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테크/종교이야기

한국불교의 이해-4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3. 9. 01:01

Ⅴ. 배불정책 하의 수난과 활동/조선시대

1. 조선조 건국과 배불의 강화

 고려에 이은 조선은 건국(1392)과 함께 성리학을 새로운 정치적 이념으로 채택하고 불교를 배척했거니와 이런 현상은 이미 고려 말부터 충분히 예측되는 바였다.

 고려불교는 특히 그 후기에 들어와 정치세력과의 결합 및 승려들의 부패 등으로 인해 그 자체 모순이 심화되고 있었다. 이데 따라 일부 지식인 및 신진관료층으로부터 불교계의 현실에 대한 비판이 조심스럽게 제기되더니, 그것은 오래지 않아 강력한 排佛의 여론으로 선회하였다. 여기에는 중국 원(元 )으로부터 도입된 새로운 유학사조(儒學思潮)인 성리학의 영향도 적지 않다.

 태조 이성계의 역성혁명(易姓革命)을 도와 조선을 세운 개국공신들 대부분은 이 같은 성리학을 정신적 지주로 삼는 신진관료층이었다.

 한결같이 불교의 폐단을 거론해 온 이들에 의해 유교 국가로서의 조선왕조가 건국됨으로써, 이제 숭유배불의 기세는 움직일 수 없는 시대의 한 조류를 이루었다.

 조선조 배불의 윤곽은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그 전기에 이미 대체적인 윤곽이 드러나며, 그것은 개국 초의 신속하고 강경한 배불책의 건의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조정 내에서 막강한 발언권과 영향력을 갖고 있던 유신들은 여말 이래 계속 주장해 온 배불을 새 왕조의 기본적인 정책과제의 하나로 수행하고자 하였다. 유신들이 그것을 얼마나 시급한 과제로 인식하고 있었던가 하는 것은 태조의 즉위 불과 3일 만에 올린 사헌부의 헌책(獻策)가운데 대대적인 ‘승니척태(僧尼斥汰)’의 건의가 포함되어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유신들의 강경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태조 대에 그나마 불교가 타격을 줄만한 조치 없었던 것은 왕과 유신들이 정치적으로는 인식을 함께 하면서도 종교적으로는 서로 입장과 신념이 달랐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 창업의 시기가 끝나고 유교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제3대 태종대(1400-1418)에서부터는 본격적인 배불정책이 단행되었다. 태종은 부왕 태조와는 달리 불교에 대해 곧잘 혐오감을 드러낼 정도로 전형적인 유자의 면모를 지닌 조선조 최초의 배불군주였다. 이제 그만큼 왕과 배불유신들의 불교에 대한 의견 또한 쉽게 일치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태종은 ① 불교의 종파수를 11종에서 7종으로 통폐합시킨데 이어 ②전국에 242개 사찰만을 공인하여 각 종파에 소속케 하고 ③사원의 토지와 노비를 대폭 몰수하였다. 그 밖에도 ④각 사원에 거주한 승려의 수를 정하여 그 외의 승려를 강제 환속시키는가 하면 ⑤국사 ․ 왕사의 제도를 폐지하는 등 일련의 배불조치를 과감히 단행하였다.

 태종 5년(1405)부터 불과 3년 사이에 나온 이 같은 불교 억압 및 배척의 정책은 일찍이 그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태종에 이은 제4대 세종 대(1418-1450)의 배불책은 이 보다 더 강경하였다. 그는 ①7종을 선 ․ 교 양종으로 다시 폐합하고 ②양종 소속으로 사원 36사, 승려 수 3770명, 급여전지 7950結 로 불교교단의 활동 및 생활기반을 대폭 삭감한 것을 비롯하여 ③도승제의 엄격한 실시 및 연소자의 출가금지 ④성 밖 승려의 도성출입금지 ⑤부녀자의 사찰출입엄금 ⑥내불당(內佛堂)의 철폐 등 가혹한 조치들을 취하였다. 세종은 그 중기 이후에는 신불자로 돌아서 오히려 흥불에 기여하고 있지만, 이 때 감행해 간 그의 배불정책의 강도는 태종대의 그것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태종 ․ 세종대의 배불정책으로 인해 불교는 조선 초기에 그 경제적 ․ 사회적 기반을 거의 해체 상실당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러나 그 뒤로도 이런 정책의 기조는 변함없이 지속되었다.

