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테크/역사이야기

[스크랩] (4) Beginning Of the Middle Ages (중세의 서막) -2)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2. 28. 06:55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1950년에 제작된 영화 「아이반호」의 포스터

 

 

Beginning Of the Middle Ages (중세의 서막) -2)

 

 3편에서 카롤링거르네상스 이야기를 하다 끝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제 좀 있으면 중세 유럽의 가장 큰 특징인 ‘장원제도’, ‘기사’, ‘영주계급’ 등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봐야합니다. 그런데, 그 전에도 중요한 일이 많습니다.

 새삼스럽게 말씀드리자면, 역사학자들이 대부분 중세의 연도(年度)적인 시작을 서로마가 오도아케르에 의해 475년 멸망했을 때로 봅니다. 그리고 중세의 쇠퇴를 ‘흑사병’, ‘화약의 발명’, ‘도시의 부흥’으로 인한 봉건제 쇠퇴로 봅니다. 약 15~16세기 쯤 됩니다. 그리고 중세의 실질적인 붕괴를 프랑스 혁명으로 인한 봉건제 해체로 봅니다. 뭐, 나폴레옹 등장하면서 쫑 났지만요.

 

경건왕의 아들들, 왕위를 위한 혈투를 벌이다

 

 카를루스 대제(샤를마뉴)의 아들인 루트비히 1세는 813년, 몸이 시원치 않은 부왕을 위해 공동통치자가 되어 통치를 도왔습니다. 그 이듬해, 샤를마뉴가 죽자, 그는 단독으로 프랑크 제국의 황제임을 선포합니다. 그는 평소 종교적 경건(敬虔)함을 상당히 강조하여 ‘경건왕’이라 불렸습니다.(다른 왕들 중에서도 종교적 신앙이 깊어 경건왕이라고 불리는 왕이 더 있습니다. 보통 루트비히가 경건왕으로 불림.) 그러나 대조적으로는 정치적인 역량이 부족하여 세 아들이 황위를 두고 혈투를 벌이는 것을 제대로 막지 못해 결국 프랑크 제국의 실질적인 분열을 야기하였습니다.

 

 자신이 왕위에 오른 지 3년밖에 안됐는데 아들들이 벌써부터 황위를 두고 암투를 벌이는 것을 알아차린 루트비히는 817년에 유명한 제국 계획령을 내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여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결단력이 부족한 루트비히는 여러 번 수정을 거치기에 이르렀고 결국 아들들의 불만을 샀습니다. 죽기 2년 전, 그러니까 838년에 마지못해 사후 세 아들에게 제국을 분할하여 상속하겠다고 발표했는데, 이놈의 자식들이 840년 아버지가 죽으니까 바로 전쟁에 들어갔습니다. -_-;;;

 

 처음에 루트비히 2세(둘째)와 카를(이복동생이나 막내 동생)이 동맹을 맺고 큰형인 로타르를 2년 동안 협공했습니다. 둘이서 하나를 짜고 패면 당연히 하나는 맥을 못 추죠. 프랑스 퐁트누아라는 곳에서 로타르의 주력부대를 격파한 루트비히-카를 동맹은 842년에 슈트라스부르크에서 맹약을 맺습니다(슈트라스부르크 맹약). 하지만 맹약(盟約)이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루트비히와 카를도 대립(對立)하여 결국 전쟁 직전까지 갔는데요. 이때 퐁트누아 전투에서 분한 패배를 당한 로타르도 다시 군대를 키워 이 대립에 끼어듭니다. 전쟁으로 인해 프랑크가 피폐해지는 것을 경계한 성직자들이 만류해서 간신히 843년에 전쟁을 끝냈는데. 베르됭이라는 곳에서 8월에 분할 조약을 합니다(베르됭 조약, Treaty of Verdun).

 

로타르 -> 프랑스의 로렌 주(로트룅겐), 부르군트, 북부 이탈리아 => 이탈리아의 전신이 됨

루트비히(2세) -> 라인 강 동쪽 -> 신성로마제국(독일의 전신)의 전신이 됨

카를(2세) -> 네우스트라시아, 아키텐, 손강 유역, 론 강 유역, 셰르트트 강 유역 -> 프랑스의 전신이 됨

 

 물론, 이게 완전히 통용되는 건 아닙니다. 왜냐면, 로렌과 부르군트는 나중에 서 프랑크과 동 프랑크가 나눠먹거든요. 그 발단이 된 조약이 또 있습니다.

