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조약과 이완용 바로 알기
을사조약의 성격과 의의는 무엇일까?
1. 자료
1
천만 뜻밖에도 5조약은 어디에서부터 나왔는가? 이 조약은 비단 우리 한국뿐 아니라 실상 동양 삼국이 분열할
조짐을 빚어낼 것이니, 이토 후작이 본래부터 주장하던 뜻은 어디에 있었던가.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대황제 폐하께서 강경하신 성의로
거절하였으니, 이 조약이 성립되지 못한다는 것은 상상컨대 이토 후작 스스로 알고 스스로 간파하였을 것이어늘. [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
2. 자료 2
●비운의 해
1905년
1904년 1월 일본 해군의 뤼순(旅順) 항에 대한 기습 공격으로 시작된
러·일 전쟁은 1905년 1월에는 한반도에서 만주로 진입한 일본군이 뤼순-다롄(大連)지구를 점령하고 이 해 5월에는 러시아 해군의 주력인 발틱
함대를 대한 해협에서 격전 끝에 섬멸시켜 버렸다. 더 이상 전세를 돌이킬 수 없게 된 러시아는 미국의 대통령 루스벨트의 권고를 받아들여 일본과
포츠머스에서 강화 조약을 체결했다. 러·일 전쟁의 승리로 제국주의의 신참자 일본은 세계 열강의 반열에 끼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전쟁은 20세기를 특징 지은 ‘세계 대전’의 전주곡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일본의 배후에는 영국과 미국이 있었고 러시아에는 프랑스와 독일이
원조를 하고 있었다. 그건 어떻든 청·일 전쟁에 이어 러·일 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는 풍전 등화 같은 대한 제국의 운명에는 치명적·파멸적 결과를
몰고 왔다.
비운의 해 1905년. 그것은 한반도에서는 ‘을사조약의 해’요, ‘시일야방성대곡’의 해가 되고 있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오랜 쇄국의 빗장을 열고 어지럽고 낯선 세계 속에서 늦잠을 깬 눈을 비비고 있을 때 일본은 이미 제국주의 열강과 상호 양해의 그물을 짜서
한반도를 집어 삼킬 준비를 착착 실현해 가고 있었다. 1905년 7월 일본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한국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받고, 같은 해 8월에는 제`2`차 영·일 동맹 조약을 체결해 영국으로부터도 한국에 대한 ‘지도·감리 및 보호의 권리’를 인정받았다. 뒤이어
9월에는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마지막으로 러시아로부터도 같은 ‘권리’를 인정받게 되자 일본은 이제 열강의 승인하에 한국에 대한 보호
조약을 강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905년 11월 한국에 도착한 일본의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 정부 각료들에게
회유와 협박을 거듭한 끝에 고종 황제와 참정 대신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을사 오적’이라 일컫는 ‘다섯 대신만으로 회의를 열어 이른바 ‘한일
협상 조약’이라는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말았다. 일본 군인들의 무력 시위 속에서 남의 나라 궁중에 헌병 사령관까지 대동하여 강제 개최한 어전
회의에서, 그것도 외국과의 조약 체결권을 가진 황제의 재가도 못얻은 한일 협약이란 마땅히 ‘불법’이요, 당연히 무효였다.
그러나
제국주의 열강이 ‘양육 강식’을 일삼던 20세기 초의 국제 정치에서는 ‘힘’이 ‘법’이요, 힘이 없는 정의야말로 ‘무효’였다. 불법적인
을사조약은 따라서 강력한 일본이 무력한 한국의 외교권을 장악하고 대한 제국의 강토에 일본의 통감부를 둔다는 그 내용을 실현하는 데에는 얼마든지
유효였다. 그리고 외교권의 박탈은 실제적으로는 국권의 박탈과 다름이 없었다. 힘이 법이요, 힘 앞에서는 불법도 유효한 현실이 되는 기막힌 역사
속에서 힘 없는 겨레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황성 신문의 대논객 지연의 이 날 논설처럼 ‘목을 놓아 통곡’하는 일밖에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자결’하는 사람들이 꼬리를 물고 있었다. 민영환, 조병세, 홍만식, 이상철, 김봉학, 송병선 등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억울한 국권 침탈의 울분을 터뜨렸다. ‘자강 운동’도 있었다. 교육과 실업 등을 일으켜 실력을 양성함으로써 스스로의 힘을 강하게 하자는 대한
자강회 등 단체의 설립도 있었다. 을사 오적을 암살 처치하려는 의열 투쟁도 있었고 그보다도 전국적으로 전개된 항일 의병 항쟁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두가 망국의 비운을 되돌려 놓기에는 역부족이었던 절망적인 울부짖음이요, 절망적인 몸부림이었다. [ 문화 일보 98. 03. 23. ]
3. 분석 및 개요
일본은 러·일 전쟁에서 승리가 보이자 그 해 8월
외부 대신 서리 윤치호와 하야시 공사 사이에 ‘외국인 용빙 협정’을 체결시켜 한국 재정에 대해 직접적인 간섭을 시작했다. 한편,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의 조정으로 러·일 양국의 강화 회담이 열려(포츠머스 회담) 한국에서의 일본의 우월권을 승인하고 일본의 한국 침략을 열강이 공식적으로
승인하게 되었다. 이로써 포츠머스 회담의 내용상 전승의 대가로 부족한 것을 한국에서 보충하자는 일본 자체 내의 여론은 곧 1905년 11월 9일
일본 특명 전권 대사 이토 히로부미를 파견하여‘보호’를 강행하려 하였다.
