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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죄(罪)에 대한 단상(斷想)-2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12. 21. 07:35

죄(罪)에 대한 단상(斷想)-2 
 
4.자유의지(自由意志)는 인간에게 부여한 고귀한 선물(善物)이다.

 

다만 인간만이 이성(理性)이 있으므로 자신의 지혜와 지식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고 사는데 이것이 인간이 부여받은 자유의지(自由意志)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이 단순한 피조물이 아니고 하나님의 특별한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이기에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부여한 고귀(高貴)한 선물이다. 그리고 이것은 "스스로 있는 자(출 3:14)" 라고 자신을 정의하신 하나님의 중요한 속성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만든 존재에 대하여 기계처럼 따르는 것이 아니고 자발적(自發的)으로 판단하여 "스스로 따르든지 어긋나든지" 인간의 자유의지에 맡긴 것이다. 인간이 자동차를 만든 것은 인간의 필요를 위한 것이지 자동차의 필요를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인간을 만든 것은 하나님의 필요를 위해서 만든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을 만드실 때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라는 고귀한 선물을 주셔서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반역할 수도 있고 순종할 수도 있는 선택의 자유를 주셨다. 하나님에게 반역할 줄 모르고 순종만 하는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하나님에게 반역할 수도 있는 자유를 주신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소중한 존재로 만드신 증거이기도 하다.

 

인간에게, 하나님께 순종할 수도 있고 반역할 수도 있도록 자유의지를 준 것은 인간의 인격을 존중하고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무조건 복종하는 노예(奴隸)가 아니고 자신의 의지로 순종하는 동반자적(同伴者的)인 존귀한 존재로 관계를 맺기 원하신 것 같다.

 

태초(太初)에,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에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는데 이는 인간을 존귀하고 고귀한 존재로 만들었음을 의미한다. 가장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이기에 존귀하게 살수 있는 방법을 정하고 이방법대로 살든지 반역하든지 인간의 뜻을 존중하여 자유의지를 선물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다른 피조물에게는 없는 고귀한 선물인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면 가장 최선의 인생을 살게 되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지 아니하면 죄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죄의 결과는 파멸이다.

 

그러나 인간의 조상인 아담은 자기 뜻대로 행하는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하여 자신의 생각대로 행하여 하나님의 뜻을 반역하였는데 이것이 인간의 최초의 죄악이었다. 그리고 인간의 이러한 자유의지의 남용은 연속하여 인간의 역사를 이루었고 완전히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선악관(善惡觀)과 죄악관(罪惡觀)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므로 인간의 죄악에 대한 관념은 하나님의 정하신 방법과는 판이하게 달라졌고 결과로 오늘의 세상은 죄악으로 가득찬 세상을 이루게 되었다. 왜냐하면 죄의 본질을 모르고, 죄를 모르기에, 죄를 범하면서도 이를 모르게 되고 죄에 대하여 무감각한 삶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인간들은 죄악의 오물덩이에 파묻혀 살면서도 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비참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하나님과 인간이 생각하는 죄에 대한 관점이 서로 다른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반역한 결과로 인함이다. 하나님이 죄로 정하신 것을 인간이 죄로 여기지 않는 것이 많은데 이것은 마치 자동차를 만든 인간이 자동차의 안전수칙을 만든 것을 자동차가 스스로 자기 마음대로 엉터리 안전수칙을 만들어 운행하는 것과 같다. 이것이 자동차로서 고장의 원인이요 인간으로서는 타락의 원인이다. 여기서 인간과 하나님과의 갈등이 생긴 것이 인간의 역사인 것 같다.

 

5.시대상황에 따라 변하는 인간의 선악관과 도덕관은 원칙이 없고 가변적(可變的)이다.

 

인간이 죄로 여기고 규정한 것은 주로 법률과 관습인데 이것들은 인간이 사회공동체를 이루고 영위하기 위하여 질서를 규정한 것이다. 사회 구성원들의 개인적인 생존과 생활, 그리고 국가나 단위공동체의 유지를 위하여 최소한 규제를 위하여 마련한 것이 법이요, 관습이다.

