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준 목포대 교수가 작년에 출간한 책입니다.
브루스커밍스와 박명림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의 뒤를 이은 한국현대사 연구의 백미라고 칭할 수있는 책입니다.
프레시안의 서평을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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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이완범/한국학중앙연구원]
미국 워싱턴 근교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가면 세계적 자료수집가이며 국보급 연구자인 재미 사학자 방선주(73) 박사를 만날 수 있다. 깡마른 체격에 평안도 사투리가 인상적인 노인이다. 평소 방 박사와 같이 문서 속에 파묻혀 정년 없이 연구하고 싶은 것이 필자의 소원이었는데 언제나 실현이 가능할지 꿈만 꾸면서 게으름을 탓하고 있다.
방 박사는 한국 현대사의 수준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려놓는 데에 기여하신 어른이다. 이번에 간행된 노작 <한국전쟁 :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돌베개 펴냄)을 지은 정병준 목포대 교수도 방 박사의 노고와 인도가 없었다면 아마 이러한 역작을 산출해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25년 만에 '커밍스의 아성'을 무너뜨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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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연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외국학자를 들라면 단연 브루스 커밍스 교수를 첫 손가락에 꼽을 것이다. 1981년 미국 프린스턴대학교 출판부에서 간행된 <한국전쟁의 기원> 제1권은 국내의 연구자들이 오를 수 없는 거대한 성벽이었다. 식민지 시대와 광복 직후의 혁명적 상황을 연결시킨 탁견이나 인용한 자료들의 방대함을 보면서 경탄해 마지 않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1970년대에 비밀 해제된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미국 문서뿐만 아니라 북한 노획 문서까지 폭넓게 활용하여 자료에 목말라 있던 1980년대 국내 연구자들에게 연구의 전범으로 간주되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의 연구에서도 당연히 허점은 있었다. 사료는 누구보다도 많이 보았다지만 이를 하나의 시각으로 재단하면서 취사선택한 점이 있었다. 그러나 1981년의 시점에서 이렇게 훌륭한 저작을 내놓았다는 점에 그 허점들은 충분히 이해될 수 있었기에 오랫동안 최고의 권위를 지켰다. 그러다가 1990년 <한국전쟁의 기원> 제2권을 역시 프린스턴대학교에서 간행하면서 그의 명성이 무색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정병준 교수의 책이 출간되면서 그의 아성은 무너졌다고 표현해도 될 듯 싶다.
정병준 교수는 커밍스 교수가 1990년대 중반에 비밀 해제된 구소련 문서를 연구에 반영하지 못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 이전에 간행되었으니 당연한 이런 한계는 커밍스 교수의 연구에서 한국전쟁과 관련된 소련의 입장과 역할에 대한 큰 공백으로 남았다. 정 교수는 커밍스 교수의 연구에 대해 "미국의 역할과 입장에 대해서는 가설-추정은 물론 심지어는 모자이크까지 동원하여 규명하려고 애썼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입장과 역할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북한에 대한 설명도 충분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특히 구소련 문서는 그간 은폐되어 왔던 김일성의 남침에 대한 스탈린(과 모택동)의 승인과정에 대해 밝혀주고 있다. 물론 구소련 문서는 김일성의 역할을 과장하고 스탈린의 역할을 회피하려 했지만 행간에 숨어 있는 소련의 개입 흔적을 다 지울 수는 없었다. 스탈린은 김일성의 도발을 제어했으며 마지막 단계에서는 김일성의 전면 남침을 승인하여 최종 결정자로서의 역할을 다하면서도 개입을 철저히 은폐하는 데에 성공했다.
남이 북의 남침을 유도했다?…"사료에 근거 두지 않은 부실한 주장"
정병준 교수는 "남이 북의 남침을 유도했다"는 커밍스 교수의 또 다른 핵심 주장도 반박하고 있다. 커밍스 교수는 <한국전쟁의 기원> 제2권에서 김백일과 백인엽이 '반격'이 아닌 '점령'을 목표로 1950년 6월 24~25일 저녁 해주를 공격했다는 추정을 주장의 근거로 제시했었다. 남한의 정보당국이 늦여름 북의 기습 공격을 인지하고, 국경선을 침범해 북의 기습 공격을 앞당기는 한편 한국군의 신속한 철수를 꾀했다는 것이다. 즉 선제공격으로 북한군을 끌어들인 후 신속하게 군대를 철수하고 미국의 개입을 획득하려 했다는 주장이었다.
그렇지만 정병준 교수는 "문서를 통해 보건대 당시 남한은 자신의 공격 의도에 스스로 오도됨으로써 북의 대규모 공격 징후를 무시했다"며 커밍스 교수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남한은 신속하게 철군을 하기는 했지만 선제공격을 가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북한의 공격을 유도함으로써 미국의 개입을 획득할 만큼 명민하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정병준 교수에 따르면, 당시 미국의 고위 당국자는 김일성이 1950년 6월 25일 남침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해 결국 정보부서의 수많은 남침 경고를 무시하는 우를 범했다. 또한 1949년 1월부터 7월까지 군사력 면에서 북에 비해 우위에 있던 한국군은 38선에서 북을 자주 공격했으며 따라서 그 관성 때문에 북의 남침 징후 역시 무시했다.
정병준 교수는 "커밍스가 핵심적인 주장을 가설, 잘못된 자료 인용, 오독에 기반을 둔 추정에 의지했다"고 평가했다. 커밍스 교수는 그간 남한의 공식 전쟁사를 진실을 왜곡한 엉터리라고 비웃었지만 정작 커밍스 교수의 남침 유도설 역시 그것을 지지할 만한 사료가 부실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 소련 문서, 선별노획문서 등을 접할 수 없었던 커밍스 교수의 근본적 한계에서 비롯됐다.
방선주 박사의 기여가 빛을 발하는 것도 이 대목이다. 정병준 교수는 미국 문서와 소련 문서는 물론 방 박사에 의해 1990년대 초 발굴된 신노획문서(선별노획문서)까지 포함한 북한노획문서를 다각적으로 광범위하게 활용해 균형 잡힌 서술과 평가를 기하고 있다. 이로써 그는 커밍스 교수의 권위를 일거에 무너뜨리며 "1949년 38선 충돌이 전쟁을 형성했다"는 주장에 이르게 된다. 그럼 1949년 38선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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