외교권 박탈을 내용으로 하는 협약안은 이토와 하야시를
거쳐 외부 대신 박제순에게로 전달되었다. 이토는 하세가와와 함께 전후 3차례에 걸쳐 고종을 알현한 후 정동의 손탁 호텔에서 참정 대신 한규설
이하 8대신을 위협하여 협약안의 가결을 강요하였다. 이어서 그들의 강요 아래 5시간이나 계속된 17일의 어전 회의에서도 결론이 내려지지 않자
이토와 하야시는 일본 헌병 수십 명의 옹위 아래 회의장에 들어가 대신 각각에게 가부의 결정을 강요하였다. 이 때 고종은 다만 ‘정부에서 협상
조처하라.’고 하여 책임을 회피했을 뿐이며 한규설만 무조건 불가하다고 하였다.
한규설에 동조한 사람은 탁지부 대신 민영기와 법부
대신 이하영이었고, 학부 대신 이완용을 비롯하여 군부 대신 이근택, 내부 대신 이지용, 외부 대신 박제순, 농상공부 대신 권중현 등은 모두
책임을 고종 황제에게 전가하면서 찬성을 표시하였는데, 이들을 을사 오적이라 한다. 이토는 강제 통과된 협약안을 궁내 대신 이재극을 통해 황제의
칙재를 강요한 뒤 동일자로 한국 외교권의 접수, 일본 통감부의 설치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조약을 외부 대신 박제순과 일본 공사 하야시 사이에
체결 조인하고 18일에 이를 발표하였다.
이 조약의 체결 소식이 1905년 11월 20일자의 황성 신문에 신문사 사장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논설을 게재함에 따라 전국에 알려져 국민들의 조약 체결에 대한 거부와 일제에 대한 항쟁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한편
민영환은 상소로도 조약 체결이 원점으로 되돌아가지 않자 유서로써 전국민에게 경고하면서 자결 순국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의병 운동이 전개되어
민종식이 홍주에서 거병한 것을 비롯하여 전라도에서 최익현이, 충청도에서는 신돌석이, 경상도에서는 유인석이 각각 의병을 일으켰다. 그 외
이근택·이완용·이지용 등을 암살하기 위한 을사 오적 암살단이 조직되기도 하였다.
이로써 서울에는 통감부가 개설되고 개항장과 주요
도시 13개소에는 이사청이, 기타 도시 11개소에는 지청이 설치되었다. 통감부는 종래 공사관에서 맡았던 정무 이외에도 조선 보호의 대권, 관헌의
감독권 그리고 병력 동원권도 보유하였다. 또한 조선의 시정을 감독하거나, 어떠한 정책의 시행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됨으로써 통감부는
명실공히 조선 보호의 최고 감독 기관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1906년 프랑스 파리 법과 대학의 교수인 F. 레이는
을사조약이 협상 대표에 대한 고종의 위임장과 조약 체결에 대한 비준서 등의 국제 조약에 필요한 형식적인 요건을 갖추고 있지 못한 데다가 한글과
일본글로 된 조약문의 첫머리에도 조약의 명칭조차 없이 그대로 비어 있어 국제 조약으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지적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그
법적 유효성을 주장하고 있어 그 후에도 계속 논란의 여지가 되고 있다.
