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과 서구의 충돌
저자 : 역사문제연구소 엮음
지난 한 세기 동안, 우리나라는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힘썼다. 그리고 ‘문명개화’를 열망하고 있었던 한국인들은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였다. 특히 종교에서 많은 한국인들은 개신교와 천주교를 받아들이면서 서양의 부강국과 같은 수준의 문명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였다.
음악에서도 서양음악을 우리의 관습적 차이를 갖는 ‘문화’로 본 것이 아니라 우리가 따라 배워야 할 ‘발전된 문명 혹은 선진기술’로 근대화란 곧 ‘서구화’를 의미하게 되었다.
또 서양의 것이라면 무조건 받아들이기에 급급하여, 왜 특정시기에 특정 학문이 지구의 다른 구석에서도 ‘보편’으로 숭배되어야 하는지 묻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서구문화를 무조건 숭배하고 받아들이기만 하였지, 어떻게 형성 되었는지, 역으로 우리의 학문과 사상이 맞는지는 알지도 보지도 않았다.
<전통과 서구의 충돌-한국적 근대성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역사비평사, 2001.4, 9,000원)라는 책은 역사문제연구소가 한국의 근대성과 관련하여 건축가, 사회학자, 심리학자, 역사학자, 음악가, 미술가, 철학자, 법학자, 의사 등 10명의 저자들의 글을 모아 엮은 책이다. 10명의 저자들이 각각의 분야에서 조선시대-대한제국-일제-대한민국의 근대성 형성과정에 대한 설득력 있는 분석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을 읽을수록 우리나라의 근대성의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것임을 곳곳에서 알 수 있었다.
1) 우리 주거는 죽었는가 – 이일훈(건축가)
2) 한국가족의 인간화를 위하여 – 문소정(사회학자)
3) 성과 성의식의 변화 – 운기현(심리학자)
4) 근대적 소비생활과 식민지적 소외 – 허영란(한국사)
5) 미술 – 서구화 지상주의의 환상 – 최열(미술평론가)
6) 서양음악의 수용과 전통음악의 변화 – 이소영(음악평론가)
7) 황색 피부, 하얀 가면: 철학의 식민화 – 이승환(동양철학)
8) 한의학과 서양 근대의학의 만남 – 황상익(의학사)
9) 돌이켜보는 ‘망국의 종교’와 ‘문명의 종교’ – 장석만(종교철학)
10) 서구법 수용의 왜곡 – 정긍식(법학)
이 중 세 가지를 선별하여 간단히 소개해보기로 하자.
황색 피부, 하얀 가면: 철학의 식민화
지난 한세기 동안 우리는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일에 안간힘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우리는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참으로 몰 주체적으로 받아들였고, 심지어 받아들이지 않아도 될 것까지 숭배해왔으며, 나아가서 우리의 사상과 문화는 돌보지 않고 암매장하듯 내팽개쳐 두었다.
중국에서 서양철학의 수용은 서구열강의 침략에 대응한 구국(救國)과 구망(救亡)의 목적에서 시작되었고,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막부의 주도 아래 위로부터의 근대화와 지배질서의 구축이라는 목적에서 시작되었다. 우리의 경우 서양철학의 수용은 일제에 의한 신식학문의 전파라는 차원에서 진행되었지만, 일제에 대항하여 수용하려 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국망(國亡)이라는 현실은 유교지식인들로 하여금 전통사상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요구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이르면서 한국의 전통사상은 일본인들의 굴절된 오리엔탈리즘에 의하여 왜곡의 길을 걷게 되었다. 비교적 일찍 서양과 접촉하기 시작했던 일본은 자신이 속한 동양을 정체적이고 야만적인 것으로 단정하고, 동양문명에서 탈피하여 서구문명으로 진입하려는 ‘탈아입구(脫亞入歐)’의 노선을 천명하였다.
전통사상의 부정적인 이미지에 대한 일제의 이데올로기적 세뇌는 결국 성공적으로 식민지 한국인의 뇌리에 각인되었으며, 조국의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서구문명을 모방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21세기가 된 지금, 한국의 동양철학은 두 갈래로 양극화되어 있다. 강단의 동양철학자들은 소수의 동업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난해한 언어로 전공분야의 지식을 독점한다. 또 다른 한 극에는, 형편없는 싸구려 언어로 재포장된 상업화된 동양철학이 존재한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양분화된 동양철학의 판도 속에서 건전한 상식을 갖춘 한글세대 독자들은 읽을거리를 찾지 못한다.
