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테크/성지순례이야기

[스크랩] 상동교회 (스크랜튼 선교사, 전덕기 목사, 이준 열사)3.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2. 1. 22:14

이준 열사


함남 북청군 속후면 용전리 발영도에서 이병관(李秉瓘)과 청주이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릴 때 이름은 성재라 했다. 성(性)은 하늘의 뜻을 따른다는 뜻이요, 재(在)는 인간이란 그 하늘의 뜻을 따름에 있다는 뜻이다. 3세 때 부모를 잃은 그는, 젊은 시절 이름을 준으로 고치고 호는 일성이라 했다. 준(儁)은 세상에 널리 빛난다는 뜻이요, 일성(一醒)은 세상을 한번 깨우친다는 뜻이다. 그는 조부 이명섭(李明燮)과 작은아버지 이병하(李秉夏) 밑에서 자라며 한학을 배우기 시작하여, 12세에 사서삼경에 이르렀다.

 17세에는 큰 뜻을 품고 서울에 올라가 대원군을 비롯하여 형조판서 김병시(金炳始) 등과 교제하다 일단 고향 북청으로 귀환했다. 1887년 29세 때 함경도시에 장원한 후 함경감사 조병식(趙秉式)과 협의하여 스스로 2천 평의 토지를 희사, 경학원(經學院)을 설립하고 인재를 양성하는데 주력했다. 1889년 다시 상경한 그는, 김병시의 중매로 1893년 이화학당 출신 이일정(李一貞)과 결혼했다. 그의 나이 35세, 아내 나이 17세로 나이차이가 심했지만, 두 사람 모두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뜨거운 애국심에 불타고 있어서 부부라기보다 동지적 결합이라는 것이 타당했다.

아내 일정은 생활이 곤란할 때 잡화상을 차려 생계를 꾸렸고, 국채보상운동 당시 부인들의 반지를 빼서 바치는 탈환회(脫還會), 찬거리 값을 절약하여 내는 감선회(減腺會)등을 조직 . 활동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가두시위대에 뛰어들어 구국을 외치기도 했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함흥에 있는 순릉참봉의 벼슬을 맡아 하향했다가, 일본이 승리하자 그는 박영효, 서광범 등 개화당 인사의 권유로 상경, 이듬해 신설된 법관양성소에 들어가 6개월 후에 졸업했다. 1896년 2월 한성재판소 검사보에 임명되었으나 고관의 비행을 탄핵한 죄로 1개월 만에 면관(免官)되고 말았다.

 

이후 독립협회에 가담하여 평의장(評議長)으로 활약하다가, 을미사변 이후 조직된 김홍집 등 친일내각 각료들과 교제가 있던 그는 신변에 위험을 느껴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97년 와세다 대학 법과에 들어가 이듬해 졸업하였고 마침 그의 체포령이 해제되었다. 이에 귀국하여 다시 독립협회에서 일하는 한편 상동교회 청년회장직을 맡아 힘쓰다가, 독립협회 해산 시간부 17명과 함께 체포되어 수개월 후 석방되었다. 1902년 민영환ㆍ이동휘ㆍ이상재 등과 비밀결사 개혁당을 조직했고, 1904년 러일전쟁 후 일제의 한국 침략과 친일 주구들의 활동이 노골화하자 대한보안회ㆍ대한협동회 등을 조직하여 황무지 개척권을 얻으려는 일제의 음모를 폭로했다. 친일파인 일진회와 대항하기 위해 공진회(共進會)를 조직, 회장에 추대되어 친일대신 5명을 성토하다가 체포, 황주 철도(黃州 鐵島)에 6개월 간 유배당했다. 이 때 그는 성경을 깊이 연구하는 중에 주님의 은혜를 깨닫고 진실한 신앙에 몰입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정치생활의 구급피난소로 첫 출발하였으나 여러 신자들과 상종하며, 목사 전덕기와의 관계와 상동 예배당 만국청년회의 관계가 인연이 되어 기독교 신자가 된 것이다. 이번 유배 가운데서 더욱 예수의 성스러운 희생의 정신인 십자가의 피의 의의를 내 것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 것이다. 그러니까 일성의 종교생활의 완전한 출발은 이 불우한 귀양살이 섬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이후부터는 많은 공사의 생활에 있어서도 기독교의 정신을 잃지 않았다.” <일성 이준 열사> 또한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상동교회에서는 전국감리교회 엡?청년회 연합회가 소집되어 ‘을사보호조약’ 무효상소운동을 결의하였는데, 이 때 상동교회 엡?회 대표로 참석한 그도 대한문에 나가 상소를 올렸으나 일본 경찰에 의해 무참히 해산되고 말았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국채보상연합회의소를 설립하여 소장이 되었으며, 그 해 조직된 항일 결사 신민회에도 참여하였다. 한편 1907년 7월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이 소식을 먼저 들은 양기탁은 즉시 상동교회 공옥학교 교감 이회영에게 알렸고, 이회영은 전덕기 목사에게 알렸다. 전덕기는 이회영, 이동휘 등 여러 동지들과 이 회의에 고종황제의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보호조약은 일제의 강압이며 결코 한국 황제의 원하는 바가 아니라는 것을 세계에 알려 무효화시키기로 합의했다. 특사는 이상설, 이준, 이위종으로 정한 후 이 뜻을 은밀히 고종황제에게 전하였고,

