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민주주의의 시초가 될 대헌장에 서명하는 잉글랜드의 존 왕 (On 1215)
Beginning Of the Middle Ages (중세의 서막) -3)
흐음, 휴가를 갔다오니 몸이 천근만근이네요. 하지만, 개인게시판 관리에는 소홀히 할 수 없다는 사명감에 이렇게 다시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습니다. 어제, 서 프랑크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고 약속한 것 같은데, 이제 그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프랑스로 변모된 서 프랑크
서 프랑크는 중학교 과정에서 프랑스의 모체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서 프랑크라는 말은 실제로는 역사학 상에서 ‘프랑크가 분열된 직후’에 학문적으로 말하는 것일 뿐 실제로 베르됭 조약으로 서 프랑크를 형성한 카를 2세 때부터 이미 서 프랑크는 프랑스(France)라고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카를 2세는 대신들을 모아놓고 ‘동 프랑크도 자신들이 프랑크 제국의 정통 후손이라고 하는데 더 이상 이러한 문제를 두고 실랑이를 벌여봤자, 이득이 없다. 따라서 이미 라틴어와 달라지고 있는 지방 토속어를 우리의 진정한 국어로 삼고, 우리의 국호를 프랑크와 구별할 수 있는 프랑스로 개칭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때 카를 2세가 말한 ‘지방 토속어’는 프랑스 사람들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라고 자부하는 ‘프랑스어’가 됩니다. 실제로, 중세에 유럽 공통어는 라틴어였지만 근세부터 유럽 공통어는 프랑스어가 됩니다. 뭐, 지금은 영어가 공용어지만요.
카페왕조 초기, 귀족들의 횡포가 너무 심했기 때문에 이미 왕권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왕은 당시 수많은 지방통치 귀족 중 하나에 불과하였습니다. 사실, 프랑크 제국 전성기 시절에도 왕은 그다지 큰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교통수단이나 지방간 교역이 활발치 못했기 때문에 한 사람이 갖는 영향력은 크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유럽의 중심지는 파리였기 때문에, 프랑스가 전체적으로 갖는 힘은 가히 유럽 최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제 1차 십자군 전쟁 때 프랑스의 제후와 영주(기사층)들이 주축이 되어 아랍 군을 물리치고 예루살렘 왕국을 건국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왕권이 강하지 않기 때문에 그 힘을 발휘할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백년전쟁 때 부르고뉴파와 오를레앙 파로 분열되어 대헌장(大憲章)으로 정치적 안정을 되찾은 영국에게 침략당해 초기에는 영토 대부분을 뺏기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전형적인 봉건 국가였던 프랑스는 여러 경험을 겪으면서 새롭게 발전하게 됩니다.
중세 잉글랜드의 발전
이러한 상황 속에서, 프랑스는 중세 중기까지 전형적인 봉건 국가로 자리 잡았습니다. 한편, 영국을 볼까요? 잠시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그런데 일반인들은 ‘영국=잉글랜드’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영국이라는 말을 단순히 영어로 하면 잉글랜드라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인데, 사실 그것은 타당치 못합니다. 영국을 그대로 영어로 하면 England가 아니라 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 and Her other Realms and Territories(브리튼 섬과 북 아일랜드 그리고 그 밖의 그녀의 다른 영토와 영지의 연방 왕국)이라는 뜻입니다. 엄청 길죠. 이게 바로 영국이라는 겁니다. 최근엔 귀찮아서 United Kingdom(더 줄여서 U.K.)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여기서 ‘그녀’라는 말은 영국 여왕을 뜻하는 말입니다 금세기 들어 영국은 계속 여왕이 나오고 있죠)
그렇다면, 잉글랜드는 무엇일까요? 잉글랜드는 역사적으로 볼 때 스코틀랜드는 제외한 브리튼 섬의 아랫부분을 말합니다. 브리튼 섬의 북부에 위치했던 스코틀랜드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근세까지 존재한 어떤 자치 국가 비슷한 지역이었는데 영국이 제국주의에 빠져들면서 이 지역과 아일랜드 그리고 여러 식민지를 흡수해버립니다. 하지만 현대 들어서 잉글랜드라는 법적인 개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잉글랜드는 영국의 중심지인데다가 2차 대전이 끝나면서 모든 식민지가 독립하였기 때문에 잉글랜드 자체가 영국이라는 범위와 거의 같아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영국=잉글랜드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실 그다지 아주 틀린 것도 아니니 지금까지 말한 것 넘어갑시다.
