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참배와 서문교회
1937년 1월부터 신사참배의 위협이 본격화되자 서문밖교회는 신흥과 기전학교의 앞날을 위하여 특별기도를 하였다. 1월 13일(수요일밤 기도회)에는 신흥학교 교사 대표 김가전 목사의 인도로 간절한 기원이 있었고, 교회 제직 몇 사람의 대표기도가 있었다.
1937년 5월 5일(수요기도회)에는 신흥 기독청년회 주관으로 순회 특별기도회를 서문밖예배당에서 드렸는데 김재우 군의 사회, 회장 이강문 군의 기도로 이루어졌으며 신흥학교 학생인 김종신 군과 심상영 군의 신앙간증이 있었다. 이것이 신흥학교 기독청년회의 마지막 순회 예배였다. 신사참배 강요의 마수에 걸려 신흥과 기전 두 학교는 폐교가 확정되었다.
이에 1937년 9월 15일 수요기도회 날, 서문밖교회에 출석하던 신흥과 기전의 학생들은 어머니의 품과 같은, 모교회인 서문밖교회의 사랑의 정을 못잊어 폐교 송별 기념식을 교우들과 함께 가졌다. 일본은 이 날에도 발악적이고 의도적인 방공연습을 실시하여 등화관제시켰다. 그렇지만 행사는 계속되었고 먼저 기전학교 학생 대표가 폐교 송별사를 울면서 피력하였다. 다음 신흥학교 학생 대표도 통분함을 가까스로 억제하며 폐교 송별사를 울부짖으며 낭독했다.
서문밖 교우들 가운데 울지 않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고 예배당 안은 너무나 침통하고 숙연하였다. 서문밖교회에 출석하던 기전과 신흥학교 학생들이 성금을 모아 청동제 화병 한 쌍과 화분대16) 두 대를 마련하여 교회에 바쳤다. 그 밤에 신흥의 린턴 교장 부인 인사례 여사가 기념품으로 화병을 교회에 바치는 순서도 함께 가졌다.
서문교회
1937년 9월 15일 밤 서문밖교회는 신흥과 기전학교 학생들의 송별예배를 드리고, 22일부터 4일간은 신흥학교 학생들을 고창으로 떠나보내고 전주 시내로 전학가는 기전학교 학생들은 개별적으로 흩어졌다.
9월 26일, 주일이 되었는데 교회에는 빈자리가 너무 많아서 처절할 정도였다. 교회 제직 중 김교문 안수집사의 가정을 위시하여 김태훈·최계남·박준영·김병수 선생과 그 가족의 자리가 비었고 신흥과 기전 학생들의 자리가 집단적으로 비어 있었다. 그날 주일 예배일지의 출석 상황 난에는 ‘신흥·기전학생 전무(全無)’라고 간명하게 기록되었다. 공석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주일학교 부서에서 신흥학교 학생 교사의 궐석이 확연하였다. 처량한 공백이었다. 모든 교인들은 침묵으로 처절함을 표현할 뿐이었다. 그 자리를 메워야 할 각오를 무언으로 다짐하는 눈빛들뿐이었다. 너무나 엄청난 사건이기에 새삼스럽게 설명이나 강조가 필요치 않았다. 오직 먼저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하나님께서는 들어주실 것을 믿고 다시 힘을 내어 일어설 것을 다짐할 뿐이었다. 군국주의 침략 야욕에 기초한 일본의 기독교 억압 정책이 점차 심화되어 가고 있었으나, 교인들은 어려움을 이겨갔다. 교인들은 예배당 신축으로 인한 부채를 힘써 갚아가며 교회 내 각 부서에서 새교인과 직원의 확보에 힘쓰고 주일학교 교육에도 열심을 내었다.