 

 855년에 로타르 1세가 일찍 죽습니다(그때로서는 오래 산거일수도;). 이때 차남인 로타르 2세는 로트룅겐, 지금으로 말하는 프랑스의 로렌 주의 땅을 받습니다. 로렌 주는 중 프랑크의 일부였습니다만, 로타르 2세는 형제들이 계속 일찍 죽자 그에 따라 자신도 많은 영지를 계속 받게 됩니다. 869년, 로타르 2세도 통치 14년 만에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킬리만자로의 사자처럼 먹이를 찾아 우글우글 모여드는 사자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서 프랑크와 동프랑크 놈들이죠.

 

 처음에는 사실 동 프랑크는 형제의 정(?) 같은 것을 생각해서 쳐들어가지 않습니다. 중 프랑크에서 새로운 왕조가 생기더라도 동 프랑크는 같은 형제의 땅을 침범하긴 싫었던 모양이죠. 이때까지도 동 프랑크는 루트비히 2세가 계속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카를 2세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로렌은 당시 유럽에는 그다지 많지 않았던 철광석을 대량으로 매장하고 있어서 그곳을 차지하면 질 좋은 무기를 많이 생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특징 때문에 지금까지도 프랑스와 독일이 분쟁을 벌이고 있죠.

 

869년, 서 프랑크의 카를 2세는 잽싸게 로트룅겐을 서 프랑크에 병합해버립니다. 왜 중 프랑크 군대는 저항을 안 했냐고요? 당시에는 프랑크 왕국이 하나라는 인식이 강해서 어느 사람이 왕이 되든 간에 프랑크라는 기본 틀만 유지하면 그게 그거 같았기 때문이죠. 게다가 왕이 죽었는데 저항할 생각이 있을 리가 만무하였습니다.

 

 루트비히 2세가 이에 크게 반발하자 카를 2세도 이에 응수합니다. 군대를 소집하고 지금의 네덜란드의 메르센이라는 곳에서 전쟁을 불이 붙기 직전에 거의 간신히 타협이 이루어집니다. 결국 로트룅겐 분할 조약이 성사됩니다(메르센 조약, Treaty of Mersen). 이때 로트룅겐을 반으로 자르는 것에 협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양국의 분쟁은 계속되어 1919년, 베르사유 체제 형성까지 계속됩니다. 이야기가 멀어졌지만, 이때 1차 대전에 패배한 독일은 ‘다시는 알자스. 로렌에 대하여 영유권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했습니다.

 

 돛을 올려라! 대륙으로 출항하자!

 

 메르센 조약 이후의 유럽 판도는 예상치 못한 또 하나의 큰 외세의 침략을 받게 됩니다. 맨 처음, 게르만 족의 민족 대이동에 대해서 제가 말씀드린 것 기억하실 겁니다. 그런데 이 민족 대이동은 어느 한순간에 갑자기 된 것이 아니라 기원전 11세기부터 기원후 10세기, 약 2천년 가량에 걸쳐 진행됩니다. 물론, 그것이 가속화된 것이 로마 멸망의 주요 원인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가 멸망하고 나서도 민족 대이동 과정에서 그 포악함을 드러낸 것만으로 유럽의 판도를 바꾼 민족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게르만의 일파인 ‘노르만족(Norman, 북방인이라는 뜻)’. 노르만족은 지금 한국인들이 전형적으로 생각하는 서양인의 모습을 갖추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금발 머리’, ‘큰 키’, ‘푸른 눈동자’, ‘정말 높은 코’, ‘백색 피부’의 특징은 사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지에서도 모두 찾아보기 힘든 특징이지만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 스웨덴 등지에서는 허다하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노르만 족은 로마 멸망 이후에도 스칸디나비아 반도 주변을 떠돌았습니다. 그러다 지금의 노르웨이 땅에서 노르만 왕국을 세우고 본격적으로 유럽의 ‘해적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그땐, 해상 교통이 원활하지 못해서 그 당시 해적질이란, 배를 타고 땅에 상륙해 돈 될 물건과 노예로 쓸 사람들을 잡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당시 노르만 해적 ‘바이킹(Viking)’들이 성능 좋은 배를 타고 다녔을 거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배웠는데, 실제로 해상 전투에서는 바이킹의 배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습니다. 단지 항해성능만 최대화 시켰을 뿐이죠. 충돌이 일어나면 100% 다른 배가 이깁니다.

 

 갈수록 이 노르만족의 약탈이 심각화 되자 전 유럽은 노르만의 간섭에 놓이게 됩니다.