그러므로 법정신이나 관습에는 그 당시의 사회여건에서 발생한 문제에 대한 대응책이 주류를 이룬다. 보다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나 인간의 본질적인 존재에 대한 고찰이나 철학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영원하고 근원적인 철학적인 문제와는 상관 없이 그 당시 사회여건에서 공동체가 유지 되는 것에 최우선 가치를 부여하게 된다. 인생이 추구하여야 할 근원적인 선악의 문제 보다 그 때 그 때 사회여건에 알 맞는 것을 법으로 정하여 놓고 이를 지키면 된다. 따라서 인간이 법이나 관습으로 정해진 것은 그 당시의 사회상(社會狀)의 반영이므로 사회상이 변화함에 따라서 법이나 관습이 정하여 놓은 선악의 개념이 변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인간이 정한 선악의 개념은 시대에 따라서 변화되는 법과 관습에 의하여 바뀌게 되므로 가변적(可變的)이다.

 

인간이 정해 놓은 선악의 개념은 이렇게 가변성이 있으므로 영원하지 못하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인간이 구축한 도덕관과 모든 가치관은 불완전한 한계를 보이고 그 한계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것은 인간의 역사를 개관(槪觀)하여 보아도 금방 알 수 있다.

우리 사회상황을 둘러 보아도 지금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청춘 남녀의 연애를 불과 수십 년 전만해도 죄로 여겼다. 처녀 총각들이 혼기가 차면 부모가 정해주는 배필을 만나기 까지 남녀 교제를 하면 품행이 좋지 않은 것으로 매도 당했고 그보다 앞선 조선시대에는 양반 집에서 이런 일이 발생하면 큰 잘못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청춘 남녀가 연애하는 것을 장려하는 시대가 되었고 이에 따라서 예전에는 엄격하던 여성들의 정조 관이 해이해져서 성 풍조가 문란해지고 있다.
미국 같은 곳에서는 오히려 미혼 여성들이 순결을 지니고 있으면 오히려 이상한 사람으로 보는 풍조도 있다 하니 인간의 가치관과 선악관이 얼마나 윈칙이 없고 변화가 많은 지 알 수 없다.

 

인간이 만든 도덕관과 선악관을 포함한 가치관은 그 당시의 시대상황에 따라서 변하므로 인간이 원래 지키고 살아야 하는 방법에서 멀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삶을 반복 함으로서 인간이 최상의 조건에서 삶을 영위하지 못하고 위에서 언급한대로 고장 난 자동차 같은 인생이 되고 마는 것이다.

 

자동차를 최상으로 유지하고 운행하는 방법은 정해져 있다. 다른 방법은 있을 수 없다. 자동차를 잘 아는, 자동차를 만든 인간이 정해놓았기 때문이다. 마찬 가지로 인간이 최상의 삶을 사는 방법은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이 정해준 방법대로 살 때에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이 방법에서 이탈하면 자동차가 고장 나고 폐차가 되듯이 하나님이 정해준 방법에서 이탈된 인간의 삶은 결국 폐차인생(廢車人生)인 파멸이 오게 된다. 이것이 죄에 대한 심판인데 이는 인간이 스스로 선택한 결과이다.

 

인간이 최상의 삶을 살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뜻이 기록된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은 인간이 고장 난 자동차 같은 인생이 되지 않도록 안전하고 건강한 삶을 살수 있는 방법을 계시하셨다. 그리고 이 계시된 방법대로 사는 개인이나 민족은 잘 살게 되고 발전하지만 이 방법을 어기고 사는 개인이나 민족은 패망하게 되는 것을 성경의 많은 기록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다.

 

성경의 기록을 살펴보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계시와 이를 반역한 인간들의 기록이 많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인간이 하나님이 정해준 방법을 어김으로서 인간이 멸망 당하게 되고 이를 회복 하시려는 하나님의 하신 일이 성경의 주제인 것 같다.

 

6.성적 타락과 부패는 심판의 징조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들고 인간이 잘 살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지만 인간들은 이를 어기어서 멸망을 스스로 불러들였다. 이것이 죄로 인한 심판이요, 개인과 국가와 인류의 멸망으로 나타났다.


죄악이 가득차면 개인이나 민족과 인류 전체의 멸망이 닥쳐오는데 흔히 아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이라 던지 노아의 홍수(洪水)는 인간의 죄가 누적되어서 빚어진 결과이다.

