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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7) 격동의 시대 -2) 십자군 전쟁 ①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2. 28. 07:03

 

a Turbulent Period (격동의 시대) -2) 십자군 전쟁 ①

 

 

 지난번 올린 ‘동 프랑크의 쇠퇴’(원래 쓰러지는 신성로마제국 이었던)에서 내용이 부실해서 꼬릿말이 안 올라온 것으로 압니다. ㅠ.ㅠ 사실 공백기가 너무 길어서 눈치 보일까봐 내용을 빨리빨리 만들어서 했기 때문에 내용 부실에 대해서는 제 잘못이 큽니다. 만약 내용 중 전편 내용과 관련이 있다면, 전편 내용을 뒤적거리고 보시기 바랍니다. (죄송)

 

 클로비스가 프랑크 왕국을 건국할 때에 그 과정에서 이민족 게르만 족과 선주민 라틴(로마) 족, 갈리아 족의 융합을 위하여 가톨릭으로 개종한다고 나옵니다. 그리고 예수의 사도 베드로가 세운 로마 교회는 전 유럽으로 세력이 확장됩니다. 이 과정에서 유럽인은 자연스럽게 가톨릭의 영향력을 받을 수밖에 없었으며, 또한 교회는 그에 따른 특권과 여러 보상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이는 유럽인의 과도한 종교열로 이어집니다.

 

 교회의 왕, 교황은 지금 있는 영향력과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영향력을 지녔습니다. 특히 아주 전형적인 가톨릭 국가였던 프랑스 왕국과 신성로마제국, 또 신성로마제국이 실질적으로 분열되어 형성된 여러 왕국들은 교황과 교회에 막대한 자금과 영토, 여러 군사적 지원을 해주어야했습니다. 만약 이것은 거부한다면, 그 군주는 교황으로부터 종교적. 지위적 파문(破門)당하여 명분적으로 가톨릭 신자의 권리와 왕권을 잃습니다. 중세 초기에는 왕의 권한이 분열된 상황으로 형편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일이 가능하였습니다. 만약 왕이 힘이 있었다면 교황이 ‘명분적으로’ 아무리 왕권을 인정하지 않아도 실질적으로 왕권은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전 사회가 철저히 가톨릭 중심으로 이러진 유럽 세계는 7세기 이슬람의 현재 시리아 지역(가톨릭의 뿌리인 그리스도교의 형성이 이루어진 곳. 예루살렘 위치) 점령사건 이후 외부의 침입을 받게 됩니다. 프랑크 왕국에서 카롤링거 왕조 형성 초기과정에서 궁재의 세력 확장에 관해서 말씀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궁재 카롤루스 마르텔이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대군을 이끌고 이슬람의 침입 세력들을 막아낸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이때부터 전 유럽 지역이 서서히 이슬람의 침입에 노출되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이것은 곧 말할 십자군 전쟁의 발발과 너무나도 연관이 깊습니다. 중학교 2학년 과정이시라면, 이 부분은 선생님께서 반드시 형광펜 몇 번으로 그으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638년, 아랍인들은 이슬람의 성도(聖都)이면서, 기독교의 성지(聖地)이기도 한 예루살렘을 점령하였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멸망한 로마인들이 남아서 유지한 동로마, 즉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였지만 그것은 명목상이었고 사실상 무정부상태이면서 자치도시상태였습니다.

 

 바로 이 예루살렘이 기독교의 필수 순례(巡禮)지이자, 성스러운 도시였던 것. 11세기까지 많은 가톨릭교도들은 이곳을 방문하였고, 일생에 한번쯤은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다녀가야 할 곳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때까지는 이슬람의 아랍인들은 온건(溫乾)한 편이라 적당한 통행료만 지불하면 이교도(異敎徒)라도 성지에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도록 허락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11세기 후엽부터 이슬람 세계에서 새롭게 정권을 잡은 셀주크 투르크 왕국이 갑자기 예루살렘에 순례 온 이교도들을 탄압(彈壓)하고 다른 민족의 출입을 엄금(嚴禁)하였던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영토에 탐욕(貪慾)이 있었던 셀주크 이슬람 세력은 비잔틴 제국의 경계선까지 군대를 보내 부유(富裕)하기로 이름났던 도시인 콘스탄티노플, 즉 비잔틴(동로마)제국의 도읍(都邑)을 치려고 했습니다. (셀주크 족의 후손이 지금의 이란인들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강경(强勁)하고 잔인(殘忍)성을 지니고 있는 지금의 이란 사람들과 셀주크 족이 어쩐지 닮은 구석이 있네요.)

 

 1092년에, 셀주크 왕국이 왕권 다툼으로 세력이 약해지자 그 틈을 타 위협(威脅)을 받고 있던 비잔틴 황제 알렉시우스 1세(Alexius I)는 로마의 부흥(復興)을 꾀하고자 같은 그리스도교의 지도자인 로마 교황 우르반 2세(Urbanus II)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당시 비잔틴 황제는 동로마의 교황이라고도 할 수 있었습니다.)

 

 우르반 2세는 이참에 크게 강력해진 교황권과 종교열을 이용하여 군사적인 영향력까지 행사하려 했기 때문에 십자군(十字軍) 결성 주창(主唱)에 그다지 반감(反感)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때까지 비잔틴과 갈등이 있었던 종교 문제에 있어서도 비잔틴 그리스도교(그리스 정교)를 로마 가톨릭으로 흡수하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가장 격렬하게 십자군 결성을 여러 군주에게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프랑스의 여러 지방 세력과 신성로마제국의 여러 군주들이 점점 모여 자신들의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奪還)하려고 나섭니다. 드디어 십자군 제 1차 원정의 막이 오른 것입니다.

 

 PS 십자군 특집을 맞아 폰트(글씨체)를 무료로 다운받아 한번 해봤습니다. 으음. 호응이 좋다면 계속 실시하겠습니다. ^^

출처 : 삼국지 커뮤니티
글쓴이 : 『위사령』7로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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