 제9조 성종 대(1469-1494)네는 핵심적인 것만 하더라도 ①출가의 법제인 도승법(度僧法)의 중단 ②대략 8만여 명에 이르는 승니의 강제 환속 ③왕실과 관련된 불교 의례의 폐지에 이어, ④불공 등 민간의 불교적 풍습 또한 엄격하게 금지하였다.

 유학의 진흥과 함께 유교정치를 더욱 강화해간 성종 대에 특히 도승법이 중단되고 대대적인 승니축출이 강행되었음을 이 시대의 대불정책이 불교의 인적조직의 해체에 집중되어 있음을 말해 준다.

 이렇게 해서 거의 모든 면에서 세력을 상실한 불교는 더구나 10년간 폭정으로 문화전반을 황폐화시켰던 제10대 연산군(1494-1506)의 불교파괴와, 사림파(士林派) 성리학자들의 정치적 부상으로 불교가 더욱 박해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제11대 중종 대(1506-1544)를 거치면서는 그 명맥의 유지마저 어려운 지경에 처하게 된다.

 연산군은 선 ․ 교 양종의 도회소(都會所)를 없앰으로써 사실상 양종마저 철폐한 것을 비롯, 원각사 등 도성안의 사찰들을 강제로 폐쇄시키고 승니를 강제한속 혹은 노비화 하는 등 그의 다른 정책에서와 마찬가지로 불교에 대한 폭정을 거침없이 강행하였다. 이 같은 연산 ․ 중종조의 대불교정책은 한 마디로 파불(破佛)과 폐불(廢佛)로 표현될 만한 것들이었다.

 태종 조부터 본격화된 배불정책은 중종 조에 이르면 폐불의 단계에까지 달하고 있는데, 이로써 조선조 배불정책의 윤곽은 거의 드러난 셈이다.


 2. 흥불 활동과 교단유지의 노력

 조선시대 국가의 종교정책이나 개인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주목되는 것은 외유내불(外儒內佛)이라는 특이한 현상이다. 즉 외적으로는 유교 및 유교적 가치를 중심으로 하면서도 내적으로는 불교에 대해 상당한 배려를 담고 있는 정책성격이라든가, 배불정책과는 상관없이 개인의 의식세계는 여전히 불교가 지배하고 있는 것 등이 그러하다. 이 같은 외유내불의 경향은 다시 공유사불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국가정책이든 개인의 신앙행위이든 간에 공적으로는 유교를 표방하면서도 사적으로는 불교를 수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명분으로나 실제에 있어서 배불이 공식화되어 있던 조선시대에 이처럼 외유내불의 경향이 지속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유교의 종교적 한계성과 지배종교의 인위적 교체에 따는 문제성, 이 두 가지 측면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즉 조선조가 정신이념으로 삼고자 한 유교는 치도(治道)로서 정치 ․ 사회적 효용은 컸을지라도 인간구제의 종교적 기능면에서는 그 한계성을 지니고 있음이 분명하다. 또한 오랫동안 정신세계를 지배해 온 불교의 영향력을 강요하는 국가정책에 의해 쉽게 소멸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외유내불의 경향은 이런 사실의 반증인 셈이다.

 배불이 정책의 기조를 이루었던 조선시대에 몇 차례 흥불의 시기가 있었던 것도 외유내불적 현상의 한 단면이었다.

