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6년 전라도 병영 제초작업
1663년9월3일, 조선에서 일본으로
1666년 9월 하멜은 야음을 타서 읍성(邑城)을 탈출, 해변에 있는 배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도망하여 1668년 7월, 꿈에 그리던 고국 네덜란드로 귀국하였다
1666년 9월8일, 일본 연안에서 나가사끼로
1666년 일본으로 탈출후의 하멜의 흔적 설명서
하멜과 동료
하멜이 타고왔던 스페르웨르호(sperwer)와 범선의 구조
하멜 육필 보고서, 제주 하멜기념관
하멜 표류기, 1718년 하멜 저, 숭실대 박물관
하멜표류기는 네덜란드인 H.하멜이 썼다. 《난선제주도난파기(蘭船濟州島難破記)》라고도 한다. 한국의 사정을 유럽에 소개한 최초의 문헌으로서 1668년에 네델란드어 ·영역본(英譯本) ·불역본(佛譯本) ·독역본(獨譯本)이 발간되었고, 한국에서는 1971년 영국왕립협회 한국지부에서 G.레드야드의 영역본을 발간한 바 있으며, “진단학보” 1∼3권에 이병도(李丙燾)가 영 ·불역본에서 번역 ·전재하였다.
이 하멜표류기 육필 원고는 1920년 네덜란드 학자 회딩크에 의해 발견됐으며 그때까지 출간된 많은 하멜표류기의 오류를 바로잡는 역할을 했다. 내용을 약설하면, 하멜이 탄 네델란드 스페르웨르호(號)가 1653년(효종 4) 1월에 네덜란드를 출발하여 같은 해 6월 바타비아(Batavia), 7월 타이완[臺灣]에 이르고, 거기서 다시 일본의 나가사키[長崎]로 항해하던 중 폭풍우에 밀려 8월 중순 제주도 부근에서 파선을 당하였다.
선원 64명 중 28명은 익사하고, 하멜 이하 36명이 제주도에 표착하여 관원에게 체포된 경위와 1653년~1666년(현종 7)의 14년간을 여기저기 끌려다닌 생활, 즉 군역(軍役) ·감금 ·태형(笞刑) ·유형 ·구걸의 풍상을 겪으며 모든 사람과 접촉하고 남북 여러 곳의 풍속과 사정을 견문한 결과가 상세하게 적혀 있다. 특히 부록인 《조선국기(朝鮮國記)》에는 한국의 지리 ·풍토 ·산물 ·경치 ·군사 ·법속(法俗) ·교육 ·무역 등에 대하여 실제로 저자의 보고 들은 바가 기록되어 있다. 하멜과 그 일행은 제주도에 표착한 다음 해인 1654년 5월에 서울로 호송되었다가 2년 후에는 전라도 지방으로 분산 이송되었다. 1666년 9월 하멜 이하 8명은 야음을 타서 읍성(邑城)을 탈출, 해변에 있는 배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도망하여 1668년 7월에 귀국하였다.
이 책은 한국의 존재를 유럽인에게 뚜렷하게 알렸을 뿐 아니라, 당시 한국의 사회실정 ·풍속 ·생활 등을 아는 데에도 귀중한 사료가 된다. 내용 중 한국을 소개한 부분을 보면 “ 이 나라를 저희들은 코레, 그들은 조선이라 부르며 북위 34도 반에서 44도 사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남북의 길이는 대강 140~150 마일, 동서의 폭은 약 70~75 마일이며 그들은 나뭇잎 모양으로 자기들 국토를 그립니다. 그 나라 해안은 들쭉날쭉 돌출부가 많습니다. 국토는 여덞 개도( 道 )와 360개 도읍으로 나눠지고 그 밖에 산에는 성채, 해안에는 진( 鎭 )이 있습니다.
