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urbulent Period (격동의 시대) -3) 십자군 전쟁 ②
교황(敎皇)은 1095년 11월 27일, 3천여 명의 성직자를 소집(召集)하여 프랑스 중부 산악도시 클레르몽에서 공의회(종교회의)를 열었습니다(클레르몽공의회). 이날 공의회에서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성직자들의 찬성과 콘스탄티노플에서 급파(急派)된 사자(使者)를 통해 비잔틴 정교회(正敎會)의 지지와 지원을 확인한 교황은 비밀회의가 끝난 후, 일반 청중들에게 ‘형제의 도시가 이슬람에게 위협받고 있습니다. ’라는 말로 설득하여 십자군(十字軍) 조직에 성공하였습니다.
당시 십자군(十字軍) 결성(結成)의 이유에 여러 의견이 분분(芬芬)한데, 오래전부터 악화되어온 봉건 영주(호족, 왕, 황제, 기사)들과 교황의 관계, 동방 정교회 흡수가 주요한 원인(原因)이 있었습니다. 예전부터 교황을 위한 무조건 희생(犧牲)을 강요하는 교황에게 봉건 영주들은 반감이 들 수밖에 없었고, 일부 영주들은 자치(自治)도시(都市)를 세워 왕을 명분적으로도 따르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습니다. 이는 후에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봉건제를 무너트릴 자치도시의 발전, 중산층(소위 유산 제3계급, 부르주아)의 등장과 연관이 있으니 잘 기억해 둡시다. 악화되어온 그들의 관계를 종교적 열정으로 개선시키려면 십자군만큼 좋은 것이 없었습니다. 곧 가톨릭 세계가 이슬람으로부터 위협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말로 관심을 이 한군데로 쏠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지(聖地) 탈환(奪還)을 줄곧 주장한 교황 덕분에 여러 성직자들이 발 벗고 나섰습니다. 먼저 프랑스의 수도(修道)사인 피에르 어밋(Pierre l'Ermite)가 청중(聽衆)들을 감격(感激)시켜 민간(民間) 십자군(十字軍)을 결성하게 됩니다. 이들은 하느님에 대한 충성(忠誠)을 맹세하고자 십자모양의 천을 실로 옷에 꿰었는데, 이것이 십자군(十字軍, Crusader)이란 말의 기원이 됩니다. 이들은 처음으로 십자군(十字軍)으로서 예루살렘을 향해 떠나갔는데 마치 우리나라의 동학(東學)농민(農民)운동(運動)과 같이 농민 군대였다고 합니다. 그들이 프랑스 다뉴브 강에 다다랐을 때, 그 수는 5만에 달했는데 당시 많지 않았던 유럽 인구에 비하면 엄청난 수였습니다.
1년에 걸친 행군 끝에 질병과 약탈 등을 견뎌 동로마의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에 도착한 그들은 비잔틴 제국의 황제 알렉시우스 1세(Alexius I)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한 번도 제대로 된 군사훈련을 받지 않은 이가 태반이고 제대로 무기를 갖추지 않은 자는 더 많았습니다. 결국 걱정이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소 아시아에 도착한 그들은 바로 셀주크 투르크에 대패하고 대 학살까지 당하였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정규(正規) 십자군이 결성됐는데, 이들은 무기도 퍼펙트, 훈련도 퍼펙트 한 정통 기사 정예군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군대였습니다. 이들의 무기와 군량미(軍糧米)를 구입하기 위해서 정규 십자군 모집을 주도한 주교(主敎) 아데바르 몬테일(Adhemar of Monteil)은 프랑스 로렌의 공작인 고드프루아 드 부용(Godefroi de Bouillon)에게 금전적(金錢的)지원을 요청하였고, 그는 이를 선뜻 받아들였습니다.
아데바르와 고드프루아의 지휘 아래 최강의 정규십자군은 계속 그 수가 불어났습니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Jerusalem, 현(現)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공동소유 도시)의 정복을 통하여 이익을 얻고자 온 잉글랜드, 프랑스, 에스파냐, 신성로마제국 등지에서 온 기사들이 계속 모여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종교적인 열정과 정치적인 목적이 결합되어 형성된 십자군 전쟁은 나중에 큰 한계로 인해서 실패하게 됩니다만, 고드프루아가 이끈 제 1차 십자군 전쟁은 승리하게 됩니다.