 

1907년 4월 20일 고종의 신임장을 받았다. 이후 전덕기 목사는 이준에게 신임장을 전달하고 상동교회에서 그를 위해 마지막 기도를 해주었다. 그 해 4월 헤이그로 출발한 그는 도중에 이상설ㆍ이위종과 합류하여 6월 25일 도착,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알리려 했으나 일본과 영국 대표의 방해 및 각 국 대표들의 냉담한 태도로 말미암아 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하였다. 그 당시 서울에서 The Korea Review를 발행하며 배일운동을 하던 감리교 선교사 헐버트가 헤이그로 와서 한국 대표를 후원하며 회의 참석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한편 네덜란드의 신문인 의 주선으로 평화회의를 계기로 개최된 국제협의에서 호소할 기회를 얻었고, 이 때 외국어에 능통한 이위종이 세계 언론인에게 조국의 비통한 실정을 호소한 연설이 세계 각국에 보도되어 주목을 끌었으나 구체적인 성과를 얻지 못하였으며, 이에 비분한 이준은 49세를 일기로 자결 순국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 되었으며 그동안 헤이그에 묻혀있던 유해가 1963년 서울 수유리 묘지에 이장 되었다.

 

 

네델란드 당국이 발행한 사망진단서인데 병명이 기록되어있지 않다. 

 

헤이그 외곽 묘지의 이준 열사 무덤  (블로그명 : 화려한 시절)

 

「헤이그」교외 「니에·아이큰다인」공동묘지 안에 있는 이준(李儁)열사의 묘지는 1977년 흉상과 묘비(墓碑)가 제막되어 한결 정화돼 있다. 외무부의 「李열사 묘적(墓跡)정화사업」은 3천 5백만원을 들여 이루어졌다. 조각가 백문기씨(전 이대(梨大)교수)사 높이 90cm·어깨 폭 72cm·가슴두께 40cm의 청동 흉상(胸像)과 높이 2·3m의 조석묘비, 그리고 애석(艾石)으로 만든 상석(床石)과 화강암 석병풍, 대리석 화병(花甁)·향로(香爐)들을 모두 서울에서 제작, 옮겨왔다. 묘역바닥과 울타리에 쓴 화강암은 거울같이 비치도록 7천번의 물갈기로 곱게 갈았다. 습도가 유달리 높은 「네덜란드」지역에서 돌의 산화를 막고 이끼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李열사의 흉상은 분사(憤死) 며칠전 「헤이그」에서 찍은 마지막 사진에 따라 수염이 있는 기품있는 모습이다. 열사의 묘지를 찾는 한국인의 발걸음은 그침이 없고 싱싱한 꽃다발도 끊이지 않고 놓인다.「파리」의 유학생이건, 서독에서 일하는 광부들이건 한국인들은 이역(異域)의 외로움과 고달픔을 달래고 뜨거운 동족애를 확인하려는 듯이 열사의 묘지를 찾는다. 기자가 李열사의 묘역의 묘역을 찾아들었을 때에도 두 어린이를 이끈 한 한국인 주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72년엔 저녁 늦게 닫혀버린 공동묘지의 담을 넘어 들어간 한국인 청년들이 출동한 경찰에 연행되었다가 「단지 애국열사의 묘역에 참배하려는 순수한 뜻」이 판명되어 석방, 화제가 된 알까지 있었다.