또 이 나라 바다는 암초와 얕은 곳이 많아 지리를 모르는 사람이 항해하기는 매우 위험합니다. 이 나라에는 인구가 많고 풍년일 때는 자급자족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는 쌀과 곡식 그리고 목화가 많이 재배되는바 특히 남부가 그렇습니다. 이 나라의 동남쪽에는 일본이 있는데, 제일 가까운 곳, 즉 부산에서 대판( 大阪, 현 오사카 )까지는 약 25~26 마일이고 그 중간에 쓰시마 즉 그들이 대마도( 對馬島 )라 부르는 섬이 있습니다. 이 섬은 처음에 조선에 속해 있었으나 그 옛날의 전쟁시 조약으로 일본땅이 되고 조선은 그 대신 제주도를 얻었다 합니다. 서쪽으로는 중국, 죽 남경만( 南京灣 )이 있고 북으로는 아주 높은 산으로 하여 중국의 제일 북쪽의 주( 州, 만주 )와 련결돼 있습니다. 북쪽만 제외하면 이 나라는 섬이라 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이 나라 동북쪽도 �은 바다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바다에서는 매년 화란( 네덜란드 ) 인이나 그 밖의 구라파( 유럽 ) 인들의 작살에 찔린 고래가 몇 마리씩 발견됩니다 "
하멜 [Hamel, Hendrik, ?~1692]
1651년 네델란드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 소속 선박의 포수(砲手)로바티비아(Batavia:현재의 자카르타)에 건너갔다가 서기(書記)로 승진, 1653년(효종 4) 상선 스페르웨르로 타이완을 거쳐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가는 도중 일행 36명과 함께 제주도에 표착(漂着)하였다. 제주목사(濟州牧使) 이원진(李元鎭)의 심문을 받고 이듬해 서울로 압송되어 훈련도감에 편입되었으며, 1657년 강진(康津)의 전라병영(全羅兵營), 1663년(현종 4) 여수(麗水)의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에 배치되어 잡역에 종사하다가 1666년(현종 7) 7명의 동료와 함께 탈출하여 일본을 거쳐 1668년 귀국하였다. 그해에 《난선제주도난파기(蘭船濟州島難破記) Relation du Naufrage d'un Vaisseau Hollandois》 및 부록 《조선국기 Description du Royaume de Corée》, 즉 《하멜표류기(漂流記)》로 알려진 기행문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그의 억류생활 14년간의 기록으로서 한국의 지리·풍속·정치 군사 교육·교역 등을 유럽에 소개한 최초의 문헌이다. 이 표류기는 VOC의 Sperwer 호가 조선의 남해안인 켈파르트(제주도)해안에서 좌초된 8월 16일부터 선원 중 8명이 Coree (조선)에서 탈출하여 일본 Nangaskij (나가사끼)에 도착하기 까지의 선원들의 운명과 조선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하멜표류기에 기록된 난파 당시 상황
평의회의 명령으로 우리는 1653년 6월 18일 스뻬르베르호를 (Sperwer) 타고 바따비아
(Batavia:자카르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있던 곳. 영어 식 발음은 바타비아)에서 포르모사 (Formosa:현재의 대만)로 항해를 하게 되 었다. 이 배에는 꼬르넬리스 께이사르(Cornelis Ceasar) 경이 함께 승선하 고 있었는데 포르모사 총독으로 있던 니꼴라스 페르뷔륵흐(Nicolaes Verburgh) 경을 대신하여 그곳 총독으로 부임하러 가는 길이었다. 순조로운 항해 후 우리는 7월 16일에 따이완(Taijoan:대만)의 정박지에 도착하여 께이사르 경과 화물들을 그곳에 내려놓았다. 7월 30일 우리는 따이완때만) 총독과 평의회의 명령으로 다시 야빤(Iapan:일본)으로 출항하게 되었다. 순조로운 항해가 되길 하나님께 기도 드리며 항해를 시작하였다. 7월 마지막 날, 날씨는 매우 좋앗지만 저녁 무렵부터 포르모사에서 폭풍이 불어 왔고 밤이 되자 날씨는 더욱더 거칠어졌다.
