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점에서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행서 <먼 북소리>는 이미 나온 지 오래되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상찬하는 여행서의 한 전범이 될 만한 책이다. 이 지상에 발 붙여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세상살이의 항구성을 그 특유의 모던한 취향과 건조한 문제로 담담하게 적어놓은 것이 이 책이다. 물론 최소 몇 년간을 현지에서 살아본 경험적 내용이 아니면 적지 않는다는 작가의 견고한 글쓰기 원칙이 바탕에 깔려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먼 북소리>를 읽는 무렵 나는 생각했었다. 왜 우리는 이런 깊이 있는 여행서를 갖지 못하는가?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여러 가지일 터이지만, 대체로 그것은 국력 탓을 해야 할 것이었다. 일찍이 개화에 눈떠, 무역에 나서고 이를 통해 부를 축적하여 선진대국에 끼지 못한 우리 조국의 현실 말이다. 문화는 평지에서 돌출하는 한 천재적인 작가에 의해서 추동되기도 하지만, 그런 천재도 포용할 수 있는 문화적인 인프라가 갖춰져 있지 못하면 결국 고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문화사가 말해주는 진실이 아니더란 말인가.
그런 점에서 얼마 전 읽은 우리나라 저자의 두 권의 여행서는 매혹적이었다. ‘프랑스 어느 작은 시골 마을 이야기’란 부제가 붙은 <알자스>(신이현 지음)와 ‘캐나다에서 바라본 세상’이란 부제가 붙은 <느리게 가는 버스>(성우제 지음)가 바로 그것이다. 말의 엄밀한 의미에서 이 책들은 좁은 의미의 여행서는 아니지만, 그러나 우리에게 미지의 세계로 ‘안내’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영락없이 여행서이기도 하다.
<알자스>와 <느리게 가는 버스>가 의미 있는 여행서가 된 것은 각각 ‘거리두기’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현지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바로 그 생활의 터전 이야기가 아니라 공간적, 내용적으로 다른 곳의 이야기를 주된 화두로 가져온다. <알자스>의 저자는 파리에 살지만 차로 꼬박 6시간을 달려야 하는 프랑스의 국경지역인 알자스의 풍광과 습속을 이야기하고, <느리게 가는 버스>의 저자는 멀리 캐나다에 살면서도 우리가 갖지 못하는 ‘교육’과 ‘보건’의 어떤 것들을 한국의 현실과 대비시켜 들려준다. 그들은 낯선 것들 속에서 페이소스와 분노라는 방식을 통해 독자의 삶을 흡입력 있게 일깨운다는 점에서 아주 노련한 선동가들이라고 할 만하다.
작가와 기자라는 그들의 원직이 책의 설득력을 더하고 있음을 굳이 따로 명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알자스>의 다소 지겨울 정도의 참살이 음식 이야기나 <느리게 가는 버스>의 선진 교육,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배려의 강조 같은 것은 우리가 보고 배워야 할 어떤 것들이지만, 이 땅의 현실에서 구현되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것 또한 갈 수 없는 곳에 대한 갈 바 없는 ‘여행서’라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모든 좋은 여행서가 그렇듯이, 이 책은 비록 현지에 깊이 뿌리박고 있지만 떠나온 곳에 대한 그리움을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그리움을 가슴에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담백하게 토로할 때, 이 책은 우리를 낯선 곳으로 한없이 길 안내 하는 여행서의 일차적 기능에서 벗어나 문학작품으로 읽힌다.
출판사 ‘마음산책’ 대표, 시인 정은숙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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