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교산교회
나. 김상임 일가의 개종과 강화의 복음화(1893-1902)
서민층인 이승환 씨의 가족과 그의 동류인 부녀자들로만 구성된 초기 교산교회는 성장 부흥에 한꼐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회 설립을 위해 이미 다른 측면에서도 역사하고 계시었다고 할 때, 교산리의 유력한 양반 김상임 씨가 바로 하나님의 선택받은 인물이었다.
김상임씨는 1848년 강화 양사 출신으로 16세에 이미 동몽과의 과거를 보아 상을 받은 준재로 성균관에서도 수학한 바 있고, 40세(1887년)에 승부 초시에 합격한 이름있는 양반이었다. 그는 과거 공부를 위해 서울을 자주 왕래하면서 기독교인과 자주 접할 기회가 있었고, 또 적지 아니한 관심을 갖고 있는 터였다. 그러던 차 이승환 모친의 선상세례를 계기로 선교사의 사려깊은 행위와 헌신적인 열의를 보고 많은 감명을 받게 되었고, 선교사와 매서인들이 양사에 자주 드나들면서 직접 선교사를 만나 대화 할 기회를 갖게 되자 김상임씨는 혼연히 기독교로 개종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김상임 씨의 개종은 그의 문중만이 아니라 강화지역 복음화를 위한 결정적 계기가 될 수 있었다.
김상임 초시는 본래 성실하고 민첩한 분으로 기독교로 개종하자마자 주변의 비난도 개념치 아니하고 가신(家神)과 사당을 불사르고, 믿음과 말씀공부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이러한 김상임 성도의 적극적인 행보는 교산교회를 그 즉시 50명으로 부흥시켜 놓았고, 그와 친분있는 강화지역 지도급 인사들이 연이어 개종해와 강화 복음화는 비교적 순조롭게 이루어져 갔다. 김상임 성도는 1894년 10월에 존스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좀 더 믿음이 돈독해지자 1896년 5월부터는 교산교회의 담당자의 직분을 맡을 수 있었다.
1896년 홍우동에 교회가 설립되었을 때 교산 교회에서 수도한 박능일 씨가 담당자로 파송되었고, 이때 초신자로 종순일, 권신일 씨가 입교했다. 1898년에는 본토 전도사 직분을 맏아 무려 10여 곳의 교회(개교회와 가정교회를 포함한 숫자인 듯 함)를 다스리며 선교 사업에 열중했다. 1899년에 존스 목사가 인천 우각동에 한국 최초의 신학회를 개설하자 김상임 전도사는 김기범, 김창식, 최병헝, 이명숙 등과 함께 지방 전도사 8명중 한 사람으로 신학회에 적을 두고 강의를 들었다. 이때의 강사진은 노보을(魯普乙, W.A.Noble), 조원시(존스), 서원보, 아펜젤러 등 미국인 선교사들 이었다.
여기서 김상임 전도사는 한국 최초의 신학과정 이수자가 된 것이다. 또 1900년에 평양에 신학회가 개설되자 김상임 전도사는 김경일, 박능일, 권신일 등 강화인 5명을 데리고 2년급 전도사 과정을 이수했다. 김상임 전도사에 인도되어 결신 입교한 강화인들중 박능일, 김봉일을 중심한 지도급 인사들이 모여 "주안에서 하나되어 복음을 전파하자"는 뜻에서 이름 끝자를 모두 한 일(一)자를 넣어 개명하고 서로 의형제를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동참한 이들은 권신일, 종순일, 주선일, 허진일, 최족일, 박현일, 황도일, 제씨 등이며, 김봉일은 자기의 두 아들에게까지 은일, 환일로 개명시켜 놓았다. 이들 전도인들의 모임을 외지에서는 초대교회의 '강화 오 걸일:五 傑一'이라 칭하지만 실은 '오 걸일'이 아닌 '십 걸일:十 傑一'이 넘는 인원이 동참했고 그후 一자로 개명 결신한 분은 60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거의가 직접 간접으로 김상임 전도사를 통해 결신한 분들로 강화지역은 물론 서울, 경기 전 지역에 걸쳐 개척 전도인으로 크게 활약함으로서 초대 한국 개신교의 초석들이 되었다. 1900년 전후만 해도 한국 개신교가 복음의 거점을 확보한 곳이라고는 아직 10여곳에 불과했다. 또 이 무렵에는 예수교인에 대한 박해와 조소가 극심한 때였다. 이 같은 악조건 속에서 10여명의 십자가 군병들이 자진해서 대오를 짜고 나서는 기적같은 현상이 이곳 강화에서 이루어 졌다. 이들은 분명 하나님이 내세운 복음의 전초병들이었다면, 이곳 강화는 예수님이 당초에 제자들을 불러모았던 갈릴리 해변과 유사한 고장인양 싶기도 하다. 여하튼 그후 이들 <십 걸일>들은 주안에서 결의형제하고 나서 복음 전파를 행동으로 옮겼다.
