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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내시, 그들은 누구인가?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2. 28. 06:29

제3의 세력, 내시

 

 

산 곳곳에 흩어진 무덤의 수는 모두 800여기. 이것이 내시의 묘임을 알려주는 것은

등산로 곳곳에 남아있는 비석의 명문이었다.통훈대부행내시부 경기도 고양시의 한 야산.

이곳 역시 산 여기저기에 수많은 상석과 비석들이 방치된 채로 흩어져 있었다.

뚜렷히 남아있는 글자-- 승전색.왕명을 받들고 전달했던 내시였다.

유원지로 잘 알려진 장흥.이곳 삼상리는 옛부터 내시골이라고 불렸다.

통훈대부행내시부상세승공극철양위지묘--

그러니까 이 묘는 통훈대부라는 품계를 가진 내시부의 상세직을 수행하던 승극철이라는

사람의 묘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이 맨 마지막의 양위지묘이다.
양위지묘, 이것은 바로 승극철이라는 사람이 그의 부인과 나란히 묘를 썼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내시에게도 부인이 있었다는 얘기가 되고 또한 그것이 사실이라면 가정을 이루고

살았다는 추측도 가능한데 과연 그럴까?


국립중앙 도서관 족보실. 


이곳에는 내시의 것이라고 알려진 특별한 족보가 한 권 남아있다.


-양세계보(족보)
 여말선초의 내시였던 윤득부를 시조로 하는  내시 집안의 가계도다.  
 족보의 구성은 태어나고 죽은 해, 그리고  일생의 행적이 기록돼 있는  
 일반족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시 족보는 양자의 형태로 되어  있기

 때문에 성이 서로 다 를 수 밖에 없다 족보에는 내시의 부인도 함께 기록돼 있었다. 
 일반인과 다름없이 가정을 가졌던 것이다.

 

-족보의 서문 
족보를 만든 이유를 밝히고 있다. 
비록 양자로 가계를 이어 가지만 낳은 은혜 못지않게 키우는 은혜도 크기 때문에 
이를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 명 내지 두 명을 입양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재산이나 
권력에 비례해 4-5명 양자를 들이는 경우도 있다. 뿐만 아니라 양녀도 들일 수 있는거지.

결혼도 하고 양자도 들이고 양녀도 들여서 어엿한 일반가정과 똑같은 생활을 했던 것이다.

            

내시의 후손

김계한

 선조 당시의 내시 김계한을 시조로 한 집안의 가계도였다.

 

 

                                      -올해 일흔한살의 유충현씨.
                                        김계한의 14대손으로
                                        아버지대까지 내시직에 있었다는
                                        이 집안의 마지막 후손이다.

                                                                
                                할아버지는 참 준엄했다. 키가 구척 장신이고--여기서  건너
                                산을 망원경으로 내다 보다가 남의 산에서 나무 하는 사람이
                                있어 소리 지르면  거기까지 들릴  정도로 목청이 우람했다.
                                일대의 몸만 성한 사람이라면 무사 기질이 있었을거다. 장엄
                                하고 건장하시고 글씨도 명필로 잘 쓰고 이  근처의 수원 백
                                씨들이 벼슬이 높다하지만 만만하게 우리 할아버지를 홀대하
                                지 못했다.

 


이땅의 내시의 사라짐


내시가 공식적으로 이 땅에서 사라진 것은 한일합방이 있기 두 해전인 1908년이다.
일제가 대한제국의 모든 관부를 없애면서 내시부도 폐지된다.
그러니까 1908년부터는 내시가 궁궐에 더이상 머무를 이유가 없게 된 것이다..

바로 유충현씨의 이 증언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내시들도 일반 관료들과 마찬가지로 궁궐밖에서
가정을 가지고 또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는 새로운 사실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내시들이 궁궐에서 생활하다 궁에서 생을 마쳤다는
우리가 알고있던 상식과 다르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내시들도 조선시대 일반관료들과 마찬가지로
궁궐밖에 집을 두고 출퇴근을 했을까? 확인해 보도록 하겠다.

 


내시도 출퇴근을 했다.