 태조의 불교정책은 기본적으로 유폐는 시정하되 고려의 불교를 계승 발전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그가 즉위 후에 선종의 무학을 왕사로 삼고 천태종의 조구(祖丘)를 국사로 책봉함으로써, 유교입국(儒敎立國)을 추구하는 왕조초기에 국사 ․ 왕사제도의 틀을 고수하고 있는 것도 그런 의지를 잘 읽게 한다.

 태조의 불사는 다양한 것이었고 불교의 전통유지, 각 사찰에 대한 경제적 지원, 억불세력으로부터의 불교보호 노력 또한 각별하였다. 또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 부근에 170여 칸의 흥천사(興天寺)를 세우고 조계선종의 본사로 삼아 새로운 불교발전을 도모하기도 했던 그는 태종의 배불시에는 부왕으로서 그 견제자가 되기도 하였다.

 태종의 배불책을 충실하게 계승했던 세종도 중기 이후에는 대불태도를 달리하면서도 점차 숭불로 돌아서고 있다. 비록 그가 흥불 정책을 공식화한 것은 아니지만 만년에 행한 그의 불사들이 지니는 의의는 큰 것이었다. 흥천사 5층 사리각의 중수 및 유신들의 격렬한 집단반발 속에 강행된 궁중 내 내불당(內佛堂)의 재건 등은 금기시 되어온 불사가 도성 내에서 공공연하게 재개되었음을 보여준 것이다. 특히 자신이 직접 한글을 창제한 이후의 세종은 한글을 통해 그의 숭불심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그 반포(1443)와 함께 착수되어 이듬해 완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불서 석보상절(釋譜詳節)이 이렇게 편찬되었으며, 그는 또 부처님의 덕을 찬탄하는 노래 월인천강지곡을 친히 짓기도 하였다.

 이 같은 세종의 흥불 활동에는 그 전면이나 이면에 대부분 그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이 함께 있었다. 그가 뒷날 조카 문종의 왕위를 찬탈하여 즉위한 제7대 세조(1455-1468)이다. 따라서 세조는 정치 도덕적인 면에서 곧잘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대군시절부터 불교와 유교를 하늘과 땅에 비유하고 스스로 불자임을 공언함으로써 유신들로부터 비난의 표적이 되어온 그로서는 흥불을 두고 내심 뜻하는 바가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세조의 즉위로 과감한 흥불책이 공개적으로 펼쳐지고, 모처럼 불교계는 숭불주의 출현으로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된다. 세조의 흥불 내용은 ①불교의 사회적 위상제고 ②승니의 법적 권익보호 ③각 사원의 중수 및 불사를 통한 중흥 ④대대적인 불전의 국역 간행 및 유포 ⑤불교음악 등 불교문화 사업의 진흥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같은 세조의 흥불노력과 그 영향으로 조선불교는 핍박받던 위치에서 다시 큰 부흥을 기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성종 ․ 연산 ․ 중종 조를 거치는 동안 불교는 다시 박해를 받아 거의 재가가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가, 제13대 명종(1545-1567)이 즉위하자 그의 모후 문정대비에 의해 또 한 차례의 흥불이 추진되었다. 어린 왕을 대신하여 섭정에 나섰던 문정대비는 당시 고승 보우를 맞아들여 불교중흥을 꾀하였다. 대비와 보우에 의한 명종대의 흥불 사업은 15년간에 걸쳐 지속되었고, 이 기간 중의 흥불에 대한 배불세력들의 반발과 저항은 실로 경악할 정도였다. 그런 여건 속에서도 ①선교 양종의 복구 ②승과제도의 부활 ③도승법의 시행과 같은 흥불 정책은 당시는 물론 중기 이후 불교교단의 유지 존속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조선불교 중흥의 대조사라 할 수 있는 휴정(休靜 , 1520-1604)이 이때 승과에서 배출되었으며, 그의 문하로서 임진란 중에 의승군 활동으로 구국에 앞장 선 유정(惟政 , 1544-1610) 또한 그 후의 승가에서 등용되었던 것이다.