1900년에 강화읍 잠두 교회가 설립 될 때에도 인도자는 역시 박능일씨이며, 초신자는 주선일, 허진일, 최족일, 김봉일 씨였다. 또 같은 해 교동교회가 섰을 때도 권신일 씨(1907년 목사 안수, 순위9)를 파송했다. 1905년 박현일 씨(1914년 목사 안수 순위 50)는 덕적도에 군인 신분으로 들어가 복무하면서 덕적 중앙교회를 세우고 초대 사역자가 된 후, 1909년에 도이명 선교사의 어학 선생으로 이임해 갔고, 그 후임으로 종순일(2대), 허진일(3대), 최족일(4대)목사 등이 연이어 덕적도에 들어가 교회를 개척한 사실이 있다.
종순일 목사는 1899년부터 강화 남부지역 선교를 시작해 1901년에 초지 부근에 기도처를 마련하고 피미교회를 세웠으며, 1903년 북도의 진축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한 후 강화 길상면에서 전도를 해 선두교회(1904년)와 선두중앙교회(1907년)를 설립하고 초대 담임자로 시무한 바 있다(1916-1926년) 결국 교산교회의 박능일 목사에게서 전도 받은 종순일 목사는 일생을 강화, 옹진지역 복음화에 선도적 역할을 하면서 한 평생을 보낸 것이다. 이처럼 '一'자로 개명 결의한 위의 '십 걸일'들은 거의가 목사 장로 등 성직의 길을 걸었지마는 특히 권신일, 최족일(1915년 목사, 안수순위 60) 두 분은 3.1운동에 깊이 관련되어 수감 휴직되는 수난을 겪기까지 했다.
이처럼 강화교회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면서 많은 후배들을 양성해 온 김상임 전도사는 그 공로를 크게 인정받아 1902년 4월에 집사 목사 안수자로 내정되어 있었다. 한국 감리교에서 김기범, 김창식 목사에 이어 3번째로 목사 후보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영예의 안수식을 한달 앞두고 졸지에 세상을 뜨는 비운을 맞는다. 교회에 열병환자가 발생하자 그 환자를 심방한 후에 그 병에 감염되어 55세를 일기로 하나님께로 소천하고 만 것이다. "네 이웃을 위해 목숨을 버리면 그 보다 더 큰 것이 어디에 있겠느냐"하신 예수의 말씀을 그대로 이행했다고나 할까. 사실 당시의 감리교단은 하나의 큰 일꾼을 잃은 것이 애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1902년의 신학일보는 김상임 전도사의 사망소식과 아울러 생애 선교업적등을 무려 3페이지에 걸쳐 소상히 보도해 주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그분의 교계 활동이 어떠했던가를 가히 짐작케 하고도 남음이 있다.
3. 고난속에 성장해 온 교회(1903-1970)
1903년 본 교회는 김경일 씨가 서구역 전도사가 되어 1907까지 순행시무하게 되고, 김상임 전도사의 차남 김우제 씨는 읍구역 제 2대 전도사로 파송되어 갔다. 1906년부터는 김상임 전도사의 장자인 김홍제 권사가 전담하여 교회를 처리해 갔고 전도사로는 방족신, 조내덕 양씨가 차례로 순회하였다. 이 때에 손승용씨가 읍구역 제 4대 전도사로 파송되면서 본 교회는 읍구역으로 편입되어졌다. 이 때까지 부임해 온 감리사로는 시란돈(스크랜톤 1900년 한국 선교지방 감리사), 조원시(존스 1888년 5월 9일 서울도착, 1901년 한국 서지방 감리사), 기이부(奇怡富 케이블 able,Elmer M. 1899년 9월 29일 서울도착, 1905년 한국 서지방(인천, 부평, 강화, 교동, 남양, 황해 및 연안구역 등) 교역자는 모두 8명(목사 1)에 불과했다.