경국대전엔 내시부에 관한 규정을 두고 있다.
내시부를 승정원이나 홍문관과 같이
하나의 관부로 인정해 그 조직과 임무를
상세히 적어놓고 있다.

 

                                        
내시부의 임무 네가지

1. 대내감선.
                                궁중내의 음식 전반에 대한 감독이다.

2. 왕명출납
                               두번째가 왕명을 전달하는 전명.

3. 수문
                           
                               세번째로 궁중의 문을 지키는 수문.

4. 소제            
        
                               마지막으로 궁궐내의 청소다.

                                        포괄적인 규정일 뿐.
                                        실제로는 궁중의 제사는 물론
                                        왕실의 재산 관리. 궁실의 각종 공사.
                                        궁녀의 감독등.
                                        궁중내의 모든 대소사에 내시들이 관여했다.

 


내시의 경국대전 품계

내시의 관직은 종2품의 상선에서
종9품의 상원까지 두었다. 
이 중 임금의 수랏상에 오르는 음식을
감독하는 상선이 내시부의 가장 높은 직위였다. 
이밖에 상원 상다 상약 상전등 
각 관직마다 상세한 임무를 규정하고 있다. 
내시부의 전체 정원은 백사십명이었다.

 


내시의 숫자

정원이 140명이라면 일부 군부대 말고는  이렇게 큰 부대가
없었다. 예를들어 병조나 이조와  같은 육부에서도 판서에서
부터 정랑 좌랑에 이르기까지 정규 관원이 10여명 내외였다.
10여명 내외의 관원들이 일국의 국방이나 인사나  또 교육이
나 이러한 일들을 총잭임졌는데 140명 정도의 관원이 소속되
어 있었다면 대단히 규모가 큰 관서였다고 볼 수 있다.  


6조

조선시대의 거의 모든 관부는
궁 밖에다 청사를 두고 있었다.
지금의 세종로는 이호예병형공의
6부의 모든 청사가 있었던 곳이다.
그렇다면 내시부는 어디에 있었을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내시부의 청사는
한양 북부의 준수방에 있었다.
                                                

한성도의 준수방
        

준수방은 경복궁 바로 옆. 
지금의 효자동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내시부도 다른 관부와 마찬가지로
궁 밖에 나와 있었던 것이다.  


내반원

내시부와는 별도로 궁안에 내시들을 위한
공간이 있었는데 내반원이었다.
내반원은 왕이 업무를 보던 선정전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왕실의 수발을 좀 더 효과적하기 들기 위해서다. 
                                         
궁궐안에 있는 내반원은
내시부의 파견처인 셈인데
내시들 중 가장 핵심인물들이 근무하던 곳이다.
                                        


근무 형태

그렇다면 내시들은 어떤 형태로 근무했을까?
내시들은 크게 장번과 출입번으로 나뉘는데
번은 교대로 근무하는 것을 의미한다.

장번은 장기간 왕 가까이 모시는 자들로 장번은 모든 내시들
에게 주어지는 게 아니라 왕과 세자궁에만 제한되어 있는 사람.

 

다른 내시들에 비해 승진의 기회나 권력을 잡을 수 있는
기회가 더 많다.

장번 내시는 내시부의 핵심요직에 해당된다.
흔히 왕이 있는 대전이나
왕비가 있는 내전등을 지키지만  
장번내시라 해서
궁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출입번과 달리 교대기간이 길었던 것이지
이들도 궁 밖에 집을 두고 있었다.


내시가 살고 있던 곳
                 

내시부가 있었던 준수방. 오늘날 효자동과 통인방 근처라고 생
각되는데 그 지역에 많은 내시들이 살고 있었고

 

내시들이 궁밖에 살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기록이 있다.
조선중기에 작성된
한양 5부중 북부지역의 호적대장.
양반가로 분류된 곳에 내시의 집이 눈에 띈다.
양반 관직을 가진 쉰한가구 중
여덟가구가 내시의 집이었다.  

그때 당시 내관들이 어디에 살았나? ...와룡동 종로3가에서
동궐쪽으로는 내관들의 집들이  많았다. (궁궐쪽으로?) 종로3
가에서 비원으로 올라가는 길을  동관이라고 했다. 동관길로
길 양쪽에 내관들이 많이 살았다.