 조선조 흥불 사업은 이처럼 숭불주들에 의해 추진된 것이 사실이지만, 그 이면에서의 당시 고승들의 흥불 활동 및 교단유지 노력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세종대의 고승 기화(己和 , 1376-1433)는 현정론을 지어 유자들의 불교에 대한 편견을 논박하였고, 세조대에는 신미(信眉 ) ․ 학조 같은 고승들이 세조의 흥불 사업에 영향을 주었다. 그 가운데 문정대비를 도와 흥불 사업을 추진했던 보우는 대비가 세상을 떠나자 제주도로 유배되어 杖殺 당하는 순교를 겪기도 하였다.

 명종대의 약 15년간에 걸친 흥불 노력 이후 다시 특기할 만한 흥불 사업은 없었으며, 이로부터 불교 교단은 산중 승단으로서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해 가야 했다. 그러나 이런 여건 하에서도 승려들의 교단유지 노력은 그치지 않았다. 이미 종파마저 없어져 버린 상태에서 사자상승의 법맥계승 노력이 경주되고, 임란 이후에는 특히 사원의 자립경제기반의 구축을 위한 각종 계(契 )조직 등의 활동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불교인들의 교단유지에 큰 힘이 되었다는 관점에서, 임진 ․ 병자 양대란 중에 보인 의승군 활동 또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임진왜란(1592) 당시 각지에서 일어난 의승군의 수는 대략 5천여 명에 달했던 것으로 추산되며, 이들이 국난의 극복에 절대적으로 기여했던 것임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이 같은 의승군 활동은 그 뒤 병자호란(1637) 때에도 그대로 이어지며, 종전 후에도 승려들이 산성의 수축과 수비를 맡는 등 주관군의 형태로 존속하였다. 불교계가 이처럼 위기에 처한 국가 현실에 적극 참여하여 그 극복에 크게 기여함에 따라 임진란 이후 불교의 국가 사회적인 위상이 눈에 띄게 높아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역할이나 기여와는 관계없이 본질적으로는 불교 외적인 활동일 수밖에 없는 것 또한 분명한 일이다.

Ⅵ. 새로운 변화와 여명/최근세

1. 개화의 물결과 근세불교의 새 변화

 근세불교는 개항으로부터 시작되는 개화시대 이후의 불교를 말한다. 1876년 개항과 함께 일본과의 불평등한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이 땅에는 개화의 물결이 도도하게 밀려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같은 급격한 시대의 변화는 그대로 불교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동안 조선의 조정은 이른바 서학이라 했던 천주교를 억압하여 순조, 헌종, 철종, 고종의 4대에 걸쳐 박해사건이 연이어 일어나고 있었다. 이는 당쟁으로 인해 영달의 길이 막히는 등 현실에 실망한 남인 학자들이 지나치게 관념적인 종래의 주자학을 버리고 새로 들어온 서학을 신봉하면서부터 발단이 된다. 그들이 마침내 봉건사회의 혁신을 부르짖고, 이에 중인과 상민들 사이에까지 그런 기류가 급속히 번져 나가자 조정으로서는 이런 현실을 방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즉 천주교는 조정에 의해 구래의 신분적인 질서와 권위를 말살하는 사교로써 위험시되어 박해를 받게 된 것이다.

 이에 비해 조선후기에 들어와 불교에 대해서는 이렇다할 배척이 가해지지 않고 있었다. 이 같은 조정의 태도는 더 이상의 배불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불교는 쇠진해 있었고 체제에 순응적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 조정은 천주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재래종교인 불교에 대해 더 친밀감을 가졌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조선 말기의 조정은 그동안 관례화되어 온 사원에 대한 불법적인 주구와 각종 잡역 및 박탈을 금지시키는가 하면, 여러 차례에 걸쳐 공명첩(空名帖. 무기명의 사령장)을 발행하여 사원의 중수비용에 충당케 하는 등 오히려 불교를 비호하기까지 하였다. 이처럼 변화된 조정의 대불태도는 사양길에 있던 불교계에 다소나마 소생의 기대를 갖게 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바로 이런 즈음에 이미 강제조약을 맺고 한국 침략계획을 진행시켜가고 있던 일본은 먼저 종교계에서부터 그 불순한 손길을 뻗쳐왔다.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된 1876년 이듬해부터 일본불교 각 종파가 속속 유입하여 서둘러 조선 개교에 나선 것이다. 일본 진종 대곡파 본원사(眞宗 大谷派 本願寺)의 부산 개교를 필두로 한 일본불교의 유입은 일련종(1881년), 분파 본원사(1895), 정토종(1897), 조동종 및 진언종(1906)의 순으로 이 땅에 들어와 개교별원(開敎別院) 또는 포교소를 개설해 나가고 있었다.