이완용 (
李完用, 1858∼1926 )
한일합방의 주역이었던 매국노의
대명사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 공로로 의정대신 서리 겸 외부대신 서리
1920년 '한일합방' 공로로 백작. 1921년 후작, 중추원 고문 겸 부의장
미국통에서 친러파·친일파로
한일'합방'조약 체결
당시의 내각 총리대신으로, 매국의 원흉으로 지목되는 이완용의 생애는, 일단 관계로 나아갔다가 육영공원(育英公院)에서 영어를 배운 후 미국통의
외교관리가 되었다가 아관파천, 러일전쟁 등을 계기로 친러시아파·친일파로 변신해 가는 과정과 친일파로 변신한 후 내각 총리대신이 되어 매국의
원흉이 되는 과정 그리고 그 대가로 일본 제국주의의 귀족이 되어 반민족행위를 계속하면서 잔명(殘命)을 보존하던 시기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자를 경덕(敬德), 호를 일당(一堂)이라 한 이완용은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백현리에서 우봉(牛峰) 이씨 호석(鎬奭)과 신씨(辛氏)
사이에서 태어나서 열 살 때부터 판중추부사 호준(鎬俊)의 양자가 되었고, 1870년에 양주 조씨 병익(秉翼)의 딸과 결혼했으며, 1882년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했다. 이후 규장각 대교 검교, 홍문관 수찬, 동학교수, 우영군사마, 해방영군사마 등을 거쳐 육영공원에 입학하여
영어를 배웠고, 사헌부 장령, 홍문관 응교 등을 거쳐 1887년에 주차미국참찬관(駐箚美國參贊官)이 되어 미국에 갔다가 이듬해 5월에 귀국하여
이조참의를 지냈다. 이 해 12월에 다시 참찬관으로 미국에 갔다가 1890년 10월에 귀국하여 우부승지, 내무참의, 성균관 대사성, 공조참판,
육영공원 판리, 외무협판 등을 거쳐 1895년 5월에 학부대신이 되었다. 이 해 8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바로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했느데,
미국으로 가려다가 당분간 정세를 관망하는 사이에 아관파천(1986. 2)이 있었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불려간 그는 친러파로
변신하여 외부대신 및 농상공부대신 서리가 되었고, 탁지부대신 서리, 학부대신 서리 등을 겸하는 한편 독립협회 창설에 참여하고, 학부대신,
평안남도 관찰사, 중추원 의관, 비서원경, 전라북도 관찰사, 궁내부 특진관 등의 관직을 거쳤다. 이후 영국과 미국의 도움을 받으면서 러일전쟁을
도발한(1904) 일본은 한일의정서 체결을 강요하여 조선을 전쟁터로 만드는 한편, 초전에서의 유리한 국면을 배경으로 '화폐정리사업' 등을
감행하면서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기초를 닦아 갔으며,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보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 통치를 실현하기 위한
'을사보호조약'의 체결을 강요했다. 양아버지(養父)의 초상을 치르고 이 해 9월에 학부대신이 된 이완용은 이 과정을 통해 다시 친일파로 변신해
갔다.
'을사보호조약' 체결 문제를 두고 열린 어전회의에서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과 탁지부대신 민영기(閔泳綺)는 반대했으나,
이미 일본 쪽에 의해 매수되었던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은
일본 쪽이 제시한 조약안 외에 "일본국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하기를 보증함"이라는 조문 하나를 더 첨가한다는 조건으로 찬성했고,
이에 따라 외부대신 박제순*이 조약을 체결했다(1905. 11. 17). 이완용은 조약 체결과정에서 주동적인 역할을 다함으로써 '을사오적'의
수괴가 되었다.
을사조약' 체결의 주역으로
러일전쟁이 일본 쪽에 유리하게 되자 친러파에서 친일파로 변신하여 '을사보호조약' 체결을 주동한 이완용은 그
공으로 의정대신 서리 및 외부대신 서리가 되었다가(1905. 12. 8), '을사보호조약'의 결과 조선의 통감이 된 이토의 추천으로 의정부
참정대신이 되었고(1907. 5. 22), 또 이토의 요청에 의해 통감부 농사과 촉탁 조중응*을 법부대신, 일진회 고문 송병준*을
농상공부대신으로 하고, 임선준(任善準)을 내부대신, 이병무(李秉武)를 군부대신, 이재곤(李載崑)을 학부대신, 고영희(高永喜)를 탁지부대신으로
하는 내각을 조직했다.
그리고 곧이어 의정부를 내각으로 바꾸게 되자 이완용은 내각 총리대신이 되었다. '을사보호조약'에 반대하는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한편 이 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었음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한 헤이그 밀사사건이 터지게 되자 일본은 이토로 하여금 고종의
양위를 요구했다. 이완용은 이에 동조하여 양위를 건의했다가 두 번씩이나 거절당했으나 계속 강압하여 결국 황태자에게 양위하게 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격렬한 반대운동이 일어나는 한편 분노한 군중들이 남대문 밖 약현(藥峴)에 있던 이완용의 집에 불을 질렀다(1907. 7. 20).