1937년 5월 4일부터 열렸던 제31회 전북노회의 전주지방 시찰위원회 보고 중 서문밖교회의 상황을 보면, 작년(1936년) 8월 15일 미증유의 수재를 당하여 교우 중 가옥을 유실당하고 말로 할 수 없는 참상을 겪는 중에도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로 생명을 잃은 교인은 없었다. 교인 중에는 매일 새벽마다 예배당에 나와 기도하는 사람이 있으며, 성경연구를 열심으로 하여 신령상 많은 진보가 있었다. 종전에 예배당 안에서 경영하였던 숭덕학교는 차츰 발전되어 특지가를 얻어 시내 노송동으로 이전하여 교사를 새로 지었고 박성근 씨와 설립자 배은희 목사의 협의로 서문밖교회에서 분리, 독자적으로 운영하게 되었다. 전주유치원은 여전히 교회 직영 사업으로 경영중이었다.
1937년 정초에는 부인조력회에서 예년과 같이 여자사경회를 개최하였고, 주일학교와 면려청년회도 여전히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교회는 전년 수재로 인하여 무너진 전도실 건물을 다시 건축하기로 계획하였으며 성인 교육을 위하여 한글 보급운동을 교회 내적으로 실시하여 글 모르던 교인들이 성경을 스스로 읽을 수 있도록 힘썼다.
1937년 11월 3일(수요일)에는 그동안 배은희 목사의 사양으로 미루었던 전별식을 하기로 하였다. 이때는 헌당식(1937년 10월 31일)도 마친 뒤였으므로 기도회 후 이미 제직회에서 선출하여 맡겼던 위원들17)이 준비한 기념품을 드림으로써 전별의 예를 갖추었다. 이날밤 예배 때 설교는 조하퍼 선교사18)가 담당하였는데 그 당시 시국과 관련된 설교로 많은 감명을 주었다.
그 이듬해 6월 7일부터 열린 제32회 전북노회에 제출한 전주 시찰위원회의 보고를 보면, 서문밖교회는 신흥·기전 두 학교의 폐교로 큰 타격을 받을 것으로 염려하였으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교회는 안전하게 유지되고 있다고 하였다. 또 그 동안 마음에 걸려있던 예배당 신축 부채가 완전히 정리되고 1937년 10월 31일에 헌당식을 거행함으로써 교인들은 이제 가슴을 펼 수 있었다고 되어 있다.
교회는 다시 힘을 내어 400원의 예산으로 교회 관리원(사찰) 주택 10여 평을 신축하였고, 교인들이 마음을 모아 1937년 2월 28일부터 1938년 5월 24일 어간에 순차적으로 장로 1명(안백선)과 안수집사 5명(김교문·박보석·오공여·김진태·김형술)을 선출하였고 각기 날짜를 정하여 임직하여 교회의 일꾼을 더욱 보강하였다.
1938년을 맞아 서리집사를 증원 임명하였다. 신흥과 기전 두 학교가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폐교된 지 9개월도 못되어, 1938년 6월 8일 시작된 제32회 전북노회는 각 교회의 목사 27명 중 24명, 선교사 7명 중 4명, 장로총대 103명 중 97명으로, 모두 125명이 회집하여 신사참배를 결의하였다.
1971-74년의 서문교회, 평면 100평, 연건평 320평에 지하실, 지상3층의 교육관을 건축하였다.
1971-74년의 서문교회
1981- 현재의 서문교회, 평면 300평, 연건평 705평, 지하1층 지상2층을 3년간 건축하고 1983년 90주년 교회로 봉헌하였다.
현재 전주서문교회와 100주년 기념관, 1993년 창립 100주년에 맞추어 연건평 705평, 지하1층 지상5층의 기념관 건축하였다.
전라도 선교 25주년 기념 책자
옛 종각 사진
제직회록
당회록
전시물
예수셩교젼서 복사본
전시물
전시물
방애인 선생 (앞줄 좌측 1번째) 자료제공 배보석 장로
전주 YWCA 초창기 인물들(1929, 전주)인 방애인, 강정숙, 김갑수, 진숙희, 진송자, 김영신 등
방애인 소전, 방애인 선생은 고아들을 위해 산 서문교회의 자랑스런 평신도이다.
방애인 소전 책 표지, 2001 복간본 재판
서문교회의 자랑스런 평신도 이거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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