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테크/성지순례이야기

[스크랩] 전주 서문교회, 신흥학교, 전주예수병원 1.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2. 1. 22:35

전주서문교회


1897년 호남 최초로 미국 남장로교에서 세운교회이다. 1997년 창립 100주년을 맞아 기념관을 건축하였다. 2007년 현재 창립 114주년을 맞아 기념예배와 행사를 가졌다. 전주서문교회는 1893년 정해원 씨가 은송리에 초가1동 예배당을 마련하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1897년 7월 처음으로 5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이로써 ‘전주 교회(교회 명칭)’가 한국인 세례 교인이 있는 교회로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또한 8월 1일 주일에는 전주 교회에서 처음으로 성찬 예식을 레이널즈 목사의 집례로 거행했다. 2007년 현재 114주년을 맞는 서문교회는 2000여명이 출석하는 교회이며 해외 후원 선교사 22명, 후원 미자립교회 17개, 기관 후원단체 22개, 일반 후원단체 12개 등 전도와 구제에 온 힘을 다하는 교회가 되었다.

  

전주 서문교회

  

전주 서문교회

 

100주년기념관 

1993년 창립100주년기념비(1893- 19993) 

교회내부

 

주보

 

창립 114주년(2007년) 기념예배 팜프렛

 

종각모습

종각과 창립50주년기념비

 

창립50주년기념비

종각

종각연혁 

 

<전주서문교회 역사자료실>

 

전시실

 

전시실

 

서문교회 역대교역자

 

미국 남장로회 한국지회 초기 7인 선발대 

 

초기 장로 교회의 각파(미국 북장로회, 미국 남장로회,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 캐나다 장로회) 선교사들이 입국해 각 지역에서 교회를 설립하자 이들은 장로회의 공통된 방식으로 다스려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각파의 선교사들이 모여서 선교사 공의회(The Council of Missions Holding the Presbyterian Form of Government)를 조직하였다. 이 공의회는 치리권 행사가 별로 없었고 토의와 권고와 보고·친목 등을 다루었으며 앞으로 정식으로 조직될 치리회의 예비적 공회일 뿐이었다.  1893년 2월 선교구역 분할 협정에 의해 미 남장로회 선교 구역으로 확정되면서 선교가 시작된 이 지역은 그 해 3월 선교사 레이놀즈(W.D.Reynolds)와 조사 정해원이 선교부의 파송을 받고 활동을 시작했으며, 1894년에는 데이트 남매(L.B.Tate와 M.S.Tate)가 파송되어 상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혁명과 청일전쟁으로 선교활동은 중단되었으며, 1895년 이후부터 다시 선교에 전념하여 1907년에 이르러서는 전주 교회가 전주 시내 남문 교회를 분립시키는 한편 1911년 10월에는 전라노회가 전주 서문밖 교회당에서 조직되었다. 한편 전주지역 선교활동은 병원선교로 큰 성과를 거두었으며, 특히 1902년 잉골드(M.D.Ingold)선교사가 세운 여성을 위한 진료소는 현재 전주 예수병원 전신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진료의 혜택을 주었다. 1890년대의 호남 선교과정을 지나서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반 선교업무와 병원 설립, 의료선교, 학교교육을 통한 선교사업이 차츰 구체화되면서 전도를 받고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점점 증가하게 되었다. 당시 전주와 군산에 자리를 정하고 차분히 활동하던 선교사로는 테이트 남매(崔義德과 玖德) 선교사와 레이널즈(李訥瑞) 선교사 내외, 약방을 설치하고 의료선교사역을 겸했던 해리슨(河緯廉) 선교사, 잉골드 여의사 등의 활약이 현저했다. 목포를 거쳐서 이곳 전주로 파송되어 온 매큐첸(Luther Oliver McCutchen, 馬路德) 선교사와 나중에 그의 부인이 된 요세핀(Mrs L.O.Josephine Hounsell) 여선교사, 군산에 파송되어 온 불 선교사와 그의 부인이 된 앨비 선교사 등이 일반선교와 학원선교 또는 의료선교 등을 담당했다.