영국, 아니 지금은 브리튼 섬이라고 하는 게 옳을 듯싶군요. 철기시대 브리튼 섬은 고대 지금의 도버 해협을 넘어와 정착하는 켈트 족의 켈트 사회가 성립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팽창하는 로마인들의 위협을 받았고, 결국 그 유명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케사르, 시저)에 의해 점령되었습니다. 사실 그때에는 문명이라는 게 유럽 전역에서 드물어서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 무조건 문명이라는 게 형성됐다 보시면 됩니다. 만약 로마가 지배를 하지 않았다면, 미개한 브리튼 지역은 프랑스의 영토가 되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로마가 몰락한 후, 게르만의 민족 대이동 가속화의 물결로 이민해온 앵글로색슨 족은 전형적인 게르만의 일족답게 근면하고 착실한 민족성을 보여 이 지역을 빠르게 성장시킵니다. 로마가 속주로 삼음으로써 지배했을 시기에는 본국 로마와 너무 멀리 떨어져있어서 성장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웬걸. 앵글로색슨이 터전을 마련한 이 지역에 10세기 초반부터 무섭게 몰려온 노르만족이 침입해왔습니다.
헤럴드 왕이 분전했지만, 용맹 하다못해 포악하기까지 한 노르만 인들은 색슨족을 수수깡 부러뜨리듯이 물리치고 이 지역에 자신들의 또 하나의 왕조를 세웠습니다. 색슨족들로서는 분할 노릇이지요. 이 부분은 전편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노르만족이 잉글랜드를 점령하니 발전이 멈췄습니다. 왜냐고요? 당시 노르만족 역대 왕들은 전쟁에서는 매우 용맹했지만, 정치력은 형편없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귀족들의 반발을 사는데, 그것은 존 왕 때에 절정에 이르러 결국 1215년에 유명한 대헌장 발표에 연관이 있습니다.
1199년에 부왕인 헨리 2세가 죽자 왕위를 물려받은 존 왕은 성격이 포악하여 자신의 조카인 아서가 왕위에 대한 불만을 ‘술김에’ 말했다가 즉시 아서를 참수시켰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1204년에 선대왕들이 대륙 프랑스에 점령해둔 땅을 필리프 2세와의 전투에서 대패하여 거의 모두 잃었습니다. 프랑스와의 전쟁이 길어지자 그는 중과(重科)세를 부과하였고, 이는 더 큰 불만을 사서 귀족들의 반감을 샀습니다. 결국 프랑스 전쟁도 1206년에 패했습니다. 1213년 또한, 대주교 선임 문제에서 교황과 충돌하여 교황에 파문당하여 굴복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습니다. 1214년 프랑스 영토를 되찾는다고 출병하고 귀족들에게 군사력을 바치라 요구하자 귀족들이 폭발하였습니다.
1215년, 프랑스로 떠났던 존 왕이 돌아오자 귀족들은 그를 런던에서 포박하고 충성서약을 그의 면전 앞에서 파기하였습니다. 그리고 국민의 권리와 왕권의 제한을 주요 의제로 하는 대헌장에 서명토록 협박하였습니다. (마그나카르타, Magnacarta) 당시로서는 귀족들의 권리를 중시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국민 전체의 권리를 주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대헌장은 존 왕이 나중에 파기한다고 발표하였지만, 대세를 거스를 수가 없었고 결국 대헌장은 ‘말로만’ 파기한 셈이고 결국 잉글랜드 역사 전체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오늘 내용은 여기까지입니다. 내일부터는 내용을 좀 줄이고 요약만 하겠습니다. 제가 혈액형이 A형이라서 그런지도 모르만 굉장히 뭘 할 때마다 꼼꼼하지 않으면 불안증이 생겨서 가만히 있지 못하거든요.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요약만 하시는 게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메일 보내주세요. 꼼꼼하게 해드림
-불초(不肖) 7로군근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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