으로 시작된 러·일 전쟁은 1905년 1월에는 한반도에서 만주로 진입한 일본군이 뤼순-다롄(大連)지구를 점령하고 이 해 5월에는 러시아 해군의 주력인 발틱 함대를 대한 해협에서 격전 끝에 섬멸시켜 버렸다. 더 이상 전세를 돌이킬 수 없게 된 러시아는 미국의 대통령 루스벨트의 권고를 받아들여 일본과 포츠머스에서 강화 조약을 체결했다. 러·일 전쟁의 승리로 제국주의의 신참자 일본은 세계 열강의 반열에 끼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전쟁은 20세기를 특징 지은 ‘세계 대전’의 전주곡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일본의 배후에는 영국과 미국이 있었고 러시아에는 프랑스와 독일이 원조를 하고 있었다. 그건 어떻든 청·일 전쟁에 이어 러·일 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는 풍전 등화 같은 대한 제국의 운명에는 치명적·파멸적 결과를 몰고 왔다.

비운의 해 1905년. 그것은 한반도에서는 ‘을사조약의 해’요, ‘시일야방성대곡’의 해가 되고 있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오랜 쇄국의 빗장을 열고 어지럽고 낯선 세계 속에서 늦잠을 깬 눈을 비비고 있을 때 일본은 이미 제국주의 열강과 상호 양해의 그물을 짜서 한반도를 집어 삼킬 준비를 착착 실현해 가고 있었다. 1905년 7월 일본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한국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받고, 같은 해 8월에는 제`2`차 영·일 동맹 조약을 체결해 영국으로부터도 한국에 대한 ‘지도·감리 및 보호의 권리’를 인정받았다. 뒤이어 9월에는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마지막으로 러시아로부터도 같은 ‘권리’를 인정받게 되자 일본은 이제 열강의 승인하에 한국에 대한 보호 조약을 강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905년 11월 한국에 도착한 일본의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 정부 각료들에게 회유와 협박을 거듭한 끝에 고종 황제와 참정 대신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을사 오적’이라 일컫는 ‘다섯 대신만으로 회의를 열어 이른바 ‘한일 협상 조약’이라는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말았다. 일본 군인들의 무력 시위 속에서 남의 나라 궁중에 헌병 사령관까지 대동하여 강제 개최한 어전 회의에서, 그것도 외국과의 조약 체결권을 가진 황제의 재가도 못얻은 한일 협약이란 마땅히 ‘불법’이요, 당연히 무효였다.

그러나 제국주의 열강이 ‘양육 강식’을 일삼던 20세기 초의 국제 정치에서는 ‘힘’이 ‘법’이요, 힘이 없는 정의야말로 ‘무효’였다. 불법적인 을사조약은 따라서 강력한 일본이 무력한 한국의 외교권을 장악하고 대한 제국의 강토에 일본의 통감부를 둔다는 그 내용을 실현하는 데에는 얼마든지 유효였다. 그리고 외교권의 박탈은 실제적으로는 국권의 박탈과 다름이 없었다. 힘이 법이요, 힘 앞에서는 불법도 유효한 현실이 되는 기막힌 역사 속에서 힘 없는 겨레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황성 신문의 대논객 지연의 이 날 논설처럼 ‘목을 놓아 통곡’하는 일밖에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자결’하는 사람들이 꼬리를 물고 있었다. 민영환, 조병세, 홍만식, 이상철, 김봉학, 송병선 등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억울한 국권 침탈의 울분을 터뜨렸다. ‘자강 운동’도 있었다. 교육과 실업 등을 일으켜 실력을 양성함으로써 스스로의 힘을 강하게 하자는 대한 자강회 등 단체의 설립도 있었다. 을사 오적을 암살 처치하려는 의열 투쟁도 있었고 그보다도 전국적으로 전개된 항일 의병 항쟁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두가 망국의 비운을 되돌려 놓기에는 역부족이었던 절망적인 울부짖음이요, 절망적인 몸부림이었다.
[ 문화 일보 98. 03. 23. ]


3. 분석 및 개요

일본은 러·일 전쟁에서 승리가 보이자 그 해 8월 외부 대신 서리 윤치호와 하야시 공사 사이에 ‘외국인 용빙 협정’을 체결시켜 한국 재정에 대해 직접적인 간섭을 시작했다. 한편,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의 조정으로 러·일 양국의 강화 회담이 열려(포츠머스 회담) 한국에서의 일본의 우월권을 승인하고 일본의 한국 침략을 열강이 공식적으로 승인하게 되었다. 이로써 포츠머스 회담의 내용상 전승의 대가로 부족한 것을 한국에서 보충하자는 일본 자체 내의 여론은 곧 1905년 11월 9일 일본 특명 전권 대사 이토 히로부미를 파견하여‘보호’를 강행하려 하였다.

