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테크/책방이야기

[스크랩] `남자들의 울음소리`를 복원해낸 김훈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4. 14. 09:50

 




[북데일리]

 

 

김훈(59)의 세 번째 역사소설 <남한산성>(학고재. 2007)에는 남자들의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작품의 시대배경은 병자호란. 1636년 12월 14일부터 1637년 1월 30일까지, 47일간의 시간을 그린다.

 

가장 긴 울음을 토해내는 것은 남한산성에 갇혀 있던 인조다. 김훈은 그의 울음을 이렇게 표현한다.

 

“임금은 오래 울었다. 막히고 갇혔다가 겨우 터져 나오는 울음이었다. 눈물이 흘러서 빗물에 섞였다”

“임금은 오래 울었고 깊이 젖었다” “임금이 울음 사이로 말했다”

 

청나라 칸에게 절을 하는 치욕을 당할 때까지 인조는 쉼 없이 울어댄다. 갇혀 있을 수밖에 없는 무능한 왕 인조. 그는 아들을 붙잡고 이처럼 오열한다.

 

“우리 부자의 죄가 크다. 허나 군병들이 무슨 죄가 있어 젖고 어는가”

 

인조를 괴롭히는 척화파와 주화파. 이를 대표하는 김상헌, 최명길도 수차례 운다. 예조판서 김상헌은 “적들이 이미 서교西郊에 당도 했다, 어가는 남대문에서 길이 끊겨 남한산성으로 향하였다”는 형의 편지를 받고 가슴이 무너진다. 그는 대청마루로 올라가 눈물을 떨 구기 시작한다.

 

“김상헌은 선영이 있는 남쪽을 향해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몸의 깊은 곳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몸이 울음에 실려 출렁거렸다. 김상헌의 몸속에서 울음은 그렇게 울려 나왔다”

 

한참을 울어재낀 김상헌은 행장을 챙겨 길을 떠난다. 그는 남한산성으로 가던 송파나루에서 한 사공을 만난다. 김상헌은 제 칼로 사공의 목을 벤다. 적인 청병에게 죽을 가여운 백성. 차라리 제 손으로 베리라 생각한 것이다. 사공이 죽고 김상헌은 다시 서글피 운다. 소설은 당시 정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사공의 피가 김상헌의 얼굴에 튀었고, 눈물이 흘러내려 피에 섞였다. 김상헌은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남한산성>에서 남자들을 울게 하는 공통된 요인은 ‘치욕’이다. 남의 나라 왕 앞에 머리를 조아려야 하는 왕, 제 백성을 칼로 베야 하는 예조판서 모두 ‘치욕’의 역사 속 피눈물을 흘려야 했던 증인들이다.

바늘땀처럼 촘촘한 김훈의 문체가 묘사하는 울음소리는 인간의 것만이 아니다. 비운의 역사를 위로하듯 산, 바람, 나무 모두가 함께 통곡한다. 짐승도 운다. 소, 말의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린다. 심지어 식사중인 임금의 귀에까지 소 울음소리가 들린다.

 

“가까운 민촌에서는 일없는 겨울 소들이 아침 여물죽을 기다리며 울었다. 소 울음소리는 내 행전까지 들렸다. 느리고 긴 울음소리를 잇대어가며 소들은 울었다. 국물을 넘기면서 임금은 소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반정으로 보위에 오른 뒤 소 울음소리를 듣기는 처음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왕의 귀에 들려온 소 울음소리는 힘없이 스러져가는 백성들의 비명을 은유한다.

이번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다양한 인물을 균형적으로 그려 냈다는 것이다. 이는 전작 <칼의 노래>의 충무공, <현의 노래>의 우륵처럼 개인의 고통 속에 역사적 정황을 투영시킨 것과 차별화 되는 점이다.

 

<남한산성>의 주인공은 여럿이다. 지옥 같은 47일의 중심에 서있는 인조, 그를 괴롭히는 척화파 김상헌, 주화파 최명길, 영의정 김류, 수어사 이시백, 대장장이 서날쇠 등이 씨실과 날실처럼 엮여 있다. 이들은 각기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같은 역사적 운명을 타고난 형제 혹은 가족이다.

 

이 중 대장장이 서날쇠는 실존인물이 아닌 소설이 만들어낸 인물이다. 칸에게 굴욕을 당한 인조, 떼죽음을 당한 관료들. 쑥대밭의 요동 속에 건강히 살아남은 인물을 대장장이 서날쇠로 설정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상징이다. 소설은 임금 인조의 시선이 아닌, 백성 서날쇠의 시선에서 마무리 된다.

 

<언니의 폐경> <강산무진> 이후, 역사소설로 돌아간 김훈의 문체는 여전히 촘촘하다. 현재가 아닌, 역사를 그릴 때 김훈의 글은 더욱 자유로워진다. 그의 바늘땀 같은 문체는 ‘약육강식’의 치욕을 견뎌낸 역사를 빈틈없이 기록한다.

 

성실한 관찰자이자 기록자인 김훈은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를 그냥 두고 보지 않는다. 임금이 울 때 나무도 울고, 백성이 울 때 말도 함께 운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김훈의 문체는 때로는 시어詩語처럼, 때로는 일기처럼 은유되고, 기록된다. 도달하지 못한 시공간에 선 작가의 자유로운 글 놀음을 보는 것이 여전히 즐겁다.

 

“그해 겨울은 일찍 와서 오래 머물렀다. 강들은 먼 하류까지 옥빛으로 얼어붙었고 언강이 터지면서 골짜기가 울렸다. 그해 바람은 빠르고 날카로웠다. 습기가 빠져서 가벼운 바람은 결마다 날이 서있었고 토막 없이 길게 이어졌다. 칼바람이 능선을 타고 올라가면 눈 덮인 봉우리에서 회오리가 일었다. 긴 바람 속에서 마른 나무들이 길게 울었다”

 

 

[김민영 기자 bookworm@pimedia.co.kr]

 

 

출처 : 본연의 행복나누기
글쓴이 : 본연 이해모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