(8월 1일 새벽에 우리는 조그마한 섬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떻게 해서든 섬 뒤편에 닻을 내릴 만한 장소를 찾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결국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는 닻을내리는데 성공하였다. 그섬 바로 뒤편에 큰 암초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닻을 내린 상태로 있어야만 했으며, 바다는 더욱 더 거세어졌다. 이 섬은 선장이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배 뒤편에 있는 전망대의 창문을 통해 발견하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 섬에 난파되어 배를 잃을수 있었을 것이다. 너무 어두웠기 때문에 나중에서야 우리가 그 당시 화승총(Musquet) 사정거리 내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날씨가 개고 나서 보니 우리가 있는곳이 중국 해안 근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완전 무장을 한 중국 군대가 해안을 따라 행진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우리가 그곳에서 좌초되기를 기대하는것 같아 보였지만 전지 전능한 하나님의 도움으로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그날 태풍은 가라앉기는 커녕 더욱 심해졌으며,우리는 그 다음날까지 그곳에서 정박하였다. (중략.....)
8월 16일 아침녘, 몸을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은 다른 생존자가 있는지 찾아보기 위해 해안으로 갔다.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나타났다. 난파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36명이었으며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 중 대 부분은 부상 정도가 심하였다 우리는 난파선을 조사하다가 큰 갑판보 사이에 끼여 있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우리는 곧바로 그를 끄집어냈다. 그러나 그는 갑판보에 끼여 몸이 납작해져 있었기 때문에 3시간후 죽고 말았다. 15분도 채 되지 않은 시간에 그렇게 아름답던 배가 난파선으로 변하였고, 선원 64명 중 오로지 36명만이 살아 남았기 때문에 우리는 매우 낙담하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파도에 떠밀려온 시신이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 우리는 해안을 수색하였다.
우리는 바다에서 약 10~12바뎀 떨어진 곳에서 암스테르담 출신 선장인 레이니어 에흐베르스(Reijnier Egberse)가 한 팔을 머리 아래로 하고 죽어 있는 것을발견했다. 우리는 여기 저기에 죽어 흩어져 있는 다른 선원들 7명과 함께 그를 곧 바로 묻어 주었다. 우리는 또한 파도에 떠밀려온 생필품이 해안가에 있는지 살펴보았다. 왜냐하면 악천후로 인해 요리사가 요리를 할 수 없어 지난 2~3일 동안 우리는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겨우 밀가루 한봉지와 고기와 베이컨이 조금 들어 있는 상자 하나, 그리고 포도주 한 상자를 발견하였다. 포도주는 부상을 당한 사람들에게는 유익한 것이었다. 그순간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불이었다. 우리는 사람들을 전혀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곳이 무인도라고 생각 하였다. 정오 무렵 비바람이 잦아들었다. 우리는 모두 비를 피하기 위해 돛을 몇 개 이용하여 텐트를 만들었다.
8월 17일 우리는 맥이 빠진 채로 모여 앉아 사람들이 있는지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리는 일본사람이 나타나기를 바랐는데, 일본사람들이라면 우리를 다시 고향으로 보내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미 보트와 사장을 바치는 나무는 산산조각 나 있어 그것들로는 더 이상 항해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외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정오가 조금 안 되어, 텐트에서 대포 사정거리쯤 떨어진 곳에서 우리는 한 사람을 발견하였다. 우리는 그에게 손짓을 했지만 그는 우리를 보자마자 달아나 버렸다. 정오가 조금 지난 후, 우리가 머무는 텐트에서 화승총 사정거리만큼 떨어져 있는 곳에서 세 사람이 다가왔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하는 행동과 손짓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결국 우리들 중 한 명이 용기를 내어 그들에게 총을 겨누고 다가가 우리가 절실히 필요로 하던 불을 마침내 얻었다. 그들은 중국식 의상을 입고 있었지만 말총으로 만든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우리는 혹시 우리가 해적이나 추방된 중국인들이 거주하는 곳에 난파된 게 아닌지 무척 두려웠다. 저녁 무렵 무장한 사람들 100여 명이 텐트로 다가왔다. 그들은 우리 인원수를 세고 나더니 밤새도록 텐트 주위에서 우리를감시하였다.