1914년 한국인 최벙헌 목사(1902년 5월 18일 서울에서 모인 미감리교 선교연회에서 무어감독에게 집사목사의 안수례를 받음)가 서지방에 부임해 왔으나, 이 때는 일제의 핍박 속에 교회가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 침체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1915년에 김홍제 전도사와 그의 부인 하덕신 씨가 깊은 영적 체험을 함으로서 오히려 교인수가 증가할 수 있었고, 제 2차 초가 8간의 예배당을 증축하여 교회의 면모를 새롭게 해 놓았다. 1916년에 벙커목사(1886년 7월 4일 서울에 도착)와 김유순 목사가 본 지방순회 목사가 되고, 김봉일 전도사와 그 부인 허나오미 권사가 수시로 본 교회를 왕래하여 대 예배와 사경회를 인도하자 교회가 부흥해 교인수가 70여 명에 이르렀다.
1917년 에는 읍내교회의 박봉래 목사가 본 교회 언혁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자료를 수집해 '기독교 대한감리교 교산교회 연혁'을 편집해 놓았다. 그는 연혁 서두에서 "대개 기독교회가 서울에서 시작하여 인천에 설립되고 강화에 본 교회가 설립 된후 전도(全島)에 전파되니라"라고 전제하고, 그 당시까지의 교회 연혁을 개괄적으로 정리해 놓은 것이다. 그 후 본 교회 담당자로 시무한 바 있는 신응균 목사가 1970년 2월에 이것을 재 편집해 놓고 다른 곳으로 이임해 감으로서 오늘날까지 귀한 교회사 자료로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1930년에는 남북 감리회가 통합됨에 따라 본 교회는 '기독교 대한 감리회 강화구역 교산교회'로 명칭이 바뀌었다. 1930년대 이후 교회가 소강상태에 있었으나, 1950년에 박승도 전도사가 연회로부터 파송되고, 구역이 또 다시 나뉘어 '중부연회 강화지방 양사구역 교산교회'로 개편되면서 새로운 활력을 얻었으나, 뜻밖에 6.25동란의 비극을 맞고 말았다. 수복이후 다시 부흥을 가져와 신도수가 증가해 90명에 이르렀다.
1956년 에는 안광남 전도사의 주선으로 교단 본부로부터 100만원의 건축보조금을 받아 건축 자재를 구입할 수 있었다. 1958년 최창묵 목사가 부임한 후 김용기 권사가 교산리 산 201번지의 대지를 기증(1,320평중 1,000평은 52만원에 매입하고 320평은 기증받음)하자, 1959년 4월 김봉기 장로를 기성회장으로 정초식을 거행하였다. 온 교회가 2년간에 걸쳐 예배당 건축에 전력하던 중 교회가 거의 완공될 무렵 담임목사와 김봉기 장로 그리고 김정기 권사가 동시에 교회를 떠나게 되어 교인들은 아쉬운 작별을 하게 되었다. 1961년 신응균 전도사가 부임하면서 예배당을 완성하고 봉헌식을 올렸다. 1963년 덕하리에 기도처를 설치하고, 교인 일부가 분리하여 교회를 개척해 나갔다. 1964년에 17평의 주택을 건립하고, 1968년에는 최윤영 권사를 기성회장으로해 37평 규모의 교육관을 1년에 걸쳐 완공해 놓았다.
1970년에는 교회 옆의 밭 234평을 매입해놓았고, 동년 3월에 신응균 목사가 서울로 전임해 가면서 후임으로 임종락 목사가 부임해 왔다. 1977년에 "또 다시 30평의 성전을 증축했고(기성회장:김용기 권사), 1979년에는 슬라브 양옥으로 목사관을 신축했다. 1981년 구역회의 결의로 교산교회의 명칭을 '양사중앙교회'로 변경했다. 1982년에는 '새마을 유아원'을 설립해 운영하기 시작했는데, 1991년까지 9회에 걸쳐 약 300명의 졸업생을 길러내고, 원아수의 격감으로 부득이 폐쇄시키고 말았다. 1985년에는 담임자 임종락 목사의 성역 30주년 및 회갑기념 예배를 드렸고, 그 다음해에는 '교회요람'을 창간 배포하고, 아울러 일부 낡은 건물을 철거하면서, 24평 정도의 슬라브 양옥식당도 건축하였다. 1994년 구역회에서 교회명칭을 '강화 교산교회'로 다시 변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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