가재와 함께 집이 전소하여 이완용의 가족들은 이토의 보호로 몇 달 동안 왜성구락부에 들어 있다가 저동의 전남영위궁(前南寧尉宮)으로 옮겨 살았다.
이 때 불탄 그의 재산은 약 10만 원 정도였다 한다. 고종을 양위시킨 이토는, 통감이 한국 정부의 시정(施政)을 '지도'하는
권리를 가지며, 법령을 제정하고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을 할 수 있으며, 고급 관리의 임명, 외국인의 고빙(雇聘) 등을 할 수 있게 하는 '정미
7조약' 체결을 요구했고, 이완용은 이에 응하여 조약을 체결했다(1907. 7. 24). 이 조약의 부수문서에 따라 한국의 사법권과 경찰권이
일본에게 넘어갔으며 또한 한국 군대가 해산되었는데, 많은 해산 군인들이 의병전쟁에 가담했다.
이완용은 1909년에 들어서면서 이토의
요구에 따라 새 황제 순종으로 하여금 민정시찰 명목으로 전국을 순회하게 하면서 이에 동행했다. 이 해 10월 안중근의 의거로 이토가
살해되자(10. 26) 내각령으로 3일간 춤과 노래를 금지시키고 한국 정부 대표로 다롄(大連)까지 가서 조문한 후 장춘단에서 추도회를 열고
일본에서의 장례에 정부 대표로 농상공부대신 조중응을 파견하면서 은사금 명목으로 10만 원을 보냈다. 주저함이 없는 친일행위로 국민적 지탄을 받던
이완용은 내각 총리대신 자격으로 서울 종현(鐘峴) 가톨릭 성당에서 거행된 벨기에 황제 추도식에 참가했다가 이재명(李在明)의 의거로 어깨, 허리,
복부 등 세 곳을 칼로 찔렸으나(1909. 12. 22), 약 2개월간의 입원 치료 끝에 회복되었다(이재명은 교수형에 처해지고 연루자
11명에게는 최고 15년, 최하 5년의 형이 선고되었다).
 ▲이재명의사
사진 이재명의사는 1909년 매국노 이완용을 칼로 복부를 찔러 중태에 빠트려 체포되어 이듬 해 사형당한 순국의사입니다. 이 사진은
이재명의사가 하와이에 체류중에 찍은 사진이며 미국에서 엽서로 제작된 것입니다. 출처 : 박건호의
역사사랑
이 일이 있고 난 후부터 이완용은 한일'합방'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일본어를 할 줄 몰랐던 이완용은
일본에 유학했던 이인직(李人稙)*을 심복 비서로 삼아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小松 綠)와 '합방'문제를 교섭하게 했다. 이 무렵 통감부에서는
'합방'을 앞당기기 위해, 이완용 내각을 와해시키고 그와 대립관계에 있던 송병준으로 하여금 내각을 구성하게 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었다.
송병준 내각이 성립된다면 보복당할 우려가 있을 뿐만 아니라 '합방'의 '공'과 그로부터 따르게 되는 영화를 빼앗길 것을 두려워한 이완용이
이인직을 고마쓰에게 보내 "현 내각이 와해해도 그보다 더 친일적인 내각이 나올 수 없다"라 하고 자기 휘하의 내각이 직접 '합방'조약을 맺을 수
있음을 자진해서 알렸다.
이에 따라 이인직과 고마쓰 사이에 "합방 후에도 한국의 황실에 대해 종전과 같은 세비를 지급하고 일본
황족의 예우를 내리며, 한국 황제의 지위를 일본 황태자의 아래에, 친왕(親王)의 위에 둔다", "내각대신은 물론 다른 원로 고관에게도 평생을
안락하게 보낼 수 있는 충분한 공채(公債)를 주고, 합방에 힘쓴 자 및 옛 대관 원로에게는 은금(恩金)에 영작(榮爵)을 더하고, 그 유력자는
중추원 고문에 임명하여 총독부의 정무에 참여하게 한다"는 내용의 '합방' 기초조건이 합의되었다. 이 모의에 따라 이완용과 농상공부대신 조중응이
마침 동경에서 일어난 수재(水災)를 위문한다는 핑계로 서울 남산에 있는 통감관저를 방문하여(1910. 8. 16) '합방'조약의 내용을
마무리지었고, 같은 날 오후 내각회의를 열어 그것을 통과시킨 후 다시 어전회의 절차를 거쳐서(8. 22) 그날로 "한국 황제는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국 황제에 양여한다"는 '합방'조약을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과 통감 데라우치(寺內正毅)의 이름으로
조인함으로써 그는 영원히 지워질 수 없는 매국의 원흉이 되었다.
