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테크/성지순례이야기

[스크랩]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 수도원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5. 10. 11:16


성 프란시스코 수도원

 


성 프란시스코 수도원

 


성 프란시스코의 돌 무덤

 


수도원 내 벽화

 


성 프란시스코가 새에게 설교하는 벽화

 


사막의 성프란체스코,  벨리니

 


 BON, Bartolomeo

 


자연과 함께하는 성 프란시스코

 


성흔을 받는 성 프란시스코, 지오토

 


성 프란시스코, 마타니 그림

 


성 프란시스코의 십자가

 


BERLINGHIERI, Bonaventura

 


성 프란시스코, 치마부에 그림

 

 

가난한 자와 똑같이 된 프란치스꼬는 이렇게 말했다.

 

"거지를 욕하는 자는 누구건간에, 모든 가난한 이들이

그분의 고귀한 표를 지니고 있는 그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가난하게 만드신 것은 바로 우리를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1209년 다미아노 성당에서 미사참례 때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가지고 다니지 말 것이며,

식량자루나 여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말아라.

일하는 사람은 자기 먹을 것을 얻을 자격이 있다"(마태10, 9-10)하신 말씀을 듣고,

 

"이게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이다. 이게 바로 내가 찾고 있는 것이다.

이게 바로 내가 온 마음을 바쳐 행할 일이다."하면서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손뼉을 쳤다.

이런 철저한 청빈생활에 감화를 받은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12명의 제자를 두게 되었다.

그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1198-1216)에게 수도원 인가를 청원하여

'작은 형제회'라는 이름의 수도원으로 인가를 받았다.

1224년 성 프란치스꼬가 '알베나'산에 들어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고 있을 때,

그리스도 친히 양 손, 양 발, 그리고 늑방에다 오상(五傷)을 박아 주셨다.

이것은 커다란 은혜임에 틀림없지만,

한편으로 오상은 주의 상처와 같이 심한 고통을 주는 어려운 시련이기도 하였다.

1226년 10월 3일 죽을 때까지 이런 시련을 기쁨으로 인내하면서 마쳤다.

 44세의 짧은 일생 동안 빛나는 성덕과 생전에 행한 여러 불가사의한 일과

사후에 계속 일어나는 기적 때문에 임종한 지 3년 후인 1229년에 시성의 영광을 받았다.

프란치스꼬 수도원과 성당은 엘리아 수사가 설계하여 건축했는데 2층에 성당이 있고,

청빈, 정결, 순명의 수도정신을 나타내는 모자이크가 아름답다.

28개의 벽화에 프란치스꼬 성인의 생애를 담은 그림이 그려져있다.


출처 : 일곱샘
글쓴이 : 일곱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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