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 저자 |
역사적 배경 |
느헤미야가 수산 궁에서 술 맡은 관원으로서 섬겼던 아닥사스다 Ⅰ세는 에스더를 왕비로 삼은 아하수에로 왕의 아들이었다. 부림절(에 9:20-32)은 아닥사스다 Ⅰ세의 즉위 8년 전, B.C. 473년 3월 8일 에 제정되었다. B.C. 458년 봄,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왕의 도움으로 유대 인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고, 이듬해 봄 이방 여인과의 결혼 문제로부터 시작하여 예루살례ㅁ 성전 재건까지 여러 문제 해결에 착수했다. 그러나 르훔과 심새의 온갖 방해로 인하여 유대 인들은 참극(스 4:7-16, 21, 23 느 1:3)을 겪는다. 이러한 비보를 전해 들은 느헤미야는 바사 왕실의 안락한 자리를 버리고 예루살렘에 돌아온다. 그리하여 B.C. 445-420년에 이르기까지 유대 민족의 정통성 회복과 순수성 유지에 온 정성을 다 쏟는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동시대의 인물로서 활동했다(느 8:1-9;12:26). |
주요내용 본서에 나타난 주요 내용은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과 여호아의 율법에 대한 충성이다. 예루살렘 성벽은 유대 인들에게 있어서 성전과 더불어 민족의 상징이요,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원수들의 갖가지 조롱과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일어나 건축하라는 나팔소리는 결국 승리의 환호로 이어져,죄악으로 인해 허물어졌던 성벽이 갖은 고초 가운데서 재건되었다. 이는 포로 후의 새출발에 있어서 새 삶의 터전이 되었고, 또한 신앙의 증거로서 후대에 큰 귀감이 되었다. 느헤미야는 이전 자기 민족의 멸망과 포로생활의 고난은 하나님의 율법에 불순종한 범죄의 결과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율법의 회복과 거룩한 말씀에 대한 충실한 해석 및 준행에 그의 정성을 기울여 강력하게 밀고 나갔다. 특히 제사장겸 학사인 에스라로 하여금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쳐서 마음판에 새겨 온전한 생활을 하도록 했다. |
서론일람 1. 기록자 : 아마도 느헤미야가 기록했을 것이다(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에스라가 느헤미야서의 대부분을 기록하고 그 나머지를 느헤미야가 자신의 회고록을 사용해서 기록하였다고 주장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