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테크/설교및 목회자료

[스크랩] 스테반 설교와 베드로 설교-2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12. 21. 07:28

스테반 설교와 베드로 설교-2

 

같은 죄목으로 예수 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교권 자들은 같은 죄목, 같은 방식으로 스테판을 죽이려고 일을 꾸몄고 이점에서 보면 스테판의 죽음은 당연한 일이 될 수 밖에 없다. 예수 님을 이단으로 몰아서 처형한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자 그를 핍박했고 그리스도의 복음이 왕성하게 전파되자 위기의식을 느끼고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을 죽이려고 획책(劃策)했다.

 

그리고 스테판을 죽인 그들은 그 당시 초대교회에 큰 핍박을 가하여 많은 신자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떠나서 유대 각 지방과 사마리아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흩어진 신자들이 복음을 전하게 되어 이는 결과적으로 예수 님의 명령대로 복음을 널리 전파하는 계기가 되었다.

 

어찌하여 예루살렘 교회가 이런 핍박을 당했는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는 인간이 알수 없다. 하나님이 계시해주시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스테판의 순교 사건은 복음이 이방에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교회를 향한 핍박이 이방전도에 소홀한 예루살렘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된 계획인지 아니면 이방전도에 게으름을 보인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인지 인간의 입장에서는 알 수 없다. 다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롬 8:28)는 성경 말씀대로 하나님은 선한 결과로 항상 인도하신다는 말씀을 믿을 뿐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통한 많은 사람들의 회심 사건과, 스테판의 설교후에 돌에 맞아죽는 순교 사건을 비교해 볼 때에 이 두 사건은 우리에게 많은 의문을 던져준다. 왜냐하면 성경의 기록이 그 사건이 일어난 원인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성경은 그 두 사건의 전말(顚末)을 우리에게 사실대로 기록하여 전해주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기록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려고 노력하여 그 사건의 진정한 원인을 분석하여 일부라도 알도록 해야한다. 그것이 우리 신앙의 유익을 가져오며 진정한 성경연구의 본 뜻이 되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어떤 설교는 회심 사건을 일으키고 어떤 설교는 청중들로 하여금 반감을 일으키고 이를 갈며 분노하게 되었는가? 이점은 매우 중요한 문제로 오늘 교회의 흥망(興亡)이 여기에 달려있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의 전도나 교회 사역에서 설교처럼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들이 교회의 설교를 통하여 예수를 만나고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는 사건은 설교를 통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라는 성경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말씀을 선포할 때 믿음이 발생하고 하나님의 복음이 확장되므로 설교는 그 인생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교가 생명력을 잃으면 교회가 생명력을 잃게되고 교회가 생명력을 잃으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지 못하고 정체되고 교회는 쇠락해지고 만다.

 

이렇게 되면 복음 전파의 사명은 상실된 채 지상에서 흔적만 남은 소아시아 일곱교회 같이 되고 말 것이다. 날로 능력을 상실해가는 한국교회에서 시급히 살려야할 것이 기도와 설교인데 기도도 설교를 통하여 교인들에게 생명력을 공급할 때에 기도에 힘쓸 수 있고 올바른 기도생활을 행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도와 설교는 서로 도와주며 나란히 발전 부흥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설교가 중요하므로 베드로와 스테판의 설교를 비교 분석하여 생명을 살리는 설교가 어떤 것인지 연구해보기로 하겠다.
베드로와 스테판의 설교 후 일어난 사건의 배경에는 위에서 지적한 대로 설교를 듣는 청중의 상태가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면 그 외에 다른 점은 없는지 다른 것을 찾아보면 몇 가지가 나오는데 그 중에 하나는 설교하기 전(前)에 이적과 표적이 발생했다는 점이다. 베드로의 첫번 설교에는 집단 방언(方言)의 표적이 있었다. 외국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유월절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왔을 때에 방언을 받은 일백 이십명의 기도소리가 각 각 자기들의 거주하는 나라의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각기 거주하는 외국어로 하나님 찬양을 하는 갈릴리 사람들의 말을 듣게된 사람들은 그 표적(表跡)에 놀라게 되었고 하나님의 초월적인 능력을 느끼게 되었다.

