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제주군 안덕면 사계리에 위치한 하멜 기념비
하멜 기념비 뒷면
해변에 위치한 하멜호 (남제주군 안덕면 사계리)
하멜 기념비 아래 해변가에 위치한 하멜 기념전시관(하멜 호)
헨드릭 하멜의 제주 표착 350주년 기념일인 8월16일 당시 하멜 일행이 타고 왔던 상선이 남제주군 안덕면 사계리 용머리 해안가에 ‘바타비아호’를 모델로 재현됐다. 길이 36m, 폭 8m, 높이 11m(돛대높이 32m)인 하멜 상선은 5층 구조이며, 2층에는 하멜 관련자료와 하멜표류 영상, 조선에서 13년간 생활 모습 등을 보여주는 하멜전시실이 꾸며져있다
하멜호(하멜 기념관)
하멜기념관 내부에 전시된 전시물
하멜의 모습
하멜에 대한 설명
1653년 7월30일, 하멜일행 제주도 표착
1653년8월16일, 제주도에 난파한 스페르웨르호
1653년 8월 16일 하멜과 일행 64명을 태우고 타이완에서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던 범선 스페르웨르호가 풍랑을 만나 난파, 제주도에 표류하게 된다. 이때 일행 64명중 28명이 사망하고 36명만 살아남는다. 이들은 이때부터 낯선 조선 땅에서 무려 13년이라는 세월을 보내게 된다
1653년 8월21일, 난파선 도둑에 대한 처벌
1653년 8월 21일 제주 관헌들은 하멜일행이 보는 앞에서 난파된 스페르웨르호의 물건을 훔친 조선사람에 대한 형벌을 집행한다. 관헌들은 하멜 일행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병사들을 배치시켜 이들을 보호하였다. 다음날 하멜 일행을 제주 목관으로 이동, 제주 목사 이원진을 대면하게 되었으며 그는 광해군이 유배되었던 집에 하멜 일행의 거처를 마련해준다
1654년 5월 , 탈출에 실패한 하멜 일행
1654년 5월 하멜 일행중 6명이 어선을 훔쳐 탈출을 시도 하지만 관헌들에 붙들려 실패하고 만다. 무모했던 첫탈출 시도는 수포로 돌아 가 버리고 이때부터 하멜 일행에 대한 제주 관헌들의 감시가 심해진다. 탈출을 시도했던 6명은 형벌로 곤장 25대씩을 맞았으며, 그중 한명은 후유증으로 인해 사망하게 된다.
1654년6월, 서울로 압송
1654년 6월 하멜 일행은 당시 조선의 국왕이었던 현종을 알현하기 위해 서울(한양)로 이송된다. 일행은 4척의 배에 태워졌고 두다리와 한쪽 팔은 배에 묶여 갔다고 한다. 이는 하멜 일행이 배를 탈취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는데, 훗날 하멜은 보고서에서 실제로 묶이지만 않았더라면 그러했을 것이라고 서술하였다
1654년 6월26일, 효종을 알현하는 하멜
1654년 6월26일 하멜일행은 한양(서울)로 압송되어와 조선의 국왕 효종을 알현한다, 이들은 일본으로 보내줄것을 간청했지만 효종은 당시 추진중이던 북벌계획에 대한 보안문제와 일본에서 불고있던 기독교에 대한 탄압을 염려해 "외국인은 국외로 보내는 것은 이 나라의 관습이 아니므로 여기서 살아야 하며 대신 조선이 너희들을 부양해 주겠다고" 답했다
하멜이 표류해왔을 때 조선 관리들과 어떻게 의사소통을 했을까. 통역자로 2년간 같이 지내며 그에게 조선의 말과 풍속을 가르쳐준 사람은 박연(朴淵.1595-?)이었다. 역시 네덜란드 출신인 그는 하멜보다 앞서 1628년에 일본으로 가던 중 제주에 표착했다가 귀화해 조선 여자와 결혼, 남매를 두면서 완전히 이 땅에 정착했다. 박연의 네덜란드 이름은 벨테브레였다. 박연이 조선 땅에서 수행한 공로는 매우 크다. 훈련도감에서 근무한 박연은 병자호란 때 출전하는가 하면 명나라에서 밀수입한 홍이포의 제작법과 조작법을 가르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당시 효종은 북벌정책을 강력히 추진하면서 장수 이완에게 실무책임을 맡겼고, 박연으로 하여금 그를 보조하게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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