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식 지음/너머북스·1만3000원
20대초 근대문화 선망 일본인 행세
2년 전 우연히 이봉창 의사 재판 기록을 읽던 역사문제연구소 배경식 연구원은 당시 제출된 70여 가지 압수증거품 중에서 다섯 장의 여자 사진에 유난히 눈길이 갔다. 그중 넉 장은 이 의사가 거사 직전에 유곽에서 만난 창녀들 사진이었다. 그 사실을 확인한 순간 판에 박힌, 고결하고 순결한 독립운동가라는 고착된 이봉창 이미지가 흔들렸다. 그때 배 연구원에게 불쑥 이런 의문이 떠올랐다. “독립운동가 아닌 인간 이봉창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일제의 만주침략 다음 해인 1932년 1월8일 일본육군 새해 관병식에 참석하고 돌아가던 히로히토 일본국왕 행렬 두 번째 마차를 향해 수류탄이 날아갔다. 이봉창이 던진 폭탄은 목표물을 정확하게 맞혔고 요란한 폭발음과 함께 제대로 터졌다. 하지만 히로히토는 맨 앞 마차에 타고 있었다. 게다가 폭탄의 위력은 신통치 않았다. 몇 사람이 다치고 잠시 말들이 놀라 날뛰었을 뿐이다. 이봉창은 하나 더 갖고 간 수류탄을 마저 던지지도 못했다. 그는 히로히토의 얼굴을 미리 익혀 두는 초보적인 작업도 하지 않았고 행렬코스도 몰라 계속 허둥댄 ‘아마추어’였다. 히로히토를 암살하려던 ‘도쿄의거’는 그 자체로는 실패였다. 하지만 한편으론 엄청난 성공이었다. 지독한 자금난과 인재난 속에 꺼져가던 임시정부의 불꽃은 그 사건을 계기로 다시 타올랐다. 세계가 주목했고 냉담했던 미주 등 재외동포들이 다시 뜨거운 성원을 보내기 시작했다. 자금과 청년들이 다시 김구 주위로 모여들었다. 그 몇 달 뒤 윤봉길은 히로히토 탄생과 ‘상하이 사변’ 승전을 기념하던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 등 일제의 중국침략 총책들을 폭사시켰다.
배경식 연구원이 쓴 <기노시타 쇼조, 천황에게 폭탄을 던지다>(너머북스 펴냄)는 이 의사 부친이 재산을 물려받은 게 아니라 건설청부업자로 막대한 부를 쌓아올렸으나 축첩 등 방만한 생활로 이를 다 날려버렸으며, 이 의사는 거사 당일 태극기를 갖고 있지도 않았다고 지적한다. 지은이는 이처럼 ‘동경작안의 진상’이나 <백범일지> <도왜실기> 등이 전하는 변조된 사실을 확대재생산하면서 고결과 순결로 스테레오타입화한 ‘영웅신화’를 문제 삼는다. 그런 신화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근대 소비문화를 선망하며 ‘황국신민’이 되기를 꿈꿨던 ‘모던 보이’가 왜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진 독립운동가로 변신했는지 인간 이봉창의 내면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극빈 속에 일본 과자점과 약국 점원, 용산철도역 전철수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능란한 일본어 실력으로 친일적인 금정청년회 간사, 국세조사위원 등을 맡아 잘나가던 이봉창은 함께 도일한 조카딸마저 외면할 정도로 일본인 행세를 했으나 결국 외판원, 가스회사 일용직, 부두 석탄 짐꾼, 스미토모 출장소 인부, 요리점 점원으로 떠돌며 영양실조로 각기병에 걸릴 정도의 바닥생활을 전전해야 했다. 그를 좌절케 한 것은 지독한 ‘조선인 차별’이었다. 그가 조선인임이 드러난 순간 고용주들은 표변했다. 조선인이기 때문에 판판이 취업을 거부당했으며, 같은 일을 해도 조선인이기 때문에 임금은 일본인들의 몇분의 일에 지나지 않았고 승진 기회는 일본인에게만 주어졌다. ‘천황’ 행렬을 구경갔다가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현장에서 붙잡혀 9일씩 구금당해도 호소할 데조차 없었다. 1901년생인 그가 1925년 일본에 건너가(기노시타 쇼조란 이름도 그때부터 썼다) 5년여 만인 1930년 말 상하이로 건너간 건 그런 좌절과 분노 때문이었다. 거기서 김구를 만나 목표를 정하고 1년1개월 만에 폭탄을 들고 다시 일본으로 향한 이봉창의 내면 변화는 1994년 최서면씨의 노력으로 재판 기록들이 공개될 때까진 어둠에 묻혀 있었다. 지은이는 이 의사의 옥중수기인 ‘상신서’ 등의 재판 관련 기록과 당대의 다른 인물들 자료를 비교해 가며 그 변화 ‘과정’을 꼼꼼히 추적한다. 그렇게 해서 재구성된 이봉창은 ‘추악한 영웅’으로 전락했는가? 천만에! 오히려 훨씬 더 인간적 매력을 풍기는 영웅으로 거듭난다. 뉴라이트의 ‘식민지 근대화론’이 얼마나 실상과 동떨어진 관념적 허구에 지나지 않는지도 덤으로 보여준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한겨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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