 조선말 조정의 대불태도가 개선되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한국의 승려는 입성이 금지되고 있을 만큼 사회적 신분은 천민계층에 머물러 있었고, 그만큼 공식적 활동 또한 여전히 억제당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식민정책의 전초로소 이 땅에 들어온 일본 승려들의 위상은 자못 달랐다. 바로 이 무렵 고종 32년(1895). 조선불교로서는 의외의 획기적인 전기를 맞는다. 김홍집 내각의 건의와 고종의 재가에 따라 성 밖 승려의 도성출입 금지령이 해제된 것이다.

 세종 12년(1430)경에 처음 령이 내려서 시행과 완화가 되풀이 되다가 인조 1년(1623)에 다시 강화된 이후 실로 270여 년 만에 그 질곡이 풀린 것이다. 그러나 이 금령의 해제는 조선 조정의 자발적 결정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이 땅에 들어와 자유롭게 활동하고 있던 일본 일련종 승려 좌야 전려가 조선 조정에 올린 ‘금령해제건백서’가 크게 주효한 결과였다. 일본 승려에게 힘입은 것이기는 하지만 입성금령의 해제는 조선불교로서는 일대 변화임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이로써 새로운 기운을 얻게 된 것도 사실이다. 그리하여 금령이 해제된 바로 이듬해에는 전국 각 사원의 승려가 도성 내 원동에서 일본 승들과 합동으로 대 무차법회(大 無遮法會)를 열고 있다.

 근세의 불교는 이렇게 그 공공연한 활동의 서막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근세불교의 이 획기적인 변화에 대해 우리는 그 사정의 내막을 좀더 깊게 관찰할 필요가 있다. 승려입성금령의 해제를 건의했던 좌야(左野)는 이를 빌미로 장차 조선불교계를 회유하려는 의도를 감추고 있었다. 실제로 당시 많은 승려들이 좌야의 공적을 칭송하고 앞 다투어 일본불교에 대해 친근감을 표시하고 있었다. 또 이로부터 불교계의 친일 경향이 현저하게 나타났던 것은 바로 사노의 의도가 그대로 적중했음을 잘 보여준다. 그만큼 당시 승려들은 국제정세에 어둡고 시대의식이 빈약했던 것이다.

 그러나 입성금려의 해제가 한국승려의 신분을 보장하는 계기가 되고 불교계에 활기를 불어 넣어준 것만은 분명하였다. 따라서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받게 된 불교계에는 이후 전국 사원데 대한 統割 및 체계적인 관리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하여 1899년에는 동대문 밖에 원흥사를 세워 조선불교의 총 종무소로 삼고 13도에 각 1개소의 수사(首寺)를 두어 전국 사찰의 관리를 총괄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조정에서도 궁내부에 관리서를 설치하고(1902) 그동안 방치해 온 불교에 대해 국가의 행정적 관리를 꾀하기도 했다. 그러나 관리서는 오히려 불교계의 반대로 설치 2년 만에 폐지되었다.