 

죄에 대하여 중요한 속성(屬性)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앞에서 논급한 대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과 인간의 관점이 다른 것이 있다. 하나님의 정하신 죄에 대한 정의(定義)와 인간이 정해놓은 죄에 대한 정의가 다르면 다를수록 인간의 삶은 타락하고 부패해지는데 이는 나라와 개인과 민족의 망해갈 때 보여주는 증세 중의 하나가 되기도 한다.

 

역사를 보면 나라가 망할 때에 보여지는 특징 중에 하나가 도덕과 윤리가 타락해지는 것인데 그 중에서도 성적 타락이 극심해 짐을 볼 수 있다. 인간이 사회공동체를 이루고 사는데 그 근본은 가정 공동체이다. 인간은 가정공동체를 이루고 자녀를 생산하고 양육하여 사회와 국가 구성원을 끊임없이 배출하여 사회와 국가의 공동체를 유지하게 한다.

 

그런데 성적윤리의 타락은 가정을 이루는 핵심인 부부간의 신뢰를 훼손하고 건전한 가정의 기풍을 파괴하므로 사회의 기본 구성 요소인 가정의 존재 목적과 가치에 의미를 잃게 만든다. 국가 사회 공동체의 기초단위는 가정 공동체이다. 성적 윤리의 부패와 타락으로 존재의미를 잃어버린 가정이라는 기초 단위로 이루어진 사회 역시 존재의미를 잃어버리게 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존재의미를 상실한 사회나 국가는 망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역사는 성적윤리의 타락으로 시작한 민족과 국가의 패망을 끊임없이 경고하고 있다.

하나님과 격리된 인간의 죄의 관점은 날이 갈수록 하나님의 정해준 방법과 멀어져서 타락과 부패도 심해지는데 이는 자동차를 제멋대로 운행하고 제멋대로, 엉터리로 관리할 수록 자동차의 상태가 나빠지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세세하게 고찰하기엔 지면이 부족하여 이 정도에서 넘기고 죄에 대하여 중요한 속성 중에서 다른 점을 고찰해보기로 한다.

 

7. 죄는 형체를 이루고 물량화(物量化) 된다.

 

죄에 대한 관점 중에서 성경에 기록된 죄에 대한 속성과 인간이 보는 죄에 대한 속성에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이 죄에 대한 물량화(物量化)요, 계량화(計量化)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죄악에 대하여 물건의 분량을 달아보듯이 달아보고, 물건을 쌓아두듯이 물건처럼 형상화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창고에 상품을 쌓아 놓듯이 인간의 죄악도 이렇게 물품처럼 차곡 차곡 쌓이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들은 죄에 대하여 물건처럼, 상품처럼 형태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쉽게 말해서 개인이나 국가나 민족이 죄를 범하면 죄가 물품처럼 쌓여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죄라는 것은 물품처럼 형체를 이루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자신이 범한 죄가 자기집 마당이나 방구석에 흉한모습으로 자리를 잡고 쌓여 있으며 이것으로 인하여 자신의 인생에 막대한 장애가 되는지 인식할 수 있다면 이 사회는 범죄 없는 세상이 되어서 지금보다 훨씬 밝고 건강한 사회를 이루고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자신이 아무리 악한 죄를 범해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없는 것처럼 착각한다. 그러나 흔히 아는 대로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여서 없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보는 가시광선(可視光線)은 범위가 한정되어 있다. 인간이 귀로들을 수 있는 가청주파수(可聽周波數)가 정해져 있듯이 인간이 볼 수 있는 범위도 한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볼 수 있는 가시광선 안에서 죄악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뿐이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여 죄악의 모습이 없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현실의 물품의 모습보다 더욱 단단하고 무거운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

 

성경에는 "음행(淫行)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 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고전 6:18)" 라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은 사람의 죄는 몸 밖에 있다 하였다. 죄악이 무형(無形)이 아니고 형체를 이루어 몸 밖에 있다 한다. 그리고 음행 하는 죄는 죄가 몸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몸에, 인격에 붙어 있게 된다는 뜻이다. 일반적인 죄는 몸에 붙어 있지 않고 몸밖에 덩어리로 달려있다는 뜻이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에서 나오는 스쿠리지 영감처럼 자신의 죄가 덩어리가 되어 자신에게 쇠사슬로 연결되어 자신의 행로를 방해하는 장애물 덩어리 노릇을 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죄 덩어리는 이 사람의 인생 행로에 큰 장애물이 되지만 이 사람의 인격에 달라 붙는 죄 덩어리는 아니다. 그런데 음행의 죄는 몸에 달라 붙은 오물 덩어리처럼 인간 자신에게 직접 달라붙어서 인간의 신체와 정신을 썩게 만들고 인생(人生)을 오염시키므로 보다 심각한 상태라는 것이다.