외교권 박탈을 내용으로 하는 협약안은 이토와 하야시를 거쳐 외부 대신 박제순에게로 전달되었다. 이토는 하세가와와 함께 전후 3차례에 걸쳐 고종을 알현한 후 정동의 손탁 호텔에서 참정 대신 한규설 이하 8대신을 위협하여 협약안의 가결을 강요하였다. 이어서 그들의 강요 아래 5시간이나 계속된 17일의 어전 회의에서도 결론이 내려지지 않자 이토와 하야시는 일본 헌병 수십 명의 옹위 아래 회의장에 들어가 대신 각각에게 가부의 결정을 강요하였다. 이 때 고종은 다만 ‘정부에서 협상 조처하라.’고 하여 책임을 회피했을 뿐이며 한규설만 무조건 불가하다고 하였다.

한규설에 동조한 사람은 탁지부 대신 민영기와 법부 대신 이하영이었고, 학부 대신 이완용을 비롯하여 군부 대신 이근택, 내부 대신 이지용, 외부 대신 박제순, 농상공부 대신 권중현 등은 모두 책임을 고종 황제에게 전가하면서 찬성을 표시하였는데, 이들을 을사 오적이라 한다. 이토는 강제 통과된 협약안을 궁내 대신 이재극을 통해 황제의 칙재를 강요한 뒤 동일자로 한국 외교권의 접수, 일본 통감부의 설치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조약을 외부 대신 박제순과 일본 공사 하야시 사이에 체결 조인하고 18일에 이를 발표하였다.

이 조약의 체결 소식이 1905년 11월 20일자의 황성 신문에 신문사 사장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논설을 게재함에 따라 전국에 알려져 국민들의 조약 체결에 대한 거부와 일제에 대한 항쟁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한편 민영환은 상소로도 조약 체결이 원점으로 되돌아가지 않자 유서로써 전국민에게 경고하면서 자결 순국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의병 운동이 전개되어 민종식이 홍주에서 거병한 것을 비롯하여 전라도에서 최익현이, 충청도에서는 신돌석이, 경상도에서는 유인석이 각각 의병을 일으켰다. 그 외 이근택·이완용·이지용 등을 암살하기 위한 을사 오적 암살단이 조직되기도 하였다.

이로써 서울에는 통감부가 개설되고 개항장과 주요 도시 13개소에는 이사청이, 기타 도시 11개소에는 지청이 설치되었다. 통감부는 종래 공사관에서 맡았던 정무 이외에도 조선 보호의 대권, 관헌의 감독권 그리고 병력 동원권도 보유하였다. 또한 조선의 시정을 감독하거나, 어떠한 정책의 시행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됨으로써 통감부는 명실공히 조선 보호의 최고 감독 기관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1906년 프랑스 파리 법과 대학의 교수인 F. 레이는 을사조약이 협상 대표에 대한 고종의 위임장과 조약 체결에 대한 비준서 등의 국제 조약에 필요한 형식적인 요건을 갖추고 있지 못한 데다가 한글과 일본글로 된 조약문의 첫머리에도 조약의 명칭조차 없이 그대로 비어 있어 국제 조약으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지적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그 법적 유효성을 주장하고 있어 그 후에도 계속 논란의 여지가 되고 있다.

이완용 ( 李完用, 1858∼1926 )

한일합방의 주역이었던 매국노의 대명사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 공로로 의정대신 서리 겸 외부대신 서리
1920년 '한일합방' 공로로 백작.
1921년 후작, 중추원 고문 겸 부의장