8월 18일 아침 우리는 큰 텐트를 만드느라 바빴다. 정오 무렵 1000~2000천 명에 이르는 기병과 병사들이 우리 주위로 다가왔다. 그들은 텐트 주위에 군사들을 배치시켰다. 그런 후 서기, 일등 항해사, 이등 갑판장, 사환을 텐트에서 끌어내 화승총 사정거리에 떨어져 있던 지휘관에게 데려갔다. 그들 모두의 목에 쇠사슬을 감았는데, 그 쇠사슬 아래엔 큰 종이 매달려 있었다. 마치 네덜란드에서 양의 목에 매다는 종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들의 얼굴이 바닥을 향한 채 엎드린 자세로 사령관 앞에 내팽개쳐졌다. 그러자 병사들은 청천벽력 같은 큰 소리를 내질렀다. 텐트 주위와 안에 남아 있던 우리 동료들은 그 장면과 소리를 듣고선 서로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상급 선원들이 우리보다 먼저 끌려갔으니 우리도 곧 끌려갈 것이다.' 그들은 잠시 동안 그렇게 있은후, 우리 선원들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했다. 지휘관은 우리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였으나 우리는 그의 말을 알아 들을수가 없었다. 우리는 손짓 발짓을 해가며 야빤(일본)에 있는 낭가사께이(나가사키)로 가고 싶다고 이야기하려 하였다. 그러나 모든것이 허사였다. 왜냐하면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그들은 야빤(일본)을 예나리(Ieenare)혹은 이어뽕(Ierpon)으로 불렀기 때문에 야빤이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지휘관은 우리에게 술 한잔 씩을 따르게 하고선 우리를 다시 텐트로 되돌려 보냈다. 우리를 호위하던 군사들은 우리 텐트에 먹을 것이 있는지 확인하려 했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거라곤 위에서 언급한 고기와 베이컨 뿐이라는 것을 알고 곧장 이것을 지휘관에게 보고 하였다. 한 시간쯤 지난 후, 그들은 우리에게 쌀죽을 조금 가져다 주었다. 우리가 너무 굶주렸기 때문에 먹을 것을 갑자기 많이 주면 무슨 탈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정오가 지나자 그들은 각각 손에 밧줄을 가지고 나타났고 우리는 그것을 보고 겁에 질렸다. 왜냐하면 우리를 밧줄로 단단히 묶어 죽이려고 왔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해안가에서 여전히 쓸 만한 것을 건져 올리기 위해 큰 소리로 떠들어 대면서 난파선 쪽으로 걸어갔다. 저녁 무렵 다시 그들은 우리가 먹을 밥을 조금 가져다 주었다. 그날 오후 항해사는 위도를 측정하여 우리가 북위 33도 32분에 위치한 �빠에르츠(제주)에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하멜의 조선 표착에서 탈출까지의 연도별 기록
▒ 1653년 8월 16일 제주 표착
▒ 1653년 8월 21일 대정현 관아로 이송
▒ 1653년 8월 22일 제주목 관아로 이송
▒ 1653년 10월29일박연(벨테브레)와 면담
▒ 1654년 6월초 선박이용 제주항 출발
▒ 1654년 6월26일 한양도착
▒ 1656년 3월초 전라병영(강진)으로 이송
▒ 1663년 2월 생존자 22명을 여수.남원,순천으로 분산
▒ 1666년 9월3일 탈출.9월13일 일본 나카사키 도착
▒ 1667년 12월18일 나카사키 출발
▒ 1668년 7월 20일 네델란드 암스테르담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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