오늘날 강단 동양철학은 서양철학과 마찬가지로 난해한 형이상학적 언어로, 맥락과 현실감을 결여한 채, 하나의 암호체계에 불과하다.
지적 식민지주의를 청산하고 탈모방적인 사고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현실·역사·문화에 대한 주체적인 인식이 요청된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재발견과 현실의 주체적 인식은 ‘전통주의’니 ‘근본주의’라는 편협한 태도를 넘어서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 것을 세계인과 더불어 공유할 수 있도록 보편화하여 인식하고 소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돌이켜보는 ‘망국의 종교’와 ‘문명의 종교’
서구 근대사회에서 근대적 합리성을 상징하는 것이 과학과 테크놀로지였음을 상기한다면 개항기 한국사회에서 개신교가 문명의 종교로서, 근대의 합리성을 대표하는 것으로 인식된 상황이었다. ‘문명개화’를 열망하고 있었던 한국인들에게 보다 현저하게 나타났다. 선교사들도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근대식 건물이나 과학기구, 근대적 생활용품을 한국인들에게 과시함으로써 개신교와 문명진보를 등치 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많은 한국인 신자들은 개신교를 받아들임으로써 서양의 부강국과 같은 수준의 문명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였다. 개신교가 불교 및 유교와 같은 종교에 대해 취했던 기본자세는 개신교를 중심으로 종교의 위계제를 설정하고 개신교의 밑에 이들 종교를 배치하는 것이었다.
반면 불교와 유교와는 달리, 제도적 기반을 지니지 못한 무속이나 민간신앙에 대해서 개신교가 보였던 태도는 종교의 영역에 이런 것들이 발을 붙이지 못하게 쓸어버리는 것이었다.
중국에서 기독교는 언제나 서구열강의 위협과 서구의 침략이 결부되어 나타났다. 서구 군사력의 첨병으로서 기독교는 서구의 침략을 예고하고 그 기반을 마련해주는 몫을 담당하였다. 따라서 기독교에 대해 청나라 인민은 극도의 적대감을 표시하였고, 이런 점은 1900년의 의화단 봉기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기독교가 중국을 위협하는 서구 제국주의 세력의 주구로 인식되는 한 기독교가 중국사회에서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은 제한 받게 마련이다.
일본의 경우, 자신의 정체성를 보존하면서 서구적 세계관을 수용하는 방향이 채택된 것이다. 그 정체성 보존방법은 바로 천황제의 수립이었다. 이런 맥락 속에서 기독교가 설 자리는 극히 제한될 수 밖에 없다.
‘유교망국론’ 은 조선의 멸망에 대한 해답을 추구하던 이에게 효과적인 설명방법으로 여겨졌으며, 치욕의 과거와 단절하고 새로운 대안을 찾고 있던 이에게 생각을 정리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적지 않은 이들이 개신교를 통해 새로운 대안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이런 점으로 인해 개신교는 한국사회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유교적 의례의 허구성은 자명한 것이 되었고, 종교를 보는 관점은 개신교의 모델에 따라 정비되었다. 조상이 지내온 대로 제사를 드리면서 사는 방식은 종교 본래의 방식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다만 유일신을 ‘영접’하고 ‘믿는’ 것이 “올바른” 종교활동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게 되었다. 요컨대 개신교와 유교는 한국사회에서 각각 ‘문명의 종교’와 ‘망국의 종교’로 인식되었고, 이런 이분법은 한국의 근대성 성립과 함께 자명한 이치로서 정착되었다.
서구법 수용의 왜곡
조선시대에는 법이 없었거나 실효성이 없는 공법에 불과하였다고 여기고 있다. 태조는 즉위교서에서 법치주의를 천명하였고, 이에 따라 초기부터 법전을 편찬하였다. 이는 단순한 폭력적 지배가 아니라 객관적 규범에 의해 통치를 하겠다는 역사의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법의 내용은 행정조직에서부터 개인의 권리의무까지 다양하였다. 동양에서는 율, 즉 형법을 중심으로 법이 발달하였지만, 공사법이 함께 있어 그렇게 보일 뿐이지, 사법도 엄연히 존재하였다.