3·1 운동이
일어나자 세 차례의 [경고문] 발표
이보다 앞서 일본은 1910년 6월 하순경에
'일한병합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한국 황실에 대한 대우, 한국 원로대신에 대한 조처, 한국 인민에 대한 통치방법, '병합'의 실행에 필요한
경비문제 등을 의논했고, 그 결과 한국 황제 일가의 1년 세비를 150만 원 지급할 것, '합방' 공신에게는 응분의 작위를 주고 세습재산으로서
공채를 하사할 것, '합방' 공신에 대한 수당으로서 현 수상에게는 백작 작위와 15만 원, 일반 대신에게는 자작 작위와 10만 원, 기타는 남작
작위와 5만 원을 줄 것, '합방'의 소요경비로서는 공채 3000만 원을 발행할 것 등이 결정되었었다.
이에 따라 이완용은
'합방'과 함께 일본 정부로부터 특별 은사금, 총리 퇴관금 등과 함께 일본 귀족으로서 백작 작위와 그것에 따르는 응분의 대우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이 되었다가 다시 그 부의장이 되었다. 이후 '내선인친목회'를 발기하고 '조선귀족회' 부회장이 되어 일본을 드나들면서 일본 국왕을
만나는 등 친일행위를 계속하였는데, 고종이 죽고 그 장례를 이용하여 3·1 운동이 일어나자 세 차례에 걸쳐 조선 민족에 대한 이른바 [경고문]을
발표했다. 첫번째 [경고문]에서 이완용은 "조선독립 선동은 허설(虛說)이요 망동"이라면서, 일제 당국이 이 운동을 '무지몰각한 망동'으로 보고
관대하게 회유하지만, 그래도 자각하지 못하면 필경 강압책을 쓸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 같은 [경고문]이 발표되자 매국노 이완용을
규탄하는 소리가 다시 높아졌고 이에 대해 그는 "천만인 중에 한사람이라도 나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경고의 효과가
적지 않은 것"이라 강변했다. 조선총독부가 각 지방에 게시한 [경고문]을 민중들이 모두 찢어버렸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세번째 [경고문]을
발표했다. 세번째 [경고문]에서 그는 이렇게 강변했다. 3·1 운동이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서의 민족자결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조선과 일본은 고대 이래로 동종동족(同宗同族) 동종동근(同種同根)이어서 민족자결주의는 조선에 부적당한 것이다, 또한 한일'합방'은 당시의
국내사정이나 국제관계로 보아 역사적 자연의 운명과 세계 대세에 순응하여 동양의 평화를 확보하기 위하여 조선 민족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활로였다,
그리고 3·1 운동에 참가하여 '경거망동'하는 사람은 조선 민족을 멸망시키고 동양의 평화를 파괴하는 우리의 적이다.
가히 민족반역자로서의 극명한 논리가 아닐 수 없다. 이후 이완용은 후작으로 승작했고(1921), 아들 항구(恒九)도 남작을 받았으며 손자
병길(丙吉), 병희(丙喜) 등도 모두 귀족으로서 일본에 유학하는 등 친일파 수괴로서의 갖은 '영화'를 누리는 한편, 매국의 대가로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게 된다.
일찍이 이재명의 의거에서 목숨을 건진 그는, 만년에 그 집에 함께 기거하던 일족 이영구(李榮九)에 의하여
암살되려다가 미수에 그쳤다는 소문이 있은 지 약 2개월 후 서울 옥인동 자택에서 결국 와석종신(臥席終身)할 수 있었다. 그러나 8·15 후 그
후손의 손에 의해 무덤이 파헤쳐져 없어지고 말았다. 일제시대의 민족해방운동전선은 좌우익을 막론하고 해방 후의 민족국가 건설과정에서
매국적(賣國賊)의 전체 재산을 몰수하여 국유화한다는 정책을 세웠으나 이승만 정권이 실시한 농지개혁과정에서 그것이 실시되지 않음으로써 그 재산은
그대로 후손들에게 물려졌다. ■ 강만길(고려대 교수·한국사)
■참고문헌 이완용, [경고문], {매일신보},
1919.4.8 / 5.30. 大垣丈夫 編, {朝鮮紳士大同譜}, 1913. 小松綠, {朝鮮倂合之裏面}, 中外新論社, 1920.
김명수, {일당기사}, 일당기사출판사,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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