 

운당여관                            

-유씨는 바둑대회가 자주 열렸던 곳으로

유명한 운당여관이 원래 내시의 집이었다고 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비원 바로 앞.
 이곳 일대에는 많은 내시집이 있었다고 한다.


내시가 일반 관료와 다른 점 내시의 유래

내시들도 궁궐밖에 집을 두고 출퇴근을 했으며 처와 비록 양자이긴 하지만 자식을 두고
가정을 이루어 살았다는 점에서는 일반관료와 똑같았다.


그런데 뭔가 다른 특별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신체적으로 정상인과 다르다는 점 때문이다.

 


 

이것은 중국 은왕조의 갑골문자이다.
이 두 자의 상형문자는 내시 즉 환관의 역사가
얼마나 오래 되었고 또한 그들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기록이다.
우선 오른쪽의 글자는 지금의 한자와 비슷한데
강족이라는 오늘날의 티벳종족을 가르킨다고 한다.


앞 부분의 문자는 남자의 성기를 나타낸다.
그리고 이것은 자른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이 두문자는 강족의 성기를 잘라 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갑골문의 이 부분은 바로 은왕조의 무정왕이 전쟁에서 체포한
강나라 사람들의 성기를 잘라 환관으로 만들고자 신에게 물어봤던 내용이라고 한다.  
이 때가 기원전 13세기경이니까 벌써 3천년전에 중국에서는 환관내시가 존재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유래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록상으로는 9세기 신라 흥덕왕때 환관내시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러니까 우리의 내시 역사도 천년이 훨씬 넘었다.
내시는 왜 필요했고 어떻게 선발되었을까?


내시, 그들은 누구인가?

내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숙명적으로 정해진 존재로 여겨진다.
서양이 내시의 존재를 신과 관련 지었다면   
 중국은 하늘의 원리와 결부지어 설명했다.   

 

삼재지회                           

-하늘과 땅과 인간의 관계를 풀어놓은 삼재도회.
이 책에 의하면 중국에서는
하늘의 원리는 지상의 원리와 마찬가지라고 여겨
내시의 존재를 천문현상으로 풀이한다.  

천계에는 황제의 별이 있고
그 측근에는 일반관료들과 함께  
환자 즉 내시의 별이 있다고 적고있다.
내시는 황제에게 봉사하는 사람으로
천계의 원리에 따른 운명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동양사회에서 황제라고 하는 것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 하늘
의 천명을 받은 신비한 존재로  이념화 되었다. 신비한 존재
인 천자와 일반사람들이  만나기 위해서는 중간에  매개체가
필요하다고 생각. 신성한 존재와 속세의 사람들이 만나기 위
해서는 중간에 인간이면서도 비인간적인  요소를 지닌 존재.
그 존재가 무엇인가? 바로  거세를 한 환관들. 거세했기때문
에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을 극복했다고 할까.  이런 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중간에 매개 역할을 함으로
써 황제의 신비함 신성성을 높히지 않았는가


중국

자금성 + 환관                     

-이런 이유로 왕권사회에서 내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였다. 
중국은 한때 궁궐안에 만명이 넘는
환관내시를 두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 많은 인원을
어떻게 구할 수 있었을까?
  

궁형기구
               

중국은 전통적으로 전쟁포로를
거세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것이 궁형이라는 거세의 형벌로 이어졌다.  
중국의 경우 궁형에 의한 거세자가
많을때는 수만명에 달해
환관내시를 구하는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우리나라  내시 만들기


중국과 같은 궁형의 형벌이 없는 우리는
합리적인 방법을 취했다.
바로 양자제도를 이용한 것이다.   
내시들로 하여금 고자 어린이를 양자로 삼아
대를 잇게함으로써 궁중의 필요한
내시를 구한것이다.

경국대전에는 내시가 3세이전의 어린이를
양자로 들일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 양자들을 어떻게 입양했을까?

19세기 말 조선에 온 프랑스인 신부
샤를르 달레.
그가 저술한 한국천주교사에는
구한말 궁궐안의 모습과 함께
내시들을 어떻게 입양했는가를 알려주는
기록이 있다. 
                                  
