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테크/성지순례이야기

[스크랩] 강화 교산교회, 김상임 전도사 7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2. 1. 22:27

4. 교항교회 설립


 앞서 살펴본 <橋山敎會沿革>은 교회 시작을 진술하며 '이성완'(이승환) 모자의 개종과 이명숙의 전도활동을 진술하며 같은 해 사건으로 김상임의 개종과 전도활동을 언급하고 있다.  "李聖完氏가 趙元時 宣敎師의 指導를 받어 美國聖書公會 賣書人이 되어 福音을 傳할 時 兄弟 金商林氏가 서울에 往來中 主를 믿고 姉妹 許조스편氏가 主를 믿는지라"  이승환 모자의 세례와 김상임의 개종을 같은 시기로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앞서 살펴본 밀러 부인의 증언에 따르면, 이승환의 고향 집에서 세례를 거행하지 못하게 한 일물이 '김씨'라는 유력한 양반이었으나 오히려 존스 목사의 사려깊은 행동에 감명받고 존스 목사를 초빙하여 대화를 나눈 후 개종한 것으로 되어 있어 이승환 어머니의 세례와 김상임의 개종을 밀접하게 연결시키고 있다.

그러나 다른 여러 자료에 의하면, 김상임의 개종 및 세례를 이승환 어머니 세례와 시차없이 연결시키기보다는, 김상임도 다른 통로로 기독교를 접하고 탐색하다가 이승환 어머니 세례와 그것을 계기로 선교사와 매서인들이 시루미에 자주 등장하게 되면서 직접 선교사를 만나 대화한 후 개종을 결심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김상임은 서사면 교항에 근거를 둔 전통 양반 가문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한학에 전념하여 과거 급제를 통해 입신출세를 도모하던 전형적 유학자였다.

나이 열 다섯되던 해부터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번번히 낙방하다가 사십(1887년)에 비로소 강화부 승부초시가 되었다. 이후 '김초시'는 벼슬에 나가지는 않았지만 고향인 교항동에 서당을 차리고 후학을 양성하며 지역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차에 이승환을 통한 감리교 선교가 바로 이웃 마을인 '시루미'(증산)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1902년 김상임이 별세하였을 때 그의 별세 기사와 함께 약력을 기록한 <신학월보>는 김상임의 개종 과정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김 형뎨는 환족의 자손인대 죠션고적 풍쇽대로 글일기와 과거보기로 힘스고 셰월을 보내는거슨 아람답고 큰 사업으로 알앗더니 하로날 우연히 예수교 젼도하는 사람을 맛나니 비로소 진리드럿나니라 그러나 젼도하는 목사 하나 맛나여야 밋기를 쟉졍하겟노라 하여 이에 목사를 맛나니 그 권면하는 말을 깃부히 듯고 예수 밋기를 시쟉하엿난지라" 

 앞에서 살펴본 <橋山敎會沿革>이나 <신학월보> 기록은 김상임이 선교사(목사) 존스를 만나기 전에 이미 기독교에 대한 정보를 듣고 스스로 선교사를 만나 기독교의 정체를 알아보려는 결심을 하고 있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서울을 왕래하며 알 게 되었든지, 아니면 이명숙, 이승환 등 매서인을 통해 알 게 되었든지, 선교사와 교회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었던 그는 직접 선교사를 만나보고 개종을 결심하였다는 말이다. 따라서 존스 선교사를 만나기 전에 나름대로 기독교에 대한 긴 탐색과정을 거쳤음을 알 수 있다.

김상임이 존스를 처음 만난 때가 언제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신학월보>기록이 1894년 8월 6일에 존스에게 학습받고, 그해 10월 8일에 세례를 받았으며, 그해 12월 12일에 만진례를 받은 것으로 정리하고 있고 <橋山敎會沿革> 역시 김상임의 개종, 세례를 '1894년' 사항으로 정리하고 있어 그가 존스를 만나 세례를 받은 것은 1894년 무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상임의 개종은 그가 살고 있던 '교항'마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지역유지이자 학자로 영향력있던 '김초시'의 개종은 김씨 문종의 비판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지만, 교항 주민들의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을 씻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교항의 사대부들 가운데 교인들이 생겨났으며, 이는 '무식한' 부류의 여성과 아이들로 구성된 시루미(증산) 신앙공동체와 다른 성격의 신앙공동체를 이루었다. 처음에 김상임을 비롯한 교항 마을 교인들은 증산에 있던 이승환의 집에가서 예배에 참석 했는데, 교인수가 늘어 장소가 비좁아 별도 예배처소를 마련하기로 하였다. 

