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의 순교 역사 공주는 옛부터 많은 사람들이 피를 뿌린 곳이다. 후백제를 일으키기 위하여 수많은 의사들이 일어나서 웅진(곰나루 부근)에서 싸우다가 발단하는 수만 명이 우금고개를 넘어 공주로 들어오다가 참패를 당하여 잔인하게 죽음을 당했다. 동학군은 파죽지세로 서울까지 밀고 올라갈 기세였으나 무참히도 패하였다. 국가적인 면에서 의로운 피를 흘렸을 뿐 아니라 한국 천주교회의 200년 역사에서 '열심한 천주교인들과 순교자들이' 참된 신앙과 하느님의 은총을 증거하고 영광스럽게 승리하기 위하여 줄곧 고귀한 피를 흘렸기에 전세계 신앙인들에게 순교성지로 부각되기에 손색이 없다. 공주는 한국 천주교 순교사에서 그 시초부터 마지막까지 장엄한 신앙고백의 피를 받았다. 박해의 시초가 되는 1791년에 순교한 권상연은 공주에 이주해서 살다가 전주에서 순교했으며, 함께 순교한 운지중의 딸은 공주 숯방이의 송씨집안으로 시집와 여기에서도 천주교를 믿었다. 충청도의 사도라고 하는 이단원(존창)이 1784년 권일신으로부터 영세 입교한 후 내포지방에 전교할 때에 공주지역에도 전교하였다. 전교가 시작된 지 불과 10여년 밖에 되지 않은 해인 1797년에 천주교 말살령이 내려졌다. 종교의 자유를 얻은 후에도 마지막으로 신앙 때문에 피를 흘린 조 모이세 신부의 순교는 공주 장깃대에서였다. 이단원(존창)은 권일신으로부터 영세 입교하여 고향에 돌아가 전교하라는 권면을 받은후, 집안과 동네에 전교하였다. 그리고 내포의 여러지방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매료하는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했다. 공주에서도 전교활동을 한것으로 전해진다. 가성직 시대에 신부로 봉직하던 그는 금잔으로 미사를 드리기도 했다. 장차 그의 집안에서 한국의 최초와 두번때 사제가 나오게 된다. 저 유명한 내포의 천주교회는 그로부터 기초가 이룩되었다. 이 지방의 천주교인의 수는 현저하게 증가하였다. 이제 양반과 선비의 집안뿐이 아니라 농부, 노동자, 노비, 가난한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게 되었다. 충청도는 서울, 경기, 호남지방보다도 교세가 우세하였고, 교우의 수도 제일 많았다. 정부에서 이 단원을 공주로 보내어 그곳 민중들 앞에서 처형하게 했던 것은 이를 경계하고자 한 것이다. 1797년 충청관찰사 한용화는 도내의 모든 수령들에게 천주교인들을 체포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천주교를 없애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난폭한 조치로 많은 천주교인들이 체포되었다. 이 때의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다른 지역보다 일찍 순교의 영광을 받아안게 되었고, 많은 분들이 용맹한 순교담을 남기게 되었다. 이존창의 전교로 신자가 되었던 이들은 1801년 신유대교란과 충청도에서 자주 일어난 사사로운 박해 때 경상도로 피난하여 영남교회를 세우고, 대구감영에서 순교의 효시를 이루게 되었다. 전세계 교회역사에서는 한양의 인류 선비들이 천주교를 스스로 연구하여 신앙으로 받아들인 것을 영광스러운 일이라 칭송한다. 그러나 제사문제로 서울의 교회 창립자들이 반대와 박해에 부딪쳐 일보 뒤로 주춤할 때에도 충청도의 순박한 교우들은 여기에 굴하지 않고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황새바위 성지 역사 공주 황새바위는 한국 천주교 역사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 증언지 중 하나로 그 의미가 크다. 공주에는 일찍부터 충청남북도를 관할하는 관찰사와 지금의 시에 해당하는 감영이 있었다. 이곳 공주 감영에서는 각 지방에서 잡혀 숱한 심문과 무서운 고문을 당하고도 배교하기를 거절하였을 때에는 감사의 명에 의해 황새바위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는데, 충청도 각 지방뿐 아니라 타 지역으로부터 끌려와 이곳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교우들도 많았다. 충남의 홍주, 예산, 해미, 덕산, 신창, 홍산, 연산, 청양, 공주, 이인, 탄천과 충북의 청주, 진천, 연풍, 옥천, 전라도 전주, 광주, 경기도 죽산, 포천, 그리고 한양의 교우들이 공주에 와서 순교 하였다. 이곳 황새바위에서 천주학 죄인들을 공개 처형할 때에는 맞은편 산 위에서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마치 병풍을 친 모양으로 둘러서서 구경을 하였다고 한다. 처단한 죄인들의 머리는 나무위에 오랫동안 매달아 놓아 사람들에게 천주학을 경계하게 하였으며, 그들의 시체는 강도, 절도범들의 시체와 섞여 어느 것이 순교자의 것인지 구별하기조차 어려웠다. 황새바위 앞을 흐르는 제민천은 지금처럼 둑이 쌓여 있기 전에는 지금보다 훨씬 넓었는데, 홍수로 범람할 때에는 순교자들의 피로 빨갛게 물들어 금강으로 흘렀다고 한다. 