내시는 자식이 없어 전국에 사람을 보내
고자 어린이를 찾아 오게 했는데

 

-중국과 달리 궁형이 없는 우리나라에서는
입양 대상자를 찾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대상자를 찾았다고 해서 아무나 양자로
들이지는 않았다.

 

내가 네살적에 똥을 싸고 방에서 뭉개니까 개가 냄새를 맡고
뛰어 들어왔다가 덮쳤다. 그래서 불구가 되었다. 근처에 나씨
성 가진 분인데 당시에 높은 벼슬을 하던 분이 그 분이 천거
를 해서 나를 이리로 양자로 보냈다. 그 양반들이 아무나 마
구 받지는 않는 모양이다. 그 집안의 내력을 보고 가세가 어
느정도인가 보고 교육같은 것을 보고 양자로  받아들이는 모
양이다.


내시의 유지

양자 제도만을 통해 내시직이 유지됐을까?
흔치는 않지만 가족에 의해
또는 스스로 거세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시들의 권세와 궁생활을
동경하는데서 비롯됐다.


사설양성소
                                        

내시가 되기위한 일종의 사설 양성소가
있었다고 한다. 
                                        
바로 그 사설양성소를 운영했던  
쇠귀할머니에 대해 증언 했다 
                                
귀가 커서 쇠귀라고 했는지 확실치 않지만 아무튼 이분이 자
식없고 재산많아 성불구자들을 모아놓고  교육을 시켰다. 기
생을 교육 시키듯이 소양을 길러야  하지. 말도 함부로 해서
는 안되지. 또  경서라든가 여러가지 교양을  쌓아야 하니까
이들을 모아 그런 공부를 시켰다.  또 자기가 여러통로를 통
해 궁중으로 들여보냈다. 쇠귀 할머니가 배출한 궁중에서 세
력을 잡으니까 아울러 쇠귀할머니도 올라갈 수 밖에 없고 쇠
귀 할머니를 어머니로 모셨다. 쇠귀할머니 우이동에 묘를 썼
는데 내시들이 제사를 지내러 다녔다고 한다.

 

궁에 들어가면서도 철저한 교육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들의 구체적인 교육내용은 알 수 없지만
내시의 몸가짐과 궁중의 법도를
배우는 것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다만 경국대전은 현직내시들도
공부해야 하고 일년에 네 번 성적을 평가해
고과에 반영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엄격한 선발과 교육을 통해 
한 사람의 내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내시의 표현

(宦官. 宦者. 火者.  人. 內官. 內侍 차례로 뜨고)
환관, 환자, 화자, 엄인, 내관, 내시 참 다양하게 쓰이고 있다.  
여기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불화자의 화자이다..
남성의 성기를 거세할 때 마지막 마무리를 불로 했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또 엄인은 거세의 형벌이 있었던 중국에서 그 죄인을 엄인으로 불렀다고 한다.


여기의 이 네가지 명칭, 환관-- 환자-- 화자-- 엄인등은
모두 남성성의 상실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내관이나 내시라는 표현에는 그런 뜻이 없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내시가 처음부터 환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환관은 거세된 사람들로 궁중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노예와 같은 존재들이었고
내시는 왕을 가까이서 보좌하는 관직이 높은 고급관료였습니다.
이렇게 역할과 신분이 명확하게 구분되었던
환관과 내시의 관계가 고려중기에 들어 변화를 맞게 된다.
바로 내시직을 환관들이 차지하게 된다..
이때부터 내시의 권세가 국정을 뒤흔들 만큼 막강해 졌다.

 


제3의 권력, 내시

                   

고려의 내시는 과거의 장원급제자등
당대 최고의 엘리트들이었다.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
사립대학의 창시자 최충의 손자인 최사추.
주자학을 처음 도입한 안향.
이들 모두가 내시였다.  
환관이 발호했던 원나라의 영향으로
고려에서도 내시직에 환관이 진출하기 시작했다.