미국 남장로회 한국지회 초기 7인 선발대  

 


                마로덕 선교사,      마로독 선교사의 부인 요세핀 여사,           전킨 선교사

 

특히 선교 초기, 군산에 살면서 전도선으로 군산 연해 지역과 섬들을 순회하며 전도했던 드루 의사와 더불어 열정적으로 군산지역을 개척했던 전킨(全緯廉) 선교사는 드루 선교사가 1901년 귀국한 다음에도 군산·옥구·김제 등지를 배편을 통해 또는 말을 타고 다니면서 전도 활동에 열중했다. 전킨 선교사는 군산 시내에서 3㎞나 떨어져 있는 궁말(현 구암동)의 습지대에 살면서 잦은 풍토병으로 고생하다 어린 세 아들(Sidney, Francis, George)을 병으로 인해 잃고 말았다. 그리고 자신도 건강이 쇠약해졌다. 선교사회에서는 그의 사역지를 기후가 나은 전주로 옮기게 했고 활동 반경을 20리 이내로 제한했다. 1904년부터 전킨 선교사가 전주에 옮겨와서 전주교회를 담임했을 때 남장로회 파송 한국 선교사 중 리더격인 레이널즈 선교사는 그의 능력과 인격이 뛰어나 다른 선교회인 북장로회 선교회의 청빙을 받아 서울의 다른 곳에 가서 목회를 담당하기도 했다.

초기 선교사

 

초기 선교사

 

전킨 선교사 부부

 

전킨 선교사 가족 

 

<서문교회 변천사>

 

서문교회 최초의 건물로 추정

 

선교사들 중 가장 먼저 호남 땅을 밟은 선교사는 호주 장로회에서 파송을 받고 온 데이비스(J. Henry Davis) 목사였다. 그는 1889년 서울에서 선교지인 부산으로 향해 가던 도중에 충청도와 전라도를 경유하였다. 1892년 말에는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인 레이널즈와 미국의 북장로회 선교사인 마펫이 선교 지역 책정 문제를 앞에 두고 호남의 초입인 충남 공주 지방까지 말을 타고 답사한 일이 있었다. 1893년 장로회 미션 공의회에서는 예양 협정(Commity Agreements)에 의해 선교 지역을 배정했는 데, 호남 지방인 충청도와 전라도는 미국 남장로회 선교회의 선교 지역으로 지정(指定)되었다. 그 당시 호남에는 동학교도들의 움직임으로 민심이 흉흉했고 선교사들은 민심의 동향과 지역 사정에 밝지 못했다. 이에 미국 공사관의 만류로 선교사들이 나서기보다는 믿을 수 있는 한국인을 선임해 파송하기로 했다. 그래서 레이널즈 선교사의 어학 선생이면서 자신들의 일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던 정해원(鄭海元)을 선정했다. 전주에 도착한 정해원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준비 차 온 사람임을 밝히며 부근의 냇가에 있는 저잣거리에 돌아 다니며 민심을 살피는 일과 장터 전도를 하였다. 그는 주일이 되면 자기의 은송리 집에서 그간 사귀어 온 사람들에게 복음의 도리를 전하고 예배드리며 전주에 처음으로 온 신자답게 생활했다. 1897년에 예수를 구주로 확실히 믿기로 작정하고 세례 받기를 원하는 남자 3명과 여자 4명을 문답한 결과, 남자 2명과 여자 3명이 문답에 합격하였다. 그래서 그 해 7월 17일 주일에 레이널즈 목사의 집례로 남자 2명과 여자 3명(김내윤, 김창국과 여자 강씨, 임씨, 김씨)이 세례를 받았다. 이로써 ‘전주 교회(교회 명칭)’가 한국인 세례 교인이 있는 교회로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또한 8월 1일 주일에는 전주 교회에서 처음으로 성찬 예식을 레이널즈 목사의 집례로 거행했다. 세례 문답에는 합격했으나 시골에서 멀리 사는 관계로 7월 17일 세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던 전씨는 다음 주일에 교회에 나와서 세례를 받고 성찬식에도 참예했다. 그 날 세례식에서는 7월 17일 세례를 받은 바 있는 김씨가 두 살 되는 딸 보영(寶榮)을 안고 와서 자신의 신앙 고백에 따라 유아 세례를 받으므로 그 아이는 전주에서 처음으로 유아 세례를 받은 교인이 되었다.

 

호남 최초의 예배당인 전주서문교회와 전킨선교사

 

이 무렵(1897년 9월) 전주 선교부는 많이 발전하여, 9월 5일 주일에는 교회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찾아 왔다. 집회시 예배 인도자 레이널즈는 선교사들 중에 우리 나라 말을 가장 잘 했고 유식한 말로 설교하였다. 이 날 예배 후에는 감동을 받은 교인들이 자진해 예배당 개수(改修)를 위해 특별 연보(헌금) 할 것을 작정했으므로 9월 7일 화요일부터 해리슨이 살고 있으며 예배 처소로 겸하고 있는 집을 앞으로는 예배당으로 전용할 수 있게 방을 넓히고 인원을 많이 수용하도록 개수했다. 이에 소요되는 경비를 교인들이 힘써 연보하여 충당하였다. 수리를 마친 9월 19일 주일에는 개수된 예배당에 모여서 기쁨으로 감사 예배를 드렸다. 이때부터 이 건물은 전주 교회 예배당으로 불렸다. 교인은 여자들 외에 남자가 20명 가량이 출석했다. 