 

* 당시 유럽이 노르만으로부터 침략 받은 상황

 

1. 912년, 카를 3세가 노르만족에게 항복하고 서 프랑크의 센강 유역 일부를 노르만의 땅으로 인정 -> 노르망디의 시초

2. 노르망디 침습의 주역인 롤로가 노르망디 공국(公國)을 건국함

3. 1066년, 노르망디공국의 왕 기욤(윌리엄 1세)이 잉글랜드 왕가의 상속 약속을 이유로 침공 -> 10월 14일, 잉글랜드 왕 헤럴드와 헤이스팅스 전투 -> 승리

4. 잉글랜드에 노르만 왕조가 열림 (앵글로색슨족의 몰락)

5. 선주민이던 앵글로색슨과의 대립이 격화되자, 불만 해소를 위해 윌리엄 1세가 노르망디식 봉건제를 도입 -> 봉건제의 시초

6. 노르만의 침입이 전 유럽으로 확산됨. (러시아, 체코, 이탈리아, 프랑스, 동로마 등등)

 

 

 대개 이런 식입니다. 잉글랜드의 경우, 선주민족과 이민족의 갈등이 심했는데, 앵글로색슨족과 노르만족과의 갈등을 잘 묘사한 작품이 제가 어렸을 때 읽었던 ‘아이반호’에서 잘 나타나있는 것 같습니다. 아이반호의 아버지는 아이반호가 노르만족인 왕 리처드 1세의 기사가 되었다는 사실에 분개하여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끊죠. 이쯤 되면 눈치 채실 겁니다. 맞습니다. 맨 위에 있는 사진이 영화화된 아이반호의 포스터입니다. 꽤 유명한 소설이니, 잘 기억해둡시다. (발음상 아이반호우 라고 하는 곳이 있음.)

 

 노르만족은 이밖에도 이탈리아, 러시아 등지에 침략하여 나라를 여러 개 건국했는데, 이중 시칠리아 왕국, 노브고로트공국(Duchy of Novgorod)이 좋은 예입니다. 특히 노브고로트 공국은 15세기쯤에, 모스크바대공국과 통합되면서 현재의 러시아의 모습을 형성하였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노르만 족의 일부는 북극의 일부인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에 정착했다는 사실! 이러한 모험의 원동력은 노르만인들의 풍부한 ‘호기심’과 ‘모험심’, ‘용기’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 노르만 족이 전 유럽에서 산발적으로 침략을 감행함으로써, 백성들은 멀리 있는 왕보다 가까이 있는 귀족들에게 더욱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언제 그들에게 죽을지 모르는데, 어디있는지도 모르는 왕에게 달려가 사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요. 이는 곧 봉건제의 시발점이었습니다.

 

 봉건제, 전 유럽으로 확산되다

 

 우리가 잘 아는 봉건제는 현재의 프랑스인 서 프랑크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났습니다. 메르센 조약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서 프랑크의 왕들은 날이 갈수록 격화되는 노르만 인들의 해적질을 막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결국, 912년에 카를 3세가 노르만에게 아예 땅덩어리 일부를 떼어주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지방의 귀족들을 영지(領地)화(化)하여 자신들의 고유 영토로 만들었습니다. 왕도 하나의 지방 귀족으로 전락하였습니다. 이 귀족은 시간이 지나면 ‘영주’라는 봉건제 계급 개념에서 지배층에 속하게 됩니다.

 

 서 프랑크의 카롤링거 왕조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연스럽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 프랑크의 수도인 파리의 귀족들은 나약한 카롤링거 왕조를 갈아치우고 새로운 왕조를 형성하려고 논의하였고, 이에 추대된 사람이 위그 카페입니다. 위그 카페는 프랑스 역사에서 중요한 시초(始初)의 역할을 한 사람인데, 그가 지배한 시기는 귀족들의 세가 워낙 커서 정치적 역량이 큰 그도 결국 강력한 왕권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사실, 여러 사서에서는 ‘위그 카페는 987년, 카롤링거 왕조의 마지막 루이 5세가 죽자, 쿠데타를 일으켜 계승자들을 모두 추방. 감금하고 자신이 왕이 됐다.’하는데 사실 ‘위그 카페는 987년, 귀족들의 요구를 못 이기고 왕이 됐다.’는 편이 더 자연스러울 겁니다. 하지만, 카페 왕조는 백년전쟁이라는 새로운 전기를 맞으면서 필리프 4세때 봉건제가 사실상 해체되었습니다. 이후, 프랑스는 나폴레옹 지배기까지 영국과 유럽 최강을 다투는 강호(强豪)가 되었습니다.

 

 이야기가 좀 샜지만, 봉건제의 형성에 대해 조금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서 프랑크에서만 봉건제가 형성됐다면, 유럽에서 봉건제라는 말은 쓰이지 않았을 겁니다. 사실, 봉건제의 개념이 애매한데, 여기에서는 설명이 매우 복잡해지고 저도 잘 이해하기 어려우니 중국과 비슷한 개념으로 이해해두시면 될 겁니다.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봉건제에 대해서 여러 의견이 많습니다.