내시와 환관은 별개의 존재인데 원 간섭기때 환관의 역할이
부각되면서 종전에 내시가  갖고있던 권한을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처럼 고려문관 내시의 기능을 환관내시들이 차지
하면서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정함은 환관으로서
내시직에 진출한 최초의 인물이다.  
고려 의종을 키운 유모를
부인으로 맞이한 덕분에
내시가 된 정함을 시작으로
수많은 환관들이 내시직에 진출한다.
환관에서 일약 내시직으로 올라섰던
이들의 폐해는 극심했다.
                                        


조선시대 내시

내시가 환관으로 완전히 대체된
조선시대에 들어서자
조선은 경국대전에 내시의 임무를 규정해
그들의 맡은 바 임무를 엄격히 제한했다.


고려를 거울 삼아 환관의 페해를
더이상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내시들이 왕과 가까이
있을 수 있는 신분이었기 때문이었다.

왕의 측근에서 근무하기 때문에 왕명을 전달하기도 하고 궁
중의 궁녀들을 관리하기도 했기 때문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
지고 있었다. 특히 정치가 어려운  때나 정치적 격변기에 이
사람들이 영향력을 발휘한다..

 

궁궐의 정보를 독점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 혼란기에는 이들이 관여될 여지가 많았다.
또한 대외적인 상황에도 내시들이 깊이 관여했다.

 

세종때 같은 경우 4군6진을 개척하기 위해 북방 여진족들과
끊임없는 전쟁상태에 있었다. 김종서라든가  최윤덕 같은 장
군들이 그 지역에서 경*을 했는데 여진족에게 간첩을 파견한
다거나 아국에서 군사 몇명을 동원해 여진의  어느지역을 공
격한다. 중요한 국가기밀을 서로 주고받고 국왕이 어디를 공
격해라. 어디를 간첩으로 보내라. 이런 사항은 내시들이 중간
에서 관료들이 전혀 모르게 다한 다음에 사후에 이러이러한
일을 했다라는 사후 처리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왕이 내시들에게 주는 임무에는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았다.
왕실의 재산관리. 궁중의 각종 공사.
지역의 실정파악등.


이런 업무를 통해        
내시들은 개인적인 치부에도 열중했다.  

고려사에 환자전 즉 내시전을 따로 둔 이유도
바로 이런 상황을 경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내시의 폐해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특히 왕명출납이 많은 문제를 야기시켰다.

왕명은 승정원에서 맡아 출납을 하게  되는데 6조라든지 각
부서에서 고문서가 올라오면은 이것이 승정원에 모이게 되고
승정원에서 국왕의 처소까지 출납하는 일은 내시들이 맡고있
다. 내시들은 이러한  공문을 전달할 뿐만  아니라 편전에서
왕의 명령을 기초하기도 하고 또 그것을  승정원으로 전달하
는 임무를 맡고 있는데 때로는 내시들이  왕명을 변조하기도
하고 왜곡해서 전달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또 왕들도 어
떤 경우에는 그것을  귀찮게 생각해서 전적으로  내시들에게 
왕명의 전달을 맡겨두는 일들도 있었다.


나쁜 내시

왕명출납을 가장 악용한 대표적 인물은
연산군 때 내시였던 김자원이었다.
김자원은 조선시대 내시로서의
모든 악행의 전형이었다.
                                        
김자원이 승정원에 출입할 때
모든 승지가 머리를 숙여야 했다.
관료들은 김자원을 통하지 않고는
왕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내시 김자원이 행차하는 곳에는
아무리 양반이라도 말에서 내려야 했다.

김자원이 이렇게 행세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절대궐력자였던 연산군 때문이기도 했다.
연산군은 수족처럼 따르는
김자원 같은 내시를 앞세워
자신의 부도덕함을 감추었고   
김자원은 그것을 최대한 이용한 것이다.

왕이 가장 믿을 수 있고 양반관료들과 원천적으로 대립관계
에 있는 사람들이 내시들이다. 양반들은 내시가 높은 공식적
인 지위를 가져도 천한 노예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다. 무시
를 했기 때문에 왕은 자기의 심복이면서  양반관료들과 대립
할 수 있는 내시들을 여러가지로 이용해 양반들의 치부를 들
춰낸다거나 또 정보를 캐낸다거나 또 자기가  양반들한테 얘
기하기 불편한 면 이런면들을 내시를 시켜  악역을 담당하게
해. 그런 댓가로  내시들의 지위와 신분을  높여주고 입장을
강화시켜주는 제스츄어를 취한다.
                                