묘역은 원래 가로 3·6m, 세로 2m가 못돼 몹시 협소했고 묘비의 국명조차 잘못 표기돼 있었다. 확장은 「네덜란드」정부와 공동묘지측의 협조로 이루어졌다. 인접 묘지의 연고자들을 설득, 이들의 묘지를 옮기고 8필지의 공간을 확보해야 했기 때문이다. - 1978. 6. 30 중앙일보 - -이 근 량(李根諒) 특파원-

이준 열사의 유해는 헤이그 외곽의 한 묘지에 묻혀 있다가 1963년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이 묘지에는 열사의 묘비와 흉상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준열사 기념교회 봉헌예배, 2007.7.14.    (출처- http://www.sangdong.org/교회앨범/백민용,이종선 권사)

 

1907년 감리교인이자 고종 황제의 특사로 네덜란드 헤이그 세계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된 이준 열사가 순국한지 1백년이 되는 14일 기독교대한감리회는 헤이그에 ‘이준 열사 순국 1백주년기념교회’를 세웠다. 이날 신경하 감독회장 등 감리교 관계자들은 헤이그를 방문해 기념교회 봉헌식과 설립예배를 드리고 이준 열사의 순국 정신을 기렸다.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전한 신 감독회장은 “나라를 빼앗긴 참담함과 식민지 백성으로 전락한 비참함 속에서 이준 열사는 예레미야와 같은 예언자였고, 에스겔과 같은 위로자였다”고 증거했다.

 

 그는 “이준 열사의 희생은 민족의 자주독립을 일깨웠다”고 평가하면서 “몸을 바쳐 순국의 피를 흘린 이준 열사의 희생정신을 오늘에 계승하고, 내일의 유산으로 물려 줘야 한다”고 했다. 또 신 감독회장은 “이제 1백년 전에 있었던 이준 열사의 분노는 여기에 머무를 수 없다”면서 “그의 분노가 박해 받는 다른 민족에게까지 희망이 되고, 그의 눈물이 나라 잃은 다른 나라에까지 기쁨이 되고, 그의 기도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신 감독회장은 “기념교회가 현지 한인들을 위한 예배는 물론, 감리교회의 유럽 선교거점으로, 더 나아가 대한민국 문화사절과 세계평화센터로 자리잡게 될 것임을 믿는다”고도 했다. 기념교회 설립은 올해 초 기감 중앙연회 박영준 감독과 상동교회 서철 목사가 헤이그를 방문, ‘레잇스켐담 천주교회’를 이준 열사 순국 1백주년기념교회로 재건축하기 위한 구매계약을 체결하면서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기감은 지난 2005년부터 기념교회 설립을 추진해 왔으며, 작년 제27회 기감총회에서는 3월 4일을 이준 열사 기념주일로 정하기도 했다. 또 기념교회 설립을 위해 기감 산하 전국 교회는 기념주일 기간 동안 특별헌금 모금을 대대적으로 벌인 바 있다. 신 감독회장은 “기념교회 봉헌은 참으로 감격스러운 일”이라며 “우리 감리교회는 지난 2년 동안 중앙연회가 중심이 되어 이준 열사 기념사업을 전개해 왔고, 153만 감리교인들이 벽돌 한 장, 유리 한 장을 보탠다는 마음으로 동참했다”고 전했다.  

(출처- 크리스쳔 투데이, 박종배 기자, 2007.7.16)

 

이준열사 기념교회

 

이준열사 기념교회

 

이준열사 기념교회 

출처 : Joyful의 뜰
글쓴이 : Joyful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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