 

성전 미문의 앉음뱅이를 일으킨 기적도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기적이었다. 베드로의 설교 전(前)에 나타난 이런 기적의 사건은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되어 청중들을 압도하였고 이로 인해 그들은 베드로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복음을 모르는 사람에게 복음을 쉽게 받아드리는 하나님의 사용하시는 도구가 병 치료의 기적을 비롯한 하나님의 이적(異跡)이다.
왜냐하면 천지 자연의 법칙을 초월하는 기적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고 다른 종교의 신(神)은 행할 수 없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유일성(唯一性)과 진정성(眞正性)을 증거 해주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든 종교는 인간의 이성에 호소하여 합리적으로 인간을 설득하지만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말만 화려하지 아무런 능력을 보여주지 못한다. 기독교를 제외한 고등종교가 인간의 생사(生死)가 달린 문제에 대하여 아무런 해결책을 제시해주지 못함을 비기독교인들도 알고 있다.

 

이제는 기독교가 널리 전파되어서 복음이 임하는 곳마다 하나님의 이적과 표적이 나타나서 이적과 기적이 쉽게 인식되는 것이 오늘의 세태이다. 그러나 역사를 상고하여 보면 비기독교 권에서 기적이란 것이 도무지 없었다고 단정할 수 있는 것은 종교의 창시자들이 기적과 이적에 대하여 자신의 무력을 솔직히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석가모니(釋迦牟尼)는 외아들을 잃은 과부의 간절한 소원을 듣고도 인간의 생명을 살릴수 없다고 했고 이슬람교의 창시자 마호�은 기적을 보여달라는 신도들에게 이 세상 모두가 하나님의 기적이라고 말하며 기적을 보여주지 못했다. 내세(來世)를 묻는 제자들에게 공자(孔子)는 살았을 때의 일도 잘 알지 못하는데 죽은 후의 일을 어찌 알겠냐고 되물었다.

 

그러나 예수 님은 죽은 외아들을 애통해하는 과부를 불쌍히 여겨서 말씀 한마디로 죽은 과부의 아들을 살리므로(눅 7:11-17) 자신이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여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인 생과 사를 해결할 수 있는 분임을 보여주셨다.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인 생사를 해결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 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되심을 기적으로 증거하신 것이다. 이뿐 아니고 예수의 제자를 비롯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전능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렸다. 하나님의 능력이 제자들 위에 임했던 것이다.

 

데살로니가 후서 2장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9-12절)"

 

악한 자도 사단의 능력을 받아서 능력을 행하는데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수로 능력을 행한다 하였다.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을 행한다 하였다. 심지어는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이적도 하여 사람들을 미혹한다 하였다(계 13:13,14).

 

그러나 사단도 피조물이다. 피조물인 천사가 타락한 것이 사단이므로 피조물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 자신의 근원적인 문제인 생사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 결국은 유황불 못에 던져져 멸망 당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계 20:10).

 

그러기에 그가 하는 능력은 생명을 살리는 근원적인 기적은 할 수 없다. 마귀의 대행자로 나온 짐승이 죽을 뻔 하다가 사는 이적을 보였는데 이는 생명을 새롭게 살린 기적을 흉내낸 속임수였다. 온전히 죽은 후에 살아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온전히 죽었다가 사신 분은 예수 님 뿐이다. 마지막 때에 보이는 이 이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흉내내는 속임수이기에 거짓 기적일 뿐이다(계13:3).

 

하나님외에는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인 생사를 해결하는 기적을 보여줄수 없다. 다른 능력과 표적을 보여 줄지라도 생과 사를 해결하는 참된 기적은 피조물 누구도 해결할수 없다.

 

그러기에석가나 공자나 마호�이나 오늘 세상에 널리퍼진 고등종교의 가르침은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인 생사(生死)의 문제에 있어서는 해결책을 보이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보이고 있다. 인간의 근원적 문제인 생사에 대해서 이론으로는 그럴듯하게 화려한 말로 아무리 꾸며도 실생활에서 이런 문제가 대두될 때는 이들은 아무런 해결을 하지못하고 있으며 위에서 지적한 대로 그들도 이점을 솔직히 인정하고 있다. 이는 이들이 창시한 종교가 인간의 한계(限界)를 초월할수 없는 인간의 이성(理性)의 산물임을 스스로 시인(是認)하는 것이다.


 

출처 : 충신사 기독교 문서 선교회
글쓴이 : joseph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