이에대한 <橋山敎會沿革>의 증언이다. "於是에 禮拜堂을 建立키로 捐補金 四十원을 거두니 橋項里에 草家 十二間을 賣出하여 敎會를 設置하다"  예배당 건축기금 40원을 마련하는 과정이나, 새 예배당의 위치가 '교항'으로 정해지는 과정에서 김상임을 비롯한 교항 교인들의 입장이 크게 반영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로서 서사면의 첫 감리교 신앙공동체는 시루미에서 '다리목'을 건너 김상임의 집 뒤쪽 교항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러한 예배당 마련 과정을 스크랜튼은 1896년 연회 보고를 통해 자세히 밝히고 있다. "강화에서는 아주 흥미있는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올해 저는 로드와일러(Rothweiler) 양과 함께 그곳을 한번 방문하였습니다. 저는 방문하는 길에 성인 10명과 어린이 1명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 예배당으로 쓰려고 낡은 집을 한 채 구입했습니다.

 

저는 처음에 이런 의견에 강력하게 반대했습니다만 상황을 고려할 때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낡은집을] 사용에 적합하게 개축하는 데는 돈이 곱으로 들 것입니다. 그들은 이번 연회에서 이 문제를 논의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이후로 계속 도움이 필요한 지방 교회들이 나올 것인데 이에 대한 우리 입장을 어떻게 세워야 할지에 관해서 말입니다. 과연 우리는 그들을 도와주어야 할까요?"  강화 교인들이 헌금 40원으로 구입한 교항리 초가집은 수리비가 곱으로 들어야 할 낡은 집이었던 것이다.

 

스크랜튼은 기다렸다가 보다 건실한 예배당을 마련하도록 권면했으나 당장 집회 장소가 필요했던 강화 교인들은 자체 헌금을 모아 낡았지만 12칸짜리 초가집을 마련했던 것이다. 선교사들은 그 수리비 지원 여부를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강화 교인들은 선교사들의 지원에 큰 기대를 걸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애원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1898년의 존스 선교 보고에 '교항교회'교인들이 '예배당당을 마련하는 데 이미 120달러를 사용했다'고 보고하고 있는 것이라든지, 1899년 보고에 교항 교인들이'자립헌금으로 44달러 10센트를 모아 그중 5달러는 전도인 봉급으로 지급하고 있다'고 한 것들이 강화 교인들의 주체성과 자립에 바탕을 둔 선교 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강화 감리교회는 처음 출발부터 강한 자립의지를 보여 주었다. 그렇게 해서 설립된 교회는 선교사에 의존하는 교회가 아닌 자치교회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 이러한 자립과 자치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강화 교인들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복음 수용과 전파라는 자전의 역사가 있었다.

 

강화는 이러한 3자선교의 구체적 실천장이 되었으며, 이후 강화 감리교회 역사를 규정하는 특징의 하나가 되었다.  그리하여 1893년 8월 이전에 서사면 증산(시루미) 마을의 이승환 모자가 세례받고, 그곳으로 이명숙 권사가 전도인으로 파송되어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시작된 강화 첫 교회는, 1894년 이웃 교항마을의 '김초시', 김상임과 그 일가의 개종으로 큰 힘을 얻었고, 교인들의 자체 헌금 40원으로 교항에 12칸 초가를 구입하여 예배당을 삼게 됨으로서 완전한 교회의 틀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하여 증산 마을의 '여성과 아이들'을 중심한 민중 계층과 교항 마을의 '양반 지식인' 계층이 함께 어울리는 아름다운 교회를 이룩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설립된 교항교회는 이명숙, 이승환, 김상임, 백헬렌등 한국인 전도인들의 헌신적인 전도활동과 존스 목사 부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짧은 시일 안에 강력한 교회로 자리잡게 되었으니, 1897년 2월 10일자 <조선크리스도인회보>는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강화 서사면 교항동에 사년전브터 서국 목사 쫀스씨와 죠션 교우 리명슉씨가 비로소 하니님 도를 힘써 젼파하야 작년에는 회당을 셜립하고 쥬일마다 례배하는 교우가 백여명인데 그중에 세례밧은 사람이 남녀로쇼 병하여 삼십륙명이요 학습인이 아해까지 합팔십여명이라 쫀스 목사는 재작년에 고국에 도라가셔 아즉 나오지 아니하엿는대 강화 교우들이 그 목사 나오시기를 형뎨가치 기다린다더라"

출처 : Joyful의 뜰
글쓴이 : Joyful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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