 

1890년대 서문교회의 종각을 짓는 모습

 

1905년의 서문교회, 기지 780평 건평 50평의 벽돌 기와지붕 예배당   

 

전주 선교부는 1894년 1월 테이트 목사와 그 누이동생 매티 선교사가 서울에서 전주에 정착할 생각으로 내려와 전주 은송리에 자리를 잡으면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동학 혁명으로 인해 서울로 일시 철수했다. 1895년 3월 레이널즈와 테이트 선교사는 육로로 다시 전주에 와서 상당기간(3∼5월)을 체류하면서 민심을 파악하고 주택을 건축하며 선교 활동 재개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초기 세례 받기를 원했던 신자들과 교회를 찾아오던 초신자들은 거의 다 흩어져서 찾을 길이 없어졌고, 선교는 완전히 새롭게 시작이 되어야 했다. 두 선교사는 테이트 목사의 집 사랑방에서 다시금 집회를 시작했다. 5월에 레이널즈는 테이트와 3월에 함께 왔던 일행을 전주에서 계속 일하도록 남겨 두고 자기는 육로로 다시 서울에 올라갔다. 전주에서 집 짓는 일을 마무리하던 테이트도 서울에 올라가 6월 선교사 회의에 참석했다. 1895년 10월 서울에서 친일 세력과 일본의 간계에 의해 민비가 시해되자 지방에 있던 선교사들 중에는 시국에 불안을 느끼고 서둘러서 모여들기도 했다. 전킨과 드루도 선편으로 서울에 올라왔다가 정국이 수습되는 것을 보고 11월에 다시 군산으로 돌아가서 거주할 주택과 선교 기지를 물색하며 본격적인 군산 선교를 진행했다. 전주에서 꿋꿋하게 일하던 테이트는 12월 일단 서울에 올라가 일 주간 준비를 한 후 앞으로 누이동생 매티와 함께 전주에서 장기간 선교 사업을 하기 위해 제물포에서 선편으로 출항해서 군산에 거쳐 1896년 1월초에 전주에 도착했다. 그래서 1월 5일 주일에는 전주 은송리 처소에서 감격적인 새해 첫 예배를 드렸다. 테이트는 집회 때마다 성경 강설과 교육을 담당했다. 집회 때는 많은 질문자들도 있었지만, 모여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 살이에 어떠한 이득과 정치적인 안전 보장의 기대나 경제상의 도움 등을 바라고 있었다. 매티는 모여드는 여자들을 위해 복음의 기본 도리를 가르치는 사역을 담당하는 한편 몸이 아픈 사람들에게 간단한 의료 시술과 위생에 관한 기초 상식을 가르치기도 했다. 남자들은 테이트의 사랑방에서 모이고 여자들은 매티의 방에서 각각 따로 모였다. 뒤를 이어 군산, 목포, 광주, 순천에도 선교부가 설치되었다. 전주 선교부를 중심으로 하여 호남 지역 선교부들은 병원 설립, 의료 선교 사업 전개 및 학원을 통한 교육 선교 사업에 힘을 쏟아 군산 구암 병원, 전주 병원, 목포 병원, 광주 병원, 순천 병원, 광주 나병원 등을 설립하고, 신흥 학교, 기전 여학교, 정명(貞明) 여학교, 영흥(永興) 학교, 숭일(崇一) 학교, 수피아(須彼亞) 여학교, 영명(永明) 학교, 메리 볼딘 여학교 등의 학교 설립을 통하여 선교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1904년의 선교 보고서에 의하면, 전주·군산·목포 등 세 선교부 내에 각기 남·여 중학교가 하나 씩 설립되었고 그 학생 수는 126명이었다. 그러나 3년이 경과한 1907년에는 인가받은 정식 학교가 44개교였고, 학생 수는 497명이며, 3년이 경과한 1910년에는 64개교에 1,740명의 학생 수를 보이고 있다.

1905년 예배당

 

 1909년 서문교회 종각에 매달을 종의 모습.(예수병원 제공)

 

1911년 ㄱ자 예배당으로 증축, 건평 89평으로 증축

 

1920년대 말 전주 북문의 모습 

1935년도 서문교회, 평면 115평, 연건평 230평의 2층 벽돌집 예배당  

출처 : Joyful의 뜰
글쓴이 : Joyful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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