미국통에서 친러파·친일파로

한일'합방'조약 체결 당시의 내각 총리대신으로, 매국의 원흉으로 지목되는 이완용의 생애는, 일단 관계로 나아갔다가 육영공원(育英公院)에서 영어를 배운 후 미국통의 외교관리가 되었다가 아관파천, 러일전쟁 등을 계기로 친러시아파·친일파로 변신해 가는 과정과 친일파로 변신한 후 내각 총리대신이 되어 매국의 원흉이 되는 과정 그리고 그 대가로 일본 제국주의의 귀족이 되어 반민족행위를 계속하면서 잔명(殘命)을 보존하던 시기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자를 경덕(敬德), 호를 일당(一堂)이라 한 이완용은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백현리에서 우봉(牛峰) 이씨 호석(鎬奭)과 신씨(辛氏) 사이에서 태어나서 열 살 때부터 판중추부사 호준(鎬俊)의 양자가 되었고, 1870년에 양주 조씨 병익(秉翼)의 딸과 결혼했으며, 1882년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했다. 이후 규장각 대교 검교, 홍문관 수찬, 동학교수, 우영군사마, 해방영군사마 등을 거쳐 육영공원에 입학하여 영어를 배웠고, 사헌부 장령, 홍문관 응교 등을 거쳐 1887년에 주차미국참찬관(駐箚美國參贊官)이 되어 미국에 갔다가 이듬해 5월에 귀국하여 이조참의를 지냈다. 이 해 12월에 다시 참찬관으로 미국에 갔다가 1890년 10월에 귀국하여 우부승지, 내무참의, 성균관 대사성, 공조참판, 육영공원 판리, 외무협판 등을 거쳐 1895년 5월에 학부대신이 되었다. 이 해 8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바로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했느데, 미국으로 가려다가 당분간 정세를 관망하는 사이에 아관파천(1986. 2)이 있었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불려간 그는 친러파로 변신하여 외부대신 및 농상공부대신 서리가 되었고, 탁지부대신 서리, 학부대신 서리 등을 겸하는 한편 독립협회 창설에 참여하고, 학부대신, 평안남도 관찰사, 중추원 의관, 비서원경, 전라북도 관찰사, 궁내부 특진관 등의 관직을 거쳤다. 이후 영국과 미국의 도움을 받으면서 러일전쟁을 도발한(1904) 일본은 한일의정서 체결을 강요하여 조선을 전쟁터로 만드는 한편, 초전에서의 유리한 국면을 배경으로 '화폐정리사업' 등을 감행하면서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기초를 닦아 갔으며,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보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 통치를 실현하기 위한 '을사보호조약'의 체결을 강요했다. 양아버지(養父)의 초상을 치르고 이 해 9월에 학부대신이 된 이완용은 이 과정을 통해 다시 친일파로 변신해 갔다.

'을사보호조약' 체결 문제를 두고 열린 어전회의에서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과 탁지부대신 민영기(閔泳綺)는 반대했으나, 이미 일본 쪽에 의해 매수되었던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은 일본 쪽이 제시한 조약안 외에 "일본국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하기를 보증함"이라는 조문 하나를 더 첨가한다는 조건으로 찬성했고, 이에 따라 외부대신 박제순*이 조약을 체결했다(1905. 11. 17). 이완용은 조약 체결과정에서 주동적인 역할을 다함으로써 '을사오적'의 수괴가 되었다.

을사조약' 체결의 주역으로

러일전쟁이 일본 쪽에 유리하게 되자 친러파에서 친일파로 변신하여 '을사보호조약' 체결을 주동한 이완용은 그 공으로 의정대신 서리 및 외부대신 서리가 되었다가(1905. 12. 8), '을사보호조약'의 결과 조선의 통감이 된 이토의 추천으로 의정부 참정대신이 되었고(1907. 5. 22), 또 이토의 요청에 의해 통감부 농사과 촉탁 조중응*을 법부대신, 일진회 고문 송병준*을 농상공부대신으로 하고, 임선준(任善準)을 내부대신, 이병무(李秉武)를 군부대신, 이재곤(李載崑)을 학부대신, 고영희(高永喜)를 탁지부대신으로 하는 내각을 조직했다.

그리고 곧이어 의정부를 내각으로 바꾸게 되자 이완용은 내각 총리대신이 되었다. '을사보호조약'에 반대하는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한편 이 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었음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한 헤이그 밀사사건이 터지게 되자 일본은 이토로 하여금 고종의 양위를 요구했다. 이완용은 이에 동조하여 양위를 건의했다가 두 번씩이나 거절당했으나 계속 강압하여 결국 황태자에게 양위하게 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격렬한 반대운동이 일어나는 한편 분노한 군중들이 남대문 밖 약현(藥峴)에 있던 이완용의 집에 불을 질렀다(1907. 7. 20). 가재와 함께 집이 전소하여 이완용의 가족들은 이토의 보호로 몇 달 동안 왜성구락부에 들어 있다가 저동의 전남영위궁(前南寧尉宮)으로 옮겨 살았다.

