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 [질문]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말씀 신앙보다 초자연적이고 신비주의적 신앙 체험을 구하는 자세가 아닌가요? [답변]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 매일 경건의 시간에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오늘의 말씀을 적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막상 어떤 문제에 부딪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자고 했을 때에는 그 말에 대해 매우 의아해 하며 이와 비슷한 반응을 나타냅니다. 그 반응 속에는 이런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나는 말씀을 믿는 합리적이고 지성적인 신앙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다는 그런 신비주의적이고 감정적인 신앙태도를 갖고 싶지 않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합리적이며 지성적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를 가지며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말씀 신앙"이란 의미를 체험보다는 이성적으로 하나님에 대해 알아가는 신앙이라고 할 때, 체험적인 것은 비이성적이란 말이 됩니다. 그러나 신앙의 체험을 비이성적인 것으로 구분시키는 것은 잘못된 세상의 사고방식입니다. 중세의 암흑기를 깨치고 일어난 르네상스 운동은 인간의 이성이란 영역을 최고의 자리에 앉혀 놓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문제들, 즉 인간의 삶과 죽음, 신의 문제, 인간의 존재 가치 등등에 대해서는 초자연적이란 이름으로 묶어 높은 다락방 위에 모셔 두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부분에 대한 접촉은 인간이 올라갈 수 있는 이성적 계단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구름이 내려와 그곳까지 옮겨다 주어야만 하는, 다시 말하면 어떤 특별하고 신기한 체험, 이성으로 설명할수 없는 체험으로만 도달할 수 있다는 사고 개념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격이십니다. 인격이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격적인 관계를 나누기 원하십니다. 인격적인 관계란 의사 소통이 있는 것입니다. 개인적이고 친밀한 의사 소통이 없이는 인격적인 관계의 성장이란 기대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나 개인적으로 그분과의 인격적 교제가 없다면 관계의 성장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또한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을 흠모할 수 있고 좋아할 수 있지만, 그들과 계속해서 인격적인 관계가 깊어질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분명 실존 인물이기는 하지만, 그리고 그들이 인격을 가지고 있음을 분명 알지만 현재 나의 삶 속에서 그들과 교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섬기고 있지 않은지 살펴볼 일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삶의 영역에서 체험되지 않는다면, 그분을 마치 스타를 좋아하듯이, 혹은 종교적인 대상으로 존경할 수는 있으나 개인의 삶 속에서 그분으로 인하여 느끼는 만족감과 충족감은 결코 찾아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의미하시는 이 말씀은 기록된 성경의 문자가 아니라 그 성경의 문자를 통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지극히 개인적인 말씀, 즉 레마를 뜻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주시는 개인적인 말씀을 계속 들어야만 제대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게 개인적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자세, 이것은 결코 비이성적인 것도 아니며 비합리적인 것도 아닙니다.
출처 : Joyful의 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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