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다리 걷어차기
저자 : 장하준
서평 글쓴이 :
체중이 120킬로그램에 프로 복싱에 입문한지 10년이 되어 오랜 기간 동안의 훈련과 경험을 거치고 근육강화제를 비롯한 각종 약물을 복용한 복서와 체중이 75킬로그램에 이제 막 프로 복싱에 입문하려고 준비 중인, 그리고 철저한 약물검사 규정에 의해 규제를 받는 복서가 경기를 하면 누가 이길까? 아니 이런 질문은 답이 너무 당연하기에 질문을 바꾸어본다면 이런 경기가 승패를 떠나서 공정한 경기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물론 건전한 상식에 의하면 이는 불공정한 경기임이 자명하며, 실제로 복싱경기에서도 이러한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스포츠에서도 용납되지 않는 일이 우리의 삶의 질과 국가 발전에 직결되는 경제적 영역에서는 버젓이 일어나고 있으며, 이러한 현실에 대한 분석과 비판을 풍부한 역사적 자료와 실증적인 논리에 의해 전개하고 있는 책이 장하준 교수가 쓴 ‘사다리 걷어차기(Kicking away the Ladder)’(부키, 2004)이다.
장하준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거쳐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경제학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90년부터 케임브리지 대학 경제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UN, 세계은행 등 국제기구와 영국, 남아공 등 각국 정부, 그리고 Third World Network(말레이시아), Center for Economic and Policy Research(미국) 등 NGO의 자문역을 역임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The Political Economy of Industrial Policy’, ‘Globalization, Economic Devel
약간은 독특한 ‘사다리 걷어차기’란 제목은 이 책의 내용을 드러내주는 중요한 용어이기 때문에 이를 먼저 설명해보기로 하자. 이 용어는 ‘유치산업 보호론’을 주장한 것으로 유명한 19세기 독일 경제학 프리드리히 리스트가 사용한 것이다. 유치산업 보호론이란 산업수준이 상대적으로 낙후된 나라는 보호관세와 같은 정부개입 없이는 선진국과의 경쟁 속에서 새로운 산업을 육성 발전시킬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리스트는 아담 스미스를 위시로 한 자유무역주의를 패권적 이익을 대변하는 위선적 학설로 비판했다. 산업수준이 상이한 국가들 사이에 자유무역이 이루어지는 것은 선진국에게만 이익이 될 뿐 장기적으로는 개발도상국의 성장에 중요한 제조업의 발전을 가로막는다고 주장했다. 자유무역이라는 보편적 수사 뒤에는 사다리를 타고 정상에 오른 사람이 그 ‘사다리를 걷어차’ 버려 다른 사람들이 정상에 오를 수 있는 수단을 빼앗아 버리는 교활함이 숨어있다고 날카롭게 지적한 것이다. 19세기에 탄생된 개념을 저자가 현 시대를 분석하는 책의 제목으로 내세우고 있는 이유는 리스트가 지적한 현상이 단순히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현재도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19세기의 개념이 현재의 현실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여전히 유효하며, 미래에도 지속될 개연성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각국의 경제발전에 대한 역사적 접근법을 통하여 정책사와 제도사의 측면에서 분석하고 있다. 우선 정책사적 측면에서 저자는 각 국가들이 추진하는 소위 산업·무역·기술(ITT; Industry, Trade and Technology) 정책의 차이가 성장과 구조 변화 면에서 성공한 국가들과 그렇지 못한 국가들을 가름한다고 보고 역사적 관점을 통해 이를 검증하고 있다. 검증 결과, 실제 역사적 사례는 신자유주의 주창자들 심지어 신자유주의에 비판적인 사람들조차 믿고 있는 자유무역 발전사로서의 자본주의 정사(正史)와는 달리, 선진국인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스웨덴, 스위스, 일본과 신흥공업국인 한국, 대만이 세계 무역구조에 있어 개도국이라는 상대적 열세의 위치에 있을 때 공통적으로 국가 주도의 산업, 무역, 기술 정책을 채택함으로 선진국과 경쟁국을 따라잡고 주도적 지위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들이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여 국가의 성장동력을 마련하기 위해 보호관세뿐만이 아니라 수출보조금, 수입원자재에 대한 관세환급, 독점권 부여, 정책금융지원, 연구개발지원, 그리고 산업스파이 고용, 다른 국가 특허권의 계획적 도용, 수출금지기계의 밀수입 등 다양한 정책적 수단을 동원하였음이 드러났다. 그리고 보호주의와 경제성장률 사이에 正의 연관성이 존재함을 드러내는 통계적 증거도 제시함으로써 위에서 제시된 실례의 타당성을 검증해 주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선진국들이 국제경쟁력의 변화에 따라 자국의 정책방향을 바꿔왔고, 자국의 정책을 고수하기 위해 경쟁국과 잠재적 도전국들에게 그들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을 강요해왔다는 점이다. 즉 자신들의 성장을 위해서 사용한 ‘사다리’를 다른 국가가 사용하려 할 때는 치워버리고 자신들이 만든 기준과 규칙에 의해 경쟁을 하자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걸어왔던 역사를 망각한, 아니 망각하려고 하는 위선과 위계 질서가 자유무역이나 세계화라는 수사적 언명 속에 감추어지고 자신만이 온갖 무기를 장착하고 다른 나라는 무장해제 시키는 은밀한 정치학이 횡행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제도사적 측면에 대한 연구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저자는 선진국이 현재 구비하고 있는 민주주의, 관료제도, 사법권, 재산권(특히 지적 재산권), 금융제도(중앙은행, 증권거래법), 사회보장제도, 노동제도 등의 시행과 발전사에 대한 고찰을 통해 기존의 통념과는 달리 이런 제도들이 선진국에서 순식간에 발전된 것이 아니라 상당히 더디고 많은 진통과 갈등을 겪으며 만들어졌음을 밝혀낸다. 