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가지로부터 아흐멧 1세(1603-1617)에 이르는 시기가지 오스만제국의 권좌는 줄곧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 승계되었고, 제위에 오른 술탄들은 권력 안보를 위해 자신의 형제들을 죽이는 것이 관례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흐멧이 사망한 뒤 그 형제 가운데 한 사람인 무스타파(1617-1618, 1622-1623)1세가 등극하면서 이런 전통은 끝이 났다. 이와 같이 술탄이 사망하고 나ㅓ 그 형제 중 나이가 가장 많은 남자를 새 술탄으로 옹립하는 새로운 전통은 차후 오스만제국의 멸망을 재혹하게 된다. 이전의 형제 학살 전통은 잔인하기는 했지만 강한 자가 술탄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는 장점이 있었고, 따라서 제국에서 강력한 왕권을 유지하는 데 유리했다. 하지만 형제계승은 이런 장점을 희석시켜버렸던 것이다 나이 많은 형제가 술탄이 되면서부터는, 술탄이 자신의 형제들은 톱카프 궁전 내부에 가두어두었다. 감금 생활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세상과 담을 쌓고 지내던 왕족이 나중에 국가 지도자가 되어서 나라를 제대로 통치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슐레이만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셀림 2세(1566-1574)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그는 국정을 소콜루 메흐멧 파샤(유능한 인물이었다), 좋아하는 포도주를 마시면서 세월을 보냈다. 이렇게 술탄이 국정을 소홀히 하자 그의 부인이자 다음 왕이 될 무랏의 어머니 누루바누가 권력을 잡게 된다. 이리하여 오스만제국에 여성 통치자의 시대가 열리고 이후로 술탄의 모후들은 막강한 권한을 휘두르게 된다.
메흐멧 3세의 시대에도 어머니 사피예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국가의 기강이 해이해지면서 예니체리들의 반란이 잦아지고 에니체리들이 만취 상태로 폭동을 일으키는 것을 본 메흐멧 3세는 이스탄불 내의 음주를 굼지하고 모든 집 안에 있는 포두주를 폐기할 것을 명하면서, 이를 어기는 사람은 사형으로 다스렸다. 그는 또한 자신이 죽고 아들 마흐뭇이 제위에 오른다는 점쟁이의 말을 듣고 큰아들 마흐뭇을 죽였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목숨을 지키지 못하고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13세에 제위에 오른 아흐멧 1세(1604-1617)는 아홉 살 먹은 동생 무스타파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위협이 없을 것으로 보고 그를 죽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는 제위에 오르면서 형제를 죽이지 않는 최초의 술탄이 되느데, 그가 바로 유명한 블루 모스크(술탄 아흐멧 모스크)를 만든 인물이다. 1606년 아흐멧 1세는 오스트리아오 평화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로써 유럽에서 지켜왔던 오스만제국의 우위는 끝이 났다. 지금까지 얻은 영토를 인정받기는 했지만, 유럽에 대해 오스만제국은 더 이상 우세한 세력이 아니었다.
반란의 소굴이 되어버린 예니체리를 정비하고자 했던 오스만 2세(1618-1622)가 오히려 폐위를 당하고 결국 예디쿨레에서 살해당한 일은 예니체리의 횡포가 얼마나 극심했는지 말해준다. 처음으로 자국민에 의해 술탄이 살해당한 이 사건은 오스만제국이 쇠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자식이 없었던 무랏은 형제들을 모두 살해함으로써 오스만제국의 마지막 왕이 되고자 하는 의도까지 있었지만, 형제 이브라힘을 죽이려던 계획은 실패했다.
메흐멧 4세에게는 31세된 아들 무스타파가 있었으나, 이미 오스만제국의 제위 계승 제도는 왕가의 가장 나이 많은 남자에게 권좌를 물려주는 방식으로 바뀐상태였다. 그리하여 메흐멧 4세의 동생 슐레이만 2세(1687-1691)가 술탄이 되고, 메흐멧 4세의 아들들은 궁전 내에서 감금 생활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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