 관리서가 폐지된 뒤 불교계는 원흥사를 중심으로 독자적으로 승단을 운영하면서 명진학교를 설립하였다(1906). 이 명진학교가 오늘의 동국대학교 전신이거니와, 이 같은 사업의 중심지였던 원흥사야말로 근대불교의 살상지요, 새 불교 운동의 요람지였다. 한편 그 2년 뒤인 1908년에는 전국승려 대표자 52명이 역시 원흥사에 모여 회의를 갖고 조선불교를 한 宗으로 만들 것을 결의하였다. 여기서 圓宗으로 하였고, 원흥사에는 원종 종무원을 설치하였다. 새로운 한국불교 종단으로서의 원종의 설립은 일본 정토종의 영향을 짙게 받은 불교연구회에서 탈피하여 거국적인 한국불교교단을 형성코자하는 의지의 결실이기도 했다.

 그러나 원종 종정으로 추대된 해인사 주지 이회광의 친일적 성향은 일제의 한일합방 후인 1910년 10월 원종과 일본 조동종과의 불평등한 연맹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조선불교의 자주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1911년 1월 이회광의 매교적 처사에 반발하여 박한영 · 진진응 · 한용운 · 오성월 등이 송관사에 모여 조회를 갖고 새로운 종파를 세우니, 임제종이 곧 그것이다. 임제종은 선암사의 김경운을 관장으로 선출했으니 연로한 김경운을 대신하여 한용운이 대리관장을 맡아 업무를 보았다. 이후 임제종은 원종에 대응하여 대구 · 서울 등지에 포교당을 세우고 교세의 확장을 도모하였다. 근세의 한국불교는 이로써 친일 · 반일적 성향을 띠고 서로 대치하기 시작한 것이다.


2. 일제의 불교정책과 교계의 동향

 1910년 8월 일제는 마침내 한국을 강점하였고, 이에 따라 한국불교 또한 일제 통치하에 들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소위 한일합방 1년 뒤인 1911년 6월과 7월에 일제는 식민지 불교정책의 근간인 전문 7조의 사찰령 및 8조의 사찰령 시행규칙을 공포한 것이다. 전국의 사찰을 30개 교구로 분할하는 30본산제도(뒤에 구례 화엄사가 추가되어 31본산이 됨)와 그에 따른 총독의 주지인가 및 활동의 감독 등을 골자로 하는 사찰령의 공포로 이제 한국불교는 원종도 임제종도 무의미하게 되었다. 대신 철저하게 총독의 통제와 감독을 받게 되고 만 것이다.

 한편 사찰령 공포에 앞서 한국 원종과 연맹관계에 있던 일본 조동종은 조선총독부에 원종 종무원 설립인가를 청원한 바 있다. 그러나 총독부는 일본 안에 정치적 기반이 굳건한 종파와 원종이 연합하면 한국불교를 독자적으로 통제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이를 불허한 바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한국불교를 독립시켜 자주적인 발전을 도모케 한다는 명분 하에 사찰령을 공포하기에 이른 것이다. 즉 총독부는 강력한 법률적 근거를 만들고 그 위에서 한국불교를 직접 통제코자 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사찰령에 대한 각 사찰의 반응은 의외로 크게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각 사찰의 주지들은 이를 무조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사찰령 제3조에 의거하여 30본산에서는 각기 사법(寺法)을 제정, 1912~1913년 사이에 모두 총독의 인가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승려들은 총독의 ‘선정에 감읍’ 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그동안 정치 ․ 사회적으로 온갖 박해와 모멸을 겪어왔기 때문에 사찰령의 시행을 선종으로 받아들이고 감읍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그들의 역사의식의 빈곤과 현실 상황에 대한 무지를 잘 보여주는 일 이었다. 당시 대다수 승려들은 사찰령이 한국불교의 지위향상과 발전을 기약해주는 것으로만 받아들였을 뿐 그 악영향에 대해서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사찰령의 악영향과 폐단은 무엇보다도 ①한국불교의 자율적인 발전의 저해 ②불교계 자체 분열 조장 및 힘의 분산 ③교단의 전통적인 승풍가통의 파괴 ④주지 선정 방법에 있어서의 일본제도의 도입 ⑤종풍보다 행정적 유대 호의 전락 및 관료화한 본말사 관계 등을 지적할 수 있다. 한 마디로 그것은 일제의 식민지배에 그대로 영향하는 악법이었다.