왕과 가까이 있으면서 궁중내의 모든 정보를
독점할 수 있는 신분에 있었던 내시들.
그들은 신권정치라고 할만큼
조선의 독특한 정치

왕과 신료들의 관계를 최대한 악용해
때로는 국정의 기본질서를 깨뜨릴 수 있는
상황으로까지 몰고갔던 것이다.   


좋은 내시


선조 때의 김계한은 임진왜란 때 목숨을 걸고 임금의 안위를 지킨 내시였다.
왕이 그 공로를 인정해 공신에 봉하자 이를 취하하라는 양반들의 상소가 끊이지 않았다.
내시에게 그런 명예를 줄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처럼 분명한 공을 세웠는데도 무시되었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정사나 야사에 나오는 내시관련 기록을 보면
건방지다거나 비하하는 표현. 아니면 분란을 일으킨 행적만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어쩌면 한 인간이 가진 능력보다는
유교적인 신분질서를 강조하는 조선사회에서는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정말 그 많던 내시들이 하나같이 나라에 해만 끼쳤던 것일까요?
몇몇 내시의 직분을 벗어난 일탈행위가 내시 전체의 얘기는 아닐거다.


중국에서 활동한 내시들

정동은 조선출신으로
명나라에서 활동했던 내시였다.
세종때 명 황제의 후궁으로 뽑혀가는
조선처녀 한계란의 종자로 따라가
중국에서 환관으로서는 높은 직위인
태감의 벼슬에까지 올랐다.
정동은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였고
더구나 명황제의 총애를 받던 한씨를
후원자로 두고 있어 대단한 권세를 누렸다.
정동외에도 박부와 황흠등


많은 조선출신 환관들이 중국에서 이름을 떨쳤다.

그 당시 여러나라에서 중국에 화자가 공납이 되어 갔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매우 영리해 글을 배우지  않았더라도 가
서 여러 다른 나라 사람들하고 그들이 매우 영리하기 때문에
그들이 빨리 출세할 수 있었고 또 한가지는 그들이 중국으로
뽑혀갈 때 궁인들하고 같이 뽑혀 간 경우가 있는데 외국에서
그네들과 궁중에서 같이  지내면서 그들을 후견인으로  해서
성장한 경우도 있었다.

 

조선 출신 환관의 영민함은
중국의 황제도 인정해
조선초 중국으로부터 온 사신 대부분이
조선출신 환관이었다.

 

정동은 사신의 자격으로
다섯번이나 고국 조선을 다녀가는데
중국황실과의 밀착관계를 이용해
조선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당시 중국은 변방의 민족들이 문제를 일으키자,
외국에 대해 무기와 관련해 금수초치를 취한다.
그 중 조선으로서 가장 타격을 입은 것은
각궁을 만드는 핵심부품이었던 
물소의 뿔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물소뿔은 중국남방에서 수입해 왔던 것이다.
여진족 때문에 골치를 앓았던
조선으로서는 큰 타격이었다.
각궁의 금수조치를 풀 수 있게하는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 이가
바로 조선 출신 환관 정동이었다.

 

당시 조선의 안보와 관련된 중요한
문제를 해결해 준 정동에게 
 성종은 고마움을 표한다.

 

병기에 관계되는 궁각이라든지 조선에서 필요하고 명나라에
서 금지하는 품목을 그 사람들이 해결해 주는 역할. 외교적
현안문제 명나라에 크게 해롭지 않은 경우 우리편을 들어
해결해 주려고 그런점을 우리나라에서는 유리하게 이용하는
경우가 있다.

 

조선시대에도 궁중의 사람으로
자기 직분에 충실했던 수많은 내시들이 있었다.
폐단의 근원이 되었던 왕과 내시와의
밀접한 관계. 그 자체가 폐단의 원인으로만
작용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내시는 왕과의 관계에서 일반실료들이 예의와 명분
을 사리는 공식적인 관계라고 하면 그에 비해 왕과 내시는 대
단히 허물이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가질 수 있다. 그런 사적인 
관계를 이용해서 왕을 자기  사사로 이용할 수  있지만 그런
가까운 관계를 이용해서 관료들이나 일반백성들이 하지 못하
는 말을 왕 앞에서 솔직하게  바른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또 내시다. 그런 경우가 연산군때의 김처선과 같은 사람들이
누구도 연산군의 공포정치를 두려워서 말을 못할  때 김처선
이 나서서 바른  정치를 해야한다.  백성들을 살리는 정치를
해야한다. 바른 말을 할 수가 있는거지.