이 때 불탄 그의 재산은 약 10만 원 정도였다 한다. 고종을 양위시킨 이토는, 통감이 한국 정부의 시정(施政)을 '지도'하는 권리를 가지며, 법령을 제정하고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을 할 수 있으며, 고급 관리의 임명, 외국인의 고빙(雇聘) 등을 할 수 있게 하는 '정미 7조약' 체결을 요구했고, 이완용은 이에 응하여 조약을 체결했다(1907. 7. 24). 이 조약의 부수문서에 따라 한국의 사법권과 경찰권이 일본에게 넘어갔으며 또한 한국 군대가 해산되었는데, 많은 해산 군인들이 의병전쟁에 가담했다.

이완용은 1909년에 들어서면서 이토의 요구에 따라 새 황제 순종으로 하여금 민정시찰 명목으로 전국을 순회하게 하면서 이에 동행했다. 이 해 10월 안중근의 의거로 이토가 살해되자(10. 26) 내각령으로 3일간 춤과 노래를 금지시키고 한국 정부 대표로 다롄(大連)까지 가서 조문한 후 장춘단에서 추도회를 열고 일본에서의 장례에 정부 대표로 농상공부대신 조중응을 파견하면서 은사금 명목으로 10만 원을 보냈다. 주저함이 없는 친일행위로 국민적 지탄을 받던 이완용은 내각 총리대신 자격으로 서울 종현(鐘峴) 가톨릭 성당에서 거행된 벨기에 황제 추도식에 참가했다가 이재명(李在明)의 의거로 어깨, 허리, 복부 등 세 곳을 칼로 찔렸으나(1909. 12. 22), 약 2개월간의 입원 치료 끝에 회복되었다(이재명은 교수형에 처해지고 연루자 11명에게는 최고 15년, 최하 5년의 형이 선고되었다).


▲이재명의사 사진
이재명의사는 1909년 매국노 이완용을 칼로 복부를 찔러 중태에
빠트려 체포되어 이듬 해 사형당한 순국의사입니다. 이 사진은
이재명의사가 하와이에 체류중에 찍은 사진이며 미국에서 엽서로
제작된 것입니다.
출처 : 박건호의 역사사랑


이 일이 있고 난 후부터 이완용은 한일'합방'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일본어를 할 줄 몰랐던 이완용은 일본에 유학했던 이인직(李人稙)*을 심복 비서로 삼아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小松 綠)와 '합방'문제를 교섭하게 했다. 이 무렵 통감부에서는 '합방'을 앞당기기 위해, 이완용 내각을 와해시키고 그와 대립관계에 있던 송병준으로 하여금 내각을 구성하게 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었다. 송병준 내각이 성립된다면 보복당할 우려가 있을 뿐만 아니라 '합방'의 '공'과 그로부터 따르게 되는 영화를 빼앗길 것을 두려워한 이완용이 이인직을 고마쓰에게 보내 "현 내각이 와해해도 그보다 더 친일적인 내각이 나올 수 없다"라 하고 자기 휘하의 내각이 직접 '합방'조약을 맺을 수 있음을 자진해서 알렸다.

이에 따라 이인직과 고마쓰 사이에 "합방 후에도 한국의 황실에 대해 종전과 같은 세비를 지급하고 일본 황족의 예우를 내리며, 한국 황제의 지위를 일본 황태자의 아래에, 친왕(親王)의 위에 둔다", "내각대신은 물론 다른 원로 고관에게도 평생을 안락하게 보낼 수 있는 충분한 공채(公債)를 주고, 합방에 힘쓴 자 및 옛 대관 원로에게는 은금(恩金)에 영작(榮爵)을 더하고, 그 유력자는 중추원 고문에 임명하여 총독부의 정무에 참여하게 한다"는 내용의 '합방' 기초조건이 합의되었다. 이 모의에 따라 이완용과 농상공부대신 조중응이 마침 동경에서 일어난 수재(水災)를 위문한다는 핑계로 서울 남산에 있는 통감관저를 방문하여(1910. 8. 16) '합방'조약의 내용을 마무리지었고, 같은 날 오후 내각회의를 열어 그것을 통과시킨 후 다시 어전회의 절차를 거쳐서(8. 22) 그날로 "한국 황제는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국 황제에 양여한다"는 '합방'조약을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과 통감 데라우치(寺內正毅)의 이름으로 조인함으로써 그는 영원히 지워질 수 없는 매국의 원흉이 되었다.