순교자들은 참수, 교수, 돌로 맞아 죽음, 옥사, 아사, 매질 등으로 죽어 갔는데, 교회사가 달레(Dallet,Claude Charles)는 공주 감영에서 있었던 교수형에 대해 "옥의 벽에는 위에서부터 한 자 높이 되는 곳에 구멍이 뚫려 있다. 매듭으로 된 밧줄 고리를 죄수 목에 씌우고 밧줄 끝을 벽의 구멍으로 내려보낸다. 그리고 옥 안에서 신호를 하면 밖에서 사형 집행인이 밧줄을 힘껏 잡아당긴다. 희생자가 죽으면 시체를 밖으로 끌어내어 장례도 지내지 않고 밭에 내버려 둔다." 고 묘사하고 있다. 때로는 구멍이 있는 형구돌이 사용되었는데 구멍에 줄을 넣고 죄수의 목에 얽어맨 다음 형구돌의 반대편에서 줄을 잡아 당겨 죽였다.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공주에서도 병인박해 당시에 가장 많은 순교자들이 나왔고, 조정의 박해령이 멎은 뒤에도 지방에서는 아직 그 여파가 남아서 피흘림이 계속되었다. 이렇게 공주는 순교 역사의 시초부터 기록상 마지막으로 순교자를 낸 1879년까지 100여년 동안 줄곧 피를 흘리며 신앙을 고백했던 참으로 거룩한 땅이다. 달레는 "공주 옥에서 순교한 이들의 이름과 숫자를 다 알 수 없었다." 고 말한다. 공주 감영록이 세상에 공개되기 전까지는 우리 순교자들의 이름을 알 수 없었다. 공주에서의 순교자들은 당시 '사학의 괴수'로 알려져 있던 내포의 사도 이존창(루도비꼬)과 10여명의 회장들을 비롯해 연령, 성별, 신분에 관계없이 무수히 많다. 가장 나이 어린 순교자는 김춘겸의 딸로 당시 불과 10살 밖에 안 되었고, 최연장자는 남상교(아우구스티노)로 당시 84세였다. 20세 미만의 순교자도 20명이나 되었으며, 양반, 중인, 농민, 노비 등 그 신분계층도 다양했다. 특히 어린이와 부녀자들까지도 온갖 고문과 회유, 공포속에서 배교하지 않고 순교로써 신앙을 굳게 지켰다. 황새바위라는 명칭의 유래는 이곳 가까이에 황새들이 많이 서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혹은 목에 큰 항쇄 칼을 쓴 죄수들이 이 언덕바위 앞으로 끌려나와 죽어갔기 때문에 항쇄바위라 불리기도 했다.
공주의 은거지 박해는 서울과 지방에서 끊임없이 생명과 교우들의 재산을 요구하였다. 순교를 하지 않은 교우들이라 할지라도 가난과 쫓김과 초조 가운데서 신앙을 위한 투쟁의 삶을 살지 않을 수 없었다. 가장 많은 순교자를 낸 병인박해 이전에도 공주의 여러 산골은 천주교 신자들의 은거지가 되었다. 버니스(선학리), 먹방리(쌍수리), 덤골(백용리), 둠벙이(조평리), 만년동(만천리), 룡수골(유룡리), 진밧(신영리), 덤틔(가교리), 도가니(안양리), 관불(녹천리), 적바위(문금리), 국실(국곡리), 새우리(산우리, 봉곡리), 지석골(학봉리), 동울(동우리, 성덕리), 수리치골(봉갑리), 지를(고성리), 소랑이(내문리), 등이 교우들의 은거지가 되었다. 1812년 홍주 출신 이여삼형제가 공주산으로 피신하여 살았으며, 1829년 최경환 성인이 고향에서 수계하기가 어려워 공주고을 김대 산골로 이주하였다. 공주군에는 지금도 산골에 공소가 많은데 군란을 피해서 신자 공동체를 산골에서 이루어 서로 신앙과 사랑을 나누며 살았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의 편지에는 박해시대에 신자들이 이룬 공동체가 얼마나 훈훈하며 열심했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물씬 체험하고 있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초대 교회 공동체의 이상이 충청도 산골에서 이미 토착화 되었던 것이다. 주문모 신부가 지방 순회를 여러번 하는 중에 공주에서 사제로서 성무를 집행했다. 교황 요한바오로 2세께서 명동 대성당을 참배하실 때 말씀한 하신 것처럼 "고주교님이 1846년 무서운 박해하에서 공주 땅 수리치골에서 이 나라와 겨레와 교회를 요셉 성인과 공동 주보이신 성모께 조용히 봉헌"(명동성당 1984.5.6)하였다. 1861년 10월에 조선 포교리는 동정성모께 바쳐졌는데, 죠안노 신부는 공주와 그 인근지방을 성모영보구역으로 정하였다. 리델신부는 진밧(공주군 사곡면 신영리)에, 랑드르 신부는 둠벙이(공주군 신하면 조평리)에 은신하여 활동하였다. 이구역은 또한 초기 본당 형태로 볼 수 있다. 가장 혹독하고 가장 조직적인 박해인 병인 대박해(1866년)를 맞이하기 전에도 먹구름은 끼어 있었고, 조정에서 박해령이 끝난 뒤에도 지방에서는 아직도 그 여파가 남아서 지방의 박해들은 더 오래 계속 되었다. 전국적으로도 그렇겠지만 공주에도 1866년 병인박해와 그 이듬해에 가장 많은 순교자들이 나왔다. 달레는 공주옥에서 죽은 이들의 이름과 상황을 다 알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감영록이 세상에 공개되기 전에는 우리 순교자들의 이름마저도 다 알 수 없는 안타까운 상태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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