또 선진국의 사정과 이익에 따라 (지적)재산권, 유한책임제도, 보통선거제와 같은 제도가 선별적으로 시행되었으며, 현재 개도국들과 비슷한 수준의 발전단계를 비교할 경우 사회복지제도를 제외한 다른 모든 분야에서 오히려 뒤처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여기서도 주목해야 할 점은 특정 제도가 특정 시기에 특정 국가에 적합한지의 여부는 많은 정치, 경제, 사회적 변수와 역사적 배경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며, 설령 적합하고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이식되어 제대로 작동되기 위해서는 많게는 수 세대, 보통은 수십 년이 걸린다는 사실이다(선진국 자신들이 그래왔듯이). 그럼에도 선진국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국제기준에 부합하는 제도들을 개도국들이 즉각 또는 5~10년 이내에 수용해야 한다고 압박하며, 이를 어길 시에는 상응하는 제재와 불이익을 받게 될 것이라고 위협하고 있다. 이는 자신들이 걸어온 제도발전 역사와는 상반되는 위선적 행위임과 동시에 경제발전에 필요한 제도의 대부분이 현 선진국들의 경제발전의 원인이기보다는 결과라고 하는 학문적 성과와도 위배되는 무지의 행위이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선진국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반론과 변명은 과거 자신들이 사용했던 산업, 무역, 기술 정책들이 경제발전에 유익했던 ‘바람직한 정책’이었음은 사실이지만 지금은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이런 정책들이 더 이상 바람직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국의 이익에 피해를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부 양심적인(?)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다른 국가들에게 지금까지 자신이 잘못된 길을 걸어왔고 뒤늦게 자유무역의 가치를 깨달았다고 참회하는 어조로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개도국뿐만이 아니라 선진국들의 경제성과도 자신들의 반론과 음모론적 회개가 그릇된 것임을 증명하고 있다. 선진국의 규제 압력과 이를 수용한 개도국의 잘못된 정책시행으로 인해 근 20년간 개도국에서는 현저한 성장률 둔화가 나타났다. 또 선진국들도 자국이 산업, 무역, 기술 정책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였을 때 성장률 둔화가 나타났다.
이처럼 선진국이 실제 시행했던 정책에 대한 연구와 개도국의 성장과 발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분석을 통해, 저자는 선진국들이 개도국에게 제도향상과 정책시행을 요구할 때 자신의 역사를 망각하지 말고 개도국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이해하며 인내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좀 더 현실적인 문제로 현 개도국의 경제침체의 원인은 적대적 대외환경과 적극적 산업, 무역, 기술 정책을 사용할 수 있는 내부능력을 박탈당했다는데 있기 때문에 이를 복원해야 할 필요성과 절박성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논의들은 지금 우리가 처한 경제적 현실과 삶의 질의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는데 중요한 함의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민주화 이후 정치적 자유화와 경제적 자유화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그런 가운데 글로벌 차원의 경제 자유화 압력과 권위주의적 발전국가에 대한 반작용이 결합되면서 자칫 무분별한 신자유주의적 정책이 넘쳐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고 있다. 그로 인해 민주정부 하에서 성장률이 둔화되고 빈부격차가 심화됨으로써 정치적 자유화의 발목을 잡게 될 개연성도 커지고 있다.
저자의 다른 책인 ‘개혁의 덫’에서도 지적된 바 있듯이, 면밀한 검토 없는 경제개혁과 IMF의 잘못된 처방으로 견제와 균형시스템이 해체되고 정책적 통제력이 상실되면서 투자율이 저하되고 실업이 증가하며 성장률이 하락하는 현실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이런 현실을 보호주의로의 회귀나 세계화에 대한 거부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세계화가 헌사하는 긍정적인 측면을 부정해서도, 할 수도 없으며 보호주의로 회귀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선진국의 경제발전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그것을 기반으로 그들이 현재 주창하고 있는 세계화에 패권적 이해관계가 내장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다.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하나의 보편적 모델을 좇지 말고 우리나라의 경제발전 단계와 여건에 대한 신중한 고려와 계산으로 지속가능한 경제발전을 가능케 하는 정책과 제도 개발에 힘쓰고, 우리와 유사한 상황에 처해있는 국가들과의 연대를 통하여 선진국의 압력에 대응할 수 있는 협상력과 경쟁력을 키워나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책을 덮으면서 선진국들이 압력을 가하는 현실과, 압도적으로 존재하는 선진국의 규정력, 경제적 자유화의 참된 모델과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구별할 수 없는 국내의 혼란, 그리고 선진국들이 자신들의 국익을 절제하면서까지 개도국과 공존협약을 맺을 수 있을까에 대한 회의감이 밀려옴을 막을 수는 없었다. 아무도 듣지 않는 말을 허공에 던지는 선지자와 같이 이 책 또한 정작 들어야 할 당사자가 듣지 못하는 메아리 없는 탄식이 되지 않을지 걱정이 앞선다.
[1]
'이야기테크 > 책방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신경제 이후 (After The New Economy) (0) | 2009.01.27 |
---|---|
[스크랩] 버블의 기원. (0) | 2009.01.27 |
[스크랩] ‘사다리 걷어차기’에 대한 짤막한 비판 (0) | 2009.01.27 |
[스크랩] 내부적 개혁과 외부적 개혁의 공존을 희망하며 (0) | 2009.01.27 |
[스크랩] 적대적 제휴(한미일 삼각 안보체제) (0) | 2009.0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