19세기 세도정치로 사회기강이 문란해짐에 따라 법질서도 붕괴되었다. 새로운 사회로 향하는 도도한 흐름을 멈출 수는 없었고, 이러한 변혁의 요구는 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갑오개혁·을미개혁부터 행정과 사법의 분리, 인민의 생명과 재산의 보호, 남형의 금지 등을 선언한 점에 의의가 있다.
개화기에 논의된 법치주의는 입헌주의에 바탕을 둔 서구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법치주의를 확립하기 위해서 그 모델을 일본의 메이지 법체제로 삼았다. 개인주의적인 사회진화론은 사회유기체설과 결합돼 개인이 전체에 봉사하는 전체주의로 바뀌어 강력한 왕권을 긍정하는 군주 주권론으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이 상황에서 법치주의는 서구와는 달리 국가에 대한 국민의 의무와 실정법의 준수를 강조하는 지배 이데올로기였다.
사회진화론에 입각한 법치주의의 강조는, 법제로 정비된 문명국인 일본이 반문명국인 한국을 지배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즉 일제의 침략을 논리적으로 긍정하는 기능을 하였다. 따라서 서구에서처럼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 대한 개인의 의무를 강조하고 왕권의 절대성을 옹호하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 왔다.
1894년에서 1905년 사이의 입법은 시계추의 양끝을 달렸다. 일제의 강요에 의한 급진적인 개혁입법과 이에 대한 반동으로 극단적인 복고입법, 전자는 실효성이 없고, 후자는 시대의 조류에 맞지 않았다.
일제는 1908년5월부터 1910년 9월까지 한국에서 민·상법전을 편찬하기 위하여 관습을 조사하였다. 일본의 민·상법의 편별에 따른 206개의 문항에 대해 한국의 관습의 유무와 그 내용을 조사하였는데, 전통법을 무시하고 사실상 일본법의 효력을 인정하는 일제의 침략의지를 관철하는 기능을 하였다.
일제는 병합과 동시에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여 통치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천황이 절대 신으로서 절대권력을 가지거나 책임은 지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권력을 가지되 책임은 없다는 데 있다. 절대왕정에 항거한 시민혁명을 거친 후 절대권력을 제한하기 위한 입헌주의와 삼권분립의 이념을 토대로 하는 서구법이 수용된 일제기에 전보다 더 강력한 제도적 권력체가 존재한 것은 식민지의 아이러니였다.
조선민사령은 세 차례의 개정을 거치는 과정에서 사실상 일본 민법이 거의 다 의용되었다. 제사상속권을 단지 관습상 또는 조상을 제사할 의무에 불과할 뿐이라고 하여 그 법적 성격을 부정하였다.
결국 식민지법은 식민체제의 기반 조성과 그 영속화를 위한 도구로 식민지 수탈을 위한 것이지, 자유주의적 법치주의의 핵심요소가 결여되는 등 근대성을 인정할 수 없다. 특히 식민지법은 자발적인 동원이 아니라 폭력을 통해 지지되었다. 식민지 조선의 법은 조선을 일본에 편입시키려는 동화정책과 수탈을 위해 동원된 차별이라는 상반된 두 모습을 띠고 있다.
해방이 되었지만 달라진 것은 없다. 법도 사람도 그대로다. 달라진 것을 말과 글뿐이었다. 식민지의 법에 대한 경험과 인식도 그대로이다. 독재정권(5·16쿠데타 세력과 10월 유신정권 그리고 전두환 정권)은 경우에 따라 사법부를 길들이려고 했다. 현대법의 왜곡은 사면에서도 잘 나타난다. 정부 수립 후 지금까지 90차례의 사면이 있었는데,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 하지 못한 정권은 사면을 남발하였다. 그들은 사법권은 안중에 없었다.
일제기에 배태된 법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독재정치기에 법의 왜곡을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법은 지켜야 한다. 그러나 가진 자들이 법을 농락하니 지키면 손해이다. 돈이나 권력이 있으면 무죄이고 그렇지 않으면 유죄인 현실에서 일반인은 지킬 수밖에 없다.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역사적 경험에서 교훈을 찾아 그릇된 길을 되밟지 않는 역사의 혜안이 요구되고 있다. 그리고 세계사적인 보편성과 우리의 독자성을 조화시키는 법문화를 만들어 가는데, 법학자와 법조인 그리고 국민 전체의 일치된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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