3·1 운동이 일어나자 세 차례의 [경고문] 발표

이보다 앞서 일본은 1910년 6월 하순경에 '일한병합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한국 황실에 대한 대우, 한국 원로대신에 대한 조처, 한국 인민에 대한 통치방법, '병합'의 실행에 필요한 경비문제 등을 의논했고, 그 결과 한국 황제 일가의 1년 세비를 150만 원 지급할 것, '합방' 공신에게는 응분의 작위를 주고 세습재산으로서 공채를 하사할 것, '합방' 공신에 대한 수당으로서 현 수상에게는 백작 작위와 15만 원, 일반 대신에게는 자작 작위와 10만 원, 기타는 남작 작위와 5만 원을 줄 것, '합방'의 소요경비로서는 공채 3000만 원을 발행할 것 등이 결정되었었다.

이에 따라 이완용은 '합방'과 함께 일본 정부로부터 특별 은사금, 총리 퇴관금 등과 함께 일본 귀족으로서 백작 작위와 그것에 따르는 응분의 대우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이 되었다가 다시 그 부의장이 되었다. 이후 '내선인친목회'를 발기하고 '조선귀족회' 부회장이 되어 일본을 드나들면서 일본 국왕을 만나는 등 친일행위를 계속하였는데, 고종이 죽고 그 장례를 이용하여 3·1 운동이 일어나자 세 차례에 걸쳐 조선 민족에 대한 이른바 [경고문]을 발표했다. 첫번째 [경고문]에서 이완용은 "조선독립 선동은 허설(虛說)이요 망동"이라면서, 일제 당국이 이 운동을 '무지몰각한 망동'으로 보고 관대하게 회유하지만, 그래도 자각하지 못하면 필경 강압책을 쓸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 같은 [경고문]이 발표되자 매국노 이완용을 규탄하는 소리가 다시 높아졌고 이에 대해 그는 "천만인 중에 한사람이라도 나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경고의 효과가 적지 않은 것"이라 강변했다. 조선총독부가 각 지방에 게시한 [경고문]을 민중들이 모두 찢어버렸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세번째 [경고문]을 발표했다. 세번째 [경고문]에서 그는 이렇게 강변했다. 3·1 운동이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서의 민족자결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조선과 일본은 고대 이래로 동종동족(同宗同族) 동종동근(同種同根)이어서 민족자결주의는 조선에 부적당한 것이다, 또한 한일'합방'은 당시의 국내사정이나 국제관계로 보아 역사적 자연의 운명과 세계 대세에 순응하여 동양의 평화를 확보하기 위하여 조선 민족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활로였다,

그리고 3·1 운동에 참가하여 '경거망동'하는 사람은 조선 민족을 멸망시키고 동양의 평화를 파괴하는 우리의 적이다. 가히 민족반역자로서의 극명한 논리가 아닐 수 없다. 이후 이완용은 후작으로 승작했고(1921), 아들 항구(恒九)도 남작을 받았으며 손자 병길(丙吉), 병희(丙喜) 등도 모두 귀족으로서 일본에 유학하는 등 친일파 수괴로서의 갖은 '영화'를 누리는 한편, 매국의 대가로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게 된다.

일찍이 이재명의 의거에서 목숨을 건진 그는, 만년에 그 집에 함께 기거하던 일족 이영구(李榮九)에 의하여 암살되려다가 미수에 그쳤다는 소문이 있은 지 약 2개월 후 서울 옥인동 자택에서 결국 와석종신(臥席終身)할 수 있었다. 그러나 8·15 후 그 후손의 손에 의해 무덤이 파헤쳐져 없어지고 말았다. 일제시대의 민족해방운동전선은 좌우익을 막론하고 해방 후의 민족국가 건설과정에서 매국적(賣國賊)의 전체 재산을 몰수하여 국유화한다는 정책을 세웠으나 이승만 정권이 실시한 농지개혁과정에서 그것이 실시되지 않음으로써 그 재산은 그대로 후손들에게 물려졌다.
■ 강만길(고려대 교수·한국사)

■참고문헌
이완용, [경고문], {매일신보}, 1919.4.8 / 5.30.
大垣丈夫 編, {朝鮮紳士大同譜}, 1913.
小松綠, {朝鮮倂合之裏面}, 中外新論社, 1920.
김명수, {일당기사}, 일당기사출판사, 1927.
출처 : 살맛 나는 세상이야기들...
글쓴이 : 크레믈린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