 

인간이 죄를 범하면 개인이나 민족이나 죄의 덩어리가 장애물 노릇을 하여 그 앞길에 어려움을 끼치게 된다. 그래서 경건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못할 짓을 피하려고 한다. 남에게 억울한 일을 하여 원한을 사면 자신이 하는 일에 장애가 생겨서 하는 일이 어렵게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말이 있기도 하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음행의 죄악의 덩어리는 자신의 몸에 달라붙는 것처럼 되므로 더욱 심각한 상황이 된다. 몸 앞에 있는 오물덩어리와 몸에 붙어있는 오물덩어리는 틀리다. 냄새 나는 오물이 발 앞에 있는 것도 괴로운데 몸에 찰삭 달라 붙어 있다면 얼마나 끔직한 일인가?

그러기에 성경에서는 음행 죄의 심각함을 경고하고 피하라고 경계하고 있다. 사실 인간 역사의 흥망의 이면에는 거의 예외 없이 이 음행 죄가 심각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인간 패망의 근본 요인을 이루고 있다.

 

어떤 이는 성경에 기록한 이 구절을 죄에 대한 표현 방법으로 서술한 것이지 무슨, 죄에 대한 물량화나 계량화로 확대 해석할 필요가 있는 가? 라고 반문할 수도 있는데 이에 대해서 성경에는 죄에 대한 물량화에 대해서 확고하게 기록된 구절이 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히브리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기를 가나안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때는 사백년 이후라고 말씀하셨다.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貫盈)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라(창16:16)"

 

이 말씀을 해석해보면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는데 지금 주는 것이 아니고 사백년 후에 이 땅에 사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가득 차서 죄악에 대한 심판으로 이 족속을 쫓아내고 멸절시킨 후에야 네 자손의 땅이 된다는 뜻이다. 지금은 이 족속의 죄악이 가득하지 않으므로 심판의 때가 아니고 사백년 이후에는 죄악이 이땅에 가득 차서 심판의 때가 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관영(貫盈)한 것 즉, 가득찬 것과 관영치 않은 것, 즉 가득차지 않은 것으로 아모리 족속의 죄에 대하여 물량화 해서 표현 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릇에 물을 가득 담듯이 땅이라는 것은, 인간의 죄악을 담는 그릇 같아서 죄악이 쌓이는 곳이라는 의미가 있다.

 

또한 물통에 물을 받을 때 시간이 경과하면 물이 가득 차듯이 세월이 지나면 인간의 죄는 갈수록 쌓인다는 시간적 특성을 지니는데 이것은 세상의 물리적 이치와 똑 같은 것이다. 인간이 죄를 날이 갈수록 만들고 양이 계속 증가하면 결국 물이 통에 가득차듯이 죄악이 땅에 가득차게 되고 결국은 정화작용(淨化作用)을 하지 아니하면 그 땅은 사람이 살수 없는 멸망의 폐허가 된다.

 

그대로 방치하면 이 땅은 사람이 살수 없는 영원한 폐허가 되므로 폐허가 되기 전에 정화작업을 하여 재생(再生) 시키는 작업이 그 민족에 대한 심판 인 것 같다. 완전히 땅을 망가뜨리기 전에 쫓아내고 다른 민족이라도 살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죄에 대하여 물품처럼 형상화 하여 적재되는 것 뿐 아니라 시간이 경과함에 다라 물품이 적재되는 양이 증가 하듯이 죄의 양이 증가한다는 이 구절은 다른 말을 덧 붙일 수 없도록 죄에 대한 공간적이고 시간적인 부피와 질량을 명시(明示)하고 있다.

 

출처 : 충신사 기독교 문서 선교회
글쓴이 : joseph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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