 

 봉건제의 시초는 로마의 은대지제도(恩貸地制度, Benefizialwesen)제도와 게르만의 종사제도(從士制度, Gefolgschaft)가 결합한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대충 중학교 과정에서 다들 배우셨으리라 압니다. 그럼 자세히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은대지제도는, 3세기 이후 로마가 점점 쇠약해지는 국력으로 인해 점점 약해지는 국경 방비를 대신해준 게르만에게 땅을 내려주는 제도입니다. 이 제도는 프랑크로 답습(踏襲)되는데, 약간 성격이 변하게 됩니다. 프랑크에서 은대지제도는 당시의 지배층(국왕, 지방귀족, 교회세력)이 자신들에게 충성을 바칠 기사나 군사세력에 땅을 내려주는 제도와 그 땅 자체를 ‘은대지(恩貸地)’라 불렀습니다. 사실 은대지라는 용어는 동양적 풍미(風味)가 강한데, 실제 은대지라는 말은 ‘베네피키움’입니다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은대지라는 용어가 더 편해서 그렇게 쓰는 것입니다.

 

 종사제도는 본래 게르만에서 온 제도인데 종사제도를 ‘주종(主從)제도(制度)’라고 부르는 역사학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사실, 종사제도와 비슷한 것은 갈리아 족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이것은 종자제(從者制, vassi)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거는 성격에서 큰 차이가 나니 패스합시다. 종사제도는 카이사르와 관련된 내용도 있지만, 그것은 불분명한 이야기니 넘어가고 처음 게르만의 키비타스 수장이 세운 것인데, 전시(戰時)뿐만 아니라 평시에도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장기적인 주종관계로 발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자격은 자유민인 미성년자에 한정되고, 그 지위는 명예로운 것으로 여겼습니다. 거의 주인집에 기거하면서 무예를 연마하고 주인으로부터는 무기 ·말 ·식사 등을 제공받으면서 전문적 전사(戰士)로서 봉사하였으나 성년이 되어 가정을 가지면서 주인으로부터 독립하여 주종관계가 해소되는 형태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네이버에 나오네요. 저도 이해를 잘 못하겠습니다만, 대충 이렇게 설명하겠습니다.

 

 봉건제는 은대지제도와 종사제도가 결합한, 3가지 요소를 갖춘 정치적 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봉건제의 가장 큰 영향력은 거의 모든 유럽 지역이 도시국가 화하였다 할 수 있습니다. 명목상 왕의 명령으로 봉토를 받는다고는 하지만 거의 대부분 전쟁을 통하여 봉토를 획득하였습니다.

 

 오늘은 독일의 봉건제에 대해서 이야기해드리겠습니다. 독일의 모태인 동 프랑크는 오토 1세가 잠시나마 중앙집권화에 성공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교황으로부터 카를루스 대제를 이은 황제의 자격이 있다고 명목상 인정받아 ‘신성로마제국’을 형성하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후손 왕들이 통치력에 있어서 신통치 않자 다시 수많은 영주들의 세력으로 분열하는데 이때쯤 되면 독일의 봉건제도 정착은 거의 완료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독일의 봉건제도는 약간 다른 점이 있습니다. 봉건제는 봉토를 매개로한 주종관계가 형성되어야하는데, 독일은 대대로 내려오는 세습지가 많아서 봉토를 매개로 하지 않은 충성 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게르만 족이 유럽 어느 나라보다 비율이 높은 독일에서는 은대지 제도가 정착하지 못하고 오히려 종사제도가 발달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봉건제에 대한 개념에 대해서 이야기해드리고 끝내겠습니다. 봉건이라는 말은 중국에서 왔으며 서양에서도 비슷한 개념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봉건제도(封建制度, feudalism)의 3가지 요소는

 

1. 봉주(왕, 대영주, 영주)와 봉주의 하위 개념인 봉신(대영주, 영주, 기사)간에 봉토(또는 농노)를 매개로한 주종(主從)관계

2. 노예제와 자본주의제도 사이에 존재하는 농노(農奴)제도의 성립으로 생겨난 농노(農奴)와 지배층간의 지배(支配)예속(禮俗)관계

3. 영주가 다스리는 지배에 한해서의 자치권(自治權)과 왕이 간섭하지 못하는 불간섭(不干涉)권

 

로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 같은 특징이 가장 강했던 곳은 서 프랑크 지역인데, 이 서 프랑크의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하겠습니다. 그럼 안녕~

출처 : 삼국지 커뮤니티
글쓴이 : 7로군근로자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