1096년 여름에 출발하여 이듬해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한 이들은 농민 십자군과는 대조적으로 비잔티움의 황제로부터 아주 열렬한 환영을 받습니다. 하지만 정규 십자군의 지휘자들은 달랐습니다. 각자 자신들에게 뭔가 이익이 될 것을 찾기에 급급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규 십자군이 반드시 예루살렘을 탈환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예루살렘을 향해 떠났습니다. 나중에,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하게 되는데, 이것은 십자군이 정치적, 금전적 이익을 좇아 십자군에 참여했다는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중세 문학가 ‘타소’의 <해방된 예루살렘>이라는 서사시에 따르면 이들의 군세는 약 10만여 명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당시 반복된 기근과 흉작으로 인구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유럽에서 한 군세의 수, 그것도 최정예 군세가 이러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되기 때문에 보통 1차 원정 십자군의 수는 최소 3만 명 ~ 5만 명 정도로 추산합니다. 가톨릭을 믿는 이 당시 유럽인들은 이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기 때문에 과장하는 부분도 없지 않습니다.
1098년 즈음에 소아시아에서 아랍 군대와 충돌한 십자군은 승리를 거두었고 이 해에 안티오크 자치국을 건국합니다. 한 군대에 의해 만들어진 자치국의 국력이 말할 것도 없이 부실했기 때문에 십자군 전쟁 실패하면서 모두 멸망하고 말지만요. 이때부터 십자군은 본질을 드러내며 점점 진격하기에 주춤거렸습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점령 지역에서 어떤 식으로는 뽑아내기 위해서였죠. 하지만 여론이 그렇지 않았습니다. 유럽 본국에서는 예루살렘 진격을 독촉하기에 이르렀고 1099년에야 예루살렘을 점령하였습니다.
<격렬한 전투 끝에,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당당한
고드프루아 드 부용 백작과 그를 따르는 십자군 병사들 >
본래 정규십자군이 정예군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던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고드프루아가 사심(私心) 없이 종교적인 열정으로써만 예루살렘을 공격했기 때문에 1차 원정은 성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드프루아 드 부용 백작이 얼마나 겸허(謙虛)한 사람이냐면, 1차 원정이 성공하여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백작의 성을 팔아 이곳에 나라를 세우고 유럽인들의 이주를 도울 정도였습니다.
예루살렘을 점령한 이후, 예루살렘에 남아 성지 수호(守護)자라는 의미로 그곳에 남은 고드프루아와 몇몇 귀족들을 제외한 모든 군대가 돌아간 가운데, 고드프루아와 그 귀족들은 예루살렘의 방위력을 높이기 위하여 유럽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지역에 4개의 십자군 왕국을 세우게 됩니다. 예루살렘, 트리폴리(Tripoli, 레바논의 한 도시), 안티오크(Antioch, 터키의 한 도시), 에데사(Edessa, 그리스의 한 도시) 국이 그것인데 별로 안 가서 멸망하게 됩니다.
이것이 1차 원정 성공의 과정입니다. 1차 원정 성공으로 인한 여파는 은근히 컸는데, 이는 일시적으로 유럽의 종교열을 더욱 높였습니다. 또한, 종교와 신앙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무력도 많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더욱 부각하게 된 십자군 전쟁은 종교적 목적을 띈 ‘요하네스 기사단’, ‘독일 기사단(Teutonic Order, 튜튼 기사단이라고도 함)’ 등의 종교적 군사단체가 예루살렘 왕국 안에서 등장하게 됩니다. 교과서에서는 흔히 종교군사회라고 합니다. 특히 여기서 독일 기사단은 후에 동 독일 지역을 장악하면서 독일의 전신(前身)이 된 프로이센의 시초를 마련하게 됩니다.
기사단은 흔히 종교와 군사력의 결합이라고 볼 수 있는데 무력을 통하여 종교적인 신앙을 닦고 전파를 목적으로 합니다. 기사단에는 몇몇 사체들과 수행원들이 가세하여 만들어지는데, 앞에서 말씀드립 종교적 목적이 큽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시간은 2차 원정부터 조금 세세하게 말씀드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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