 

-바로 그런 직언을 했던 김처선.
연산군대에 같이 내시직에 있었던 김자원과는  
달리 직분에 충실한 내시였다.

김처선은 왕에게 직언을 했다고 하여
너무나 가혹한 참사를 당한다.
그의 집터는 파헤쳐져 연못이 되었고

친척들에게까지 화가 미쳤다.  

조선조를 통틀어 공을 세웠던
내시들은 수없이 많다.
그들은 왕의 인정을 받아
공신의 칭호를 받았지만  
대부분 실료들에게는 형편없이 평가된다.
이런 평가에도 많은 내시들은 왕의 곁에서
늘 그들의 본분을 지키려고 했다.

내시들의 이런 현실을
극명하게 드러낸 사건이 구한말에도 있었다.

1884년--우정국의 개설축하연에서
김옥균 박영효등의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킨다.

 

이 때 수구세력으로 분류된 민영목
조영하 한규직등이 개화파에 죽음을 당하는데
그 중에 유재현이라는 내시도 포함되어 있었다.  
                                
내시 유재현은 정변 두 달전까지
윤치호 김옥균등과 시국을 논할 정도로
개화파들과 친밀한 사이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은 왜 유재현을 죽였을까?
갑신정변 한달 전 윤치호의 일기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정변이 일어나기 한 달 전
유재현은 군인 윤웅렬과 윤치호를
경계하라고 고종에세 진언한다.
이로인해 유재현은 개화파에게 배신자로
찍혔고 결국 살해된 것이다.

 

국왕을 충성하는 입장에서 개화파들의 동정을 파악하고
이것을 거꾸로 국왕에게 보고하는 이러한 역할을  하지 않았
느냐. 그렇게 볼 수 있는  한가지 이유는 갑신정변이 일어나
기 한달여 전쯤 내시 유재현이 그 당시 개화파의 일원이었던
윤웅렬과 윤치호등 이러한 개화파 인물들을 경계하도록 고종
에게 진언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런데 이  내용이 윤치호등
개화파 인물들에게 다시  또 전해진다. 아마  이러한 시점을
전후해서 개화파들이 유재현을 배신자로 보게 되었고 그래서
갑신정변 당시 죽지 않았느냐. 그러나 유재현의 입장에서 보
면은 왕에게 어디까지나 충성을 했던 인물로 봐야겠다.

 

-결국 갑신정변은
수구파의 승리로 막을 내리고,  

 

-그 때 유재현과 함께 죽은 민태호등 6명에게
영의정등의 벼슬과 시호가 내려진다.
그러나 유재현은 제외됐다.
바로 내시였기 때문이다.   

 

 -천년이 넘는 내시의 역사.
그 속에는 왕의 사람으로 직분에 충실했던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내시들이 있다.
내시로서 자신의 역할을 알았던 유재현.
그도 묻혀있는 내시중의 한 사람이었다.

 

결론

절대권력자의 수족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거세된 남자.
그들도 인간이었다.    
역사속에 나타나는 내시들의 본분을 넘어 선 행위는  
그들의 특수한 신분 때문에 더 부각되어 보이는 것은 아닐까?
내시라는 특수한 신분은 왕조시대의 유물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내시가 맡았던 그 역할과 기능만큼은 현재도 남아있고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절대 권력자에게만 국한되어 있었던 왕조시대와는 달리
권력이 분화된 지금 오히려 훨씬 더 확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 우리가 역사속에 잠들어 있던 내시를 들여다 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지난날의 내시를 알면 오늘날 권력자와 측근자의 관계가 어떠해야 되는지  
분명한 교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원본 http://blog.naver.com/joyllg/40014085909

출처 : 한국문화사랑
글쓴이 : 현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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