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견성이란?
배상공이 대사께 물었다.
“자성을 보는 것[見性]이란 무엇입니까?”
“성품이 곧 보는 것이요, 보는 것이 곧 성품이니,
성품으로써 다시 성품을 보지 말라.
또 들음이 그대로 성품이니 성품으로서 다시 성품을
들으려 해서는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네가 성품이라는 견해를 내며, 능히
성품을 듣고 능히 성품을 보아서 문득 같다거나
다르다는 견해를 일으킨다.
저 경에서 분명히 말하기를, ‘볼 수 있는 바는
다시 보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너는 어찌 머리 위에
다시 머리를 얹겠느냐?
경에서 분명히 말하기를, ‘마치 소반 위에 구슬을
흩어 놓는 것과 같아서, 큰 구슬은 크게 둥글며,
작은 구슬은 작게 둥글어서 각각의 구슬끼리 알지
못하며, 각각 서로를 방해 하지 않아서, 일어날 때에
<내가 일어난다> 말하지 않으며, 없어질 때에
<내가 없어진다> 말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4생과 6도가 이렇지 않은 경우가 없느니라.
또 중생이 부처를 보지 못하고 부처가 중생을
보지 못하며, 4과(四果)가 4향(四向)을 보지 못하고
4향이 4과를 보지 못하며, 3현(三賢), 10성(十聖)이
등각과 묘각을 보지 못하고 등각과 묘각이 3현, 10성을
보지 못하며, 나아가 물이 불을 보지 못하고 불이 물을
보지 못하며, 땅이 바람을 보지 못하고 바람이 땅을
보지 못하며, 중생이 법계에 들지 못하고 부처가 법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법의 성품은 가고 옴이 없으며 능히
보는 것도 보여지는 대상도 없다.
능히 이와 같을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나는 본다느니
혹은 나는 듣는다느니 말하겠느냐?
무엇보다도 선지식의 회하에서 깨닫도록 하여라.
선지식이 나에게 법을 설하시며, 모든 부처님께서
세간에 나오셔서 중생들에게 법을 설해 주신다.
그러나 가전연은 다만 생멸하는 마음을 가지고
실상(實相)의 법을 전하였기 때문에 유마거사에게
꾸중을 들었느니라.
분명히 말하건대, 어떤 법이라도 본래로 속박하지
않는데 어찌 풀어제칠 필요가 있겠으며, 또 본래
물들지도 않는데 굳이 맑게 할 필요가 있겠느냐?
그러므로 말하기를, ‘모든 법의 참다운 모양이
이와 같거늘 어찌 말로써 설명할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네가 지금 다만 시비하는 마음, 염정(染淨)을 따지는
마음을 내고 하나하나마다 알음알이를 배워 얻어서,
온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이 결정코
취하려고 하는 것을 곧 보게 되는데, 도대체 누가
마음의 눈을 갖추었으며, 누가 강하고 누가 약한지
말해 보아라.
만약 이렇게 한다면 하늘과 땅의 차이처럼 현격하게
다른 것이니, 다시 무슨 견성(見性)을 논하겠느냐?”
배상공이 대사께 물었다.
“이미 성품이 그대로 보는 것이며 보는 것이 그대로
성품이라고 스님께서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성품이 본래 장애가 없어야 하며 제한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하여 물건이 가로막히면 곧 보지 못하고,
또 허공이 가운데서 가까우면 보고 멀어지면
보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이것은 네가 망령되게 다르다는 견해를 낸 것이니라.
만약 물건이 앞에 가로막히면 보지 못하고 그것이
없어지면 본다고 생각하여, 성품을 가로막는 장애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주 잘못이니라.
성품이란 보는 것도 보지 않는 것도 아니며, 법 또한
보는 것도 보지 않는 것도 아니다.
만약 견성한 사람이라면 어느 곳인들 나의 본래
성품이 아님이 있겠느냐?
그러므로 6도, 4생과 산하 대지가 모두 내 성품의 맑고
본체 그대로이니라.
그러므로 말하기를, ‘물질[色]을 보는 것이 곧
마음[心]을 보는 것이다.’고 하였으니, 물질과 마음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모양에 집착하여 보고 듣고 느끼고 알아서
눈 앞의 물건을 없애고 나서야 비로소 보려고 하는
자들은 2승(二乘)의 무리 가운데 떨어진, 의지하여
통하려는 견해이니라.
허공 가운데서 가까우면 보고 멀면 볼 수 없다고
한다면, 이것은 외도에 떨어지고 만다.
분명히 말하노니, 안도 아니고 바깥도 아니며,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은 것이니, 가까우면서도
볼 수 없는 것이 중생들의 성품이니라. 가까이 있어도
오히려 그렇거늘, 멀어서 볼 수 없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이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