 이후 식민 통치하의 불교는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교육 · 포교 · 역경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불교개혁과 근대화에 진력하였다. 한용운의 「불교유신론」을 비롯하여 박한영의 「불료개혁론」, 권상로의 「불교혁신론」 등 저술을 통해 한국불교의 현실진단과 새로운 전도가 제시되는가 하면, 「불교」, 「일광(一光)」등 교계의 잡지들이 속속 간행되어 신 불교운동 및 그 여론을 확대시켜 나가기도 하였다.

 한편 3․1운동에 민족대표의 일원으로 참가했던 한용운 · 백용성 등의 예에서 보듯이, 불교계에서는 항일운동 또한 적극적이고 줄기차게 전개하였다. 명진학교를 이어온 중앙학림 학생들의 끈질긴 항일운동과 각 지방사찰들의 이에 대한 호응활동 또한 적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불교계 한편에서의 지나친 친일성향 또한 그에 못지않았다.

일본불교와 총독부의 불교정책에 대해 호감을 가져온 많은 불교인들이 무비판적으로 그것을 수용하고 식민정책에 적극 동조해 온 것이다.


3. 조계종의 출발 - 해방이후의 불교

 신 불교운동과 불교 근대화 노력이 경주되는 한편에서 불교교단이 친일과 반일의 상반되는 모습을 드러냈던 것은, 불교계로서나 우리 민족에게 있어 다같이 불행한 시대적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도 교단발전을 위한 방안들이 끊임없이 모색되었다. 당시 선교양종이라는 종명에 의하여 합법적이고 통일적인 중앙통제기구를 갖고 있기는 하였으나, 그것이 전국 사찰의 의사를 전적으로 반영하여 이룩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선교양종 대신 보다 선명한 종명과 특징 있는 종지, 그리고 좀더 유기적이고 집약적인 중앙통제 체제가 여전히 요청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에서는 종헌을 비롯한 제 법규를 다시 제정하고 종내 최고의 원로기관인 교정과 의결기관으로서 종회 등을 설치하기도 하였으나 이 또한 오래가지 않았다. 보다 근본적인 개신(改新)을 위해서는 총본산 체제가 더욱 필요한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941년 봄에는 태고사(현 서울의 조계사)를 세워 총본산으로 삼고 종명은 조계종으로 결정하였다.

 일제의 사찰령 이후 지금까지 조선불교 선교양종이라고 불리던 종명을 조계종이라고 한 것이다. 조계종이란 한국 재래 선종의 전통적인 명칭이었다. 신라 하대로부터 전래된 선법이 신라 말 고려 초에 이르면서 구산선문을 형성한 이래 그 총칭적인 종명으로 조계종이라 하였고, 그것이 고려일대를 거쳐 조선 초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여말선초에 11종 또한 7종이던 교단이 세종이후 선종과 교종의 2재 종파로 뭉쳐졌다가 연산군 및 중종 · 명종 이래 종명마저 없어져 왔지만, 사실에 있어서 조선 중기 이후의 승단계통은 법맥 상 선종이었으며 선맥은 엄밀히 말해서 조계종이었다. 이러한 역사의 과정을 상기할 때 조계종의 출현은 당연한 결과였다. 한국선종의 특유한 전통적 종명이었던 조계종으로 그 종의 이름을 되찾은 것이다.

 이와 같은 종단을 통제하기 위하여 31본산 위에 전국 사찰을 통일적으로 총괄하는 총본산을 둔 것인데, 이에 1941년 4월에는 ‘조선불교 조계종 총본산 태고사 사법’의 인가를 얻었다. 조계종으로 발족한 종단에서는 제1대 종정(태고사 주지)에 방한암을 추대하고, 동년 6월부터 총본산 태고사 종무원에서 종무를 개시하였다. 이로써 한국불교는 조계종이라는 선명한 종명아래 총본산 태고사를 중심으로 하여 전국 승려가 총 결속할 수 있었다.

