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olution and Changing (혁명 그리고 변화) -1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 일련의 변화들은 어떠한 세력들에게는 권력을, 또는 실권이라는 것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사실, 유럽의 역사를 말할 때 십자군 전쟁 이전의 역사는 화려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아시아나 아랍 지역에 비할 바가 못 됩니다. 하지만 이제부터 시작될 큰 역풍이 유럽 역사를 통째로 바꾸어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까지 무엇이 진행되었고 그것이 지금 당시 중세 후기에 어떠한 영향이 끼쳤는가를 파악해야 합니다. 우선 가장 큰 사건은 이민족의 대대적인 침입으로 촉발된 국권 분열사태로 인한 왕권 약화와 봉건 제후 득세라는 것을 잘 알아두어야 합니다.
그 두 번째는? 그렇습니다. 봉건 제후는 자신들의 부귀영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세속적인 권력이 극대화되었던 교황을 금전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지원해주면서 둘 사이의 밀착 관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때 치명적인 사건 하나가 터지면서 변화를 겪게 됩니다.
1. 십자군 전쟁이 남긴 것들
교황은 팽창하는 동방의 이슬람에 대해서 극도로 불안해졌습니다. 이슬람에 대해서 정치적 또는 종교적으로 대항하기 위해서는 크리스트교나 전 유럽의 단합이 중요했으나, 당시 크리스트교는 북서유럽에 많이 퍼져있던 로마가톨릭(Roman Catholic Church)과 동유럽을 중심으로 퍼져있던 비잔틴 정교(Eastern Orthodoxy, 국가마다 OOO 정교라고 이름 붙었음)로 나눠져 있었고 정치적인 대립 상태였기 때문에 상당히 불안하였습니다.
또한, 봉건 영주들 또한 뿔뿔이 권력을 분할하여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총체적인 힘의 집중을 기대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교황은 십자군 전쟁을 계획하게 되었습니다. 우르바누스 2세(Urbanus II)가 주장한 십자군은 1291년 결국 유럽 측의 대패로 끝이 납니다.
당시 유럽인들은 십자군의 패배가 믿기지 않았습니다. 뭐 3차 원정 이후에는 거의 이익을 보려고 군대를 보낸 것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래도 하나님이 지켜주시겠지’하는 심리가 작용하였고 많은 이들이 십자군에 참전하였고 목숨을 잃었습니다. 십자군 전쟁 이전에는 정말 종교가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할 때마다 종교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진정으로 캐치 해야 할 것, 십자군 패배 이후 가장 직결되어 남긴 것은? 그렇습니다. 이제 유럽인들은 종교를 종교적인 문제로 한정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쉽게 말해서 무슨 정치적인 문제가 발생해도, 예를 들어보죠. A라는 권력자가 왕에게 반란했다고 칩시다. 십자군 전쟁 이전에는 “A는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천벌을 받을 거야.”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 이후에는 “A가 왕의 자리에 오를까?”, “왕을 보호할 세력을 없을까?”라는 등의 그야말로 ‘실질적이고 합리적인’ 추측들이 나오게 됩니다. 터무니없이 신과 관련 짓는 과도한 종교 열풍이 지배하던 중세 전기는 이제 끝난 것입니다.
십자군이 남긴 것은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십자군 전쟁의 두 번째 산물인 이것은 이탈리아의 도시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당시 비잔틴, 그러니까 로마의 후예들이 보존해온 나라는 재정적으로 아주 부유한 나라였습니다. 동방에서 신비한 물건을 서유럽으로 수출하는데 (중계무역) 큰 이익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자연스럽게 비잔틴과 유럽 사이에 있는 이탈리아 반도의 해안 도시들은 이 중계무역 속의 중계무역으로 돈을 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비잔틴은 군사적으로 강대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때 팽창을 거듭했던 이슬람이 침입을 자주 해옴으로써 군사적으로 미미한 나라였습니다. 이 상황에서 십자군 전쟁이 터졌고 십자군이 왔다갔다하면서 비잔틴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이탈리아는 (이탈리아 도시들을 편의상 이탈리아라 하겠습니다) 찬스를 잡았다 생각하고 십자군에게 군수품을 대주면서 “비잔틴을 공격해달라”는 이상한 주문을 합니다. 십자군은?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결국 비잔틴은 무역 경쟁에서 이탈리아에게 패배하였습니다. 이탈리아는 비잔틴 없이 아랍으로부터 신비한 상품들을 들여올 수 있게 됐습니다. 이른바 ‘도시의 발전’이 시작된 것입니다.
도시가 상업적으로 돈을 많이 벌게 된 것은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탈리아를 포함한 전 유럽이 군사적으로 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아랍세계에 대항하자 그 아랍세계에 대한 인식이 크게 확산되었습니다. 좋든 싫든 그 아랍이라는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슬람 상품들에 대한 수요가 자연스레 증가했고 이 사이에서 이탈리아 도시들은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었습니다.
이 같은 도시 발전의 영향은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습니다. 도시들은 혼자만으로는 군사적으로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생각하고 여러 다른 도시들과 동맹을 맺기 시작하였습니다. 독일 북부 도시들이 맺은 ‘한자 동맹(Hanseatic League, 영어)’을 중요한 일례로서 들 수 있습니다.
본래 한자(Hansa, 독일어)라는 말은 12세기, 13세기 북해, 발트해 연안에서 북동 유럽과 북유럽 연안 국가들을 두루 돌아다니며 넓게 활동하는 상인 (편력상인, 遍曆商人) 들의 상업조합 (우리가 잘 아는 길드라고 해도 괜찮을 듯)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스스로 군사력 확충에 필요성을 느낀 그들은 1230년에 뤼베크(Lübeck, 1158년, 하인리히 황제에 의해 자치를 인정받은 상업도시), 함부르크(Hamburg, 1189년, 프리드리히 황제에 의해 자치를 인정받은 상업도시. 현재 독일의 주요 상공업 도시) 사이에 체결된 방위조약을 필두로 점점 자기들끼리 세력 결집을 시작하였습니다.
PS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시험과 여지없이 밀려드는 귀차니즘으로 인하여 부실해지고 있는 활동해도 묵묵히 활동하는 모습 지켜봐주시는 삼조님과 그 밖의 여러 독자들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요즘 너무 힘들군요. 토요일을 제외하면 거의 새벽에 오는 실정이라 집에오면 삼컴보다 자는게 생각날 정도입니다. 시험 끝나면 열심히 활동하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7로군 드림.
'이야기테크 > 역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2) 프랑스 왕실 계보도 보너스 칼럼 (0) | 2009.02.28 |
---|---|
[스크랩] (9) 격동의 시대 -4) 십자군전쟁 ③ (0) | 2009.02.28 |
[스크랩] [중세특집] 혁명 그리고 변화 2 (0) | 2009.02.28 |
[스크랩] (1) Rise Of Germane (게르만족의 신흥) -1) (0) | 2009.02.28 |
[스크랩] (2) Rise Of Germane (게르만족의 신흥) -2) (0) | 2009.0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