 불교계가 이렇게 하여 최소한 그 외양 면에서나마 모처럼의 통합된 모습을 나타내보이고 있던 1945년 조국은 해방을 맞이하였다. 이에 조계종은 해방된 그 해 10월 전국승려대회를 열고, 일제의 사찰령과 지금까지의 조계종 총본산 태고사 사법 등을 폐지하고 새로운 조선불교 교헌을 제정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새 교헌을 제정하는 한편 교단의 초대 교정에 박한영을 추대하고, 중앙총무원장에는 김법린이 선출되었다. 이제 불교교단은 명실공히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한국불교로서 힘찬 발걸음을 내딛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때부터 한국불교 앞에는 다시 해결해야 할 무거운 과제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제 식민불교의 청산과 한국불교의 정통성 확립 등이 곧 그러한 과제들이었다. 여기에다 해방 이후 몇 년 동안 우리 사회에 거세게 불어 닥친 좌 · 우익의 사상적 대립과 알력은 불교계에도 그대로 파장이 미쳤고, 더구나 6.25전란을 겪으면서 대가람의 소실 등 전국사찰이 입은 피해는 다시 한 번 불교교단에 심대한 타격을 주어, 그 정신적 물적 복구 또한 벅찬 과제들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이토록 어려운 현실에 처해 있는 불교계 내부에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휴화산 같은 이슈들이 잠복하고 있었다. 일제 이후 새로운 의미로 쓰이게 된 이판 ․ 사판의 유별, 혹은 비구승 · 대처승 간에 문제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려하던 대로 마침내 6.25전쟁이 멈춘 뒤 오래지 않아 1956년경부터 세상을 경악케 하는 불교계의 분규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일은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정화로도 혹은 분규로도 불린다. 뿐만 아니라 그 원인에 대해서도 한국 불교의 순수한 전통으로의 회복운동과 그에 대한 반대 활동으로 파악하기도 하고 주도권 쟁탈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불교계의 기독교 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미 제국주의의 구조적인 문화침략에 의해 조장 · 반조되었다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든, 그 원인이 어떻게 분석되든 간에 이로 인해 한국불교가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은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해방 이후로부터 최근까지도 계속되어온 종단의 분규에 대해서는 여기서 언급을 생략하거니와 역사과정 속에서 그 맥락을 찾는다면 이는 무엇보다도 근세 불교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배불의 오랜 질곡 속에 있던 우리의 불교는 자율적 역량을 미쳐 갖출 겨를도 없이 근세에 진입하였다. 이 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이 일본불교였고, 그것이 식민통치하에서는 일제에 대한 야합과 투쟁이라는 양면성을 노출시키면서 불교발전을 위한 응집력의 분산을 가져 왔다. 결국 이러한 상황들이 해방 이후의 한국 불교에 직 · 간접으로 인관관계로서 표출되어온 것이다.

 이상과 같이 1천 6백여 년의 역사를 이어온 한국불교는 힘찬 창조와 진전의 시기가 있었는가 하면 때로 답습과 침체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대한불교 조계종을 비롯하여 20여개 종단을 헤아리는 오늘의 한국불교는 민족정신과 문화를 선도해 온 오랜 역사와 전통에 대한 자부심으로 새로운 내일을 열어가고 있다. 복잡 다양한 현대사회 속에서도 전통적인 수행의 가풍을 그대로 유지해 가고 있는 한국 사원의 생활이나, 불교에 대한 일반의 새로운 인식과 불교 신자층의 증가, 그리고 정치 · 사회 · 교육 · 문화 등 사회 각 분야에 걸친 불교적 기능과 역할의 확대 등을 통해, 우리는 다시 밝아오는 한국 불교의 여명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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